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6. 왕의 서원
하늘에서 전장을 내려다보며, 동시에 두 눈은 사방을 훑는다. 페르난데스는 지금, 도박에 가까운 곡예를 하고 있었다.
-카앙!
칼을 들어 공격을 막아 내었다. 칼끝을 흘리고 폼멜로 적병의 투구를 내려찍는 공세까지, 본디라면 한 번에 이어졌을 검로가 툭툭 끊겨 나갔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인식에 딜레이가 걸리기 시작했다. 사람의 신경은 한 번에 받아들일 수 있는 정보량에 한계가 있었다.
다만 시야가 늘어난 것만으로 이런 상태가 된 것은 아니었다.
-쾅!
“큭!”
어깨에 창이 틀어박혔다. 견갑이 우그러지며 피부가 찢어져 나갔다. 그는 곧장 반격하지 못하고 간신히 자세를 추슬렀다. 그의 신음 소리를 듣고 비센테가 재빨리 창대를 부러트리며 난입했다.
“경, 괜찮나?”
“거의 다 됐습니다.”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우득 돌리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검술이란 힘보다 기교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 기술이었다. 사고의 속도가 느려져 반격과 공세가 매끄럽지 못했다.
그러나 멈출 수 없다. 페르난데스는 까마귀를 빙글 돌려 전장의 다른 방면을 바라보았다. 까마귀의 눈이 단 한시도 멈춤 없이 전장의 모든 구석구석을 훑어내고 있었다.
* * *
북부인을 막아내는 보병 방진의 전선 귀퉁이에서, 한 병사가 내지른 칼날이 어떤 방향으로 꺾일지. 이에 대응하는 북부 전사의 방패가 어떤 방향으로 틀어지고, 그 결과 칼날의 방향이 어떻게 왜곡될지.
이름 모를 북부 전사를 공격한 페이른의 중장보병은 칼날을 제때 추스르지 못한 대가로 목을 잃을 것이다. 삼 초 뒤에.
* * *
순례 기사단의 전투 사제가 내지른 창이 페이른 제3 기병대 한 기사의 가슴을 꿰뚫었다. 사제는 빠르게 기병창을 버리고 칼을 뽑아 올렸으나, 돌격 도중 살짝 틀어진 투구가 오른편 시야각을 방해했다.
그 탓에, 이름 모를 전투 사제는 우측 편에서 달려든 기사의 해머에 반응하지 못하고 정수리를 날카롭게 찍힌다. 삼 초 뒤에.
* * *
전장의 하늘 위를 매끄럽게 나아가는 화살이 있다. 특별히 누군가를 조준한 것도 아니요, 사수의 실력이 월등한 것도 아닌 평범한 한 발의 화살이.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쏘아져 나간 화살은 한 북부 전사의 투구에 맞고 볼품없이 꺾여 튕겨 나갔다.
전사는 화살의 충격으로 멍하게 울리는 머리를 휘휘 저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움푹 파인 투구의 흠을 만지작거리며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다시 무기를 들어 올렸다.
그 직후, 또 다른 눈 먼 화살이 전사의 투구 바이저 아래로 빨려 들어간다. 삼 초 뒤에.
* * *
“쿨럭!”
페르난데스의 입술 사이에서 핏물이 흘렀다. 당장이라도 혼절할 것 같은 신경줄이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간신히 유지되고 있었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자기 자신을 잃어 가는 감각. 시점의 변경은 단순히 보는 방법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개인의 사건을 벗어나 전장 자체에 몰입하는 과정, 그 사이에서 ‘내’가 사라진다.
정보가 쌓일수록 정신이 흩어진다. 이는 정보 반사 독립체들의 시선을 모사한 기술이었다. 소모되는 마력은 단 한 줌, 사역마의 눈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가능한 일이었으나 정신력의 소모는 그렇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멈춰야 한다. 그는 지금 전장 한복판에 있다. 비센테가 최선을 다해 공격을 쳐 내고 있었지만, 밀려드는 적병의 모든 공세를 그 홀로 감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그는 재빨리 칼을 내질러 공세를 막아 내며 동시에 사역마의 눈을 조작했다. 계속, 계속. 끊임없이. 마침내 전장의 모든 방면, 모든 혈투. 아니, 모든 움직임 하나하나를 눈에 담을 때까지.
