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375화 (376/388)

375. 킹스게이트 전투 (6)

후열과 측방을 강타당했다고는 하나, 그것이 포위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포위란 본디 다수의 병력이 소수를 향해 펼치는 것이었고 페이른은 여전히 다수에 속해 있었다.

더군다나 각 전선을 떠안고 있는 병력들이 전혀 다른 별개의 지휘 계통을 따른다는 문제도 있었다. 정교한 포위망이나 섬멸 작전 따윈 무리였으며, 따라서 전황은 자연스럽게 산개된 병력 간의 지연전으로 흘러갔다.

후방의 순례기사단, 측방의 북부인들이 성공적인 급습으로 거칠게 페이른의 본대를 밀어붙일 때—

“아, 제길. 알베르트 경. 미안하군.”

“정신 차리십시오. 아직 끝날 때가 아닙니다.”

적의 본대는 자연스럽게, 협로로 둘러싸인 이 킹스게이트의 폐허가 된 관문 아래로 더욱 거세게 밀려들기 시작했다.

페르난데스는 날아드는 칼과 방패를 쳐 내며 옆을 보았다. 비센테는 한쪽 팔을 잃고 반쯤 부서진 투구 아래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캉!

개개인의 기량이 제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전장 위에서 필부의 용맹은 빛을 발하기 어렵다. 제아무리 고도로 단련된 무인이라 한들 생살이 강철보다 단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그러니 한 칼, 그리고 한 칼. 그렇게 병장기가 갑옷의 틈을 파고들 때마다 생채기가 늘어간다. 왕의 갑주는 들어오는 거의 모든 공격을 흘려 내고 있었으나, 적의 수가 너무나 많다.

-캉! 카드드득!

“이…… 괴물들!!”

그러나 반면, 병사들의 낯이 초췌해진다. 전투 망치나 창 따위가 몸을 후려치면, 반드시 그 사이로 두 기사의 대검이 솟구쳤다. 이미 주위는 시체로 작은 구릉을 이룰 지경이었다.

까마귀 사이의 솔개나 양 떼 속의 늑대도 이렇지는 못할 것이다. 병사들의 사기가 점점 더 바닥을 치고 있었다. 칼이 박히지 않고, 설령 박아 넣는다면 반드시 반격하는 자들을 상대로.

-우득!

다가온 병사의 머리를 묵빛 대검이 가로지르고, 그 옆을 파고든 날쌘 병사의 머리에 두꺼운 건틀렛이 얹혔다. 강철이 으스러지는 끔찍한 소음과 함께, 날카로운 비명이 치솟았다.

“끄으으아아악!!”

사람이 산 채로 으깨어지는 소리는 차라리 대검이나 망치 따위가 달려드는 일격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페르난데스는 그런 혼란을 의도하며 투구 아래로 더운 숨을 내쉬고 팔을 휘둘렀다.

‘얼마 남지 않았군.’

막지 못할 일격은 몸으로 받는다. 대검의 빈틈을 노리는 자에겐 주먹을 휘두르고, 너무 근접한 자가 있다면 발로 걷어찼다. 그것으로 사람의 몸은 수수깡처럼 으깨어지곤 했다. 그렇게 백여 명.

한 사람이 군단을 상대로 백여 명을 죽이고 버텼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전설의 영역이다. 그는 비센테를 바라보았다. 비센테는 그와는 달리 인간의 육신으로 그와 함께 같은 전설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

한 팔을 잃고 눈이 풀린 채로, 이따금씩 비틀거리면서도 다가오는 공격에 반응하는 모습은 소름 끼칠 지경이었다. 그러나, 얼마 남지 않았다.

“전하, 아직 살아 계시옵니까?”

“말하게.”

“사죄를 드리고자 합니다.”

“경이 목숨을 건 순간 이미 그건 충분했네. 되었네.”

두 사람은 거친 숨을 헐떡이며 연신 칼을 휘둘렀다. 두 눈으로 적을 좇고, 전신의 감각으로 무기를 휘두르면서도, 이 두 무인은 천천히 대화를 주고받았다.

지금이 아니라면 기회가 없다는 듯이.

“그것이 아닙니다, 전하. 이제부터 다소 무리한 부탁을 할 듯하니, 이에 미리 사죄를 구하고자 합니다.”

“무리한 부탁? 지금 이 상황보다 말인가?”

“그렇습니다.”

페르난데스는 능숙하게 고개를 숙여 창을 피하며 말했다. 창을 내지른 병사는 공격이 빗나간 순간 두 조각이 되어 갈라졌다. 핏물이 촥 튀고, 그 사이로 페르난데스의 건틀릿이 튀어나가 다음 병사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우드득!

인골이 바스러지는 섬칫한 소음과 함께 병사들이 주춤 물러섰다. 페르난데스는 달뜬 숨을 내쉬며 곁을 바라보았다. 왕은 팔 하나 없이도 그보다 두 배는 많은 적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말해 보게.”

