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377화 (378/388)

377. 네 죄를 사하는 것은 (1)

어떤 불가해한 존재를 바라볼 때, 인간은 종종 경악이나 탄성조차 잊고는 한다. 페이른 본대의 지휘부 또한 그랬다.

교착 상태에 접어들고, 이내 우위를 점해 가던 전선이 기약 없이 밀리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페이른 지휘부는 침묵을 지켰다.

명령 전달이 끊긴 시점에서 병사들은 혼란에 휩싸였다. 전선 전방에서 파발이 빗발치고 있었으나 하달되는 명령은 없었다.

“전하……. 베르톨프 백작이 전사했습니다. 제2 군단의 현장 지휘관 파견을 요청합니다.”

“전하! 파울 폰 보크 후작의 보고입니다! 아군이 학살당하고 있습니다!”

“제3 기병대에서, 본대에 보고입니다! 순례기사단의 후방 강타를 대비하셔야 합니다. 기병대장 에버위르겐 경은 전사했습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보고를 들으며 지기스문트의 머릿속엔 단 한 단어만 떠돌 뿐이었다. 패배. 그는 떨리는 손으로 메마른 얼굴을 쓸어 만지며 중얼거렸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냐……?”

몇 번째일지 모르는 공허한 물음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패배할 수 있는 전장이 아니었다. 몇 가지 특이사항이야 있었으되, 대체 어떻게 가리고 가려 뽑은 최정예 삼만 대군이 이토록 허망하게 무너질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단 한 번의 패배로?

지기스문트의 속삭임을 듣고 지휘부의 장군들이 깊은 한탄을 내뱉었다. 오직 왕가의 부흥을 위해 두 팔 걷고 나섰던 무골들도, 또는 생존을 위해 왕자의 난에 빌붙었던 간신들도. 아니면 지옥의 세력에 타락해 살육을 즐기던 하수인들마저도.

개인의 무능을 탓하기엔 너무나 큰 결과였다.

“대체 어떻게……? 왜 아무도 죽지 않느냐? 왜?”

정확히 말해선 죽지 않는 것이 아니다. 전장은 지금도 게걸스럽게 산 자의 혈육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단 하나, 오직 아군 병사들의 죽음만을 탐한다는 것이었다.

사람과 사람이 칼을 들고 투쟁할 때, 한쪽이 죽을 수야 있다. 그것이 아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수만 명이 칼을 들고 싸우는 지금 이 순간에, 오직 아군만 희생되는 것은 명백히 기이하다.

“심판…… 심판이오…….”

한 장수가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기스문트는 핏발 선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심판?! 누가? 누가 감히 짐의 권세에 심판을 논하는가!”

“저 높은 하늘 위의 신들이…… 만신전의 분노가 내린 것이오……! 백성을 학살하고 그 고혈을 뽑아내 쌓아 올린 옥좌 위로!”

“이노옴!!”

지기스문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그 말을 뱉은 장수는 퍽 담담한 눈으로 지기스문트를 마주 보았다.

“무엇들 하는가! 당장 저 반역도의 혀를 뽑고 목을 쳐라!”

“…….”

지기스문트의 호령에도 감히 나서는 자가 없었다. 본디 쥐들은 좌초하는 배를 누구보다 빠르게 알아차리는 법이며, 이 자리에 모인 장수들 대부분은 그런 자들이었다.

반역 왕자의 편에 서서 한몫 챙기려는 쥐들과, 국운을 위한다는 핑계 앞에 신념과 서약을 포기한 배반자들. 이들에게 항명과 배신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지기스문트는 입술을 짓씹으며 침묵하는 장수들을 노려보았다.

점점 좌중의 분위기가 흉흉해져 갔다. 당장 칼부림을 할 듯 칼자루 위에 검지를 얹고 까딱거리는 무장들과, 도주할 생각에 눈을 뒤룩뒤룩 굴리는 문벌 귀족들의 모습이 보였다.

