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369화 (370/388)

369. 명예와 불명예 (3)

알트베르트는 산맥과 산맥을 둘러친 분지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었다. 물자의 통행도, 지리적 이점도 없는 이 기묘한 도시를 수도로 삼은 까닭은 머나먼 과거, 건국시조 데인이 직접 이 산악의 거인을 베어내고 그 위에 마을을 쌓아 올린 탓이다.

따라서, 알트베르트는 계획적인 대도시라거나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훌륭한 입지를 갖추지 못했다. 다만 이 도시의 장점이라 한다면 그것은, 협로를 뚫고 진입할 수밖에 없는 지리적 특성상 수비가 수월하다는 점과—

“빨리 움직여! 너희 뒤에 데인의 온 백성들이 있다!”

상징이라는 점. 이 도시가 곧 위대한 왕조의 상징이며, 백성들을 아끼고 보듬은 군왕의 거처이며, 가장 치열했던 순간에도 결코 무너진 적 없는 불침지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백성들은, 이 절망적인 순간에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어떤 종류의 신앙적 교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쿠구구구궁!!

용이 날갯짓을 할 때마다 간이 야영지의 천막들이 거칠게 나부낀다.

저 압도적인 존재감이, 저 위대한 고대의 존재가 그들을 내려보고 있었다. 오랜 신화 속, 찬란했던 기사왕의 어미가 그들을 두 날개 아래로 감싸 안고 있었다.

또한, 목책을 쌓아 올리는 현장엔 백금발을 흩날리는 소년이 있다. 자신의 신장보다 더 큰 대검을 꿋꿋하게 들어 올리고, 지치고 피로한 백성과 병사들을 독려하며 사흘 밤낮을 뛰어다니는 소년이다.

“전하! 이곳은 저희가 맡을 테니, 부디 잠시간이라도 눈을 붙이시지요!”

“내 어찌 그러겠나? 아버지께서 부재하실 때에 내게 하명하신 일이 있거늘.”

왕자는 쾌활하게 웃으며 기사의 말을 흘렸다. 그는 기사의 손에서 수통을 낚아채 거칠게 입구를 뜯어내고 벌컥거리며 마셨다. 체통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언사였으나, 그것이 의도된 것임을 모르는 자들이 없었다.

어린 소년에겐 과도한 짐이었다. 일국의 왕자라 할지라도 이제 갓 열댓 살 먹은 꼬마에 불과했다. 백성들의 존경조차도 부담으로 여겨질 것이고, 망국 직전의 위기엔 절망하기도 할 것이다.

건장한 성인 남성조차도 사흘간 잠들지 않고 건량과 마른 빵 따위로 끼니를 해결하며 성벽과 성벽을 오고 가면 탈진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소년이기 전에 왕자였으며, 왕이 없는 지금 이 순간 이들이 바라볼 가장 상징적인 희망이 바로 자신임을 알고 있는 탓이다. 에릭은 희미하게 떨리는 눈꼬리를 꾹 누르고는 오히려 크게 웃었다.

“경들과 병사들의 사기가 이리 충천하고, 대모께서 우리를 굽어살피시니 내 첫 번째 친전이 역사적인 승전임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그렇습니다. 전하.”

기사는 투구의 바이저를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왕자의 언행에서 왕족의 기품 이상의 천품을 느꼈다. 그는 조용히 눈물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서기관과 마구스들마저도 같은 심정이었다.

이 소년이 결코 이런 전쟁에서 죽지 않게 하겠다. 한 사람이 국가의 희망이라 한다면 우스운 일이지만, 지금 이 순간 모든 이들은 왕자의 생사 여부에 국운이 걸렸다고 여겼다. 이러한 왕자가 살아 있다면, 설령 왕국이 무너지더라도 재건될 수 있으리라.

-콰르르릉!

벼락이 치는 소리와 함께 정오의 태양을 덮고 있던 그림자가 사라졌다. 어느새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용이 왕자의 곁에 내려앉은 것이다.

“장하구나.”

“대모님.”

“정말이지…… 그 아이를 꼭 빼닮았어. 내 일찍이 너에 대해 들은 바 있었으나, 참으로 소문이 네 실체를 따라잡지 못했구나.”

아벨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소년의 머리칼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녀는 허리를 굽혀 왕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너를 살리기 위해 모든 이들이 이토록 노력하고 있다. 이 순간을 결코 잊지 말고, 언제나 오늘처럼 살거라.”