그러니, 지금 왕의 목소리가 담담한 것은 신화적인 허세라 할 만했다. 과다 출혈과 전신의 부상, 긴 행군 끝에 이어진 생사의 혈투. 이 모든 것들을 넘어서서, 왕은 여전히 전신으로 투쟁을 외치고 있었다.

“십 분이 필요합니다. 제가 전투에서 이탈하진 않겠으나, 집중이 흐려져 전하께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지켜 달라는 말인가?”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무슨 부탁을 하나 했군. 도주하라 했으면 거절할 생각이었네만.”

-후우우웅!!

왕의 팔이 거칠게 정면을 그었다. 투구 틈 사이로 흘러내린 백금발이 갈기처럼 떠올라 이글거리고, 피에 절어 내려앉던 망토가 다시금 곤두섰다. 왕의 갑주 사이사이에 마구스들이 알알이 박아 넣은 보호 주문에 다시금 마력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콰아앙!!

비센테의 검로를 따라 충격파가 터져 나갔다. 두 눈으로 보고도 어떻게 한 것인지 모를, 마법에 가까운 기예였다. 비센테의 정면에 서 있던 병사들은 육편이 되어 흩어졌다.

비센테의 형형한 눈을 마주한 병사들 몇몇이 무기를 던지며 도망쳤다. 그보다 많은 병사들은 침을 꿀꺽 삼키고 조심스럽게 다가섰다. 여전히, 적의 수는 해일처럼 많았다.

그럼에도 비센테는 꼿꼿이 서서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말했다.

“가신을 지키는 것은 왕의 의무일세. 내 뒤에 서게. 숨이 붙어 있는 시간만큼 지켜 주지.”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전하.”

“내 쪽도 그럴 것 같으니 할 일이 있다면 서두르되, 급하게 치러 후회할 일은 없게 하게.”

비센테의 허세 섞인 장담에 페르난데스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둘은 등을 마주하고 서서, 이제 사위를 완전히 포위한 적병들을 노려보았다.

* * *

“놈들이 옵니다!! 킹스게이트가 뚫렸…… 뚫렸습니다!”

“아, 아버지께서 승하하셨다는 뜻인가? 이것 놓아라! 경!”

“전하!! 전하! 고정하시옵소서! 전하께서 이 자리를 벗어나시면 저 악적들의 손아귀에서 그 누가 백성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겠나이까!”

“아버지, 아버지!!”

에릭은 알트베르트의 갤러리 위에 서서 킹스게이트의 협곡 아래를 지나 진군하는 적병을 보며 소리쳤다. 그가 마지막으로 본 광경은 무너진 협곡의 요새 아래에서 수만의 적병 앞에 홀로 선 아버지의 뒷모습이었다.

이 자리의 누구도 왕의 죽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당연히 저곳에서 살아날 희망 따윈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열댓 살 어린 소년에게서 아비 잃은 슬픔을 지워 주지는 못했다.

에릭을 지탱하던 마지막 끈이 끊어진 것 같았다. 그는 목놓아 울부짖으며 담장 위에 허물어졌다.

누구도 그를 타박할 수는 없었다. 그는 이미 충분히 최선을 다했다. 그는 아비가 이끌고 떠난 데인의 본대가 돌아올 때까지, 피난민들을 추스르고 밀집된 적병을 막아서면서도 의기를 잃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슬픔에 매몰될 때가 아니었다. 적의 수는 여전했고, 아군은 이제 백여 명의 소규모 민병과 아낙, 노인, 그리고 어린아이로 구성된 수만 명의 비무장 피난민들뿐이었다.

“아직 죽지 않았다.”

“대모님……!”

“포기하지 마라. 이 말을 오늘 하루간 몇 번을 하는지 모르겠다만, 지금만큼은 더욱이. 저 자리에 선 두 기사가 여전히 희망을 놓지 않고 있으며, 나 또한 저들과 같은 심경이니. 너희의 왕과 기사와 용이 희망을 노래하고 있거늘, 어찌 너희는 이리 쉽게 비탄에 빠진단 말이냐?”

아벨이 에릭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그녀의 전신엔 핏물 엉긴 붕대가 감겨 있었다. 용의 형상에서 입은 부상이 여전히 그녀의 육신 내부를 할퀴어 놓고 있는 탓이었다.

다시금 용의 모습을 취할 때까지 시간이 필요했고, 지금 컨디션으로 불을 뿜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 모습으로도 여전히 그녀는 칼을 쥘 수 있었고, 그녀의 손에 무기가 쥐여 있는 이상 포기할 생각 따윈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저 먼 곳에서 마치 폭풍처럼 날뛰는 두 기사를 보며 길게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너를 믿는다고 해서, 너에 대해 근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페르난데스.’

