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378화 (379/388)

378. 네 죄를 사하는 것은 (2)

페이른의 지휘부 막사는 검붉은 불길에 휩싸여 이글거리고 있었다. 불똥이 타닥이며 너울거리고, 지독한 유황 냄새가 탄내 사이에 섞여 흘렀다.

병사들은 불길을 잡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공황에 빠져 물러섰다. 몇몇 심약한 병사들은 혼절했고, 그나마 정신을 차린 자들조차도 뒤를 돌아 달려 나갔다.

“진홍대공의 가호입니다.”

페르난데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불길을 바라보았다. 화려하게 타오르는 불꽃은 오히려 음울한 어둠을 품어, 그 내부에 정오의 햇살이 들지 않았다.

그 불경한 광경에 비센테는 인상을 찌푸렸다. 갑주와 대검의 무게가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무거워지고 있었다.

-따악!

페르난데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비센테의 몸을 짓누르던 중압감이 가셨다.

“정신을 단단히 붙잡으십시오. 이제 제가 큰 도움이 되어 드리기 어려우니, 전하께서 무너지시면 안 됩니다.”

“놈의 정체를 아는가?”

“진홍대공의 가호를 받은 하수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악마는커녕 그 반편조차 되지 못한 머저리에 불과하지요.”

페르난데스는 혐오감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그는 싸늘한 눈으로 불길 사이를 바라보았다.

“이 시대에 진홍대공의 가호를 받기 위해선 아주 희귀한 유물들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유물들의 공능을 모조리 활용한다 해서, 놈이 악마의 위상으로 승천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굉장히 자세히 알고 있군? 이단심문청의 정보인가? 나는 경이 말하기 전까진 진홍대공이라는 악마의 존재조차 들은 바가 없네.”

“경험입니다.”

비센테가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페르난데스는 그 이상 설명을 이어가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마력 회로의 상태를 점검했다.

그의 실낱같은 마력 회로는 이미 당분간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치료에 전념해야 간신히 기능을 복구할 수 있을 정도로, 신경 다발 자체가 처참하게 부서져 있었다.

이건 아마도 아벨을 구하고 페이른 전투 마법사들에게 카운터 스펠을 먹일 당시에 입은 부상일 터였다. 좋지 않았다.

이제 상대하려는 놈은……. 지기스문트는 비록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어도, 과소평가해서도 안 되는 녀석이었다. 진홍대공의 가호를 전신에 둘렀다는 것은, 적어도 전투에 한해서 필멸자의 한계를 깨어냈다는 소리니까.

‘부럽기도 하지.’

페르난데스는 쯧, 하고 혀를 찼다. 지기스문트가 마법사였다면 진홍대공의 가호가 그에게 유리하게만 작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가호는 인간의 이성을 뭉개고 파괴 본능을 부채질하는 종류의 것이니까.

하지만 전사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육체의 성능과 개인의 기량이 한계를 초월한 자들의 것에 가까워지며, 육신이 인간의 탈을 벗게 될 터였다.

‘무슨 유물을 얻었을까. 자카스밀? 팔레디트의 눈? 우르겐의 오른손은 지금쯤 땅 밑에 있을 테니 아닐 거고…….’

진홍대공의 봉인을 해제하기 위해 그의 유물을 연구하고 행방을 수색하던 기간. 그 오랜 도주와 추적의 기간 동안 그가 수습했던 대악마의 유물은 물질 세계 위에 저 셋뿐이었다.

그중에 페이른의 왕자 신분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피 흘리는 도끼, 자카스밀과 팔레디트의 눈이라 불리는 보호의 부적 정도일 텐데, 그건 직접 만나 보기 전까지 파악할 방법이 없었다.

-콰아아앙!

