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67화
366. 소용돌이 (4)
지금까지 진군했던 과정과는 달리, 알트카이스의 외성 위에선 제법 정석적인 공성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알트카이스의 높은 성벽 위엔 위용 넘치는 군기가 펄럭이고, 산발적으로 수성 측의 화살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아군의 피해가 적지 않았다. 애초에 이천여 명의 병력은, 물론 적은 수는 아니지만 공성에 유의미할 정도로 많은 수도 아니었다.
“저놈들은 대체 왜 이리도 열심이란 말이냐?”
귄터의 말에 부관들은 다소 어처구니없는 기색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들 그러나? 그렇지 않나? 어차피 이 나라는 국운이 다했고, 저리 발악을 해대면 함락 이후에 목숨을 보장할 수 없지 않겠나! 설령 우리가 함락에 실패해 그저 포위만 한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지.”
기실, 페이른의 군대는 굳이 공성을 시도할 필요조차 없었다. 외부에서 관측한 바로, 지금 알트카이스 내부의 주둔군은 기껏해야 삼백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당연히 물자가 부족할 것이고, 근방의 민가가 모조리 약탈당했다는 의미는 곧 저 내부에 있을 민간인들을 포함하지 않더라도 당장 군량 비축조차 힘겨울 것이란 뜻이다. 이대로 포위를 굳히기만 하더라도 놈들은 천천히 고사할 뿐이었다.
길어야 일주일. 귄터는 냉정히 저들의 시간을 계산했다. 성의 문이 스스로 열릴 때까지 걸릴 시간이 그 정도였다. 놈들에겐 희망 따윈 없었다. 그런데 왜 발악한단 말인가?
“아군의 사정도 알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보급이 제아무리 부족하다 한들 저들보다는 풍족하지 않겠나?”
“아니면…… 데인 놈들이 으레 그렇듯 명예를 위해 버티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그건 가능성 있겠군.”
귄터는 부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명예라, 훌륭한 군인 정신이라 할 만했다. 그는 성벽 위 갤러리에 사다리를 걸기 위해 발악하는 병사들과, 사다리를 걷어 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적군의 공방전을 지켜보았다.
“얼마나 걸릴 것 같나?”
“반나절이면 충분합니다.”
피해를 감수한다면 그 정도였다. 애초에 영지의 주도를 감싼 성벽은 고작 삼백여 명으로 막아 내기엔 터무니없을 정도로 넓다. 실제로 지금 성벽 위엔 그의 병사들이 속속들이 올라서고 있었다.
설령 내성에 저들의 병력이 더 남아 있다 하더라도, 뭐. 그건 그때 불이라도 지르면 될 일이 아니겠는가. 귄터는 느긋하게 웃으며 성벽을 바라보았다.
“원, 쓸데없이 시간만 축내는군.”
그의 눈이 탐욕으로 이글거렸다. 정복한 땅 모두가 그의 이름 아래에 복속된다는 왕의 약속이 아니었다면 알트카이스를 우회했을 터였으나, 이젠 아니었다. 그의 진군 경로는 온전히 그의 땅이 되어야 했다.
* * *
그리고 머지않아 마지막 병사가 항복하며 성문이 열렸다. 귄터는 활짝 열린 성문 아래로 천천히 말을 몰아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메마른 굶주림의 냄새가 나는 가난한 도시의 풍경이었다.
“보고하라.”
“예, 사령관님. 알트카이스 공성전 아군 피해는 총 220인 전사에 131인 부상, 기마 열두 필 손실이었습니다!”
“공성치고 놀라울 정도로 적은 피해로군. 적들은?”
“파악된 적 병력 총 291인 중 전사자가 그 절반을 넘는다 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집계 중에 있습니다!”
“음……?”
귄터는 말을 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병사들이 성하대로 위를 뛰어다니며 혹여 매복한 적이 있는지, 또는 식량이나 물자가 있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무언가 이상했다. 그는 수염을 슬슬 쓰다듬으며 기묘한 꺼림칙함을 느끼고 있었다.
“왜 전사자 비율이 그리 높지?”
“예……?”
“포위된 상황에서 수성 측이 항복했다면 전사자 비율이 그리 높을 리가 없지 않나?”