지기스문트는 쥐고 있던 청동잔에 힘을 주었다. 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잔이 갈려 나갔다.

“그래, 경들의 생각이 그렇단 말이렷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무장들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칼자루 위에 손을 얹었다. 그들은 지기스문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우리의 목적은 하나였소. 조국의 부흥. 그런데 지금 꼴을 보시오. 국토가 마력에 오염된 것은 사고였다 한들, 백성들을 기아 속에 밀어 넣고 병사들을 차출해 이 먼 땅까지 원정을 보내어 놓고, 이제 와 모두 몰살당할 지경에 이르렀소!”

“…….”

“그러니, 우리에겐 이 병사들을 되살려 조국의 품으로 돌려보내야 할 의무만 남았을 뿐이오. 전쟁은 끝이오! 그대는 미치광이 폭군으로 역사에 남아 영원토록 후대 왕가의 반면교사가 될 것이오. 우리는 더 이상 그대의 말을 듣지 않겠소!”

장수들이 칼을 뽑아 들자 이 반역과 관계없는 귀족들의 낯이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렸다. 무장들의 반역이 언제부터 준비된 것인지는 몰라도,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들의 목숨 또한 보전하기 어려울 터였다.

“오, 그래서 내 목을 들고 가 데인의 마구간지기들에게 자비라도 구걸하겠다 이건가?”

“그래야 한다면.”

“재밌군. 백성을 위했다? 조국의 영광을 위했다? 정녕 너희가 그렇게 생각했더냐?”

지기스문트는 구겨진 잔을 바닥에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눈 아래에 붉은 마력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아녀자를 고문하고 학살하며 불응하는 이들을 화형시킨 너희가? 강역에 넘쳐나는 시체들은 매장할 공간조차 없어서 야지에 쓰레기 버리듯 내던진 너희가? 정녕코 너희가 백성을 위해 그리했다 말하느냐? 역겹다. 역겹구나!”

“그건 모두 그대의 명령 떄문에……!”

“오, 명령이라! 단지 도구에 불과했다? 좋은 핑계다! 그렇다면 너희는 어째서 지난 반정 당시에 선왕의 명을 듣지 않았느냐? 하하하! 너! 에른스트! 네가 짐에게 충성을 맹세할 때 너는 단지 하위 장교에 불과했었지! 그때 너는 도구가 아니기라도 했다더냐?”

지기스문트의 손아귀에 억센 힘줄이 뱀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형형한 눈으로 무장들을 하나하나 노려보며 외쳤다.

“하인리히, 발트, 아르트르! 그리고 너희 모두가! 연줄 하나 없이 한직에 머물러 있던 너희 모두가, 더 높은 작위와 직급을 위해 내게 충성하고 중앙의 귀족들을 주살할 때에도 백성들을 위함이었나? 정녕 그랬었던가?”

“닥쳐라! 이놈!”

“네가 그렇게 해 보아라! 직접 네 그 칼로 짐을 닥치게 해 보아라! 어디, 두 왕을 배신한 자라는 오명은 남기기가 싫더냐? 역겨운 것들……! 배포도 능력도 없는 주제에 욕심을 야망이라 금칠하며 꼬리 흔드는 개들이!”

“다들 저 미치광이를 죽여라!!”

-콰앙!

무장들은 모욕에 몸을 떨며 칼을 뽑고 달려들었다. 숙련된 기사들이 일제히 펼친 검격이 어지럽게 지휘부 안을 물들였다. 칼날이 번뜩이며 지기스문트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카드득!

그러나 칼날은 지기스문트의 피부 위에 멈춰 서서 더 이상 파고들지 못했다. 피부 위를 스치는 칼날이 숫제 금속 가는 소리를 내며 멈췄다. 지기스문트는 자신의 몸 위를 긁어내는 칼날들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게 무슨……!”

“이제 놀음은 끝이다. 아직 때가 이르지만, 장단을 맞출 시기가 지났구나.”

