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367화 (368/388)

367. 명예와 불명예 (1)

산하가 들끓고 있다. 데인 왕국 특유의 울창한 삼림과 그 산자락 아래에서부터 천천히. 고작 수천가량의 장정들이 내뱉는 외침이라 여길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게.

[발-할라아—!!]

북부어를 모르는 이들마저도 저 외침이 품은 함의를 알 수 있었다. 격렬한 적의가 끓어넘치고 있었다. 페이른의 기사들에게는 처음 보는 복식과 무장, 그리고 처음 듣는 언어였으나. 단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저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페이른의 기사들은 기마에 올라 무장을 점검하며, 무거운 바이저 아래로 보이는 적들의 진군을 바라보았다.

“적들의 수는?!”

“끊임, 끊임없습니다! 숲에서…… 산에서……! 적들이 몰려나옵니다!”

“제기랄, 정찰조는 대체 무얼 했단 말이냐!”

“부, 분명 이 근방에 이런 규모의 야영지는…….”

“허면, 놈들이 하늘에서 떨어졌느냐, 땅에서 솟아났느냐!”

지휘부는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대개 소규모 야영지에서 지휘부의 혼란은 빠르게 병사들 사이로 퍼져 나간다. 제아무리 규율 잘 잡힌 기사대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포위되어 있었다. 간이 목책에 불과한 야영지의 외곽에 서서, 기사들은 다가오는 적들을 바라보았다. 적들은 야영지를 중심으로 화살이 간신히 닿을 정도의 거리에 멈춰 그들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네놈들은 누구냐!”

루트비히가 앞으로 나서 우렁차게 외쳤다. 혼란에 빠졌다 한들 이들은 로얄 그리핀나이츠였다. 고작 포위된 정도로, 고작 수적 열세에 빠진 정도로 사기가 꺾이지 않는다.

루트비히 또한 마찬가지였다. 개인의 신념과 별개로, 전투에 돌입했을 때 그의 무용과 의기는 결코 이 정도 환란에 무너지지 않는다. 그는 크게 앞서 걸으며 외쳤다.

“네놈들의 주인을 앞으로 부르라! 명예를 안다면 앞으로 나서라, 나를 대적하라!”

그들을 노려보던 북부인들 사이에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곧 북부인들이 천천히 갈라지며 한 사내가 말을 몰며 나타났다. 루트비히는 투구의 바이저 아래로 그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나지막이 탄식했다.

“원탁 기사 알베르트……!”

“오랜만이군, 루트비히 폰 볼프스탈 경.”

“그렇군. 그대가 이 자리에 남아 있었어.”

루트비히가 침을 삼키며 신음했다. 어째서 저자는 제 왕을 따라 원정에 나서지 않은 것인가. 설마 자신들의 작전이 탄로 났고, 지금 이 데인 왕국 전역에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아니, 그렇다면 저들의 병력 구성이 이해되지 않는다. 비센테 왕이 함정을 판 것이라면 저 야만인들이 아니라, 데인의 정예병과 원탁 기사들이 그들을 막았어야 했다.

그렇다면…… 지금 이 병력은 저 사내가 개인적으로 동원한 용병들인 것일까? 자국의 침탈을 예상하고 왕의 편력 원정과 별개로 움직인 것인가?

루트비히는 그 순간 주위를 둘러보며 깨달았다.

“데인에 머저리들만 있던 것은 아니었나……?”

로얄 그리핀나이츠는 페이른의 다른 병력들과 마찬가지로 개별적인 상륙을 실시했다. 이들의 임무는 알트베르트를 향한 진군과, 그 경로에 있을 적군의 섬멸이었다.

다른 군단의 사령관들은 침략과 정복을 위해 움직였으나, 그리핀나이츠는 섬멸만을 위해 이동하고 있었다. 즉, 그들은 이 전쟁에서 거의 유일하게 적의 영토와 백성들을 침탈하지 않는 유일한 독립 부대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하필, 원탁 기사가 이 자리에 있다. 자신의 백성과 영토를 지키는 대신, 순수한 전투 병력으로 이루어진 정예군을 요격하기 위해서라면…….

“함정이군……!”

“놀랍군. 루트비히. 대체 그 머리로 왜 지기스문트를 섬기지?”

페르난데스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페이른 군에게 알려진 정보는 얼마 되지 않았다. 비센테 왕과 원탁 기사들, 그리고 유의미한 모든 병력이 페이른을 향해 진군했다는 것과, 지금 이 땅엔 방어 병력이 없다는 것.

루트비히는 고작 그 정도의 정보만을 가지고, 눈앞에 페르난데스가 나타난 것만으로 함정의 존재를 유추해 냈다. 페르난데스는 말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과연, 영웅답군.’

저자는 전생 시절 수많은 영웅들 중 하나였다. 그 시절, 비센테 2세가 이끌던 데인 왕가와 더불어 타락하지 않은 페이른의 군단을 지휘하던 총사령관. 루트비히 폰 볼프스탈. 늑대의 기사.

