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370화 (371/388)

370. 킹스게이트 전투 (1)

-부우우우!

-둥! 둥! 둥! 둥!

협로 넘어 지평선 끝에서 진군 나팔과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알트베르트로 가는 이 좁은 골목을 향해서, 산천이 진동하듯 우렁찬 소리가 하늘을 뒤덮었다.

킹스게이트의 급조된 갤러리 위에 올라선 궁수들은 식은땀이 스며 나오는 손바닥을 연신 바지춤에 문지르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적들이 끝이 없었다.

삼만여 명. 어지간한 중소규모 도시 인구 수준의 인원이 살의를 품고 무장한 채 진군하고 있었다. 갤러리 위의 궁수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옆과 뒤를 살폈다.

모든 이들의 안색이 그보다 낫진 않았다. 모두가 창백하게 질린 채 애써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그 수가 한눈에 보기에도 백여 명에 지나지 않는다. 후방에 대기한 인원을 포함하더라도 그 두 배 정도에 불과했다.

거기다가, 이 자리의 인원들은 자신과 같은 농노, 또는 기껏 해 봐야 자유농민 출신이다. 평생 활이나 칼 따윈 잡아 본 적도 없고, 전쟁이라곤 마을 간의 분쟁 수준을 넘겨 본 적 없는 이들.

“주여…….”

농노 출신 궁수는 마른침을 삼키며 작게 속삭였다. 그때, 누군가가 그의 팔뚝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화들짝 놀라 보니, 전신갑주를 차려입은 왕자가 있었다.

“주님께선 우리를 도울 수 없으시다.”

“와, 왕자님……!”

“오직 그대들만이 우리를 도울 수 있지. 두려워 마. 이곳은 알트베르트고, 데인 대왕의 혈통은 단 한 순간도 이곳에서 패배한 적 없으니.”

사자의 형태를 하고 있는 투구 바이저 아래로 눈동자가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농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대들의 뒤엔 그대들의 어버이가, 아들딸이, 형제와 자매들이 있다! 적들의 수가 많고 기세가 삼엄하다 한들, 물러설 텐가? 자식과 어버이와 아들딸을 넘겨주고 목숨을 구걸할 텐가?!”

왕자가 거칠게 소리쳤다. 갤러리가 워낙 좁았던 탓에 그의 목소리는 성벽 너머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민병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아닙니다!”

“그래, 아니다! 우리는 죽음에게 침을 뱉으며 말할 것이다! 내 가족에게 갈 죽음을 내게 다오! 나를 데려가라고!”

열댓 살, 젊다고 하기에도 우스울 정도로 어린 이 소년은 자신의 키만큼 큰 대검을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 이 소년은 기묘한 고양감에 몸을 떨었다.

데인의 모든 귀족 자제들은 기사들의 로망스를 읽으며 자라난다. 위대한 선조들의 업적과 인생을 읽으며 꿈을 키워 나간다. 이 소년 또한 그랬다.

이제, 소년은 자신의 로망스를 써 내려가기 위해 칼을 쥐었다. 무너지는 나라, 불타오르는 대지, 그리고 무력한 난민들을 이끌고.

“우리의 가족과 이웃에게 다가올 죽음이 우리에게 찾아온다면, 우리는 웃으며 맞이하리라! 그 순간이 온다면 그대들은 이것 하나만큼은 잊지 말라. 그대들의 왕자가 그대들과 같은 날에 같은 죽음을 향해 두 팔 벌려 마주했노라고! 그대들은 결코 홀로 죽지 않으리라! 우리의 죽음은 우리 가족들의 삶이다!”

“에릭!”

“에릭!”

““에릭!!””

왕자의 외침에 농민들이 환호했다. 그래, 이것이면 되었다. 왕자는 다소 피로감을 느끼며 성벽을 향해 다가오는 적들을 바라보았다. 물자도, 병력도, 그 모든 것들도 부족하지만. 적어도 사기 하나만큼은 부족함이 없다.