“그 반대가 아니겠습니까. 이들을 살리기 위해 제가 목숨을 걸 수도 있습니다.”

“다인이 너를 보았다면 좋았을 것을. 군왕의 천품을 타고났구나, 에릭.”

아벨이 부드럽게 웃으며 에릭의 머리칼을 헝클였다. 그녀는 왕자의 손에서 대검을 빼앗아 들며 말했다.

“하지만 네 말대로 네가 전장에서 이들을 구하기 위해선, 우선 너 스스로의 건강을 챙겨야 할 것이다. 들어가 쉬고 있거라. 네 자리는 내가 맡아두고 있겠다.”

“대모님. 저는 멀쩡합니다!”

“내가 정녕 너를 기절이라도 시켜야 말을 듣겠느냐?”

아벨이 엄하게 말하자 에릭은 툴툴거리며 물러섰다. 그런 모습은 꼭 제 나이의 소년과 같아서, 아벨은 저도 모르게 흠뻑 웃었다.

‘페르난데스의 아들을 갖는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최근 프레이야와 그녀는 용과 인간의 혼혈이 가능할지 다방면의 실험을 거치고 있었다. 아시르나 바니르 쪽의 정보에선 그런 사례를 찾을 수 없었고, 혼혈 혈족이 많은 요툰 계열에선 몇몇 사례들이 있기는 했었다.

요툰 또한 엄밀히 따지면 이미르의 후예들이고, 이미르의 핏줄에서 드워프가 갈라져 나왔으니. 인간과 요툰은 머나먼 친척 정도에 해당하지 않을까? 아벨과 프레이야는 조심스럽게 그런 가설을 세웠다.

이제 남은 문제는 본산 세계와 지금의 세계 사이에 얽힌 영혼의 총량과 동일성에 관련된 부분인데, 이건 아벨이 아무리 머리를 잡고 고민해 봐야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였다.

‘될 때까지 해 보는 수밖에 없겠어.’

아벨은 페르난데스가 있을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자손을 낳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면, 생길 때까지 시도하면 될 일이 아닐까.

‘일단, 그러려면 먼저 이 난리를 마무리 지어야겠지만.’

자식을 낳든 아니든, 시도를 하든 말든 평화로운 시대가 찾아온 뒤에야 가능할 일이었다. 아벨은 칼자루를 들어 어깨에 걸치고는 건설이 막 끝난 성벽 토대 위로 올라섰다.

“많기도 하구나.”

산맥을 통하지 않고 알트베르트로 향하는 유일한 관문, 킹스게이트의 앞엔 페이른의 주둔지가 펼쳐져 있었다. 지평선을 마주하고 저 멀리까지.

* * *

“저들이 방비를 마칠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나이다. 전하! 부디 진군을 명하여 주시옵소서!”

“용을 어찌 잡을 텐가?”

“용이 제아무리 강맹하다 한들 그 한 개체가 전황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겠습니까? 저 용은 백성들을 지키고자 하니, 관문을 넘기만 한다면 그 순간부터 백성들의 목숨줄을 쥐고 협상을 하면 될 일이 아니겠습니까?”

“용이 저 협로를 지키고자 한다면 도리가 있겠나?”

지기스문트는 입술을 씹으며 초조하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알트베르트로 향하는 협로 위로, 낡은 성벽을 증축하고 있는 병사들이 보였다.

저들이 성벽을 모두 건설하고 난 뒤에라면 공성이 배는 더 어려워질 것이 자명했다. 그렇다고 산맥을 돌아 타고 넘어간다면? 산자락을 내려가려는 순간 지친 병사들은 적들의 칼날 앞에 무력하게 쓸려 나갈 터였다.

산맥을 돌아 진격하는 것은 기습이 될 수 없다. 아군에게도 그렇지만, 적들에게도 마법 전력이 있었고, 심지어 저쪽엔 용마저 있었다. 그들의 눈을 속일 수 없을뿐더러 기습 도중에 들키기라도 한다면 병력을 차례차례 적들의 아가리에 쑤셔 넣어주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과연, 데인의 알트베르트. 강철의 도시. 난공불락의 요새라. 지기스문트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용이 나타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물론 건국시조의 수호룡이 데인을 지키고 있다는 소문은 들은 바 있었다.

