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374화 (375/388)

374. 킹스게이트 전투 (5)

마법 지원이 멎었다고 수만 명의 병사들이 고작 한 사람에게 막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귄터는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병사의 목을 거칠게 내려찍고는 외쳤다.

“놈은 혼자다! 빌어먹을, 놈의 손이 수십 개는 된다더냐? 다 같이 밀어붙여! 거기 너! 너! 그리고 너! 방패를 들어 방진을 짜라! 전진해!”

병사들은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그러던 중, 한 병사가 비센테의 선을 밟는 순간—

-스각!

칼날의 움직임을 본 병사 따윈 없었다. 잠시 아침 햇살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방패째로 병사의 몸이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병사들의 낯이 창백하게 질렸다. 비센테는 여전히 같은 자세로 서 있을 뿐이었다.

“괴, 괴물이다…… 괴물이야!”

“제기랄, 네가 먼저 가! 나, 난 죽기 싫어!”

“머저리들!! 뒤로 물러서는 자들은 군율로 처리하겠다! 도망치지 마!!”

병사들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슬금슬금 앞으로 나섰다. 다시 한 사람이 죽고, 또다시 한 사람이, 그리고 한 사람이 죽어 나갔다.

그러나 점차 선을 넘어오는 병사들이 늘었다. 비센테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끝인가. 오래 버텼다.’

한 사람이 수만 명을 단 한 시간이라도 붙잡을 수 있었다면 이는 기적에 가깝다. 이것으로 그의 역할은 다했다.

그의 백성들은 아마도, 앞으로도 영원히 이 광경을 잊지 않으리라. 데인의 국경이 무너지고 토지가 불타오른다 할지라도, 그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으로 되었다. 비센테는 눈을 가늘게 뜨며 칼날을 들어 올렸다. 이제 더 이상 병사들은 멈추지 않았다. 창칼이 어느새 그의 갑옷을 거칠게 긁고 스쳐 지나갔다.

그때였다. 그를 향해 말발굽 소리가 시끄럽게 울리더니, 방진의 외곽에서 병사들의 비명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전하! 세르너드의 알베르트가 참전하겠습니다!”

“……알베르트 경? 대체 여긴 어떻게……?”

“전일 전하께서 친우를 위해 근심하신다 하셨거늘, 제 개인의 영달에 눈이 멀어 전하의 호의를 무시할 뻔했으니 이 불충을 용서치 마시옵소서!”

페르난데스는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활달하게 웃으며 뛰어들었다. 대검이 크게 허공을 긋자, 그 사이에 얽힌 병사들이 우수수 튕겨 나가며 비명을 내질렀다.

간단하게 공간을 확보하자, 그는 비센테의 앞에 서서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이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란 듯 움찔거렸다.

“죽을 자리를 찾아왔나, 알베르트 경?”

“그런 말씀 마시지요, 전하. 이제부터 살길을 도모해 볼 생각이니.”

“여기서?”

비센테는 고개를 휘휘 돌렸다. 페르난데스의 서슬 퍼런 기세에 병사들이 잠시 움츠러들기야 했으나 몇 분 뒤면 다시 진군을 시작할 터였다. 도시 내성으로 돌아가는 것 외엔 활로가 없었으나, 도시 안으로 피난한다 한들 살길은 지난했다.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픽 웃으며 말했다.

“놈들의 후미에 아군이 도달했습니다. 또, 이 산자락 너머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시시각각 원군이 달려오고 있나이다. 전하, 옥쇄하시겠나이까, 보전하시겠나이까?”

“원군……? 대체 누가 우릴 돕는단 말인가?”

그의 휘하에 있던 기사들은 이미 동부 연합 전역으로 흩어졌으며, 설령 그들이 회군한다 한들 전면전은 무리였다. 그들은 이 자리에서 소모되어선 안 된다. 페이른의 본대를 고립시키기 위해선, 훗날 그들의 조력이 필요했다.

