363. 소용돌이 (1)
휴식은 짧았다. 쉴 때가 아니었다. 파비아노는 살아남은 이들의 부축을 받고 대예배당으로 향했다. 그들의 수도원장은 아직 죽지 않았다. 그는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죽음을 견디고 있었다.
“수도원장님. 제가…… 저희가 늦었습니다.”
“충분히 빨랐네.”
베오른은 언제나처럼 차갑게 대답했다. 그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려 하다가, 거친 기침을 토해 내고는 쓰러졌다.
“나를 부축해 주게.”
“예, 수도원장님.”
베오른의 몸이 가벼웠다. 그는 반쯤 감긴 눈으로 더듬거리며 파비아노의 팔을 움켜쥐었다.
“내가 어리석었네. 내가 오만했어. 파비아노 형제. 다른 형제들. 이 모든 형제들이 내 어리석음 탓에 죽어 가는군.”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 내 말이 맞아. 내가 오만했었네. 최근…… 쿨럭! 최근. 너무 성과가 좋았지. 죽는 형제들도 적었고, 거의 모든 작전이 성공했으며…… 대악마들이 죽어 가고 있었네.”
지금껏 물질 세계에 존재한 적 없던 위업이었다. 대악마의 죽음이란 그런 것이었다. 악의 근원 자체를 뿌리 뽑아내는, 위대한 업적.
그 탓에 이 늙은 헤레티카의 눈마저 어두워졌던 것일지도 몰랐다. 오만이라. 이단심문관이 가장 경계해야 할 악덕이 아닌가.
“내가 이룬 것이 아니었음에도 내가 오만했었군. 내가 주의 이름 앞에 수치가 되었네. 나를…… 나를 용서하지 말게.”
“수도원장님.”
“이제 더 이상 나는 수도원장이 아닐세. 수도원장이라…… 쿨럭. 파비아노. 그건…… 그건 그냥 자리에 불과해. 누구도 될 수 있고, 누구든 되어야 하는.”
부상과 고열로 달뜬 눈이 희미하게 깜빡였다. 베오른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본 파비아노는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더듬거렸다.
“안전한 후방에 앉아서 죽은 형제들의 수를 헤아리는 일 따위, 하고 싶지 않았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했어. 누군가는 더 많은 형제들이 죽지 않기 위해, 모든 작전을 조율해야 했어. 그것이 꼭 나일 필요는 없었고, 내가 그 자리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조차도 아니었지. 그저, 누군가는 해야 했던 일일 뿐이었네.”
“수도원장님.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께서는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페이른 왕실을 수색하게. 2왕자를. 1왕자는 베이타서스의 신도이며 2왕자는 맥라렌의 신도였네. 이 숲 아래엔 놈의 병력이 깔려 있을 거야……. 쿨럭!”
베오른이 거칠게 기침을 토해 내자, 내장 조직이 섞인 핏물이 파비아노의 어깨를 흠뻑 적셨다.
“수도원장님……!”
“내 말 듣게! 끝까지! 2왕자는 역모를 준비하고 있을 걸세. 놈은 수도원을 불태우고, 그 대가를 교회에 묻겠지. 전쟁…… 전쟁이 있을 걸세. 악마 추종자들이 벌일 수 있는 가장 큰 전쟁이……. 형제들을 모으게. 전쟁을 준비하게. 놈들을 정화하게…….”
베오른의 눈에서 점차 빛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주의 이름 아래에 세상의 평강을……. 놈들은 내 집무실을 뒤졌네. 나중에…… 나중에 확인했지만…… 성자 형제의 보고서가 없더군…… 대악마의 봉인지가 담긴 보고서가…… 찾아, 찾아야 하네. 성자 형제를…… 제피스 형제를 찾게. 제피스 형제를…….”
모든 말을 마친 베오른의 목소리가 점점 더 작아졌다. 파비아노는 그의 입가에 귀를 바싹 붙였다.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주여…… 주여. 겨울 산이 그립습니다.”
