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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371화 (372/388)

371. 킹스게이트 전투 (2)

-둥! 둥! 둥! 둥!

전고가 울리며 적의 진군이 시작되었다. 에릭은 다가오는 적군의 수를 보며 질린 얼굴을 한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좋지 않다. 방금 몰살당한 자들이 데인의 국민들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병사들의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지고 있었다.

사람을 투석기로 쏘아 던진 적장의 악랄함은, 분노에 앞서 미증유의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산 사람을 재미 삼아 던지는 녀석들이다. 이 전투에서 패배할 경우 그들이, 그리고 그들 뒤의 민간인들이 어떤 꼴이 될지는 자명한 일이었다.

달리 말해, 이들은 전혀 겪은 일 없고 들은 바 없는 전쟁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천상 전쟁 이래로 물질 세계의 패권을 인간이 쥔 이후 이러한 전쟁은 없었다.

인간과 인간의 전쟁은 귀족과 병사들의 전쟁에 가깝다. 민간인들이 전쟁의 여파에 휘말린다는 것은 전후의 황폐화된 대지로 굶주리거나 전쟁 난민으로 소모된다는 의미였지, 전후에 병사들에 의해 학살당했다는 뜻은 아니었으므로.

그러나 천상전쟁 시절, 종족과 종족 간의 전쟁에선 포로나 노예 따위를 잡지 않았다. 종의 차이가 증오를 나타내던 시대였고, 점령지의 이종족에겐 병사와 민간인의 차이를 두지 않았다.

즉, 지금 병사들은 상대를 인간이 아닌, 정체 모를 이종족으로 여기고 있다는 뜻이었다. 생존에 대한 열망보다 더 거대한 공포가 그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무지에 대한 공포가.

“정신 차려라!”

에릭은 노호성을 터트리며 칼자루를 곧게 세웠다. 투구 아래에서 더운 숨이 와류처럼 흘렀다. 그는 겁에 질린 병사들에게 외쳤다.

“정신 차려!! 놈들이 온다! 궁수! 활을 쏴라! 멈추지 마!”

“저, 전하!”

“제기랄, 다 같이 자살이라도 하겠다는 게냐!”

그라고 두렵지 않겠는가. 적의 일파, 정찰 삼아 보낸 첫 돌격에서 이미 적군의 수가 아군의 것을 상회했다. 적과 아군의 병력 차는 단순 산술상으로도 수십 배가 넘었다.

그 말은 즉, 이 조잡한 민병대가 적의 최정예 군단을 상대로 수십 대 일의 교환비를 발생시켜야 승리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가능과 불가능을 논하기조차 어려운 차이다. 지휘관의 시선은 병사들의 것보다 냉철했으므로, 에릭과 지휘부가 느끼고 있는 절망감은 그 농도가 달랐다.

[이보다 어려운 전투가 없던 것은 아니다.]

아벨이 그들의 머리 위에서 입을 열었다. 여전히 이글거리는 분노로, 그러나 애써 침착을 가장하며. 이 고대의 존재가 터트리는 분노는 그 자체만으로도 주위에 감정을 전염시키곤 했다.

아벨의 격노에 몸을 떨던 병사들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너희들의 곁에 서 있다. 너희들의 아버지와 그 아버지, 선조와 까마득한 선조들 또한 이러한 전투를 겪으며 살아왔다. 그리고 너희들이 있다.]

아벨은 다가오는 적, 그리고 그 너머에서 웃음을 터트리고 있는 지휘관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의 강대한 육신은 당장이라도 적들을 향해 비상하길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안 될 일이다. 그녀가 이 자리를 뜬다면 이 성벽 위의 아이들이 얼마나 버틸까. 삼십 분? 한 시간? 그녀의 존재가 사라진 자리에서, 이들이 얼마나 긴 시간을 버틸 수 있을까.

그녀의 숨결은 무한하지 않다. 용의 호흡에 담긴 불꽃이 다시 타오르기 위해선 제법 긴 시간이 필요했다. 또한 고룡의 숨결이 제아무리 강대하다 한들 단번에 불사를 수 있는 이들은 수백이 넘지 않는다.