훗날 역사에 이 장면이 그려진다면, 승패에 상관없이 데인의 백성들은 진정코 용맹했노라 남으리라. 그것 하나면 되었다. 선조들의 전당이 있는 알트베르트를 등지고, 적어도 그분들께 부끄럼 없는 자손이 되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훌륭한 연설이셨습니다. 왕자님.”

근위기사가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에릭은 대답 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두렵진 않으십니까?”

“두려워. 사실 도망치고 싶다.”

“하하, 이런. 왕자님 한 분을 위한 활로를 뚫는 것은 어렵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아버지께서 내게 어머니를 부탁했으니 내 어찌 나 홀로 도망치겠나.”

에릭은 투덜거리며 칼을 바닥에 박고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을 사느니 사는 것보다 가치 있는 죽음을 택하라.’ 이것이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우리 가문의 가헌이야.”

“비센테 전하께서 왕자님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실 겁니다.”

“그래, 아버지가 보고 싶군.”

에릭은 사납게 웃으며 칼자루를 쥐었다.

“그러니 아버지께서 도착하실 때까지 살아 보자고. 다 같이 말이야.”

“명을 따르겠나이다.”

* * *

“어린 놈 입담이 대단하군그래?”

지기스문트는 성벽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픽 웃었다. 비극의 주인공으로라도 남고 싶은 심정이라. 치기 어린 마음이지만 이해는 할 수 있었다. 저 나이대에는 누구나 그렇지.

“그대들 중 누가 저 소년에게 전쟁을 가르쳐 줄 텐가?”

“신 게오르크가 저 맹랑한 꼬마에게 군율의 지엄함을 보이겠나이다, 전하!”

“신을 보내시옵소서! 신 위르겐이 저 꼬마의 목을 전하께 진상하겠나이다!”

그의 장수들은 공적을 올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용의 위엄이 상당했지만, 피해를 감수하고 성벽만 넘을 수 있다면 저 너머엔 농노와 피난민들만 있을 뿐이다.

용 한 마리가 막을 수 있는 병력이 얼마나 되겠는가. 불을 뿜는 것을 제외한다면, 한 번의 돌격에 상대할 수 있는 면적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다.

게다가 성벽만 넘을 수 있다면 백성들을 인질로 삼아 용의 화염을 봉쇄할 수도 있었다.

“하하, 경들의 용맹함을 어찌 모르겠는가. 마법사들은 어떤가. 저치들의 주문을 뚫는 데에 얼마나 시간이 걸리겠나?”

“반나절이면 충분하나이다, 전하.”

“좋아. 경들은 들으라!”

지기스문트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지휘부 막사를 걷어내며 외쳤다. 앞서 진군하고 있는 병사들의 뒷모습을 보며, 그는 비릿하게 웃었다.

“반나절이면 용의 화염이 멎는다. 노예병들이 첫 일파를 막아낸 이후 공성을 시작하겠다! 위르겐 경!”

“예, 전하! 하명하시옵소서!”

“경은 용의 첫 숨결 이후 2천의 보병을 이끌고 적의 성벽을 넘으라! 귄터 경!”

“예, 전하!”

“경은 위르겐 경과 함께 나아가 성문을 파쇄하라!”

“예, 전하!”

“복잡한 전술 따위 명하지 않겠다. 저들에게 용이 있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고작 한 줌의 민병이 어설픈 목책 위에 서 있을 뿐이다!”

투석기를 준비하라, 노예들을 진군시켜라, 뿔나팔을 부르고 전고를 울려라! 지기스문트는 전신에 끓어 넘치는 고양감을 느끼며 전율했다. 북이 울리기도 전에, 그의 핏줄 속에선 거대한 힘이 스스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용의 숨결은 한 번에 모든 이들을 향할 수 없다. 용이 수비를 택한 이상, 다가오는 적들에게만 투사할 수 있을 테니.

알트베르트 공성전, 지기스문트의 첫수는. 용의 숨결을 소모하기 위한 노예병의 축차 투입이었다.

* * *

“놈들이 온다아아아!!”

“궁병 준비!! 준비!!”

