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368화 (369/388)

368. 명예와 불명예 (2)

국토의 대부분이 평탄한 페이른과는 달리, 데인은 험준한 산악 지대가 국토 전반에 고루 발달해 있었다.

그것이 원탁 기사들이 탄생한 까닭이었다. 농경지와 목초지가 극히 한정되어 있는 탓에 백성들은 울창한 숲과 험준한 산악에 화전을 이루어야 했고, 이는 필연적으로 야생의 저항을 마주하게 되므로.

자연은 결코 인간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늑대나 검치호 따위의 짐승들은 물론이고, 해당 지역에 터전을 잡은 오우거나 트롤 등의 괴수들, 그리고 자연의 신비가 빚어낸 저주받은 존재들까지.

이 나라의 국조, 기사왕 데인은 바로 그 시기에 태어났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연민하여, 평원을 지배하는 거인과 숲속의 괴물과 산을 떠돌아다니는 망령들을 걷어내며 그의 나라를 건국했다.

그리고 그의 삶을 동경하여 칼을 쥐었던 이들, 그들 중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자신의 기사 수행을 완수할 수 있었던 이들을 원탁 기사라 불렀다. 데인 왕의 원탁 의회는 그런 배경으로 만들어졌으며—

“칼을 들어라.”

이 유구한 전통에 따라, 데인 왕가와 그 휘하의 모든 기사들에겐 의무가 있었다. 언제나 불의에 맞서라, 언제나 약자를 위하라, 언제나 스러진 자들을 연민하라.

“왕가의 기수들이여, 칼을 들라!”

이 의무를 원탁의 서원이라 부르며, 서원을 향해 떠나는 여정을 편력이라 부른다. 편력을 수행하는 자를 곧 기사라 부르고, 기사가 되고자 갖는 가장 최초의 마음가짐을 우리는, 기사도라 부른다.

“싸울 수 있는 자들은 칼을 들라! 칼을 든 자들은 짐을 보라! 그리고 그대들의 곁에 선, 그대와 어깨를 마주하고 선 기사들을 보라!”

비센테의 목소리가 평원 위로 울려 퍼졌다. 이 자리에 모인 자들 도합 삼만여 명. 마구스들이 마법을 자아내어 그들의 머리 위로 비센테의 말을 전하고 있었다.

젊은 기사왕의 망토가 스스로 떠올라 흔들리고 있었다. 결코 자연적이지 않은 바람이 분다. 사람이 만들어낸. 사람의 노력과 인생이 담긴 총화, 그 정수가 담긴 마력이 스스로 바람이 되어 불었다.

-키이잉……!!

비센테는 칼을 뽑아 정면을 가리켰다. 기사들의 시선이 그를 따른다. 그 방향엔, 불에 탄 매장터가 있었다. 아직 전소하지 않은 장대와 그 아래에 허물어진 시체들이 보였다. 평원에 긴 흉터를 남기듯이 매립지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차라리 계곡이라 불러도 좋을 그 긴 상흔 안에, 타들어 간 시체와 그 시체에 꼬인 파리, 그리고 썩은 고기를 노리는 쥐와 까마귀들이 몰려 있었다. 구름 같은 날짐승들 사이로 붉은 석양이 지고 있었다.

“약자를 연민하라. 그것은 오만한 자들의 동정이 아닌, 가장 낮은 자세에서의 섬김이로다. 타인의 삶을 위해 헌신하라는 뜻이 아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올곧게 설 수 있을 그 가치, 그 하나의 가치에 목숨을 걸라는 의미였노라. 짐의 핏줄엔 그러한 서원이 흐른다. 경들은 어떤가? 경들에게도 그러한가?”

페이른 편력 원정이 종반으로 달리고 있었다. 기실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드넓은 땅은 상상 이상의 폭정과 학살로 병들고 메말라 있었으며, 모든 도시는 오히려 비센테의 진군을 반겼다.

적진 속을 전투 하나 없이 돌파하며, 비센테는 깨달았다. 이자들은 그들을 우회하여 그들의 고향땅을 침범하고 있노라고. 돌아가기엔 이미 늦었다. 그들이 진군한 그 시간만큼, 적들 또한 그랬을 테니.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저자들은 우리의 백성들이 아니외다!’. 또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이는 아국의 국력을 무의미하게 소모하여 적국을 먹여 살리는 일이오!’. 맞는 말이다! 우리는 일견 의미 없어 보이는 가치와 작은 희망에 목숨을 걸어 우리의 총의를 깎아 나가고 있다! 그러나!”