지휘부 막사를 향해 다시 발걸음을 옮기자, 불에 휩싸인 막사 한 귀퉁이가 거칠게 터져 나가며 검은 매연이 하늘 위로 치솟았다. 용오름이 내리듯 성탑처럼 굵은 매연 기둥이 푸른 가을 한낮의 하늘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이봐, 알베르트 경. 혹시 놈의 죽음에 동의하는가?”

“……예?”

“중요한 일이니 서둘러 대답하게.”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페르난데스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비센테는 무슨 흥이 난 것인지 픽 웃으며 한 발자국 앞으로 크게 나아갔다.

“지기스문트!! 만검의회의 원탁 기사들이 네 처후에 대해 논의하였다! 의회의 결의는 죽음이며, 이는 모든 원탁 기사들의 뜻이로다! 모습을 드러내라! 나와서 네 운명을 받아들여라!!”

이 자리에 원탁 기사라 함은 둘뿐이며, 만검의회는 데인 왕국의 왕이 직접 주관하는 어전 회의를 뜻하는 말이니. 어떻게 따지면 맞는 말이라 할 수도 있었다.

“전하, 만검의회를 칭하기엔 정족수가 미달되지 않겠습니까?”

“무릇 왕의 의결권은 원탁 기사 중 으뜸이다.”

“……원탁이라 불리는 이유가 평등을 의미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당연히 어떤 신분은 다른 신분보다 더 ‘평등’하지. 가장 ‘평등’한 권한을 지닌 자가 바로 왕이다.”

페르난데스는 이 촌극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곧 불기둥 속에서 쇳조각이 으스러지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감히!! 짐에게 운명을 논하였느냐!!]

-콰앙!!

반쯤 허물어진 막사를 박차며, 불길에 휩싸인 거인이 몸을 드러냈다.

“오, 예의마저 없는 놈이로군. 그렇지 않나?”

“참으로 그렇습니다. 전하.”

“놈의 죗값에 왕실 모독과 어전 불경을 더한다면 판결에 영향을 미칠 것 같은가?”

“그렇진 않을 겁니다, 전하. 만검의회의 지고한 뜻에 따르자면, 놈에게 내려질 판결은 단 하나뿐입니다.”

페르난데스와 비센테는 각자 거리를 벌리고 칼을 뽑아 올렸다. 한쪽 팔을 잃은 기사와 당장 운신조차 버거운 기사가 같은 자세로 칼날을 들어 올리며 그을음을 등진 거인을 향해 걸었다.

“죽음.”

* * *

무저갱의 대악마, 그리고 천상의 대신들은 물질 세계의 지성체들에게 경외를 받아 제 살을 찌운다. 가령 태양을 숭앙하는 자들의 신앙은 샤일드에게 흘러가고, 질병과 병충해를 두려워한다면 우르카시아에게 그 감정이 흘러가는 식이다.

이렇듯, 당대의 패러다임 혹은 신앙의 규모가 그 신격의 강대함을 증명한다. 한때 미지와 야만의 공포를 독점하던 예카세트가, 문명 사회의 시대에 그 성세를 잃어버린 것처럼.

그렇다면 이러한 신들이 내리는 가호는, 그 신격의 강인함에 좌우되는가? 정답은 놀랍게도 ‘아니다’.

‘선택과 집중의 문제지.’

모방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성물은 그 자체로 강대한 힘을 지닌다. 그렇듯 범상한 성물은 그 격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베이타서스의 열쇠검 로사리오처럼, 상징만 남았을 뿐 희소성 없이 누구나 지니고 다니는 성물엔 신성이 담기지 않는다.

다수의 신도를 지닌 대신, 수많은 하수인을 거느린 대악마. 그들의 공통점은, 가호의 농도가 분산되어 있다는 것. 그러나 타이반의 경우에는—

‘이 시대, 타이반은 신도가 극히 드물고, 존재가 거의 감추어져 있으며 노출된 유물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전생 시절, 페이자쉬가 굳이 타이반을 섬긴 이유가 그것이었다. 강대한 힘을 지닌 대악마에게 그 하수인마저 적다는 메리트 때문이었다.