더 이상 대화에 논리가 이어지지 않았다. 이미 베오른은 돌이킬 수 없는 부상을 입었다. 평생에 걸쳐 이단심문관들을 이끌었던 이 사내조차도, 죽음 앞에서 차츰 마모되어 가고 있었다.
파비아노는 아무 말 없이 노인의 중얼거림을 듣고 있었다. 이것은 일종의 고해였다. 그리고 그 고해를 듣는 것은 사제의 의무였다.
“겨울 산이…… 마을이. 내 고향이 그립습니다. 불에 타기 전의 고향이. 저주받기 전의 산이 그립습니다. 주여, 어째서. 어째서 그들을 버리셨나이까.”
“베오른 실드베인 형제님.”
“아아…… 그래. 베오른…… 실드베인…… 내 형제여. 어째서 그렇게 먼저 떠났나. 왜 내 대신…… 내가…… 자네의 이름을 잇겠네. 형제여. 그렇게 영원히 살아갈 수 있도록.”
베오른은 더듬거리며 허공을 짚었다.
“마을이 타오르던 날에. 마법사가…… 마을을 불태우던 날에…… 주여, 어째서.”
신은 대답하지 않는다.
“어머니……. 어머니. 저는…… 당신을, 원망하지 아니합니다…….”
“수도원장님. 수도원장님! 형제여!”
이제, 베오른 또한 대답하지 않는다.
파비아노는 한참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그의 눈을 감겨 주었다. 그는 조용히 성호를 그으며 입을 열었다.
“펙투스, 인켄숨(용기와 희생). 1급 렐리기오사 헤레티카. 성 바르톨로메오 제23대 수도원장 베오른 실드베인이 소천했습니다.”
“주여, 당신의 어린 양이 지금 전당으로 향하나이다. 어여삐 여기사, 이 지친 영혼을 품으소서.”
“막토.”
* * *
“시신은 수습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악마의 손아귀에 시신이 능멸되는 것을 막기 위해, 본청의 남은 터와 함께 형제들의 시신을 불태웠습니다.”
“잘했네.”
“지옥 관문은 파괴되었습니다. 해당 지역을 벗어나기 위해 제가 길을 열었습니다. 수도원장님의 말씀대로 산 아래엔 페이른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이를 피하기 위해 활로를 뚫어야 했습니다.”
“……잘했네.”
마르코는 자신의 안대를 툭툭 치며 말했다.
“그 대가로, 저는 눈을 그 산 위에 두고 왔습니다.”
“잘했네.”
제피스는 그저 그 말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대화가 끊겼다. 보고가 끝난 것이다. 그러나 제피스는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찻잔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존중받아 마땅한 이였네.”
“예, 형제님.”
“나는 그분과 같은 작전에 투입된 날들이 아직도 선하게 기억이 나.”
“예.”
“주께서 그를 필요로 하셨으니 우리가 어찌 그분의 행사를 짐작할 수 있겠나.”
“……그렇습니다. 형제님.”
제피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예상과 달리, 그의 눈에선 전과 같은 굳건한 의지가 보였다.
“그러니, 인간의 일은 인간이 처리해야 하지. 신의 뜻을 예상치 말 것이며—”
“다만 주의 의와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래. 이제 작전을 시작하지. 이단심문청은 그저 건물이 아니네, 형제들. 그대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가 곧 이단심문청일세. 우리의 마지막에 단 한 사람이라도 굳건히 서 있을 수만 있다면, 그곳이 우리의 본청일세.”
제피스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르코가 따라 일어서자, 제피스는 붕대를 감고 있는 파비아노에게 말했다.
“부상은 언제 완쾌할 것 같나?”
“이틀이면 충분합니다.”
“형제는 어떤 작전에 투입되고 싶나?”
“다리안의 판결이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선언한 그의 죗값을 제 손으로 돌려받겠습니다. 형제님.”
“그렇게 하게. 마르코 형제.”
“예, 형제님.”
“동부 전 지역에 흩어진 형제들을 되찾는 것부터 시작하지. 페이른…… 놈들의 심판은 그 이후에 이루어질 걸세.”