* * *
세속 왕가의 첩보부들에겐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말이 있다. 충분히 많은 양의 정보는 미래를 보장한다고.
작게는 단순히 날씨나 기후 변화에서부터, 각 가문의 관계에서 물자의 흐름, 최근의 정치적 이슈, 더 심도 깊게는 극히 내밀한 자들만 알고 있는 음모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보를 규합해 나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어떤 그림이 보인다.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그러나 충분히 형태를 파악할 수 있는 그림이. 미래라는 이름의 그림이.
외부의 개입이 차단된 상황에선, 설령 모든 변인들을 통제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해당 지역의 모든 정보를 획득한 이후엔 미래를 알 수 있다.
다만, 첩보부 요원들의 책상물림과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 페르난데스는 초 단위 아래의 시간에서 그 모든 정보들을 분석해야 했다는 것이며—
“……일어나라.”
현장에서, 목숨을 노리는 창칼을 막아 내는 와중에 전장 전역을 굽어봐야 했다는 것이고—
“일어나라……!!”
그조차도, 그가 의도한 마법의 한 요인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한 마디 이하의 주문, 한 어절 미만의 수인, 한 줌 아래의 마력. 최소한의 연산 기능만을 활용한 ‘저급 술수’. 싱글 캐스팅의 너무나 사소한, 그래서 어떤 전투 마법사도 신경 쓰지 않을.
아니, 주의 깊게 살피지 않는다면 자연 마력으로 착각할 만큼 희미한 자취만을 남긴 채. 손가락이 허공을 움켜쥐어, 마지막 수인을 잡아 내었다.
동시에, 창공을 향해 그의 마력 한 줄기가 뻗어 나갔다. 하늘 위에서 날갯짓하는 사역마의 곁을 향해.
* * *
키르하스는 초조했다. 급습은 완벽했으나 병력의 숫자에서 오는 불리함을 뒤집기엔 역부족이었다. 밀어붙이는 듯했던 전선이 어느 순간 교착되어 지지부진한 소모전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적 지휘부의 혼란이 빠르게 수습되어 가고 있었다. 후방의 기사단과 연계를 하려 해도, 저 방향의 지휘관과 합을 맞출 방법이 없었다.
합을 맞춘다 한들 상황이 희망적이진 않다. 끌어모을 대로 모아 온 북부의 병력이 삼천을 조금 넘고, 순례기사단의 병력 또한 그 정도. 반면 적의 총병력은 삼만이다.
다섯 배의 차이다. 진형의 유리함과 급습의 이점이 그나마 전선을 유지할 수 있게 돕는 유일한 요인이었다. 그 반면에—
‘은공이 저기에……!’
페르난데스와 비센테는 단 두 사람의 몸으로 적의 와류를 직접 막아서고 있었다. 물론 막아선다는 표현을 쓰기엔 적이 부족하다. 페이른의 선봉은 이미 그들을 지나쳐 알트베르트로 나아가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저 방향에 페르난데스가 고립되어 분투하고 있음은 분명했다. 당장 그를 도와야 했다. 그러나 무슨 수로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밀어붙여! 남부의 희멀건한 것들에게 밀려서야 되겠나! 이봐, 군나르손! 도끼 바싹 들어!”
아에렌은 전역을 누비며 연신 고함치고 있었다. 그녀의 분투와 전사 개개인의 기량 차에도 불구하고 북부인들은 수적 열세에 쉽사리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선이 고착되고 적들이 본격적인 방진을 짜 체계적인 반격을 시작한다면 고립되는 것은 북부인이 될 것이었다. 좋지 않다. 키르하스는 시시각각 다가오는 패배의 예감, 그리고 페르난데스를 향한 걱정에 연신 날뛰며 초조함을 곱씹었다.
그 순간, 꼬리가 바싹 뛰어올랐다.
“읏?!”