이건 임관 직후의 기초 군사학교에서 배우는 단순한 산수였다. 수적 열세에서 포위된 적병은 일반적으로, 제대로 된 교전이 발생하기 전에 항복하므로 전사자의 비율이 그리 높지 않아야 한다.
설령 성을 끼고 싸우는 입장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갤러리가 넘어가고 성문이 열린 시점에서 수성 측은 전투를 지속할 의욕을 상실하기 마련이다.
병사들이 인형도 아니고, 감정을 지닌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이 말이 되나? 물론, 시골 마을에서 괴수나 야수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싸울 때는 그럴 수도 있다. 항복이 곧 죽음을 의미하므로.
그러나 인간과 인간의 싸움. 거기에 단순히 영주를 바꾸는 정도에 한하는 영지전에서는 그렇지 않다. 영지전에 동원된 병사들은 전투 의욕이 대단히 떨어져 전사자보다 탈영병의 비율이 더 높아야 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놈들이 이렇게 목을 매고 이 땅을 지켰을까?”
“영주성을 수색하라 명하겠습니다!”
“혹 성내에 매복이나 함정이 있는 등의 정황이 포착되었나?”
“아뇨……! 사령관님. 성내엔 쥐새끼 한 마리 없었습니다!”
“이런 제기랄.”
귄터는 인상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성하대로를 넘어 시가지까지, 그의 귓가에 들리는 소음이라곤 아군 병사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발걸음 소리뿐이었다.
전후에 함락된 도시에서 들려야 할 소리가 아니었다. 이를테면 아낙의 비명 소리나, 아이의 울음소리. 이런 종류의 절망 가득한 소음이 들려야만 했다.
그제야 그는 이 기묘한 침묵, 그리고 이 꺼림칙한 기분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결사대였군.”
“……예?”
“시간벌이였어. 애초에 저자들은 살 생각 자체가 없었겠군! 포로들은 어디에 있나!”
“지금 갤러리 위에서 심문 중에…… 피하십시오!!”
부관이 버럭 외칠 때, 귄터는 이미 칼자루에 손을 얹고 성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상대로였다. 저들은 살 생각이 없는 듯했다. 부관에게 보고를 듣는 귄터의 모습을 본 포로들은, 일제히 성벽 아래로 몸을 던지며 그에게 뛰어들었다.
무장도 변변치 않고 숙련도도 범상한, 말 그대로 징집 민병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선 의기가, 그의 표현대로라면 ‘군인 정신’이 남아 있었다.
-스캉!
귄터의 칼날이 민병의 칼을 치고 목을 잘라냈다. 그에게까지 닿은 자는 셋 정도였다. 남은 포로들은 순식간에 붙잡혀 그의 눈앞에 무릎 꿇려졌다.
“놀랍군. 대단히 명예로운 행동이었어.”
귄터는 살아남은 포로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제압되는 과정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포로들은 저마다 얕은 신음을 내뱉으며 천천히 죽어 가고 있었다.
“퉷!”
포로 중 하나가 돌연 귄터의 뺨에 침을 뱉었다. 귄터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손을 들었다. 대답을 들을 필요도, 심문할 이유도 없었다.
“모두 죽여라.”
그는 뒤를 돌아 걸어 나가며 생각에 잠겼다. 그의 곁에 부관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령관님. 괜찮으십니까?”
“저들은 민병들이었다.”
“……예?”
“전쟁 이전까진 밭이나 갈던 녀석들이었다는 말이야. 군사 훈련은커녕 칼 한 자루 휘두르는 법이나 간신히 배웠겠지.”
이 도시엔 민간인이 없었다. 아니, 이 아랫마을들까지 모두 포함하여도 영지 전체에서 그들은 단 한 사람의 민간인도 마주하지 못했다.
그 의미는 뻔했다. 이들은 미끼였다. 적들의 진군을 한나절만이라도 묶어 둘 미끼. 반드시 전멸하고 말, 단어 그대로의 미끼들에 불과했다. 고작 한나절을 위해 목숨을 포기한 미끼들.