비센테의 의문에 페르난데스는 씩 웃으며 말했다.

“사제들과 야만인들입니다. 전하.”

페르난데스는 안장 아래로 훌쩍 뛰어내려 비센테의 곁에 섰다. 그는 곧 말의 뒤를 후려쳐 빠져나가게 하고는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그러니 버팁시다. 승산이 없지 않으니.”

두 사람으로 삼만여 명의 진군을 막아 내는 것. 물론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페르난데스는 그저 가만히 정면을 바라보았다.

전생에도, 현생에도. 불가능하다 하여 포기한 적 없었다. 가능과 불가능은 그에게 논의의 대상이 아니었다. 해야 하는 일인가, 그렇지 않은가. 오직 그뿐이다.

그리고 이건, 해야만 하는 일이다. 교황청의 신전 기사들이 적의 후방을 치고, 북부의 야만인들이 적의 측방을 강타할 때까지.

이 자리에 적들을 멈춰 세워 두는 것.

수천여의 망치가 이들을 두드릴 때. 단 두 사람의 모루가 버텨 내야 했다.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왕을 살리기 위해서. 그리고 또한, 이젠 어쩌면 업이라 부를 수도 있을 정도로 두텁게 쌓인 이 질긴 전생의 인을 끊기 위해서.

“오라, 나는 세르너드의 알베르트. 기사다.”

비센테는 그 말을 듣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페르난데스의 곁에서 칼날을 들어 올리며 흔쾌히 앞으로 걸어 나섰다.

“다 보고 있었군. 좋아, 알베르트 경. 어디 한번 해 보자고.”

기사 서사시를 읽으며 자라난 소년이 이제 자신의 서사시를 써 내려가기 위해 칼을 든다. 두 사람은 창과 칼로 이루어진 강철의 숲을 향해 걸었다.

* * *

-다각, 다각, 다각.

천여 필의 기마가 일렬로 늘어서 느긋이 걷는 모습은, 평지의 보병들이 보기엔 지극히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터 오르는 동녘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지평선 끝에서 끝까지 금속광을 산란시키며.

사제들이 걷는다. 천천히.

-다각, 다각.

이들의 진군에는 뿔나팔도, 진군 속도를 제어하기 위한 전고도 따르지 않았다. 흔히 기사들의 돌격에 있을 법한 신호수나 나팔수 따윈 없었다. 이들은 그저 아무 말 없이 걷고, 걷고, 또 걸었다.

이 기묘한 고요 속에서 이들이 만들어 내는 소음은, 무거운 강철의 마찰음. 대지를 박차는 기마의 인내심 섞인 평보, 그리고 맞바람에 군기가 휘몰아쳐 펄럭이는 소리뿐.

새하얀 모직이 햇살 아래에 스스로 빛을 내는 것만 같다. 그 위로 피처럼 붉은 문양이 병사들의 뇌리에 선연히 각인되고 있었다. 역십자 열쇠검 문양. 군신(軍神) 베이타서스의 인장. 그리고 그 위로 그려진 버들잎 문 용의 문장.

성 요한 순례 기사단의 상징이다.

-두두두!!

한 무리의 기마가 그들의 진로 앞으로 달려왔다. 공성전이 진행 중이었으므로, 복합 편제의 형태를 띠고 있던 페이른의 군단은 기마 부대를 후방에 배치해 둔 상태였다.

페이른의 기사들이 평원을 가로질러 신전 기사들의 앞에 섰다. 화살이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 서서, 가장 선두에 선 기사가 바이저를 열고 외쳤다.

“멈추시오!! 그대들은 세속의 정세에 내정 간섭을 시도하고 있소! 그것이 아니라면, 그대들이 정녕코 신의 행사를 빌미로 왕가의 정치에 흙발을 디디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좋겠소?!”

