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4. 소용돌이 (2)
귄터 폰 슐리히부르크는 긴장한 눈으로 어슴푸레한 해안선을 노려보고 있었다. 모든 군인에게 가장 취약한 시기는 행군 중이며, 행군 중에서도 가장 취약한 시점은 상륙 직전이었으니.
그러나 페이른군의 장병과 병장기를 실은 수송선은 부드럽게 해안가에 정박했다. 보병들이 일제히 하선하고, 병마와 병장기들, 그리고 마침내 거대한 공성병기까지 하선하는 순간에도 그는 여전히 긴장한 눈으로 사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모든 병력이 해안을 밟고 진지 구축을 끝냈을 때에 이르러서야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사령관님, 총 병력 2,318인. 전원 하역 완료했습니다!”
“그래, 고생 많았네!”
부관의 외침에 귄터는 큼지막한 미소를 지으며 양손을 비볐다. 이제부터 그가 진군하며 밟는 모든 땅은 그의 영지가 될 예정이었다. 위대한 지기스문트 대왕께서는 정복한 땅의 권리를 사령관에게 위임한다 하셨으니.
성과에 따라, 어쩌면 대공의 위를 받을 수 있을 수도 있다. 아니, 설령 별다른 작위를 인정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좋았다. 슐리히부르크 백작가의 영지에 이 땅까지 합친다면 독립백은 물론이요, 공왕 위까지 노릴 법도 했다.
지기스문트 대왕에 의해 새로이 재편될 동부 왕국 연합의 소왕국들 중에 그의 가문기 또한 걸릴 것이다. 귄터는 행복한 상상에 웃음을 터트리고는 말했다.
“군마의 상태는 어떤가?”
“항해 도중 병든 기마가 도합 15필이었습니다. 기력이 쇠한 군마가 다소 섞여 있습니다만, 기병 편제 운용엔 차질이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좋아. 좋아. 스무 필을 꺼내오게. 정찰을 파견해 이 일대를 수색해야 할 걸세. 서두르게! 가장 가까운 영지가…… 음. 이치들 도시 이름은 적응이 안 되어서…….”
“알트카이…… 카에엔입니다!”
“그래. 그 도시 방향으로 정찰조를 파견하게나. 데인의 머저리들이 전군을 파병했다고는 하나 영지 관리에 최소한의 병력 정도는 남겨놨겠지.”
귄터의 입가에 긴 호선이 그려졌다. 데인의 저 유명한 ‘편력 전쟁’은 지금으로 총 세 차례였으며 앞선 두 번의 전쟁에서 데인의 비센테 왕은 기용 가능한 거의 모든 병력을 동원했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데인은 지금 속 빈 강정에 불과할 터였다. 놈들의 주력군은 기마병이었으므로, 편력 전쟁에 대부분의 병력을 파병했다면 아군의 기마 전력을 막아낼 방도가 없을 테니.
이건 수도까지 이어지는 텅 빈 대로를 진군하는 것과 같은 여정이었다. 적의 급습 따윈 고려할 필요조차 없었다. 달려가서 깃발을 꽂는 대로 그의 땅이 될 무주지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독립백령이든 공왕령이든 자신의 새로운 땅엔 단 하나의 병력조차 아쉬운 노릇이다. 적의 급습 따위에 쓸모 없는 손실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완벽해.”
그야말로 인덕 넘치는 이상적인 군주가 아닌가? 귄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떠나는 정찰병들을 바라보았다.
* * *
정찰병들이 떠난 지 세 시간이 지났을 때, 귄터는 초행길에 어두운 병사들이 다소 늦게 움직인다 여겼다.
다섯 시간이 흘렀을 때, 그는 병사들의 태만을 훈계할 생각에 가득했다.
일곱 시간이 지났을 때부터, 그는 무언가 이상하게 흘러간다 생각했다. 그냥 주위 마을 위치나 파악하라 보낸 병사들이었으므로, 그들이 소지한 야전 식량은 한 끼 분량을 넘기지 않은 탓이다.
그리고 군인은 어떤 순간에도 식사 시간을 거르지 않는다. 아침에 출발한 녀석들이 밖에서 점심을 건량으로 대충 해결했다 하더라도, 저녁에 돌아오지 않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이놈들이 탈영이라도 했단 말인가?’
당연히 정찰병들이 요격당했으리란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정찰병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교전을 회피하도록 교육받으며, 지금 데인 왕국 내부에는 그들의 상륙을 사전에 확인하고 요격할 자원도, 인력도 부족했으므로.
“진군한다.”
“예? 하지만, 사령관님! 정찰조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혹여 데인 촌놈들의 함정에라도 걸린 것이라면 야간 행군은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녀석들은 탈영한 것 같군. 최대한 조심스럽게 행군하며 근거리 정찰은 도보로 수행하면 그만이다.”
귄터는 작전의 첫 단추부터 어긋나기 시작한 탓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다른 방면의 사령관들이 얼마나 빠르게 진격을 시작했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알트베르트에 도착하는 마지막 사령관이라는 오명을 쓸 수는 없었다.