“예, 형제님. 하지만 제국 방면으로는…….”
“그건 내가 처리하겠네.”
제피스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빠져나갔다.
* * *
동부의 환란으로 고난을 겪고 있는 이가 하나 더 있었다. 귀르의 백작이자 위대한 선제후, 에버리즈였다.
귀르는 지금 북해항 전역에서 보급되는 식량 물자들을 거대한 함선에 적재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가을 추수철에 맞춰 제국 곡창에서 거둬들이는 그 어마어마한 물량은, 단순 적재만으로도 귀르의 항구를 온통 마비시키고 있었다.
그 탓에 무역항이 정지하며 엄청난 피해를 야기하고 있었다. 에버리즈는 입술을 꽉 깨물며 지금도 구멍 뚫린 회계 장부를 노려보고 있었다.
“전하! 파발이 도착했습니다! 교회에서 온 급보입니다!”
“교회?! 빨리 가져와요!”
그러던 나날 중, 교회에서 온 파발이 도착했다. 그녀의 머릿속에 교회는 곧 제피스의 직장이었다. 그걸 단순히 직장이라 여기는 것은 선제후 특유의 대범함이라 할 수 있으리라.
그녀는 설레는 마음으로 편지의 밀랍을 뜯고 천천히 폈다. 익숙한 필체로 급히 휘갈겨 쓴 서한이 보였다.
처음으로 서신을 왕래한 셈이었다. 그녀는 어떤 답장을 해 주어야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을지 한참 고민하다가, 편지의 내용을 읽을수록 점점 더 차갑게 굳어 갔다.
“제국에 흩어진 이단심문관들을 찾아 달라……?”
아니, 뭐?
내가…… 아니. 아이언사이드가 무슨 흥신소야?
“요즘 다들 나한테 왜 이래, 정말!!”
그렇게 빽 소리치던 에버리즈는 서한의 마지막에 적힌 제피스의 사인을 보고는 다시 입꼬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제피스, 제피스, 제피스 시라다스트.
음…… 그래. 이번 한 번 정도야 뭐. 혼수로 치고.
그 대신 이름은 제피스 드 트레뮐레라고 짓는 거야.
그녀는 잠시 망상에 빠져 있다가 곧 고개를 젓고는 일어섰다. 맑은 차임이 울리고 시종장이 들어왔다.
“황제 폐하께 급사를 파견해야겠다. 아이언사이드 지휘 면장이 필요해.”
“예, 전하. 준비하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 * *
키르하스의 하루는 아주 규칙적이었다. 페르난데스의 곁에 있다가, 같이 밥을 먹고, 다시 그의 곁에 있다가, 다시 같이 밥을 먹는다. 그것을 며칠간 반복하면 그녀의 일상에 대한 설명이 끝난다.
무언가를 도와주고 싶어도, 사실 그녀는 페르난데스와 프레이야가 정확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며칠간 그의 일을 계속 지켜봤지만, 그럼에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B-21 구역을 소개해야 하오. 퇴각 명령을 내리고, E-17 구역에도 같은 명령을 부탁하오.”
“여신은 죽는다.”
“그리고 G-01에도 같은 명령이 필요하겠군.”
“여신을 죽여라.”
프레이야는 투덜거리면서도 여전히 정좌한 채 자세를 풀지 않았다. 이 테이블 위로 거대한 꽃무덤이 피어올라 있었다. 이건 그녀도 익히 아는 광경이었다.
프레이야가 표현한 동부 해안선의 전도였다. 꽃들은 일제히 피고 지며 시시각각 위치가 변하고 있었고, 페르난데스는 가만히 그 지도를 내려다보며 이따금씩 명령을 내리곤 했다.
“저기…… 은공?”
“응?”
“혹시 이 붉은 점들이 적인가요?”
“맞아.”
“그럼 지금 바다에서 오고 있는 이 점들도요?”
“그렇지?”
“그럼 지금 해안선에 적들이 상륙하고 있는 건가요?”
“응.”