페르난데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칼자루를 쥐었다. 삶이 어떻게 흘러간 것인지, 아니 어쩌면 세계가 그에게 드리운 업인 것인지. 전생에 적대했던 영웅들이 이번 삶에서도 그를 적대하고 있었다.

“알트베르트에 함정을 파 두었나……? 천천히 진군하고 있을 다른 사령관들은 내버려 두고, 알트베르트로 곧장 진군하는 우리에게 바로 찾아온 것은 그 외엔 설명할 길이 없군.”

“정답이다. 시간을 벌어야 하는 입장에서, 유일한 변수를 통제할 필요가 있겠더군.”

“휴전 협상은…… 의미 없겠지.”

“단장님! 그게 무슨……! 저희는 싸울 수 있습니다!”

“닥쳐라, 어리석은 놈!”

루트비히는 자신의 곁에서 불만을 토하는 기사에게 일갈했다. 그의 눈이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저자가 이 자리에 제 모습을 드러내고, 또 나의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하는 이유가 무엇인 것 같으냐! 우릴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는 탓 아니겠느냐!”

“그건 오만입니다! 그 누구도 감히 페이른의 로얄 그리핀나이츠를 상대로 필승을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저자의 이름을 알고 있느냐?”

“……처음 보는 자입니다. 원탁 기사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원탁 기사 알베르트. 너는 샤일드의 성자이며 데인 왕의 재림이라 불린 기사의 이름도 몰랐단 말이냐?”

“아…… 저자가……?”

루트비히는 망연히 중얼거리는 기사를 무시하고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페르난데스가 다가오는 것을 보며 그는 느리게 칼을 뽑아 쥐었다.

“결투를 신청하오, 알베르트 경.”

“그것이 네 기사들을 구원해 줄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내 명예를 구원해 줄 수는 있겠지.”

“그렇게 명예로운 자가 지기스문트의 학살을 방조하고 타국을 침략해 약탈을 자행했느냐? 그것이 네 기사도였더냐?”

페르난데스의 말에 루트비히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투구 쥐고 바닥에 집어 던졌다. 그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페르난데스를 똑바로 노려보며 외쳤다.

“내게 다른 선택이 있었다 말하는 것이오? 페이른의 모든 왕혈이 이미 죽고 없어진 이후에, 전 국토가 마력 오염으로 허덕이는 그 시점에서! 내게 왕실을 적대하고 왕국을 영원히 동토 아래에 파묻어 다가오는 겨울에 백성들과 함께 고사했어야 한다 말하는 것이오!”

“아무렴 그랬어야지! 네가 명예를 입에 담았다면 그랬어야지! 그렇지 않았다면, 네가 지기스문트의 명령을 따르기로 선택했다면 너는 감히 명예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되었다. 네겐 그럴 자격이 없다.”

페르난데스는 말을 몰아 그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을 중심으로 작은 공터가 생겼다. 북부인들도, 그리고 로얄 나이츠의 기사들도 그들 사이로 섣불리 다가서지 못했다..

두 기사의 엄중한 기세가 격렬하게 맞부딪치고 있었다. 둘은 수천 명의 병사들이 바라보는 가운데에서 서로를 향해 검을 뽑아 올렸다.

“알베르트……!! 내게 감히 명예에 대해 가르치려 드느냐? 내가 지치고 병들어 쓰러진 백성들 사이에서 곤죽을 구걸하며 폐허 속에서 눈을 감기를 바랐느냐? 나는 기사이며, 칼날 앞에 죽을 것이다!”

신념을 저버린 기사의 낡은 망집이라 해도 좋았다. 그는 빈자들 사이에서 추위 속에 쓰러져 죽고 싶지 않았다. 지기스문트의 유혹과는 별개로, 그는 전장에서 칼을 거머쥐고 승리를 향해 싸우다 죽고 싶었다.

지기스문트가 백성들을 학살해? 분명 저지해야 옳은 일이었으나 저지에 실패한 이상 다음이 없었다. 페이른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으며, 유일한 왕혈인 지기스문트는 왕가의 귀족들을 모두 휘어잡은 뒤였다.

그 홀로 반역을 저지른다 한들 승기가 적다. 설령 승리한다 하더라도 그곳엔 비탄에 빠진 국토에서 스러지는 미래뿐이었다. 그러느니, 그러느니 차라리.

차라리 기사로서 죽겠다. 그것이 그가 품은 유일한 명예였다. 군주의 명령에 따라 전장에 나서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 그에게 죽음은 속죄 따위가 아니었다. 도피처였을 뿐.

페르난데스는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그를 노려보다가 낮게 말했다.

“여기에 있는 모두가 명예에 대해 논할 수는 없겠지. 적어도 내겐 너를 비난할 자격이 없으니.”