제 부모를, 제 자식을, 제 가족과 이웃의 한나절을 위해 스스로를 불사른 사내들이었다. 저들에겐 심문도, 대질도 의미가 없었다. 죽기 위해 싸우는 자들을 구슬리기 위해 어떤 조건을 내밀어야 한단 말인가.
귄터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그는 페이른 고등 군사 교육 과정을 이수한 야전사령관이었다. 당연히 전술의 목적과 기본에 대해 박식하다는 의미였다.
‘대체 무엇을 바라는 것인가.’
모든 전술에는 지향점이 있다. 생존, 돌파, 파괴, 섬멸, 포위. 그 무엇이 되었든 최선의 ‘희망’이란 것이 있다. 그렇다면 이들에겐 무엇이 있을까. 어떤 희망이 있기에 자신들의 목숨을 초개같이 던지며 한나절을 버텼단 말인가.
“사령관님, 정찰대가 도착했습니다.”
“피난민들을 발견했다 하던가?”
“피난 행렬이 지나간 것으로 보이는 자취를 찾았다 합니다. 목적지는…….”
“뻔하겠지.”
알트베르트. 강철의 도시이자 난공불락의 요새. 이 나라의 수도이며 거인과 악마, 시체 군단의 침공까지 막아낸 유서 깊은 성벽일 것이다.
하지만…….
“정녕 그곳에 희망이 있다 여겼느냐?”
데인의 본대가 페이른으로 향한 이 시점에서, 텅 빈 데인 국내에서 어떤 희망을 위해 그 도시로 모여든 것일까. 귄터는 씁쓸하게 웃으며 지휘부로 향했다.
* * *
페르난데스는 말 위에서 익숙한 자세로 지도를 펴 들고 있었다. 디모니카의 균형 감각이 있다면 별달리 놀라울 것까진 없는 기예였다. 그는 흔들리는 말의 등허리 위에서 지도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프레이야, E-31를 퇴각시키시오.”
-퐁!
그의 목깃에 매달린 작은 나무 브로치 위로 조그마한 꽃망울이 팡 하고 터졌다. 알겠다는 의미였다. 키르하스는 그 광경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저는 이제 은공이 뭘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배 위에서 하던 지휘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여긴 배 위가 아니잖아요! 프레이야 님은 아직 거기에 남아 계시고요. 프레이야 님이 직접 지도를 만들어 주지도 않았는데, 이젠 그냥 종이 지도만 보고 지휘를 하시는 건가요?”
“지금까지 본 걸로도 충분해.”
페르난데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적들의 상륙 위치와 숫자, 그리고 병사의 편제와 주변 지리까지 파악했다면 적들의 진군 방향과 속도를 계산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그렇다면 동시에, 지도 전체에 각기 다른 방향에서 그려지는 적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그 진군 경로에 있는 병사들을 다른 방향으로 빼내는 것까지도. 그렇게 특기할 만한 기술이 필요하진 않았다.
“그게 말이 되나요……?! 적어도 일곱 방향에서 각각 진군하는 적들의 시간을 계산하면서 스물이 넘는 약탈조를 동시에 움직인다고요?”
“내가 달리 마법사겠느냐?”
“저는 평생 마법은 안 배울래요.”
“그래. 배우지 말거라. 아주 신물 나는 학문이란다.”
페르난데스는 픽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들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굽이진 산길을 넘고 있었다.
적의 진군 경로를 예측하는 것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이후에 아군의 이동을 일일이 지시하는 것은 다소 복잡하긴 하지만, 여전히 가능한 수준의 일이었다.
그러나 전장은 언제나 예측 불가능한 변수를 만들기 마련이었다. 테이블 위에선 그런 변수들을 통제하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페르난데스가 직접 전장 위로 뛰어들어야 했던 이유 중 하나다.
“처음 비센테 왕이 왕위에 오를 때 당시, 페이른이 데인 왕국을 침공하려 했던 것을 알고 있느냐?”
“아, 예…… 그때 작전 목표였죠? 페이른과 데인의 대립을 막아 내는 것이요.”
“그렇지. 비센테가 왕위에 오르고 난 뒤에 페이른이 사절을 보냈었어. 환란으로 약체화된 데인을 견제할 겸 해서. 그때 원탁 의회에서 무어라 했는지 알고 있느냐?”