인간의 살점은 결코 강철보다 견고할 수 없다. 그러나 칼날은 지기스문트의 피부를 끝끝내 베어 내지 못했다. 경악한 무관들의 얼굴 위로 천천히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지휘부 내부의 마력등이 하나둘 터져 나갔다. 마력이 휘몰아치며 거친 바람 소리를 냈다. 그리고—

-화르륵!

“끄아아아악!!”

칼을 든 무관의 손 위에서 불길이 뱀처럼 휘어지며 손을 타고 올랐다. 살이 익어가는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끔찍한 탄내가 막사 안에 퍼져 나갔다.

경악이 번지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녹슨 쇠와 유황의 악취가 막사 내부에 퍼졌다. 제아무리 왕이 친전한 엄중한 지휘부라 할지라도 완전히 밀폐된 공간은 아니었으나, 지금 이 순간 막사 내부엔 정오의 햇살조차 들지 않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유일한 광원은 지기스문트를 중심으로 번져 나가는 불꽃의 싯누런 빛뿐이었다. 화염 속에서, 지기스문트는 쉿쉿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희의 어리석음과 무능함이 질리는군. 동부를 온전히 무릎 꿇린 연후에 해야 했을 일이거늘…… 뭐, 이르든 늦든 이젠 상관없겠지.]

“마, 마물이 왕자의 탈을 쓰고 있었구나!”

[우리 모두가 누군가의 탈을 쓰고 살지 않았던가?]

-으적!

화염 속에서 붉은 손이 나타나 가까이 선 무관의 머리를 움켜쥐고 그대로 터트렸다. 목 위가 사라진 시체가 빠르게 타들어 가며 새카만 뼛조각만 남긴 채 요란하게 바닥을 굴렀다.

그 위로 굵은 기둥 같은 다리가 드러나 바닥의 뼈무덤을 짓밟고 으스러트렸다. 귀족들은 경악에 찬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지기스문트가 서 있던 자리엔, 붉은 피부와 큰 뿔을 지닌, 거대한 근육질의 존재가 어둠을 뚫고 서 있었다. 그것은 황동색으로 타오르는 눈동자를 굴리며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이 말을 들으면 마음이 편해지겠나? 너희 모두는 결국 죽을 운명이었다. 쓸모가 다한 이후엔.]

악마는 무쇠가 갈려 나가는 듯한 소리로 웃음을 터트리며 손아귀를 들어 올렸다. 비명은 그것의 행동보다 반 박자 늦게 터져 나왔다.

* * *

“오.”

비센테의 부축을 받으며 걸음을 옮기던 페르난데스가 문득 발을 멈추고 짧게 감탄했다. 비센테는 그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는가?”

“놈들이 예상보다 과감한 수를 썼군요.”

“그대의 마법 때문에? 그도 그렇겠구나. 전황이 뒤집히고 있으니.”

비센테는 여전히 적병 한가운데에 있었으나 그에게 달려드는 병사들의 수가 크게 줄어 있었다. 그가 거의 시체로 길을 쌓다시피 적들을 도륙한 탓도 있겠으나, 그보다 적병들의 혼란이 더 크게 작용한 것이다.

페이른군은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지휘관으로서 전장을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일개 기사로 전선에 투입된 그조차도 느낄 수 있도록. 전장에는 흐름이란 것이 있다. 분위기와 전황으로 표현되곤 하는 그런 것들이다.

비센테는 본능적으로 그 흐름이 넘어오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이성적으로는, 적들의 지휘 계통이 마비되었음을 알아챘다. 병사들을 독려하고 인솔해야 할 장교급 무관들이 하나둘 사라진 탓이다.

“헌데 과감한 수라니? 이제 놈들에게 도주나 옥쇄 말고 더 나은 수단이 있겠나?”

“하나가 더 있기야 합니다. 보다 초월적인 존재의 힘을 빌리는 것 말이지요.”