-콰앙!

비센테는 다시 등을 돌려 바닥을 찍었다. 그가 높게 들어 올린 군기가 바람에 펄럭였다.

“우리의 선조들께서 이 나라를 일으켜 세울 때, 국경이 있어 백성이 생겼더냐? 아니다! 천대받고 굶주리며 죽어가던 백성들. 손에 닿는 모든 이들을 위해 살아간 그분의 삶이 곧 이 나라가 되었다. 경들은 어떤가? 경들은 지금 경들의 영지가 외세의 침탈에 불타오르고 있는 이 순간에, 고향땅을 향해 회군하고자 하는가? 아니면! 지금 눈앞에서 불타 쓰러지고, 굶주려 쓰러지고, 창칼에 허덕이는 저자들을 위해 진군하고자 하는가!”

비센테의 말에 기사들은 가만히 침묵을 지켰다. 기실, 비센테는 원정군의 사기가 바닥을 치고 있는 것을 느꼈다. 저들 하나하나의 총의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제 집안이 불타고 고향에 남은 자신의 가족과 백성이 유린당하는 와중에도 탈영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저들은 자신의 의지를 입증했다 볼 수 있었다.

그러니 왕으로서 그에게 두 가지 선택이 있을 뿐이었다. 회군하느냐, 이대로 진군하느냐.

페이른은 지금 악마들의 준동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지기스문트의 학살과 청야전술로 나라 전체가 타오르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가겠는가. 그리고 후방의 병참 지원 없이 어찌 이 원정을 유지하겠는가.

군량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군사들은 단지 걷고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군비를 소모한다. 이들의 식사, 말들의 유지비, 소모성 병장기들의 충원. 그 막대한 군비를 유용할 방법이 없었다.

페이른은 메말라 있고, 데인은 공격받고 있다. 소왕국들은 이 내전에 불참할 것을 천명했으며 그의 군사들은 점차 소모되고만 있었다. 단 한 차례의 전투도 없었음에도!

비센테는 이 시점에서 결단을 내려야 했다. 사기가 떨어지고 불만이 생기기 시작한 기사들에게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 했다.

기사들 사이로 혼란이 퍼졌다. 기사들은 저마다 웅성거리며 원정의 실패와 군대의 해산에 대해 속삭이기 시작했다. 투구를 늘어트리고 그를 바라보는 저 장대한 사내들의 얼굴 위로 회의감이 짙게 드리우는 광경이 보였다.

이들은 기사이기에 앞서 영주이며, 토호였고, 또한 가장이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참상은 분명 불의의 표상이었으나, 이는 엄밀히 타국의 문제에 불과했다. 그리고 지금, 이 참상을 벌인 침략자들이 그들의 고향땅을 짓밟고 있었다.

이 자리의 모든 이들은, 페이른에서 일어났던 비극이 자신의 혈육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날 수 있음을 상상하며 점차 낯을 무겁게 가라앉혔다.

비센테는 그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주의 깊게 바라보며 말을 골랐다. 어찌 이들을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다만 이 자리까지 함께한 것만으로도, 군영을 이탈해 회군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들은 진정코 명예로운 기사들이라 할 만했다.

그는 진심으로, 자신이 이들의 왕임을, 이들의 군주이며 이들의 충성을 받은 유일한 사내임을 감사했다.

“경들의 생각이 보이는군. 이 비극이 경들의 어버이와 자녀들에게도, 경들의 백성과 그 자손들에게도 벌어질 수 있음을, 또는 이미 벌어졌을 수도 있음을 근심하고 있겠지. 짐 또한 그렇다. 짐의 혈육과 짐의 식솔이 저 국경 너머 알트베르트에서 짐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적들은 알트베르트의 성벽을 향해 지금 이 순간에도 진군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비센테의 눈이 의지를 담아 불타오르고 있었다.

“경들이 돌아간다면, 경들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떠난다면 그 누가 경들을 비난할 것인가? 원정의 실패, 그 불명예를 각오하고 적의 군세를 향해 진격하는 기사는 분명코, 그 어떤 이들보다 명예롭다! 경들의 혈육과 백성뿐만 아니라, 데인의 그 어떤 이들도 감히 경들을 비난하지 못하리라!”