그 수백을 또다시 수백 번 반복해야 마침내 적들을 모두 물리칠 수 있다. 먼 옛날, 용들이 살아 숨 쉬던 그 시절에도 용들은 종족들의 전쟁에서 쉽게 소모되곤 했었다. 개개인의 강대함이 전쟁에서 발휘할 수 있는 영향력엔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가이메른 대왕이 말했듯이, 한 마리의 용을 잡기 위해선 엘프 정예 삼천여 명이 필요하다. 일대 삼천의 교환비라 한다면 압도적인 강자라 할 법했으나, 용이 곧 불멸 무적의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리고 오래된 용이자 수많은 전장 위를 날았던 용으로서, 아벨은 자신의 분노를 제어할 줄 알았다. 이 전장에서 그녀는 이 자리의 희망이 되어야 했다.

[너희의 존재는 곧 너희 조상들의 생존을 증명한다. 너희의 조상들이 그토록 험난한 전쟁과 시대를 가로질러 마침내 너희에게 닿았듯, 너희는 결코 이 자리에서 멸망하지 않으리라. 인간의 생존은 인간이 그 모든 전쟁에서 언제나 승리해 왔음을 의미한다.]

근위 기사 십수 명과 열 명도 되지 않는 마구스, 수백에 불과한 민병대로 삼만이 넘는 대군을 막아야 하는 이 상황에서, 희망마저 꺾인다면 이들에겐 싸울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적군의 화살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용은 거대한 날개를 들어 올려 병사들의 머리 위를 가로막으며 적들을 노려보았다.

[그러니 싸워라. 너희의 조상들이 그러했듯이. 너희의 후손들이 그러하듯이. 너희의 역사에 남은 시련이 너희의 생존을 증명할 것이다. 마침내 살아남아 지금까지 이어졌노라고, 너희의 까마득한 후손들이 자랑스레 말할 수 있도록!]

무릇 역사란 생존의 총체다. 아벨의 말은 병사들의 마음속 깊은 곳을 울렸다. 그랬다. 그들의 선조는 언제나 지금보다 더 험난한 세월을 보내어 견뎌냈고, 그 결과가 지금 이 자리의 자신들이다.

병사들의 마음속에서 공포가 걷히기 시작했다. 그것이 비단 머리 위로 쏟아지는 화살을 몸으로 오롯이 받아내고 있는 용의 존재감 때문만은 아니리라.

공포가 사라진 자리를 차지한 것은, 당연하겠지만 분노였다. 저 무도한, 잔악한, 그리고 독랄한 적들에 대한 한없는 분노. 자국의 강역을 침탈하고 포로를 재미 삼아 던지며, 생존자를 모두 몰살하겠다는 적들에 대한 분노.

산 자의 분노가, 인간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병사들은 화살을 쥐고, 활대를 당기고, 또는 끓는 물과 기름 따위를 성벽 아래로 쏟아내며 분노를 담아 고함을 질렀다.

킹스게이트 전투, 데인-페이른 전쟁의 마지막이 될 전투 첫날이 시작되었다.

* * *

“거 보아라, 내 무어라 했더냐!”

용이 감히 날아오르지 못하는 것을 보며 지기스문트는 낄낄거리고 웃었다. 마법전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두지 못하는 이상, 용의 비상과 화염을 막아 낼 방법 따윈 없었다. 그리핀나이츠마저 없는 마당에 창공을 누비는 드래곤을 무슨 수로 막아 낸단 말인가.

그러나 용은 쉽사리 성벽 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성적인 판단이며, 또한 현명한 판단이었지만. 지기스문트가 보기엔 의미 없는 발악에 불과했다. 그 휘하의 마법사들이 마법전에서 승리하는 순간까지 함락의 시간을 유예시킨 것일 뿐이니.

용이 자리를 뜨는 순간 성벽이 함락된다. 드래곤의 보호 없이 고작 민병 따위로 수적 열세를 견디고 성벽을 지킬 수는 없다.

그러나 이는 반대로, 아벨이 존재하는 한 성벽을 넘을 수도 없다는 의미였다. 즉, 지기스문트의 공성전 개시는 적어도 반나절 안까지 무의미한 병력 소모에 불과했다.

“허나 전하. 용이 저 자리에 있는 이상 성벽을 무너트릴 수도 없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마법사들이 힘을 낸다 한들 용을 물러나게 할 뿐, 잡아낼 수도 없을 테고.”