수인 특유의 예리한 감각 탓이라 해도 좋았다. 아니면 그녀의 눈이 본능적으로 포착하는 승리의 감각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하늘 위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푸른 것이 저 하늘 너머에 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보자, 화살 하나 닿지 않을 높은 하늘 위로 푸른 기운을 둘러친 검붉은 까마귀가 저 홀로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은공……?”
짙푸른 형상은 예로부터 페르난데스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키르하스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가, 화들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고개를 크게 젖혔다.
-후우웅!
눈 먼 화살이 그녀의 뺨을 할퀴고 지나갔다. 보고 피한 것이 아니었다. 시야 바깥에서 날아온 것이었고, 일반적이라면 이렇게 완벽히 피할 수 없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천운이나 어떤 놀라운 본능 따위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뺨을 꿰뚫는 화살을 분명히 ‘보았다’.
“이건……?”
그녀는 상처 하나 없는 뺨 언저리를 손가락으로 살살 쓸어 만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공기가 변하고 있었다. 사방에서 푸른 실선이 날뛴다. 승리를 향한 예감이 전선 위를 거칠게 내달리고 있다. 단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서서히 충격력을 상실해 가던 선두의 전사들 위로!
* * *
한 전사는 경악하며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급히 숙였다. 찰나의 순간, 그의 몸이 있던 자리에 창날이 허공을 긁어낸다.
전사는 이 놀라운 행운에 감사할 겨를도 없이 반사적으로 도끼를 휘둘러 병사의 목을 쳤다. 그러고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허리 어림을 쓰다듬었다. 상처 따윈 없었다.
“이게 대체……?”
* * *
순례 기사는 급히 고개를 틀었다. 아슬아슬하게 바이저 옆의 철판 위로 화살이 튕겨 나갔다. 기사는 삐뚤어진 투구를 고쳐 쓰고는 하늘을 바라보며 성호를 그었다.
* * *
마법사들은 이따금씩, 마법엔 마력과 다른 소비재가 있다고 말한다. 어떤 마법사는 집중력이라고도, 또 어떤 마법사는 정신력이라고도 부르는 감각이다.
기실 특별할 것도 없다. 당연히 모든 행위엔 정신력이 소모된다. 단순히 밭을 매는 농부도, 강철을 단조하는 야금 장인도, 또는 회계 장부를 뒤적이는 상인마저도 그렇다.
그러나 마법사들이 말하는 정신력은 조금 더 근원적인 의미를 지닌다.
마법사들은 마력 회로라 불리는 후천적인 신경을 강제로 육체 내부에 삽입하여, 마력을 이용해 관념을 현실에 끌어내리는 방식으로 마법을 구현한다.
관념이란 본디 정신의 영역이므로, 마법사들의 정신력은 그 한계까지 소모될 때 일반인들과는 전혀 다른 부작용을 가져온다. 단순히 과로로 혼절하는 일반인들과는 달리 실제 육체에 붕괴를 수반하는 것이다.
관용적으로, 이런 상황을 ‘선을 탄다’라고 표현한다. 상상과 현실의 선, 또는 삶과 죽음의 선 사이를 타 넘는다는 의미다.
“크……흑!”
그리고 페르난데스는 지금 선을 밟고 있었다. 최소한의 연산 기능조차도 생존을 위해 투자해야 하는 이 지독한 전쟁터에서, 그는 전장 전역을 굽어보며 동시에 마법을 자아 내고, 또 심지어 직접 칼을 휘둘러 공격을 막아 내야 했다.
사고가 뚝뚝 끊겼다. 그러나 그건 육체에 한한 일이다. 그의 정신은 지금 창공을 비상하며 전장을 뒤덮고 있었다. 이 괴리가 그의 육신을 시시각각 살라 먹고 있었다.
일반인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개념이고, 범상한 마법사들이라 할지라도 시도조차 하지 않을 행위였다. 심지어 당년의 페이자쉬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가능과 불가능을 넘어서, 무의미한 짓이다. 지금 그가 하는 행위는 투정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 정도의 정신력과 마력을 소모해야 하는 일이라면, 페이자쉬는 차라리 대규모 살상 주문을 외워 전황을 뒤집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페이자쉬라면 결코 선택하지 않았을 방식을 시도했다. 모두를 죽여 위협 요인의 근원을 제거하는 페이자쉬와는 달리, 페르난데스는 지금 모두를 살리기 위해 자기 자신을 소모하고 있었다.
