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 소용돌이 (3)
제국 전역의 곡창에서 수확한 작물들이 귀르로 향하고 있었다. 카르벨리에 여제의 ‘인도주의적 구휼’이라는 정책과, 제국 내전 당시 각 선제후들의 충성 서약의 결과였다.
작물은 차곡차곡 레이아의 기함에 쌓여 가고 있었다. 가이메른 기함의 적재 한계는 일국의 성채에 준하는 규모였으며, 계산상 두 번 정도의 운송으로도 동부 전역의 겨울을 책임질 수 있었다.
운송 수단과 식량은 이미 충분히 마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레이아의 기함은 귀르의 앞바다에 고고히 떠 있을 뿐이었다.
“폐하, 사절이 알현을 청하옵니다.”
“이번엔 누구냐?”
“바라스의 레온 왕이 보낸 사절이옵니다.”
“들라 하라.”
르네는 피로한 눈을 꾹 누르며 손짓했다. 곧 문이 열리며 추레한 복장의 사내가 걸어 들어왔다. 사내는 문가에서 르네를 발견하자마자 걸음도 옮기지 않고 곧장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주여 가호하소서, 신성 레바인테르 제국 만세! 수천 강역의 지배자, 위대한 여제 카르벨리에 폐하를 뵙습니다!”
“그만. 짐은 바쁘다. 본론을 말하라.”
사절은 르네의 성격을 미리 파악하지 못한 듯싶었다. 그는 자신의 말실수가 있었는지 생각하며 파리하게 질렸다.
보다 못한 시종장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폐하께오선 허황된 미사여구로 찬양하는 자를 혐오하십니다.”
“오오……! 그 겸허함이야말로 진정한 군주의 미덕일지니! 대지의 지배자 카르벨리에 여제시여, 만수무강하소서!”
“……저자는 귀가 먹었더냐?”
르네가 인상을 찌푸리자 사절은 힉, 하고 짧은 숨소리를 냈다. 더 말이 길어지기 전에, 르네는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빠르게 말하라. 짐이 바쁘다 말한 것은 진심이었다.”
“폐, 폐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폐하께오서 아국에 구휼미를 지원하여 주시겠다 하셨던 날로부터 벌써 열흘 하고 아흐레가 지났나이다……. 작금의 동부는 무도한 자들의 전쟁과 도적 떼의 환란으로 굶주리고 병든 자들이 속출하고 있나이다. 하온데…….”
“그만. 그러니까, 배가 언제 출항하는지 궁금하다 이 말이더냐?”
“그것, 그것이…….”
“그대의 나라로 돌아가 시기를 기다려라. 짐이 그대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이 이것뿐이겠구나.”
“하, 하오나 폐하……!”
“그대는 제국의 곡식이 그대들의 마땅한 권리로 보이더냐?”
르네의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문가에 엎드린 사절을 향해 걸었다.
“아니면, 짐의 아량과 연민이 그대들의 생득적인 권리라 생각하느냐?”
“아, 아국의 수송함을 혹여 이 항구에 접항하게만 해 주신다면…… 급, 급한 백성들을 위해 작은 자비만을 보여 주신다면…….”
“떠나라. 짐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사절은 부들부들 떨며 간신히 물러섰다. 그는 떠나는 순간에도 수차례 르네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집무실의 문이 닫혔다. 르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어울리지 않는 연극이 계속되고 있었다.
“폐하…….”
“짐은 괜찮다.”
시종장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르네를 바라보았으나, 그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르네가 어렸을 시절부터 카르벨리에 공작가의 집사로 근무했었던 그는, 지금 르네가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마음이 여린 아이였다. 수백, 수천, 아니 어쩌면 수만여 명의 굶주림을 담보로 소왕국들의 목줄을 쥐고 더 나은 조건을 가져오라며 겁박하는 종류의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 했다. 그녀는 더 이상 카르벨리에 공작가의 어린 영애가 아니었고, 제국의 황제가 곡창을 열어 외국의 기아를 해결할 때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이익이 돌아와야 했으니.
‘아버지……. 저는 황제가 하기 싫었어요.’
르네는 펜을 쥐고 손 안에서 굴리며 잠시 생각했다. 그녀가 황제가 된 이유, 그녀를 황제로 만든 사내.
그 사내가 바랐던 것. 황제로서 해야 하는 일.
그가 떠나기 전, 엘프와 북부인과 제국인들의 회합에서 이루어진 밀약에 대해서.
* * *
“미쳤군.”
“어…… 죄송해요. 세르너드 공. 하지만 이건 좀…….”
“……페르난데스.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어쩌면 후세에 ‘세 군주의 밀약’이라 불릴 수도 있을 그 역사적인 순간에, 세 명의 군주들은 한마음이 되어 그에게 되물었었다.
밀약이 체결되기 직전, 페르난데스가 공표한 향후의 전략 방향 때문이었다. 아에렌도, 르네도, 그리고 레이아마저도 술잔을 내려놓는 것조차 잊은 채 멍하니 눈앞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민가를 무차별적으로 약탈해? 뭐…… 물론 우리야 나쁠 것 없다지만……. 선조들을 뵐 낯이 없겠군.”