그의 말에 바이에미어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왕이 그들로 하여금 탈영을 권유하는 것인가? 그러나 비센테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짐은 경들에게 오히려 진군하라 명하겠다! 경들의 서원을 수행하라 명하겠다! 경들의 마지막 폭군이 되겠노라 천명하겠다! 경들은 들으라. 경들의 선조는 비단 그 혈육과 백성뿐만이 아니라, 만민을 위해 검을 들었노라! 그러니 나아가라. 이 세상 모든 이들을 구원할 수는 없더라도, 지치고 병든 자들의 손길을 거절하지 않으리라 맹세한 기사들이여. 나아가라! 그대들의 서원을 수행하라!”

기사들 사이로 싸늘한 침묵이 맴돌았다. 지금 그들의 왕이 하는 말은, 저 자신의 가족을 포기하고 왕국의 몰락을 감수하란 의미와 같았다. 어찌 저런 말을 따를 수 있겠는가.

한 기사가 잔뜩 힘이 들어간 눈으로 앞서서 말했다.

“하오면 왕이시여, 이들의 목숨은 그다지도 귀하고, 데인의 산하에서 침탈당하는 백성들의 목숨은 천하오이까?”

대단히 무례한 말투였으나 이 자리의 누구도 그에게 이를 지적하지 못했다. 비센테 또한 그랬다. 그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짐의 백성들만큼 이들의 목숨 또한 귀하다. 이것이 짐의 판단이다.”

“저희는 그 말에 따를 수 없습니다!”

“짐은 그대들의 왕이며, 왕은 명령하는 자이기에 앞서 경들을 지탱하는 자가 되어야 함이다. 그러니 짐의 말을 따르라. 경들의 근심과 경들의 불명예는 오직 짐이 짊어지고 나서겠다.”

그의 말에 기사들 사이로 혼란이 스쳤다. 불명예라 함은 원정의 실패와 회군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명예를 위해 칼을 들고 나선 기사들이 성과 없이 회군해 자신의 영토를 지키려 애쓴다는 이야기는 저잣거리 로망스에서도 팔리지 않을 싸구려였다.

그것이 기사들로 하여금 감히 군영을 탈영하거나 이탈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했다. 기사들에게 있어서, 그 어떤 이유가 되었든 퇴각은 너무나 큰 불명예였다.

“짐이 가겠다. 짐은 데인 왕가에 남은 최후의 폭군으로서 경들의 의무를 갈취하겠다! 가정과 영토를 지킬 의무를, 왕에게 충성하고 전장에서 목숨을 다할 의무를 갈취하겠다! 불명예를 감당해야 할 영주와 아비의 의무를 수탈하겠다! 그러니, 경들에겐 오직 명예만 있으라. 한 사람의 기사로서, 경들은 오직 명예로울지라!”

“하옵시면 왕께선…….”

“짐은 경들의 혈육과 식솔, 경들의 백성들을 위해 떠난다. 경들은 경들의 명예에 떳떳하리라. 그러니 진군하라. 데인의 산하를 근심하지 말고 진군하라! 경들의 근심은 오직 짐 홀로 짊어지겠다. 데인의, 그리고 그대들의 왕으로서. 짐은 데인의 백성들을 위해 퇴각하겠노라.”

좌중에 다시 한번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건 왕에 대한 비난이 아닌, 답할 말조차 찾기 어려운 희생정신에 압도된 탓이다. 퇴각은 불명예였으므로, 오로지 그 홀로 퇴각해 적들을 마주하겠다는 것이다.

가능한가? 왕 홀로 저 수천수만의 병사들을 맞이해 승리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불가능할 것이다. 군대와 군대가 마주하는 전쟁 속에서, 필부의 용맹은 그저 장식품에 불과하므로.

그러나 이 자리엔 영주들이 있다. 원탁 기사들과 그 가신들. 하나하나가 한 도시나 마을의 군주였던 자들이 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지금 비센테가 하고자 하는 말을 깨달았다.

군왕들의 시선이 서로에게 닿았다. 그들은 이내 아무 말 없이 혼란에 빠진 좌중을 훑고는 자신이 해야 할 바를 깨달았다. 그들은 조용히 서로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한 사람 한 사람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비센테!”

“비센테!!”

왕의 이름을 연호하며 좌중을 선동했다. 마치 이것이 위대한 희생이며, 또한 진정코 명예로운 일이라는 듯이. 왕의 저의를 깨달은 자들은 지극히 기계적으로 가신들과 그들의 병사들을 독려하며 왕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왕이여, 당신의 기사였음을 잊지 않겠나이다.’