“초월적인 존재라……? 당연히 만신전의 대신들은 아니겠지. 하하, 지옥의 마귀들이 나타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그 외에 놈들을 도울 수 있는 자들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하고는, 페르난데스는 짧게 코웃음을 쳤다. 그는 다시 허리를 펴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놈들 또한 페이른의 왕을 도울 수는 없을 거다.”

“그러니 우스운 일이 아닙니까. 거인학살자의 후손과 이단심문관 앞에서 악마를 부리는 짓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지 알려주게 되었으니.”

“음, 정정할 필요가 있겠군.”

페르난데스의 말에 비센테는 털털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거인학살자의 후손이나 이단심문관, 그런 것이 아니라. 두 원탁 기사 앞에서라고 정정해 주게나. 만검의회의 투표권자가 둘이나 있거늘 감히 마귀 잡졸 따위가 이제 와 전황을 뒤집기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비센테는 그렇게 말하며 칼을 휘둘렀다. 파리한 안색으로 벌벌 떨며 애써 창을 내밀던 병사가 칼등에 얻어맞고 나뒹굴었다.

“이제 죽이진 않으시는군요?”

“경의 말을 들으니 이자들은 결국 왕의 꼭두각시에 불과했겠구나 싶다. 대저 전쟁에서 병사에게 무슨 의도와 악의가 있겠나. 본디 전장의 악의는 곧 군주의 악의와 동의어일세. 이들은 격퇴의 대상이 될 수는 있어도 증오의 대상이 될 수는 없지.”

“하지만 그리하자면 너무 번잡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들 하나하나를 무력화시키며 나아가는 것엔 심력이 낭비될 겁니다.”

페르난데스는 그렇게 말하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 몸이 원탁의 일원이기는 하나, 세속의 신분을 내려놓으면 서품받은 사제이기도 합니다. 전하.”

“설교로 감화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보다 더 확실하고 평화로운 방식이 있지요. 제가 몸을 담은 수도원에선 이따금씩 사용하곤 합니다.”

잠시 운을 뗀 페르난데스는 곧 사나운 얼굴로 준엄하게 소리쳤다.

“길을 비켜라, 만신전의 양들아!! 너희의 전쟁은 이제 끝났으며, 이제 주의 정의 아래에 판결의 시간만 남았을 뿐이라! 무장을 내려놓고 회개한다면 그 과오를 허물치 아니할 것이며, 너희의 죗값은 왕의 몫이니!! 길을 열고 물러서라!! 나는 이단심문관, 세르너드의 알베르트다!!”

그의 외침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심약한 병사들은 순식간에 혼비백산해 도망쳤고, 억지로 자리를 지키던 병사들 또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지휘부로 향하는 길이 열렸다. 비센테는 잠시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껄껄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기사 말고 사제가 될 걸 그랬군!”

“제 형제들은 이를 북풍과 태양 전술이라 부릅니다. 전하.”

“당연히 내가 태양이겠지?”

“사제로서 말씀드리건대, 이 하늘의 빛은 당연히 만신전의 불빛뿐이 아니겠습니까?”

디모니카는 심문이나 회유에 능하지 않다. 그들은 보다 더 빠르고 확실한 방법을 선호하며, 애초에 디모니카는 신분을 숨기고 활동할 필요가 없었다. 은밀하게 이단을 탐문하는 것은 헤레티카의 일이었으며, 디모니카는 오직 악마 격살의 현장에만 투입되는 까닭이다.

따라서 디모니카가 민간인을 대상으로 해산을 명령할 때, 그들은 그저 교회의 권위를 내세워 소리치곤 한다. 이런 방식에 대해 세르지오는 ‘북풍과 태양 전술’이라고 부르고는 했다.

지독하리만치 단순하고 유치한 작명법이다. 그러나 어느새 그들의 사고방식에 반쯤 녹아든 페르난데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말하고는 새삼 스스로를 경멸하고 싶어졌다.

“그럼 어디 북풍을 좀 보여 주어야겠군.”

하지만 비센테는 이 이름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연신 피식거리며 당당하게 열린 길을 따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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