그녀의 눈은 저 혼란 속에서도 두 사람의 싸움을 정확히 집어낼 수 있을 정도로 정밀했다. 그녀는 전투의 흐름을 읽으며 아직 저 둘에게 싸움을 이어갈 체력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나, 너는 나를 근심하지 않고 그저 믿거라. 이 성은 너와 나의 힘이 다할 때까지 반드시 지켜 내겠다.’

킹스게이트에서도, 그리고 알트베르트에서도 그녀는 성벽 위의 거의 유일한 비대칭 전력이었다. 페르난데스가 그녀를 이 자리로 보낸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최대한 긴 시간을 최소한의 피해로 버텨 낼 것.

그러니, 그녀는 여전히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보일 뿐이다. 아벨은 칼을 쥐고, 진군하는 군사들을 바라보았다.

* * *

사용할 수 있는 주문은 많지 않다. 마력 회로가 아직 온전히 성장한 것이 아닌 탓이다.

마력이 충분하지도 않다. 이미 그의 회로는 방금 전 마법전의 무리한 활용으로 혹사당해 너덜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력을 전혀 사용할 수 없던 지난날의 육체와는 그 출발점이 다르다. 디모니카의 출력, 인간의 육체가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포텐셜을 여전히 유지한 채로 주문을 자아낼 수 있다는 것은 경이롭기까지 한 기적이다.

‘라비라타, 돌아간다면 반드시 사례하겠소. 큰 빚을 졌군.’

단순히 회생한 것이 아니다. 그의 영혼이 기억하는 최선의 육체를 직접 자아낸 것이다. 오히려 지난 육신은 그의 영혼과 완벽히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성 안토니오 성배의 디모니카 세례는 다소 야만적인 시술에 속했으므로.

-카아앙!

마력 회로를 타고 한 줄기 마력이 거칠게 흘러들었다. 자연에서 마력을 끌어당겨 여과하고, 마법진을 수인으로 대체하여 심상을 그려내는 공정이다. 그렇게 첫 수를 짚으며, 페르난데스는 다른 한 손으로 칼을 휘둘렀다.

청동 옥좌를 사용하던 시절엔, ‘마법을 잘 다루는 전사’의 것에 가까운 싸움을 해 왔다. 마법은 단순한 보조 무장으로 취급하며, 압도적인 출력을 지닌 육체를 주로 활용한 단순한 전투를 강요받았다.

그러나 지금, 그의 몸엔 마력 회로가 심어져 있다. 3년 차 초년생 마법사, 또는 배움이 얕은 와일드캐스트에 불과할 수준의 작고 가느다란 출력의 볼품없는 마력 회로가.

하지만 유물을 통해 마력을 다뤄야만 했던 것과, 진신에 마력 회로를 담고 있는 것. 그 간극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이제 그는 ‘칼을 잘 다루는 마법사’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왕의 시야와 기사의 시야가 다르듯이.

전사의 시야와 마법사의 시야 또한 다르기 마련이니.

-화르륵!

빠르게 짚어낸 수인 끝에서 불똥이 튄다. 마력 회로의 컨디션은 절반 이하, 육체가 감당할 수 있는 백래시를 고려할 때 대마법은 무리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우선은 [사역].

“일어나라.”

주문은 단어로, 수인은 한 어절을 넘지 않도록, 필요한 마력은 한 줌 이상이 되지 않게. 그의 짧은 손짓 끝에서 적들의 핏물로 이루어진 까마귀가 날개를 뻗어 하늘로 도약했다.

잠시 머리가 어지러웠다. 사역마와 시야를 공유하며 일어나는 감각의 교란이다. 그러나 이미 전생에 수도 없이 해 본 일이었다. 페르난데스는 능숙하게 감각을 조율하며 연신 칼을 휘둘렀다.

이제 까마귀가 하늘 위를 크게 맴돌았다. 이것으로 최소한의 조건 하나는 충족했다. 전장을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것.

“지금 마법을 부린 것인가……?”

“제 작은 재주 중 하나지요.”

“저 마법을 부릴 시간이 필요했던 건가?”

“아닙니다. 전하.”

페르난데스는 지친 숨을 내쉬는 왕에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부터 마법을 부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마법은 단순히 마력을 주물러 현실에 간섭하는 어린아이들의 흙장난이 아니다. 페르난데스는 개중 가장 높은 마법사로서 단언할 수 있었다. 마법이란, 있을 수 없는 일들의 총체를 단어로 정의한 것이다.

베이타서스의 신성을 품었던 육신으로는 펼칠 수 없었던 짓들마저도 이제는 가능했다. 비록 마력이 부족해 대마법을 다룰 수 없고, 순례기사단이 도래한 이상 흑마법을 사역할 수도 없다는 제약이 따랐지만.

엔소서리, 당대 모든 흑마법을 끌어모아 마침내 집대성한 위대한 학파의 종주로서, 그는 까마귀의 눈으로 전장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마법은 단순한 마력의 집합이 아니라 관념을 현실로 끌어내리는, 있을 수 없는 일들의 총체를 뜻한다.

그리고 그건 대단히 그리운 감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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