기사의 외침은 간절하기까지 했다. 그들의 왕은 아마도 저들의 개입을 퍽 달가워하고 있을 것이다. 동부 연합의 소왕국들이 이 사실을 좌시하지 않을 테니. 교회의 신권이 바닥에 떨어질 일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는 이들의 개입을 반길 수 없었다. 왕들의 생각이야 어쨌건, 잘 무장한 기사 천여 필이 아군의 후방에 돌격하는 사태는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했다.

물론 페이른 군의 수에 비하자면 그리 대서특필할 것 없을 병력이다. 수행 인원을 모두 합쳐도 전투원으로 이천에서 삼천가량. 변수가 될 수는 있어도 판도를 뒤엎을 수 있을 병력은 아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전사자가 발생하겠는가. 그리고 가장 큰 문제가 있다면, 적 기병의 돌격에 가장 먼저 대응해야 하는 것이 자신이라는 점이었다. 즉, 이 자리의 기사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서 있었다.

‘제기랄, 그리핀나이츠 그 고까운 것들은 대체 어디서 뭘……!’

애초에 그리핀나이츠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무력으로 압박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페이른의 기병 전력은 지금 성 요한 순례기사단의 것을 상회하지 못하고 있었다. 기사는 침을 꿀꺽 삼키며 사제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사제들은 대답 없이 그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 보시오! 제기랄, 아니. 회군하시오! 그대들이 회군한다면 아국은 그대들의 배후를 노리지 않을 것임을 맹세하겠소!”

여전히, 이 순례 기사들은 어떤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기사는 이자들의 정체를 떠올리며 창백하게 질렸다.

성 요한 순례 기사단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신전 사제들이며, 또한 아주 특수한 서약을 맺은 것으로도 유명했다.

‘침묵의 서원……!’

옛 시대의 교회에 있었던 사제 서원 중 하나로, 오직 주 앞에서 허황되지 않은 말만을 입에 담을 것임을 맹세하는 절차. 즉, 이 서원을 한 사제들은 성경 구절을 제외한 어떤 말도 꺼내지 않는다.

이 시대에 이르러서는, 극단적인 원리주의자들이 모인 몇몇 봉쇄 수도원을 제외한다면 이런 고리타분한 서원을 올리는 사제는 없었다. 지금의 사제들은 조언자이자 상담자이며, 또한 인도자로서 백성들을 교화해야 했으니.

그러나 순례자 요한과 그의 제자들로 이루어져 전통을 이어받은 지금의 순례 기사단은 지독할 정도의 원리주의자들이었다.

이제 그들은 성경 구절조차도 입에 담지 않는다. 백성들을 위한 사제가 아닌, 오직 신을 섬기기만을 맹세한 수행 사제들로서, 그들은 결코 삿되게 주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는다.

전투 사제들과 신전 기사들이 으레 하는 말이 있다.

‘주의 뜻대로 되리라.’

‘주께서 이를 바라시니라.’

단결을 위해서, 또는 신앙을 위해서 외치곤 하는 그러한 상투적인 구호조차 입에 담지 않는다. 이들에게 있어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남은 것은 행동뿐이다. 삿된 것이 있다면 벤다. 불의가 있다면 벤다. 주께서 바라신다면 벤다.

본디 대화라 함은 상대와 나 사이의 의견을 교환하는 것. 그러므로 이들은 대화를 거부한다. 그들의 의견은 오직 주 베이타서스의 것뿐이었으며, 이는 속세와 합의를 통해 완급을 조절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슨 말이라도……. 아니, 제발. 일단 멈추시오!!”

-다각, 다각.

마치 절벽이 다가오는 것만 같다. 자연물이 전진하는 것과 같다. 기사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천천히 걸어오는 신전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스르릉……!

“그 이상 온다면 전투 신호로 알겠소. 아시겠소? 이는 장차 그대들의 교회와 세속 왕가 사이 분쟁의 씨앗이 될 것이란 말이오!”

-다각, 다각.

발굽이 무겁게 지축을 울렸다. 기사의 외침이 신호라도 된 듯, 느긋이 걸어오던 말들이 점차 속도를 올렸다. 처음엔 평보.