잠시 전열을 가다듬던 적들이 다시 진군을 시작했다. 두꺼운 갑주를 차려입은 병사들이 이에 맞지 않는 급조된 나무 방패를 치켜들고 비틀거리며 걸어왔다.

대열도, 사기도 찾아볼 수 없는 어설픈 진군이었다. 심지어 민병대조차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어설픈. 근위기사들과 왕자는 그 모습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전하, 저들의 군주가 희생양을 보낸 걸 겁니다. 아마 죄수병들이나 급조 민병 따위가 아닐까 싶습니다만……. 아군의 전력을 가늠하고 소모하기 위한 수가 되겠군요.”

“하하, 그 급조된 희생양조차 아군의 배가 넘는구나.”

에릭은 쓴웃음 지으며 다가오는 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이따금씩 뒤를 돌아보거나, 자못 위협적으로 두 손에 든 병장기를 휘적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때, 그들의 머리 위에서 거대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들이 너희를 소모시키려 보낸 치들이라면, 굳이 너희가 나설 필요 있겠느냐?]

“대모님……!”

어느새 성벽 위까지 다가온 아벨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그녀는 느릿하게 걸어오는 군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용의 숨결이 무한한 것은 아니나, 적들의 선봉을 꺾어 기선을 제압하는 것과, 아군의 사기를 북돋는 것은 필요한 절차였다.

용의 숨결은 적과 아군 모두에게 대단히 상징적인 효시가 될 것이다. 근위기사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무슨 부탁할 일까지 되겠느냐?]

아벨은 부드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놈들의 계략이 어떻든 수성 측의 전략은 언제나 단순했다. 적의 기세를 꺾고, 최소한의 피해로, 성벽을 지켜낸다.

가장 강력한 무기는 아끼는 것이 아니다. 적들의 전략이 정석적이었듯, 그녀의 반응 또한 정석을 따랐다.

용의 입이 벌어졌다.

* * *

-쿠구구구궁!!

대지가 한순간 잘게 떨렸다. 자갈과 흙더미가 서로 부딪치며 시끄럽게 달그락거렸다. 무기를 치켜들고 겁에 질려 나아가던 노예병들은, 저도 모르게 발을 멈추고 섰다.

‘더워……?’

이제 계절은 초겨울이 성큼 다가온 늦은 가을이었다. 제아무리 갑옷을 껴입었다 한들 이렇게 후덥지근할 리가 없었다. 병사들은 갑작스런 기온 변화에 당황했다.

두 손이 병장기에 묶여 있어서 무거운 투구를 벗거나 갑주를 해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상함을 느끼고 발버둥 치던 노예 하나가 간신히 투구의 바이저를 올리는 것에 성공했다.

그제야 그들은 이 끈적한 기온 상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투구를 벗는 순간 보이는, 그리고 느껴지는 압도적인 존재감.

신화 속 드래곤이 그들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아직 멀게만 느껴지는 거리였으나 용의 거대한 크기 탓에 검붉은 비늘 한 장 한 장이 육안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오…… 주여…….”

병사 하나가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고온 탓일까, 그의 이마엔 굵은 땀방울이 주륵 흘러내렸다. 저 멀리 보이는 용의 입가에서 새하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대모님……!!”

억눌린 비명과 신음이 투구 아래에서 새어 나왔다. 그리고—

-콰아아아아앙!!!

백광이 그들을 덮쳤다. 액화된 화염이 한순간 그들의 몸 위로 쏟아져 내렸다. 노예병 천여 명. 개중 절반 이상이 그 순간 자취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들이 서 있던 협로의 대지가 유리화하여 번들거렸다. 용의 숨결에 직격되지 않아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병사들은 사지 중 하나 이상이 사라진 채, 익은 폐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몸을 떨었다.

잠시 사위가 고요해지고, 곧.

“와아아아아아!!!”

성벽 위 데인의 병사들이 아벨의 무용에 환성을 질렀다. 그들의 신화 속에서나 묘사되던 압도적인 광경이 그들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병사들의 사기가 드높았다. 아벨은 작게 웃으며 하늘 위로 다시 날아올랐다.