“이게 경의 마법인가?”
“그렇습니다. 전하.”
비센테는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느새 비센테의 몸에서 긴장과 부담이 적이 사라져 있었다. 그는 바라보지 않고도 날아드는 화살을 피하고, 칼을 비껴 내고, 창을 흘리고 있었다.
기적과 같은 무예 탓이 아니다. 보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에 닿을 모든 공격이, 지극히 찰나의 순간이지만 확실히, ‘보였다’.
“말도 안 되는 짓을 했군. 이게 가능한 일인가? 고작 나 하나에게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겠지? 몇이나 이런 눈을 가지게 된 것인가?”
“모두가 그렇습니다.”
“……모두가? 이 전역에서 칼을 쥔 자 모두가?”
“적어도, 데인의 존치를 위해 칼을 쥔 자라면. 모두가. 예, 그렇습니다.”
“허…… 하하. 하하하!”
비센테는 껄껄 웃고는 칼을 놀렸다. 굳이 적의 공격을 파악하고 알맞은 검술을 펼치기 위해 사고할 필요 자체가 없었다. 몸에 닿을 적의 공격, 그 경로가 하나하나 머릿속에 들어오니 남은 것은 그저 내키는 대로 공격하고 필요한 만큼 움직이면 그만이었다.
자신의 이런 상태가 이 전장 전역의 모두에게 일어나고 있다면, 그건—
“한 손으로 능히 열 사람을 상대할 수 있겠군. 이 주문의 이름이 무엇인가?”
“서원……. 비센테 왕의 서원. 그 이름으로 정했습니다.”
세상 모든 불의에 맞설 수는 없더라도, 지치고 무력한 이들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겠다는 서원.
그 고결한 맹세를 보고 전장에 나서기로 마음먹은 수많은 기사들 중에 그 자신도 포함되어 있으니. 페르난데스는 이 주문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지 않기로 했다.
죽을 운명에 놓인 모든 전사들에게 삼 초의 미래를 제공하는 주문. 한정된 상황과 극한의 자기 소모를 감당해야 하며, 주문이 완성되는 순간 그 백래시로 시전자가 완벽하게 무력화되기까지 하지만, 그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페르난데스는 움켜쥔 손을 풀어 마법을 해제하지 않았다.
다리가 풀리고 고개가 떨어져도. 당장 다가올 적의 창칼에 무력하게 이 한 몸을 내어주어야 할지라도.
전생과 다른 선택을 하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왔으니. 세상을 지옥에 밀어 넣은, 죄악으로 얼룩진 영혼임에도 다시금 이 땅을 구하겠다 다짐했으니.
이번 한 번 정도는 어리석은 짓을 저질러도 좋지 않겠나. 페르난데스는 비틀거리며 허물어지는 와중에도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어쩐지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이것이 지독한 자기 위안에 불과하더라도 좋았다. 설령 이런 짓을 한다 한들 그의 과거와 죄악을 털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언제나 위악보다 위선이 낫지 않겠는가.
-턱.
그런 그의 어깨를 다른 이의 어깨가 받쳤다. 비센테는 그를 지탱하며 웃었다.
“금칠도 이 정도면 받을 만하군. 내가 지금 한 손뿐이라 경을 부축하지는 못하니, 알아서 발을 맞추게.”
“전하.”
“전쟁을 끝내러 갈 계획인데, 이 자리에 경을 두고 갈 수는 없지 않겠나.”
페르난데스는 비센테의 호쾌한 웃음에 마주 웃고는 걸음을 옮겼다.
* * *
“그나저나 경, 이런 대단한 마법사라는 것은 왜 숨긴 것인가?”
“대단한 마법사라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에 욕인 탓입니다.”
“그건 그렇군. 하하하! 기왕지사 사내가 뜻을 품고 일어섰다면 마구스보다는 기사가 낫지 않겠나!”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페르난데스는 시원하게 웃는 비센테에게 별 불만을 품지 않았다. 이제 와 마법사였던 과거를 모욕한다 한들 자존심이 상하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