“아뇨…… 그때 제가 그 자리에 없었어요.”
페르난데스는 굽이진 언덕을 넘으며 지평선 아래를 바라보았다. 저 멀리 야영지들이 몰려 있는 것이 보였다.
“페이른이 데인의 강역을 밟으면, 그때 동부 최강의 기사단이 누군지 알게 될 것이라 했었지.”
로얄 그리핀 나이츠와 원탁 기사단. 그들 중 누가 더 빼어난지 가릴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겠소? 당시 바이에미어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페르난데스는 작게 미소 지었다.
산 아래에 펼쳐진 작은 규모의 야영지 앞에는 커다란 군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그리핀이 그려진 군기였다.
페이른 로얄 그리핀 나이츠. 동부 최강의 무력 집단을 논할 때 반드시 손에 꼽히는 강자들. 이 전쟁의 몇 되지 않는 변수다.
“저희 둘로 저길 치겠다는 의미……세요?”
“그럴 리가.”
페르난데스는 웃으며 지도를 내려 보았다. 전술 단위를 넘어 전략의 영역에 들어간다면, 마법과 전략의 공통점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마법전의 가장 중요한 요인은 상대의 마법을 먼저 파악하고, 해당 마법의 카운터 스펠을 준비하거나 마력 쐐기를 박아 넣어 무력화시키는 과정이다.
전략의 중점 또한 마찬가지였다. 상대의 전략을 파악하고, 전략의 약점을 물어뜯거나, 적들의 주둔지 사이에 먼저 기습을 가해 적병을 무력화시키는 것.
적이 가진 최대 규모의 병력을 무시하고, 파편화된 최소한의 병력을 하나씩 집어삼키며 적들을 천천히 깎아 나가는 과정. 그것이 페르난데스가 바라보는 가장 이상적인 전술이었다.
마력 쐐기를 박아 넣듯이, 비산된 병력들을 하나하나 흩어 놓고—
적의 핵심 마력 중추를 우선 끊어 놓으며 적의 마력 흐름을 왜곡시키는 것.
그것이 카운터 스펠의 기본이다.
“키르하스. 뿔나팔을 불어라.”
“예, 은공.”
-부우우우우!!
언덕 아래 펼쳐진 야영지와 그 너머의 깊은 숲, 저 멀리 떨어진 산……. 그 인근의 협곡과 계곡들까지.
-부우우우우!!
뿔나팔 소리가 멀리서 화답하듯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페르난데스는 손을 흔들어 키르하스를 저지하고 천천히 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야영지에서 기사들이 무장을 갖춘 채 쏟아져 나와 주위를 경계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여기에 북부 최강과 원탁 기사가 있으니, 어디 동부 최강이 어떤지 볼까.”
이 전역에 흩어진 북부의 병력 총 육천 중 사천오백. 그 하나하나가 가히 씨족의 최정예라 불릴 만한 전사들로 이루어진 무력 집단.
그들이 수풀과, 협곡과, 깊은 숲과 산하에서 한 사람, 한 사람 나타나 점점이 모여들며 방진을 이루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대체 언제……? 언제 저자들을 다 여기에 모으셨나요? 분명 지휘부를 떠날 때까지만 해도 전역에 흩어져 있었을 텐데……!”
“내 말하지 않았느냐. 소용돌이라고.”
소용돌이는 흘러가는 모양에 따라 움직이다 보면, 언젠가 반드시 한 종점에 수렴되기 마련이지. 페르난데스는 점차 몸집을 불려 나가는 북부의 전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마도 이 나라에 남은 유일한 원탁 기사로서, 손님 접대는 해 줄 수 있어 다행이구나.”
야영지의 기사들이 왁자지껄 소리치며 무기를 뽑아 들고 기마에 올라서는 모습이 보였다. 각자의 진영에서 요란하게 뿔나팔 소리와 경고성이 오고 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한자리에 모여든 북부의 전사들이 동시에 입을 열어 소리쳤다. 단 하나의 외침을, 그들의 선조들이 입에 담았던 유일한, 그리고 최후의 외침을.
[발-할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