정확하게는, 인퍼머르 사태 때부터 비센테의 양위까지 이어지는 과정에서 보고받은 적 있었다. 용이 비센테를 도왔다고.

그러나 제법 오랜 시간 잠적했던 탓에, 그리고 침략 과정에서 단 한 차례도 나타나지 않았던 탓에 무시하던 정보였다.

‘대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만…….’

지기스문트는 와인을 홀짝이며 씁쓸한 입을 헹궜다. 그가 괜히 위험을 감수하고 루트비히를 영입하려 애쓴 것이 아니었다. 태생이 완고한 무장인 루트비히를 타락시키기 위해선 그 또한 많은 부담을 가져야 했었다.

그러나 루트비히와, 그가 이끄는 그리핀 나이츠의 힘이 필요했다. 만에 하나라도 정말 적들에게 용이 있다면, 일단 공중에서 용의 발을 묶어 둘 병력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원탁 기사에 버금간다는 페이른 최정예 기사단은, 놀랍게도 며칠째 아무런 소식도 전해오지 않는 중이었다. 그들의 진군 속도를 고려할 때, 그들은 당연히 가장 먼저 이 자리에 도착해 왕을 기다리고 있었어야 했다.

지기스문트의 손이 초조하게 탁상을 두드렸다. 마지막 수단이라. 마지막 수단…….

“제장들은 모두 모였는가?”

“세 군단이 아직 당도하지 않았나이다. 그러나 아군의 병력이 이만을 웃돌며, 저들 대부분은 고작 민병과 피난민에 불과하므로 패배할 까닭이 없습니다.”

지기스문트의 입술이 비틀렸다. 고르고 고른 삼만여 명 중에 만 명이나 빈다. 세 군단이 오지 않았다 했으니 진군 도중에 소모된 병력이 사천 정도는 되는가. 뼈아픈 손실이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우스운 일이다. 도착 예정인 병력이 육천, 지금 주둔 중인 군대는 이만. 진군 도중에 손실이 사천이라? 소모율이 많기는 하지만 적들의 총병력은 잘 쳐줘도 그 사천조차 되지 못한다.

데인의 비센테가 국력을 총동원한 순간부터, 이 나라엔 칼자루 한 번 쥐어 본 적 있을 민병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저기엔 노인과 아낙과 꼬마들이 낡은 병장기를 어설프게 쥐고 두려움에 떨며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터.

“용만 어떻게 처리할 수 있다면 쉬운 전쟁인데.”

언제까지고 오지도 않는 그리핀나이츠를 기다릴 수는 없다. 적들의 방책 건설이 끝날 때까지 신사적으로 기다려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헌팅 스쿨의 늙은이들은 지금 뭣들 하고 있나?”

“와이번을 잡는 전술을 용에게 적용해도 될지 논의 중이라 합니다.”

“그래 뭐 비슷하기야 하겠지. 스무 배 정도 크고 입에서 불도 뿜는다는 것을 빼면 말이야. 멍청한 것들. 됐다. 계속 할 일들 보라 해라.”

지기스문트는 와인을 홀짝이며 손가락을 톡톡 두드렸다. 그분의 힘이 필요했다.

‘카를로마노, 어디서 뭘 하고 있느냐.’

* * *

“그리핀에선 닭고기 맛이 나는군!”

“딱 봐도 닭이랑 비슷하게 생겼잖아.”

“다리가 넷 달린 닭도 닭으로 쳐주는 건가?”

북부인들은 모닥불에 고기를 구우며 쑥덕거리고 있었다. 반나절 전까지 목숨을 걸고 싸웠던 전사들의 모습 같아 보이진 않았다. 그들은 죽음을 빗겨 나갔다는 기쁨이나, 격전의 트라우마 따윈 없는 것처럼 먹고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

페르난데스는 그늘가에 앉아 그들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 있었다. 그때, 그의 눈앞에 나무 그릇 하나가 나타났다.

“드시면서 생각하세요, 은공!”

“아, 고맙구나.”

키르하스는 고깃국을 건네주며 웃었다. 그녀는 기지개를 쭉 펴고는, 페르난데스의 무릎 위에 앉아서 그르릉거렸다.

“대단한 싸움이었지요?”

“좋은 기사들이었지만, 상성이 좋지 않았다.”

루트비히가 들었다면 어처구니없어 웃음을 터트렸을 말이었지만, 사실이었다. 그리핀들은 밤에 하늘을 쉽게 날지 못하고, 낯선 하늘에서 야간에 대열을 갖추어 활공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기예다.