“하시면 차라리 그 반나절간 전투를 멈추시어 병사들의 소모를 억제하시는 것이 낫지 않겠사옵니까?”

“하하, 경. 병사들의 진군이 멎는다면 용이 더 이상 성벽 위에 있을 이유가 없지 않나? 그렇다면 분노한 용이 우리의 머리 위로 날아들 때에 경이 몸소 막아서기라도 하겠다는 의미인가?”

지기스문트의 말에 장수들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제야 장수들은 지기스문트의 전략을 읽었다. 그는 용의 발을 묶어 놓기 위해 오히려 용의 입 안으로 병력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었다.

용의 분노에 죽어 가는 전열의 병사들이 보였다. 끓는 기름과 화살들에 쓰러지는 병사들과, 성벽 위에서 기사와 민병들의 칼에 맞아 떨어져 내리는 병사들도 보였다.

수천의 병력이 갈려 나가고 있었다. 고작 수백 명이 지키는 성벽을 넘기 위해서. 저 모든 죽음이 시간 벌이에 불과하단 뜻이었다. 장수들은 지기스문트를 보며 두려움을 삼켰다.

그들의 왕에겐 인간의 마음이 없다. 파충류의 것에 가까운 붉은 눈동자가 광기와 열락으로 번들거렸다. 왕은 콧노래를 부르며 병사들의 비명을 안주 삼아 와인을 삼켰다.

* * *

“거의 다 되었군.”

페르난데스는 산자락 아래에서 죽어 가는 병사들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킹스게이트는 해일을 막아 내는 방파제처럼, 위태롭지만 견고하게 적들의 파상적인 공세를 막아내고 있었다.

페이른의 군사들은 간격을 두고 일견 무의미해 보일 정도로 소모적인 공세를 하고 있었다. 전군을 진군시키는 것이 아닌, 한 번에 천여 명에 불과한 병력만을 투입하고 있었다.

당연히 용의 숨결에 의한 피해 확대를 경계한 일이다. 그리고 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예측한 범위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

적의 진군 속도를 제어하며, 적군의 진격이 가장 빠른 부대를 급습해 제거하고, 적들의 핵심 인력들을 섬멸하며, 적들이 허상의 ‘도적 떼’를 경계하고 추적하며 시간을 소모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데인의 피난민들이 ‘도적 떼’의 약탈을 피해 알트베르트로 도주하도록 유도하고 그 경로에서 사전에 마주칠 위협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갔다.

비센테 왕의 회군과 그 속도를 고려하여 알트베르트 공성전과 왕의 회군 일정이 겹칠 수 있도록, 최대한 주의 깊게, 아주 섬세하게. 그물을 짜 올리는 거미처럼, 적들이 더 깊은 곳을 향해 더 치명적인 틈을 보일 수 있도록—

자신들의 완벽한 승리를 장담하고 더 과감하게 행동할 수 있도록.

“하지만 은공, 반나절을 버틴다 한들 그렇다면 마법사들의 공세에 노출될 따름이 아니겠습니까?”

“하, 반나절이라. 누가 그러더냐?”

“은공께서 마법전은 반나절간 지속될 것이라…….”

“그래, 페이른의 전투 마법 부대는 이 전력 차를 반나절이라 예상하고 있겠지.”

페르난데스는 산자락 너머에서 일어난 전투 양상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의 말에 키르하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키르하스. 비센테의 편력 원정에 기사들만 파견되었겠느냐. 당연히 원탁 의회의 마구스들 대부분도 저들을 따라갔다. 반면 페이른은 제 군단의 마법 전력을 온전히 끌고 왔지. 알트베르트의 수비대에 남은 마구스들이 어찌 반나절이나 버틸 수 있겠느냐.”

전력과 전력의 부딪침이라면 반나절은 물론이요, 사흘 밤낮이라도 싸울 수 있다. 페이른과 데인은 근본적으로 전력 차가 그리 크지 않은 강대국이었으니. 하지만 최소한의 병력만 남아 있는 데인과, 본대의 전력을 끌고 온 페이른의 전투가 그리 팽팽하게 진행될 리가 없었다.

세 시간? 아니, 한 시간도 버티기 어려워야 정상이었다. 마법 전력은 단순 산술 문제로 격차가 벌어지지 않는다. 두 배의 병력을 지녔다면, 격차는 그 제곱에 비례하게 된다. 마법전의 승패 양상은 본디 그런 형태를 지녔다.