‘그대들의 군주였던 것이 짐의 영광이었다.’

그런 종류의 시선이 영주와 임금 사이를 스쳤다. 비센테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이윽고 각 도시의 영주들이 병사들을 독려해 하나둘 대열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그들 모두가 각자의 방향으로 떠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비센테는 마침내 웃음을 터트렸다. 호쾌하게 한바탕 웃고 난 후에, 그는 말 안장 위에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까지 남은 기사가 둘이었다. 바이에미어와 팔리아메인, 과거 매장 교단과의 전쟁에서부터 그를 보필했던 두 원탁 기사는 최후의 순간까지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경들은?”

“어쩌겠습니까. 전하가 붕어하시기 전에 먼저 죽는 것이 제 소원이었던 참이었습니다.”

“농이 아니다. 살 가능성 따윈 없다. 짐은 죽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압니다. 알아요.”

바이에미어는 사람 좋게 웃으며 비센테의 등을 두드렸다.

“숭고한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왕국을 살리는 유일한 방책이었다.”

“전하께서 하시리라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교묘한 계략이었습니다. 혹, 그자가 귀띔이라도 해 주었습니까?”

“그자? 아…… 알베르트를 말하는 건가? 아니다.”

비센테는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불의를 보면 참지 않겠다 맹세한 자치고는 대단히 정치적인 계략이었다는 점은 인정해야 했다.

기사들이 비센테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선 몇 가지의 정치외교적인 입지를 먼저 파악해야 했다.

페이른의 본대가 데인 왕국을 휩쓸고 있을 것이다. 각 영지의 병사와 민간인들이 어떻게 이동했는지, 피난은 했을지 알 수는 없어도, 데인 왕국 국내에서 어떤 지원 요청이나 급사도 오지 않은 것을 보아 이미 왕국은 적들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보아도 좋았다.

군대를 반전해 자국을 지키기 위해 돌아간다면 최악 중 최악의 수가 될 것이었다.

그들이 도달할 때쯤엔 이미 데인의 강역에 적들의 군세가 대비하고 있을 것이며, 오랜 원정으로 피폐해진 데인의 원정군은 적들 앞에 부서지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페이른을 점거한 채 유지할 수도 없다. 이미 이 땅은 적들의 손에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벅찰 정도로 피폐해져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데인의 비센테는 그 순간 왕으로서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을 강구했다.

1. 이 자리에 남은 기사들은 곧 데인 왕국 최선의 국력이나 다름없다. 이들을 온존해야 한다.

2. 이미 전황은 데인 왕가 개인의 국력으로 해결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들은 적의 계략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3. 그렇다면 타국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소왕국들은 지금 자국을 지키는 것조차 벅차 감히 타국에 개입할 여력이 없었다.

4. 더불어 그럴 여력이 있다 하더라도, 동부 연합은 지난 제국 원정 이후로 데인 왕국과 수교를 단절하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수. 데인의 기사들을 동부 전역에 풀어 소왕국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일견 스스로 군대를 해산하는 멍청한 짓거리라 볼 수도 있을 이 수단은—

“너무 희박한 소망이 아니겠습니까?”

“그 중심에 누가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겠느냐?”

“저는 전하가 아니라, 왕자 전하를 지키겠나이다.”

“잘 부탁한다.”

비센테는 호쾌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스스로 군대를 해산하여 오히려 타국의 위난을 돕겠다? 그렇게 한다 해서 소왕국들이 그들을 도와 페이른과 적대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동부 연합의 세속 왕가들은 지극히 정치적이고, 이기적인 생물들이다. 그들이 어디 은혜를 은혜로 갚겠는가. 망국의 기사들이 지닌 무력을 탐내 회유하거나 억류하려 하겠지.

그러나 비센테는 제국의 귀빈이다. 제국 원정을 두 차례 지원하여 제국 내의 입지를 다진 인물이었다. 그 탓에 동부 연합에서의 입지를 잃었으나, 그건 도리어 이 동부 안에서 그의 위치를 미묘하게 만들기도 했다.

만일, 그가 전쟁 중에 죽는다면 제국이 이 전쟁에 복수를 천명하며 개입할 명분이 생긴다.