-다각, 다각, 다각.

침묵 아래에서, 점차 마속을 올려 속보(Trot).

-두두두두두……!

이제, 구보(Canter). 기창이 올라가며 최초 돌격의 준비를 마쳤다. 그 모습을 본 기사가 황급히 말머리를 돌려 대열을 선회하며 외쳤다.

“대화는 끝이다! 전군! 돌격 준비! 기사들이여, 돌격 준비이이!!”

-두두두두두!!!

300m, 250m, 150m. 두 기사들의 대열이 순식간에 서로를 향해 접근해 간다. 기병창이 바싹 당겨져 어깨 아래에 걸쳐지고, 중갑 기사들은 투구 아래로 무거운 숨을 내쉬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100m. 돌격 시점의 최종 마속은 습보(Gallop). 양편의 기마가 일 초 아래의 시간 속에서 서로를 향해 창을 뻗고—

-콰아아아아앙!!!

말과 사람과 강철이 울부짖는 충격이 페이른군 후미를 강타했다.

* * *

그 광경을 바라보며 키르하스는 입술을 잘게 씹었다. 협로 끝에서 위태롭게 격전을 치르는 주군과, 적들의 후미에서 압도적인 수적 열세를 감당하며 돌격을 시작한 신전 기사들이 보였다.

그녀는 연신 산자락 위와 협로 아래를 돌아보며 초조하게 입술을 매만졌다. 지금 당장이야 위세가 퍽 대단하다 한들 수의 차이란 쉽사리 뒤집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페르난데스의 계획은 이미 완전히 헝클어졌다. 그녀가 보기에도 이 전투는 아름다운 옥쇄와 장엄한 패전뿐이었다. 적들은 잠시 혼란에 빠진 것일 뿐, 곧 지휘부가 침착함을 되찾으면 언제든 전황은 최악을 향해 치닫기 시작할 터였다.

“프레이야 님, 빨리요!!”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빽 소리쳤다. 그녀의 말을 듣고 있을 저 북부의 여신을 향해서. 그러자 그녀가 기대어 있던 나무 끝에서 퐁, 하고 하늘색 꽃이 한 송이 피어올랐다.

곧, 꽃송이들이 한 방울, 한 방울씩 연달아 터져 나가며 나무줄기를 타고 더 높이 이어졌다. 그녀는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며 시선을 위로 올렸다.

-삐이이익!

나무 끝에 걸린 푸른 하늘에, 매 한 마리가 비상하고 있었다.

“아에렌!!”

-쿠드드드득!

나뭇가지들이 스스로 뒤엉키며 긴 아치형 통로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산맥과 산맥을 가로질러 마치 터널처럼 곧게 이어진 통로 그 끝에, 한 무리의 사내들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키르하스는 그제야 밝게 웃으며 재빨리 말 위에 올라탔다. 사내들의 가장 선두에서, 전투 도끼를 두 손으로 꽉 움켜쥔 여전사가 그녀를 마주하고 함께 웃었다.

“북부의 영웅들은 정확히 있어야 할 때 오는 법이지.”

“이미 지각인걸요?”

“남부 시계는 다소 빠르군.”

아에렌은 웃음을 터트리고는 북부어로 외쳤다.

“그럼 바라는 대로 빠르게 끝내 주자. 전사들!! 선조의 전당을 위해 달려라! 이 땅에 무스펠 신봉자들이 이토록 많이 남았으니, 에인헤랴르의 위엄을 떨쳐 보이자!”

전사들의 고함이 산하를 찢어발길 듯 거칠게 터져 나갔다. 산자락 아래의 병사들은 진군을 멈추고 협로의 양옆을 감싸고 있는 산맥을 바라보았다.

-와아아아아아!!

산이 울부짖는 듯했다. 지기스문트는 혼란에 휩싸인 지휘부에서 눈가를 꾹 누르며 끓어오르는 목소리로 외쳤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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