첫 교전이 일어났을 때, 간신히 그리핀에 탑승할 수 있었던 기사들 중 절반가량은 서로의 날갯짓에 얽혀 추락했으며, 그 남은 절반은 첫 돌격 이후 지상에 발이 묶였다.

북부인들은 천부적인 사냥꾼들이었다. 개척이 더딘 북부엔 이 대륙보다 자연의 괴수들이 더 강하고 그 수가 많았으며, 북부인들은 그런 괴수들을 사냥하며 부락을 책임지던 자들이었다.

북부엔 그리핀이 살지 않았으므로, 북부의 전사들 또한 그리핀을 마주하길 처음이었지만. 그들은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그리핀 기사들을 보며 당당하게 소리쳤다.

‘하늘에서 닭 머리를 한 곰이 떨어진다!’

‘내일 아침엔 닭 스튜를 먹겠군!’

허세 섞인 외침이었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고 말았다. 그리핀나이츠들은 오히려 그리핀에서 내렸을 때 더 싸우기 쉽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고, 그땐 이미 전황이 굳어진 뒤였다.

“진짜 잘 싸우긴 하던데…….”

“뭐, 한 손으로 네 손을 어찌 감당하겠느냐.”

애초에 질 수 없는 싸움이었으니 북부인들을 전면전에 내세운 것이기도 했다.

페르난데스는 고깃국을 들이켜며 대답했다. 병력의 차이, 갑작스러운 기습, 유리한 진형, 피로한 병사들. 그 모든 조건을 확인한 후에 감행된 전투였다.

오히려 전사자 비율이 아쉬울 수준. 페르난데스는 죽은 전사들을 염하는 북부인들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아에렌이 난리 치겠군.’

저들의 수가 줄어들수록 북부의 겨울이 험난해진다. 저들은 하나하나가 부족의 미래나 다름없는 자들이다. 하지만 전투에서 어찌 전사자가 없겠는가.

“이제 기함으로 복귀하실 건가요? 은공께서 직접 지휘하시려면 그러시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요.”

“그게 맞는 일이기야 하다만, 그래서야 도리가 아니지.”

“도리요?”

“한 나라를 무너트리고 영웅을 죽이는 계책을 세운 마당에 그 임종을 지키지 않는 것은 인의가 아니지 않겠느냐?”

비센테는 지금 죽기 위해 돌아오고 있었다. 전술 전달의 불편 따위는 감수해야 할지라도, 그의 죽음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비센테의 죽음은 그의 책임이다. 페르난데스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조금만 더 빨랐다면, 혹은 더 많은 피해를 보더라도 다른 전략을 수립했다면. 비센테를 살릴 방법 따윈 얼마든지 있었다. 다만.

‘다만 이것이 가장 합리적일 뿐.’

최소한의 피해로 최대한의 성과를 얻기 위해선 비센테가 죽어야 한다. 페르난데스가 전략을 짜는 순간, 그는 비센테의 사망확인서에 서명을 넣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그의 최후를 지키는 것은 자신의 의무이리라.

“하지만 은공. 은공께선 이 나라를 지켜낸 것이 아닌가요? 이제 적들을 몰아내고 전쟁을 마무리할 일만 남은 것이…….”

“무슨 소리냐, 키르하스. 우리에게 무슨 병력이 있어 적들을 섬멸한단 말이야?”

“……네?”

“적의 총병력은 잘 편제된 정예병들로 삼만에 이른다. 비록 아벨이 있다곤 하나 알트베르트에 남은 병력은 민병대 수백에 불과하고, 지금 데인에 있는 북부인들도 오천이 조금 넘지. 여섯 배의 차이를 무슨 수로 이기겠느냐?”

사기도, 병력의 질도, 그리고 피로도도 극명하게 차이가 난다. 지기스문트가 악마의 힘을 다루는 이상 병력 하나하나에게 어설픈 축복 하나만 걸어 놨어도 회전으로는 감당이 안 될 것이다.

그 말을 들은 키르하스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어…… 그럼……?”

“데인과 페이른 모두가 이번 전쟁으로 공멸할 것이다.”

페이른의 국토는 이미 재건의 원동력을 상실했고, 데인은 이번 전쟁에서 패망할 것이다. 병력이 남아 있더라도 국가가 무너지면 뒤가 없으니, 두 왕국의 병력은 곧 흩어지게 될 터였다.