그럼에도 반나절을 버틴다는 것은, 거의 비등한 전력을 갖춘 두 집단이 성패를 가름할 때나 소모될 긴 시간이었다. 반나절은 마법에 어떤 영향도 받지 않은 두 군대가 물리적인 충돌을 일으켰을 때에도 승패를 가늠하기 충분한 시간이었으므로.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세심하게 이 전장의 모든 시간들을 조율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비센테의 회군부터 페이른 본대의 결집과 알트베르트 공성전에 이르기까지.

반나절이란, 데인의 마법 전력이 패배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 아니었다.

“반나절 뒤에 마법전이 개시되면 아벨이 퇴각하고, 피난민들은 알트베르트의 외성 내부로 도주해 마지막 전투를 준비할 것이다. 페이른의 본대가 알트베르트 성하의 평원에 진지를 틀고, 본격적인 공성 병기들이 성벽을 치겠지.”

“……그리고요……?”

“그리고 그 시각이면 비센테가 전장에 도달한다. 애초에 반나절은 비센테가 도착하기까지 필요한 시간에 불과했어. 알트베르트를 배경 삼아, 가장 절망적인 전장에 나타나 영웅이 되어 산화하겠지. 모든 백성들이 그 모습을 볼 것이고, 이제 내가 그들의 활로를 뚫을 것이다.”

페르난데스는 재빨리 수인을 짚으며 말을 이었다. 마력이 그의 팔뚝을 타고 흘러 하늘 위에서 부딪치는 두 집단의 마법전에 가담했다. 데인의 마구스들이 밀릴 때마다 교묘하게 페이른의 마력을 흐트려 놓고 있었다.

새로운 육체를 얻고 나서 마력 회로를 삽입해 개발하기 시작한 지 몇 개월. 비록 대마법을 구사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마력과 허약한 마력 회로에 불과했지만, 이보다 적은 마력으로도 카운터 스펠쯤은 가능했다.

즉 마법의 투사로 적들을 분쇄하는 것은 불가능했어도, 카운터 스펠에 집중해 양패구상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페이른의 본대가 ‘반나절이면 이길 수 있다.’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정도의 눈속임은 쉬운 일이었다.

비센테의 극적인 퇴장과, 에릭의 차기 왕위 이양을 부드럽게 연결하고, 피난민들을 기적적으로 구해내 활로를 뚫는 것까지 연출하면. 이제 에릭은 신생 데인 왕국의 확고부동한 절대 군주로 우뚝 설 수 있다.

고작 열댓의 소년이 물질 세계의 그 어떤 군주보다 완벽한 정통성과 권위를 취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훗날 제국의 속주로 전락하더라도, 그 소년은 결코 백성들에게 나라를 팔았다는 지탄을 받지 않을 것이다.

완벽한 꼭두각시가 된다. 페르난데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을 겹쳐 마법을 이었다. 그는 이 전쟁의 발호에서부터 지금까지, 운명이라는 것에 단단히 얽혀 있다는 감각을 떨쳐 낼 수 없었다.

지상에서 인간들이 전쟁을 벌이고, 천상에서 마법사들이 투쟁하듯이.

전생과 현생, 그 모든 순간에 그는 결국 지하에서 암계를 짜는 늙은 흑마법사, 영웅을 함정 속에 밀어 넣는 거미에 불과했다.

에릭이 아벨의 도움을 받아 적군의 목을 썰고 제 부하들을 독려하며 날뛰는 모습은, 자못 찬란하고 장엄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에 반해, 산그늘 밑에 숨어서 두 군단을 속이는 자신은 어떤가.

역사에 남을 영웅의 탄생을 바라보며, 페르난데스는 아주 오랜만에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늙은 흑마법사였던 시절 자주 보였던 미소를.

다섯 번째 파상 공세가 끝나고, 그다음 전투가 개시될 때. 페르난데스는 마법을 거둬 내며 허리를 폈다.

“비센테가 전장에 도착했군. 물러서자.”

“예, 은공.”

킹스게이트에 화염구가 떨어지는 것을 보며 페르난데스는 말 위에 올라탔다. 전쟁이 시작된 이후 첫 번째 공격 주문이 데인의 진영을 타격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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