페르난데스는 건성건성 대답하며 지도를 노려보고 있었다. 키르하스의 물음에 답하면서도 그의 지시는 끊임없이 프레이야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키르하스는 지도 위에 흩어진 붉은 꽃송이들을 보며 말했다.
“그럼 차라리 상륙하는 적들을 기습하는 건 어떤가요? 본디 상륙할 때 적이 가장 취약하니, 그때를 노려 하나씩 끊는다면 전황이 한결 수월해지지 않을까요?”
“그 말도 맞아.”
“예……? 그럼 왜…….”
“전력이 부족하니까.”
페르난데스는 그제야 허리를 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같은 자세로 있었던 탓에 기지개를 펴자 우드득 뼈마디가 마찰하는 소음이 들렸다.
“지금 전선에 총 서른두 개의 약탈조가 있어. 각 조가 이백여 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니, 아군의 수는 잘해 봐야 육천사백. 실제로는 육천 명이 조금 넘겠지. 적들은?”
“예?”
“페이른 본대의 수는? 상륙하는 함대 하나하나에 못해도 천여 명은 있을 거야, 키르하스. 궁병, 기병, 보병에 공성 무기까지 가득 실린 수송선들이지. 아군은 편제는 보병으로만 이루어져 있고.”
북부인들은 물론 개인의 기량이 대단히 뛰어난 전사들이지만, 전쟁의 기본은 결국 물량에 있다.
“선과 선의 대립에서 아군은 결코 페이른의 본대를 이길 수 없어. 승리하기 위해서라면 점과 점의 대결을 해야 하고, 편제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면 세 배의 수를 투입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예……?”
“그렇게 알아 둬. 그러면 저 함대 하나를 막기 위해 삼천 명을 투입한다 해 보자. 그럼 아군 전력이 두 개로 나뉘겠지?”
페르난데스는 손을 뻗어 지도를 가리켰다.
“교전이 아무리 짧고, 아무리 성공적이어도 이동 거리가 하루 이상 발을 묶이게 될 텐데, 바다를 앞에 두고 하루를 묶인다면 적의 본대가 아군을 포위하게 된다. 그럼 전투 한 번 이후에 아군 전력은 그대로 끝나.”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전투를 피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잖아요. 결국 회전이 있기야 할 텐데…….”
“점과 점의 전투를 해야 해. 적들을 보다 더 잘게 잘라서.”
전쟁의 기본은 물량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서, 적의 총병력이 얼마가 되든 한 전선에 투입되어 마주하는 두 집단의 숫자만 조율할 수 있다면 된다.
전쟁 전체의 승리를 위한 회전이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는 산발적 교전이 필요한 순간이다.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전장의 정보는 실시간으로 전달되지 않으므로, 퇴각해야 할 때, 진군해야 할 때, 그리고 진격로까지 섬세하게 조율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며, 설령 성공한다 하더라도 전장에선 어떤 변수가 일어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은공, 프레이야 님의 연락 방식은 그저…….”
“현상 유지, 퇴각 준비, 퇴각. 그 셋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맞아.”
“그럼 어디로 퇴각할지는 미리 말을 맞추어 둔다 해도, 자세한 교전 정보를 전달할 수는 없는 것 아니에요? 어떻게 모든 지역에서 소규모 교전만 일어날 것이라 확신하세요?”
“한번 봐 봐.”
페르난데스는 픽 웃고는 다시 지도에 집중했다. 시시각각 피어오르는 꽃봉오리들을 바라보며, 그의 머릿속에선 정교하게 짜맞춘 톱니바퀴가 구르고 있었다.
전달하는 명령은 고작 셋이다. 현상 유지, 퇴각 준비, 그리고 퇴각. 각 퇴각은 사전에 개별적으로 지시한 방향으로 진행되며 모든 약탈조들은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해 움직인다.
전장 전역에서 점과 점이 선을 그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톱니바퀴가 맞물리듯이, 모든 적들의 교전을 회피하기만 하며.
마치 소용돌이처럼, 적들을 끌어당기는 용오름처럼. 전황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