지기스문트는 악마의 하수인이니, 지옥 관문을 개방하려 하거나 주위 소왕국들을 충동해 제물을 모으는 등의 행동을 할 것이다. 그 시효는 알트베르트가 될 것이고.

페르난데스가 그렇게 담담히 말하자, 키르하스는 눈을 굴리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럼 대체 왜 이 고생을 하고 있는단 말인가……?

“하지만 은공, 비센테 왕이 원탁 기사들을 해체해서 소왕국들에게…….”

“지금 해체된 기사들이 소왕국의 왕족들을 곧장 설득해서 원정군을 꾸리고 연합 군단을 편성해 돌아올 때까지 알트베르트가 버틸 수 있을 성싶으냐? 당연히, 비센테 또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지. 비센테와 나는 조금 더 먼 미래를 본 것이다.”

“먼 미래요……?”

“무너진 왕국과 흩어진 백성들을 재건하고 불타오른 대지에서 새로운 희망의 상징으로 떠오를 영웅의 미래. 소왕국들을 결집하여 이젠 동부 연합이 아니라, 데인 연합국으로 변모할 기회.”

전쟁이 끝난 이후 제국의 지원을 받으며 충실한 꼭두각시가 되어 이 드넓고 잘게 쪼개진 왕국들을 하나로 통솔할 수족. 정치적 대립과 이념의 상충 따위엔 신경조차 쓰지 않고 강력한 권력으로 분란의 싹을 완전히 뿌리 뽑을 수 있는 단일 왕조 국가의 탄생이 필요했다.

동부를 데인이 온전히 차지하고, 그 데인 연합국은 제국의 속주가 된다. 그리고 제국과 동부 그 모든 방면에 완전한 영향력을 차지하면, 대륙 중앙에서 동부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면적이 그의 손아귀 아래에 들어오게 된다.

오직 그 수만을 위해서, 최소한의 피해로 최대한의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 페르난데스는 데인-페이른 전쟁의 소식을 듣는 순간 착수를 시작했다.

“그럼…… 소왕국들을 약탈하신 이유가……?”

“페이른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한 것도 있었으나, 외세의 침략에 충격을 받아 결집해야 한다는 여론을 형성하기 쉽도록 한 일이기도 했지.”

“제국의 식량 지원은…….”

“향후 십 년 이상, 동부에선 자체적인 식량 수급 능력이 상실될 테니. 제국은 식량과 재건 비용을 빌미로 동부를 얽겠지. 이를 위해서였다.”

“……비정하시군요.”

“다정해야 하겠느냐?”

페르난데스가 그렇게 말하며 키르하스를 바라보았다. 키르하스의 청록색 눈동자가 잠시 아무 말 없이 그의 눈을 올곧게 마주했다.

얼마 후, 키르하스는 천천히 손을 뻗어 페르난데스의 뺨을 쓰다듬었다.

“은공께선 당신 스스로를 죽여야 할 때에도 가장 많은 이득을 얻으려 하셨지요. 이번 계획 또한, 은공께서 바라보신 최소한의 손실에 불과할까요?”

“……그래.”

위악은 언제나 위선보다 저열하다. 그러나 자신의 악의를 대의를 위한다며 포장하는 것은 보다 더 추악하다. 그러니, 페르난데스는 변명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대량 학살과 전후의 빈곤, 혼란으로 발생할 수많은 민간인 사상자들을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 말했다.

그러나 키르하스는 알고 있었다. 만일 더 적은 손실로 같은 이윤을 얻을 수 있었다면, 페르난데스는 그것이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요구하더라도 서슴없이 내어줄 사람이었다.

타인에게 향하는 잣대에 완전히 동일한 무게로 자신을 올려놓을 수 있는 사내다. 키르하스는 페르난데스를 그렇게 여겼다. 그러니 이 마모된 사내가 잃어버린.

아니, 억누르고 있을 그 감정은 적어도 자신이 짊어지겠다고. 키르하스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그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입술 끝에서 짠맛이 났다.

“그렇다면 제가 당신 대신 눈물을 흘리겠습니다.”

-불쌍한 분, 이제 누가 선생님 대신 울어 줄까요.

그녀의 말 속에서 그리운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서, 페르난데스는 입술을 마주한 채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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