그의 명령이 모든 장병들에게 전달되자, 긴 항행으로 지친 병사들이 투덜거리며 행군을 준비했다. 이미 해가 지기 시작했으며 가장 가까운 도시까지는 반나절은 족히 걸릴 터였으므로 병사들은 긴 행군 끝에 휴식 없이 전투를 준비해야 할지도 몰랐다.
귄터는 말 위에 올라 인상을 찌푸렸다. 건방지고 게으른 것들. 군인 정신이나 충절이라곤 찾을 수도 없는 저런 방만한 것들까지 하나하나 챙기려 하니, 이 얼마나 훌륭한 군주란 말인가.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슴을 폈다.
* * *
“으음. 도적이 든 마을인가 보군.”
행군 중에 정찰 보고를 받아 들른 마을은 화마에 휩싸여 완전히 소각되어 있었다. 귄터는 혀를 쯧쯧 차며 생각했다. 영지를 지킬 최소한의 병력마저 원정에 참여했으니 도적들이 들끓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지금은 가을 수확철이다. 영주의 어리석음에 죽은 백성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자애로운 군주인 귄터는 이 참상에 혀를 찼다. 그러나 이는 낭보였다.
‘영지 내부의 도적들조차도 방어할 수 없을 정도로 빈 땅이란 말이렷다?’
그 생각은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마을을 지나는 과정에서 점점 더 확고해졌다. 영지 주도에 제법 가까운 마을까지 완전히 소각된 상황이었다.
‘기병이 아니라 보병까지 부족하다는 뜻이겠군!’
도시까지 도보로 여섯 시간 거리에 있는 마을이 불탔다면 이건 도적들에게 대응할 기병 편제가 부족한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다. 이 정도 거리는 도보 행군이 가능했을 테니, 생각이 있는 군주라면 이렇게 큰 규모의 정착지를 방기할 리가 없었다.
‘말 그대로 빈 땅!’
성과 농경지, 최소한 여섯에서 일곱 정도의 정착지가 딸린 대농장이 그의 가문에 복속되는 영광스러운 순간이 눈앞에 있었다. 그것도 고작 하룻밤만에!
‘이번 원정은 대박이로군.’
그는 비릿하게 웃으며 말을 재촉했다. 위대한 군주로서 가장 선두에 나서는 대범함을 보일 생각이었다. 피로한 병사들의 눈에는 말 탄 귀족이 유세 떠는 것 정도로 보였으나, 귄터의 눈엔 그런 것 따윈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후미에서 기마 한 필이 황급히 달려왔다.
“사령관님! 후방에서 연기가 올라옵니다!”
“또 다른 마을이 도적들에게 습격을 받고 있나? 이런, 영지 치안 상태가 정말 개판이로군.”
“아닙니다! 후방에서 올라옵니다!!”
“그래, 우리 뒤에 지나친 마을들은 많지 않았나.”
귄터는 별생각 없이 그렇게 말하다가 멈칫했다. 우리 뒤?
“잠깐, 우리가 지나친 마을들은…….”
“예!! 이미 약탈당한 마을들이었습니다!”
“그럼…… 우리 후방이라면…….”
“아군 진지입니다! 아니, 병력이 모두 빠져나갔으니 거기엔…….”
“수송선!!”
선박으로 싣고 온 식량 따위는 모두 짐수레로 이동 중이었으니 상관없다 치더라도, 후방에선 수송선과 소수의 공병대가 남아 간이 보급항을 건설 중에 있었다.
첫 상륙에 챙긴 식량은 결코 절대적이지 않다. 이 정도의 군량은 나흘에서 닷새면 동이 날 터였다.
당연한 일이다. 기습에 가까운 상륙 작전인 이상, 그 이상의 보급은 후방에서 지원을 받고 일부는 현지에서 징발하며 우선 아군의 공격로를 확보하고, 이 나라의 수도를 향해 쾌속 진군하는 것이 이 전쟁의 대전략이었으니까.
수송선이 불타고 있다. 적진 한가운데에 떨어지는 상륙작전의 특성상 선박이 없다면 퇴각로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해안선이 파괴되었다는 뜻……!’
이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수송 선단이 모두 파괴되어 해안 근방의 잔해물이 되었다면, 선박이 근접 정박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할 수 없다. 일시적인 암초 지대가 형성된 것이나 다름없다.
즉, 그들은 후방에서 더 이상 어떤 지원도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보급 물자든, 병력이든, 그 어떤 것이든.
당장 다른 부대와 접촉하려 해도 방도가 없다. 진군 루트는 알고 있어도 진군 속도를 알 수 없는 탓이다. 중소 규모의 독립 부대들이 각자 땅따먹기에 혈안이 되어 질주하는 이 상황에서, 작전의 최종 목적지인 알트베르트에 도달하기 전까지 각 수뇌부들은 서로에게 접촉을 시도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도는 현지 징발뿐인데…….
“제기랄. 속도를 올려라. 오늘 밤이 지나기 전에 주도의 성벽을 넘어야 한다!”
“예!!”
귄터는 어금니를 사리물며 박차를 가했다. 병사들의 아우성이 들렸지만 지금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현지 민가는 모두 이미 약탈당했어!”