백성을 구원하고 그들에게 희망이 되어 주는 것. 약자들의 처지를 연민하고 불의를 향해 달려드는 것. 그 모든 것들은 적어도, 페르난데스에게 허락된 일은 아니었다. 그는 그보다 더 지독하고, 악의적인 승리만을 위해 움직였다.

따라서, 루트비히의 아집에 대해 정의를 논할 수는 없다. 그는 스스로를 변론할 생각 따윈 없었다.

그는 칼을 뽑아 루트비히를 향해 달려들며 생각했다. 이 전쟁 끝에 탄생해야 하는 영웅은, 민중의 희망은 그의 역할이 아니다.

그건 더 숭고한 이, 그보다 더 적합한 이들을 위한 자리였다.

-퐁!

푸른 꽃이 그의 목덜미에 매달린 목판 위에서 피어올랐다.

‘마지막 변수가 끝났군.’

타인의 희망이자 비탄에 젖은 이 동부를 구원할 단 한 사람의 왕이 결단을 내렸다는 의미였다. 페르난데스가 의도한 수 싸움의 마지막 조건. 프레이야에게 말해 두었던 신호가 지금 그에게 닿았다.

페르난데스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칼을 휘둘렀다. 명예로운 자들의 전쟁이 이제 시작되고 있으며, 불명예를 짊어진 악인들의 전투는 여기에서 끝날 것이다.

이 이후로는, 뻔한 영웅 서사시 하나가 더 만들어지는 일뿐이었다.

* * *

강철의 도시 알트베르트. 거인의 시체 위로 올라선 이 장대한 도시는, 다섯 개의 거산으로 둘러싸인 협로를 지나고, 또 광활한 농토를 가로질러야 도달할 수 있는 언덕 능선 위에 건설되어 있었다.

지금 그 농토 위로 수많은 이들이 모여들어 부락을 만들고 야영지에 불을 피우고 있었다. 직위와 신분을 넘어 이 국토의 모든 이들이.

페이른의 군단이 해안선에 닿기도 전, 북부인들의 약탈이 시작된 그 순간부터 데인의 모든 백성들은 알트베르트의 성벽 아래로 몰려들었다. 이 나라에서 병력다운 병력을 가진 유일한 도시라는 이유도 있었으나, 알트베르트는 백성들 사이에 평화와 안전에 대한 상징으로 자리 잡아 있었던 탓이기도 했다.

알트베르트는 그 자체로 천혜의 요새였으며, 또한 왕실의 상징이었다. 당대 속세의 환란을 모두 끊어내고 민중을 구한 대영웅의 도시. 피난민들은 오직 그 신화만을 믿으며, 작디작은 희망을 품고 이 도시로 모여들었다.

전국 각지에서 들끓으며 민가를 약탈하던 북부인들마저도 그들의 피난 행렬을 습격하지 않았다. 이는 백성들 사이에서 기적과 같은, 어떤 상징으로 보였다. 이 길로 떠나면 안전할 수 있다는 상징으로.

희망이 커져 간다. 가닥 없는, 실체 없는 희망이 백성들 사이에 퍼지고 있다. 온 나라가 불타오른 그 순간에도, 이 찬란한 도시는 그들을 지켜내어 다시금 왕국의 강역을 수복할 수 있으리란 희망이.

-쿠구구구궁!

땅울림이 퍼져 나가며 백성들이 하나둘 하늘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거나, 성호를 긋거나, 또는 엎드려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 위로, 신화 속 용이 내려앉고 있었다.

용은 성벽 갤러리 위에 거대한 발톱을 걸치고 조심스럽게 내려와 자신을 향해 절을 올리는 군중을 내려다보았다.

“아아…… 대모시여.”

백성들이 낮게 조아리는 사이로, 몇몇 원로들과 마구스가 한 소년과 함께 용에게 다가갔다. 용의 푸른 눈이 소년을 향했다. 소년은 본능적으로 떨려오는 몸을 애써 가다듬으며, 용의 앞에 천천히 무릎 꿇었다.

[……과연 닮았구나. 네 이름이 무엇이냐?]

“비센테의 아들 에릭입니다. 위대한 어머니시여.”

용의 음성이 품은 지독한 위압감에 모두가 질겁해 뒤로 물러서는 와중에도, 소년은 무릎 꿇은 자세 그대로 움직임 없이 대답했다. 그 모습에 용의 눈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발톱 사이로 검은 금속성이 밝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용의 발톱 아래로 칼날 하나가 떨어져 내려 소년의 눈앞에 박혔다.

[들어라. 네 백성들을 네 힘으로 지켜 내야 하지 않겠느냐.]

“그 말씀을 제 서원으로 삼겠습니다.”

[아니, 네가 맹세해야 할 가치는 그것이 아니다.]

용은 부드러운 손짓으로 그의 머리칼을 섬세하게 쓰다듬었다.

[스러진 자들을 연민하라. 그것 하나면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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