아에렌은 씁쓸하게 웃었다. 지금 북부의 상황은 결코 좋지 않았다. 이번 원정으로 어느 정도의 수익을 챙겨야 했고, 최소한의 피해를 보길 바랐지만. 그와 별개로 이런 전투를 원한 것 또한 아니었다.
북부의 구원자가 병력을 요청했다. 이는 아에렌으로서는 거부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녀가 권력을 잡은 명분이 북부 정화였으므로. 거기에 북부 내부의 불안 요소들을 생각한다면 전투 가능한 건장한 인원들을 외부로 차출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아에렌은 북부인이었다. 지난 전투에서 선조들과 함께 어깨를 마주하고 악마를 물리쳤던 북부인이었으며, 그녀와 그녀를 따르는 전사들은 스스로가 위대한 에인헤랴르의 후예라는 사실에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누구도 영원히 살 수는 없다. 오직 영광만이 영원할 뿐. 북부인들이 갖는 삶의 기조는 이런 식이었다. 죽음에 초연하지만 명예와 영광과 황금에 집착하는 사람들.
“이번 원정이 끝난다면, 올 겨울에 북부는 추위에 죽는 이는 있어도 굶주려 죽는 이는 없을 거요.”
“물론 그렇겠지. 남부의 저 넘쳐나는 자원을 모두 긁어갈 수만 있다면 말이야…….”
아에렌은 북부인이었으나, 동시에 그들의 왕이기도 했다. 왕으로서 그녀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개인의 명예는 국가의 존속보다 가벼운 탓이다.
“저는 반대예요.”
르네는 차가운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만일 북부의 기아가 문제라면 인도적인 범위 내에서 식량 지원 정도는 가능하겠지요. 하지만 무차별적인 대규모 약탈? 이 작전에는 동의할 수 없어요.”
“그 인도적인 지원을 북부가 아니라 동부에 보낸다 생각하시는 건?”
“설령 같은 양의 식량을 지원한다 하더라도 약탈 도중에 발생할 난민과 사상자는 어찌할 생각이지요? 모든 요소가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한들 동부에서 일어날 소요 사태로 대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죽게 될까요?”
르네의 굳은 눈이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이것이 아에렌과 르네의 차이였다. 아니, 어쩌면 가난한 약소국과 부유한 강대국의 차이라 보아도 좋았다.
숭고한 이상이었지만, 페르난데스는 보다 냉정하게 이를 구분할 수 있었다. 결코 위선은 아니었지만, 선의는 때때로 사치품에 불과하다고.
제국은 반쯤 무너진 이 상황에서도 제 백성들을 챙길 여력이 있었다. 심지어 몇 개월만 더 지나면 제국의 경제는 다시 외부의 국가를 지원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의 힘이었다. 제아무리 겸허한 지도자라 할지라도 이런 강대국의 위상을 직접 목도한다면 이따금씩 사치와 향락에 젖어 들고는 한다. ‘선의’라는 이름의, 비물질적인 사치에.
르네의 경우가 그랬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선한 인간이며 위대한 영웅이었다. 다 무너져 가는 세계를 최후의 최후까지 지키려 노력했던 여걸이다. 그녀가 이런 상황에서도 타국 백성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은 오히려 본능이라 할 만했다.
“이건 어떨까요. 북부의 병력을 지원받는 대가로, 제국은 북부에 식량을 지원하겠어요. 일종의 용병 거래죠. 제국이 직접 병력을 파병할 수 없는 상황이니, 레이아 여왕의 함대는 동부 해상을 지원하고 아에렌 여왕의 전사들은 데인 왕국의 공세를 지원하는 거예요.”
이 전략이라면 약탈로 인해 파괴될 지역까지 완벽하게 지켜 낼 수 있다. 르네는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꺼냈다.
“그런 식이라면 시간에 맞출 수 없소.”
“초전에서 밀리고 들어간다는 것은 동의해요. 하지만 단 한 번의 전투로 끝날 전쟁이 아니지 않나요? 페이른 군대가 데인 해안선에 상륙 후에 진군을 시작한다면, 우리의 군사들이 추후에 상륙해 인근 해안선부터 다시 그들의 뒤를 쫓을 수도 있어요.”
“데인 내부의 거주구는 어차피 페이른에 의해 수탈당할 것이고, 추수철 동안 병력과 군량을 온존한 소왕국들은 겨울철부터 참전을 시작할 것이오.”
페르난데스는 거대한 지도를 내려보며 선을 몇 가닥 그었다.
“소왕국들의 참전을 모두 막아 내며 이미 진영을 구축한 페이른 본대를 소수의 병력을 밀어낸다? 이는 망상이오. 결국 전황은 각개 전투로 이어질 터, 그 상황에 치닫게 된다면 장기전은 피할 수 없고, 전쟁 난민의 발생은 어차피 피할 수 없소.”
북부의 전사들이 약탈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결국 전쟁의 군량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면 소왕국들의 백성이건, 데인의 백성이건 수탈받는 것은 동일하다. 그리고 그 수탈자들은 결코 백성들의 피해를 줄이려 노력하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차라리 아에렌의 병력이 약탈하는 편이 낫다. 적어도 이쪽은 통제가 가능하니까. 페르난데스의 말에 르네는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늘어트렸다.