* * *
“보급로가 끊기고 진군 경로의 민가가 모두 약탈되었다……. 이건…… 일종의…… 청야 전술이군요?”
“맞아.”
“하지만 방어 병력이 없는데 청야 전술이 의미가 있나요?”
키르하스의 말이 옳았다. 청야 전술이란 결국 대군을 상대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다. 지치고 피로하여 사기가 떨어진 적들을 회전에서 압살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며, 이는 결국 최후의 전투를 피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아군의 병력은 제아무리 잘 모아도 놈들의 주력과 일전을 벌이기엔 모자라다. 거기에 적들의 진군 방향 또한 문제였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이에요, 은공. 녀석들은 이미 퇴로가 끊겼으니 남은 선택은 진군뿐이고…… 알트베르트를 향해 전력으로 질주한다 치면 막을 방법이 있나요?”
“이젠 네가 내게 군략을 가르치는구나. 하하!”
죽으나 사나, 페이른의 사령부에는 단 하나의 길밖에 놓여 있지 않다. 육로를 통해 진군한 것이 아닌, 해안선을 따라 산개하여 상륙한 이상. 그리고 수송선이 파괴되어 퇴로가 끊긴 이상 놈들에겐 진군 외의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식량을 수탈하기 위해서 몇몇 군단은 산개할 것이고, 보다 적극적인 군단은 수도를 향해 돌격할 것이다. 굶주리게 할 수는 있어도 사기를 꺾을 방법이 많지 않았다. 더군다나—
‘청야 전술은 결코 국토 전역을 모두 불태우는 방식이 아니다.’
당연한 소리다. 청야 전술은 적의 진군 경로에 있는 약탈 가능한 자원을 모조리 불태우는 전략에 불과했다. 카라드스카르의 진군 당시 청야 전술을 직접 지시했던 키르하스조차도, 자신의 병력과 백성들을 먹여 살릴 방도는 마련했었다.
그러나 지금 데인 왕국엔 전선이라 할 만한 곳이 없었다. 적의 진군 경로는 말 그대로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해안선을 따라 산개하여 조여오는 적의 경로를 볼 때, 청야 전술을 벌인다는 것은 곧 결국 국가 자체를 불사르겠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았다.
적의 손에 떨어지느니 차라리 모두 한뜻으로 죽겠다. 아름다운 미담일 수도 있고, 장절한 옥쇄일 수도 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개죽음이다.
“키르하스. 네가 수인 연합의 각 부족들을 전혀 다른 방면으로 진군시키려면 각 부족의 족장들에게 뭐라 지시할 것 같아? 최종 전략 목표점까지 서로 간에 연락조차 불가능한 상황에서 말이야.”
“으음…….”
그 상황에서 야전사령관이 된 부족장들이 그녀의 지휘를 온전히 따르리란 보장 따윈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전략 목표를 반드시 성사시키려면…….
“보상……이 있어야겠죠?”
“당연히 그렇겠지. 뭘 보상으로 주면 놈들이 더 빨리 도착할까?”
“어…… 어…… 영토……? 영토! 맞죠?”
“맞아. 훌륭하구나.”
페르난데스는 그녀의 머리칼을 슬슬 쓰다듬었다. 키르하스가 그르릉하는 소리를 내며 작게 눈을 감자, 페르난데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밟는 모든 땅의 권리를 인정해 준다고 말한다면, 각 야전사령관들은 최대한 더 넓고 많은 땅에 자신의 가문기를 박아 넣으려 혈안이 되겠지. 자연스럽게 전역이 확산되고 진군 속도가 빨라질 테니. 정상적인 사고를 하고 있다면 이 방식을 택할 터.”
페르난데스는 꽃 무덤 진 지도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어쩌나. 모든 거주지가 이미 소개되어 있군. 전투다운 전투는 없고, 군량은 나날이 떨어져 가지. 사방에선 정체 모를 도적들이 들끓어 가뜩이나 없는 민가와 식량을 털어먹고 있다고 아우성이야.”
“어…….”
“청야 전술이 아니다. 키르하스.”
페르난데스는 그녀의 귓가를 슬슬 쓰다듬었다.
“이제부터는 공격자와 방어자의 역할이 바뀐 거야.”
이미 데인 왕국은 페이른의 상륙 직후부터 함락되었다고 보아야 했다. 페이른의 야전 사령관들은 최대한 많은 땅을 지켜 내며, 또한 동시에 알트베르트를 향해 진군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지기스문트가 당초 세웠던 전략의 완벽한 역전이라 할 만했다. 공격자와 방어자의 전환. 비센테 왕의 페이른 진격 직후 그가 세운 작전은, 페이른 영토를 내어주고 오히려 비센테로 하여금 그 땅을 지키게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이 작전을 역으로 이용한 셈이다. 이제 전역은, 페이른 국토를 데인이 지키고, 데인의 국토를 페이른이 지키는 꼴이 되었다.
다만, 데인과 그 인근 소왕국들의 국토 위엔 제삼의 병력들이 있었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 민가를 무차별적으로 약탈 중인 저 먼 땅의 전사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