* * *

그 모습을 보며 페이른의 장수들은 전율했다. 마지막 용이 자취를 감춘 것조차도 전설만 간신히 남았던 시대의 일이었다.

막연한 환상과 전설이 현실이 되는 이 순간에, 페이른의 장수들은 끔찍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건 의지의 문제를 떠나서, 포식자를 마주한 인간의 공포. 아니 차라리 자연재해를 마주한 필멸자의 공포에 가까웠다.

가장 용감한 장수조차도 손을 잘게 떨며 용을 바라보았다. 신화의 시대에 숨을 쉬던 저 고대의 생물에게 지금, 창칼을 겨누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때, 찢어지는 웃음소리가 그들 뒤에서 터져 나왔다.

“하하, 하하하하하!!”

“전, 전하?”

너무 크게 웃은 탓에 지기스문트는 마른기침을 토해내며 끅끅거리기 시작했다. 한참 웃음을 터트리던 그는 눈가에 묻은 눈물을 쓸어내며 간신히 말을 꺼냈다.

“데인의 수호신이 제 백성들을 불살랐구나! 하하하하!!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전하, 저희는 잘…….”

“저것은 신이 아니란 뜻이다! 머저리들아! 제 백성들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짐승 따위에 겁을 집어삼켜서야, 대 페이른의 사내들이라 할 수 있겠느냐? 뭣들 하느냐! 병사들을 보내라! 예정대로 진군해라! 투석기는 준비가 끝났느냐? 쏴라! 쏴라! 쏴라!! 멈추지 마라!”

지기스문트는 버럭 소리치며 일어서 외쳤다.

“전설이든 신화든 무슨 상관이더냐! 그따위 고릿적 이야기들에게 내어줄 자리 따윈 없도다. 투석기! 쏴라! 저것에게 가르쳐 주어라. 무엇을 불태웠는지!”

정예를 긁어모아 최대한 신속하게 상륙해야 했던 페이른 군대가 어떻게 노예병들을 편제할 수 있었겠는가. 당연히 그들에겐 노예병 따위 없었다.

저들은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해 붙잡힌 민간인과, 최후의 순간까지 저항하던 현지 민병대들이었다. 낡고 급조된 병장기 따위를 양팔에 묶어서, 채찍질로 전선으로 내몰린 자들이었다.

본디 제물로 바쳐질 자들이었으나, 무슨 상관이랴? 제물이라면 저 좁다란 성벽 너머에도 수없이 많다. 지기스문트는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와인을 홀짝였다.

* * *

“투석기! 전하, 성벽 아래로 피하십시오! 위험할 수 있습니다!”

“잠깐, 저건 돌이…… 아닌데……?”

정오의 푸른 하늘을 가로지르며 검은 궤적이 날아들었다. 성벽 위에 서서 눈을 가늘게 뜬 에릭은 그것이 어느 정도 가까이 온 이후에야 날아드는 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이게 대체……?”

사람이었다. 투석기로 날려진 자는 양팔을 휘적거리며 비명을 내지르다가 성벽에 몸을 박고 퍽, 하며 터졌다. 선혈이 후드득 튀고 그가 입고 있던 갑주 따위가 비산해 시끄럽게 울렸다.

이 끔찍한, 그리고 무의미한 공세에 모두가 말을 잃었다. 아무리 급조된 성벽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육체 정도를 들이박는다고 무너트릴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이 근방은 산악지대다. 던질 수 있는 바위야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들의 의문은 곧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해소되었다. 투석기로 쏘아진 자들 중 하나가 성벽 위에 떨어져, 사지가 박살 난 채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것이다.

그 인근의 병사가 쓰러진 자의 두꺼운 투구를 벗겨내자, 불어터진 입술 사이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데인 왕국 백성 특유의 억양이었다. 에릭은 그의 손에 묶여 있는 부서진 방패와 검을 보고, 또 용의 숨결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 남아 있는 시신들을 보았다. 같은 복식과 같은 무장이었다.

[이……놈들……이……!]

-우드득!

용의 발톱이 성가퀴의 한 귀퉁이를 으스러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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