“그게 아니라면,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은 것이오?”
“그런 것은……. 아니에요.”
전쟁엔 선악의 개념이 모호하다. 전쟁은 그 과정에서 살인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 활동이며, 이 틈바구니 속에서 어떤 선인도 스스로를 선하다 평가할 수는 없으리라.
반면 전쟁의 개전에 서명하는 지도자들은 어떤가. 그들이 감당해야 할 무게는 펜의 무게뿐이었다. 바란다면 이들은 충분히 선해질 수 있다. 적어도 그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페르난데스가 한 말은 이런 것이었다. 선인으로 남고 싶으냐. 민가를 약탈하라는 명령서에 서명한 순간부터 이 전쟁에는 명예도, 선의도 남지 않을 것이었으므로.
그러나 이는 위선이다. 더 큰 악을 방기하는 최소한의 위선.
‘어차피 누군가에 의해 약탈당할 자들이라면, 적어도 그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자신의 손을 더럽힌다.’
정상적인 사고로는 도달할 수 없는 결론이었다. 하지만 도의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악업을 짊어져야 한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반박할 여지가 없는 정론이었다.
르네의 착잡한 눈을 바라보며, 페르난데스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제국은 데인 왕가에 빚을 지고 있소.”
“맞아요. 세 번이죠.”
“라 메르티옹에서 한 차례. 카라드스카르의 대북진에서 두 차례. 데인이 제국에 참전을 요청하더라도 피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빚이지. 전쟁이 끝난 이후에 동부를 향한 식량 지원을 개시한다면 데인과 동부에 다시 목줄을 채울 수 있게 되오.”
최근 일련의 사태와 제국의 부침으로 동부는 점차 제국의 영향력에서 독립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제국을 향해 정기적으로 상납하던 조공이 끊어지고, 심지어 제국 내전기에 그들을 직접 지원한 것은 데인뿐이었을 지경.
그런 와중에 데인의 몰락은 제국에게 결코 긍정적인 지표가 될 수 없다. 동부의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면 지금의 전쟁에 제국은 반드시 한 발 걸쳐야만 했다. 내전의 여파가 어찌 되었든 간에.
하물며 지금, 생산 기반이 완전히 박살 날 미래의 동부는 당분간, 아마도 향후 수십여 년간 제국에게 일방적으로 자원 외교의 주권을 잃어버릴 것이었다.
페르난데스는 지금 르네에게 그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북부인의 약탈로 동부 전역의 자원 생산 기반을 파괴하고, 이를 통해 다시금 목줄을 채우라고.
‘무릇 여러 국가를 통제하는 것보다 하나의 대국을 통제하는 편이 더 쉬우니.’
르네가 마음을 얼마나 독하게 먹느냐에 따라서 수십 개의 국가가 얽힌 저 거대한 지역이 영원히 제국의 속주로 남을 수도 있다. 비센테는 의로운 인물이지만 쉽사리 제어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반면 르네는 그렇지 않다.
페르난데스의 눈을 바라보며 르네는 마른침을 삼켰다.
“당신…… 데인 왕국 출신 아니었나요?”
“이제 와서 나를 매국노로 보는 것이오?”
“하긴, 당신이 어디 한 나라의 이권을 대표한 적이 없긴 하지요.”
르네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렇게 르네 또한 페르난데스의 작전에 동의하게 되었다. 페르난데스는 이 자리에 남은 마지막 군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엘프 여왕의 눈이 가늘게 웃음을 짓고 있었다.
“우리가 언제 죽을 것 같은가?”
무슨 의미지? 페르난데스가 눈을 가늘게 좁히자 레이아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오래 살아 봐야 200여 년. 그 정도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영원히 살 생각 따윈 없으니까.”
“하프엘프의 수명을 생각한다면 그쯤이겠지 싶긴 하오만.”
“200년 뒤라! 하…….”
레이아는 술잔을 내밀었다. 짙은 벌꿀색 증류주가 투명한 크리스탈 잔 안에서 끈적하게 물결쳤다.
-쨍.
두 사람의 잔이 맞부딪치며 얼음이 달그락거렸다. 레이아는 술을 한 모금 들이켜며 말했다.
“200년 뒤 지옥이 충분히 뜨겁길 바란다.”
그 말을 끝으로, 세 여왕은 페르난데스의 작전 개요에 서명을 했다. 북부의 군사, 제국의 식량, 엘프의 운송. 목표는 동부의 평탄화와 악마 준동의 저지, 그리고 동부 전역의 식민화.
대외적으로 알려지는 이 이야기는 그저, 북부인들의 대규모 침략.
다만 공교롭게도 당시 동부의 왕국들은 내전 상황에 돌입하여 이를 막을 여력이 없었다.
후대 사가들은 그렇게 기록할 것이다. 가장 잘 알려진다 하더라도 세 군주들의 욕심 정도로.
페르난데스는 씁쓸하게 웃으며 르네와 나눈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