만일, 그가 죽고도 왕가가 끊이지 않고 전쟁이 마무리되지 않아, 자칫 장기전으로 흐른다면. 제국의 군단이 동부를 향해 합법적으로 진군할 수단이 된다.

만일, 데인의 기사들에게 지원을 받고도 데인을 돕지 않았다는 사실을 제국이 알게 되기라도 한다면, 추후 제국의 군단은 이를 빌미로 동부 연합의 존폐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할 것이다.

동부 연합은 제국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모인 집단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제국의 속주로 전락하지 않는 대가로 조공을 바치는 조공국의 위치이기도 했다. 그들은 제국의 영향력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카르벨리에 여제의 치하 아래 빠른 속도로 재건되고 있는 제국과, 전쟁의 장기화와 내분으로 무너지기 시작한 동부 연합. 이 구도가 확립되기라도 한다면 힘의 저울추가 어느 방향으로 기울지는 너무나 명백했다.

이대로 겨울이 지나면 동부의 소왕국들은 당장 식량과 무역의 문제에 직면한다. 제국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며, 제국이 동부를 완전히 집어삼키기 위한 명분은 데인 왕국의 멸망에 있을 것이다.

그러니, 세속 왕가들을 지원하여 명분을 강화하라. 제국이 동부에 개입할 첫 단추로 자신의 목숨을 걸 테니. 비센테가 그 짧은 순간에 짜낸 계략은 군략이라기보단 정략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가신들. 원탁 기사들은 이를 눈치채며 왕의 죽음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떠났다. 이 동부 전역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저들이 살아남는 이상 데인은 멸망하지 않으리라. 저 한 사람 한 사람이 곧 데인이니.”

“전하 또한 그렇지 않습니까?”

“맞다. 그러니 더욱 우습지 않느냐? 내가 곧 데인이라면, 내 죽음이 데인을 살리는 기책이 된다는 의미이니. 이 얼마나 역설적이란 말이냐.”

비센테는 호쾌하게 웃고는 기마의 고삐를 틀어쥐었다. 모든 군단이 해체되어 각자의 길로 흩어진 이 순간, 모두를 살리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 왕이 몰락한 왕국을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어떤 것도 얻지 못하고, 심지어 원정을 나선 군대를 제 손으로 해체하고, 원정 중에 본국의 패망을 불러일으킨 폭군이라는 오명을 온전히 감수해내며.

너무나 명예로운 불명예였다. 두 원탁 기사는 왕의 등을 바라보며 짧게 성호를 그었다. 그들은 곧 왕의 뒤를 따라 말을 몰았다.

* * *

피엘을 통해 이 소식을 전해 들은 페르난데스는 즉시 지휘부를 떠나 작전을 개시했다. 아벨로 하여금 알트베르트를 수호하게 하고, 그 자신은 직접 북부군을 지휘해 적들의 핵심 병력을 분쇄하기 시작했다.

만일 비센테 왕이 전군을 회군해 다시금 데인으로 돌아왔다면, 데인의 멸망을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회군 소식을 들은 페이른 군은 즉시 매복과 회전을 준비했을 테니. 먼 원정을 떠난 뒤에 돌아오는 군대로는, 페이른의 본대를 상대할 수 없다.

그러나 비센테의 군단이 해산하고, 패망한 왕이 홀로 복귀한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지기스문트는 여유롭게 데인의 산하를 점령하기 시작할 것이다.

데인의 피난민들은 알트베르트로 몰려들어 농성을 준비할 것이고, 겨울철 사냥을 벌이는 정도의 여흥으로 지기스문트는 느긋하게 전쟁을 즐기게 된다.

그러니, 페르난데스가 할 일은 명백했다. 지기스문트 휘하의 가장 발 빠른 군단, 그리고 가장 강력한 군단을 미리 끊어 놓고, 최대한 시간을 버는 일뿐.

제국과, 또는 소왕국들의 본격적인 개입이 시작될 때까지.

한 영웅이 비참하게 허물어지고, 그 위로 새로운 영웅이 탄생할 때까지. 무릇 영웅을 만들어내는 것은 시련과 악적이었으며, 그 두 가지에 대해서 그는 이 물질 세계의 어떤 이들보다 더 노련했으므로.

페르난데스는 위대한 기사왕의 죽음을 짧게 애도하며, 말을 몰아 전장으로 향했다. 그 이튿날, 페이른 로얄 그리핀 나이츠가 지도상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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