다른 대악마들은 막강한 권세와 다수의 신도를 사역하고 있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지하 조직들을 포함한다면, 하나의 대악마와 그 수하들을 섬기는 인간 신도들은 셀 수조차 없을 지경이다.

그런 와중에 떠돌이 와일드캐스트가 진정한 힘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선택을 해야 했을까. 설령 그것이 마법의 위대함과는 전혀 연관 없는 관념을 다스리는 존재라 할지라도, 페르난데스에게 타이반은 그 자체로도 너무나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그리고 그 매력적인 선택지가, 지금 이 시대엔 저 사내란 말이렷다.

[너희 모두를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겠다! 이 세계를 조각 내고, 이 땅 모두와 저 먼 천상의 자락까지 불태워 그분께 공양하겠다!!]

“너무나 열화되었군.”

페르난데스는 짧게 혀를 차며 놈을 노려보았다. 마법사가 타이반을 섬길 때 받는 악영향이라면, 인지능력의 문제라기보단 감정 통제의 문제에 가까웠다. 애당초 마법사는 마력을 이성으로 사역해야 하는 자들인 탓이다.

그러나 본질 자체가 전사인 자가 타이반을 섬기게 된다면 늘상 저런 꼴이 되곤 한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으나, 사고 능력이 저하되고 파괴 본능이 미쳐 날뛰는 것이다.

“네 도량에 비해 너무 큰 힘을 취했구나. 지기스문트.”

페르난데스는 짧게 놈을 평가했다. 대악마의 가호는 필멸자의 육신에 품기엔 너무나 강대한 힘이었고, 심지어 타이반은 제 가호를 적당히 배분할 정도로 영악한 존재가 아니었다. 가뜩이나 적은 신도에게 때려 박듯이 하사한 가호는, 저주와 다를 바가 없다.

대저, 악마들의 선물이란 시점에 따라 저주와 구분하기 어려운 법이다. 그걸 다룰 줄 모르는 자의 손에선 더욱이.

[닥쳐라!!]

-쿠우우웅!

놈의 발걸음에 맞추어 불길이 치솟았다. 대지가 놈을 거부하며 갈라지고, 그 사이로 무저갱의 화염이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치솟았다. 놈이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대기가 오염되고 창공이 잿빛으로 물들어간다.

그 모습을 본 비센테가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지었다.

“저게…… 음. 악마조차 되지 못한 반편이라고 했나?”

“물론 힘으로만 따지자면 군왕급은 됩니다만, 악마는 아닙니다. 필멸의 육신을 벗어내진 못했으니…… 아직 놈은 인간입니다.”

“경이 갖는…… 인간의 기준이 참 넉넉하구만.”

비센테는 뜨악한 눈으로 페르난데스를 한 차례 바라보고는,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되잡았다. 더운 땀방울이 투구 아래에서 주륵 흘러내렸다. 수확철 늦가을, 겨울이 훌쩍 다가온 이 절기엔 맞지 않는 지독하고 끈적끈적한 더위였다.

비센테는 투구를 고쳐 쓰며 털털 웃었다. 계절 감각이 어긋나고 하늘이 잿빛이 되며 악마 ‘같은’ 놈이 날뛰고, 겁에 질린 병사들은 무기를 내팽개치며 도망친다라…….

“신화적인 전투로군.”

그야말로 서사시의 종장에 기록되기에 부족함 없는 싸움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비극적인 영웅담, 그것도 고작해야 인간들의 싸움에 불과한 사소한 비극에 불과했으나. 이젠 숫제 성경 구절에나 기록될 법한 전장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그것이 못내 즐거워서, 비센테는 한쪽 팔을 잃어버렸다는 것에도 큰 아쉬움을 느끼지 않기로 했다. 이런 편력 수행을 할 수 있는 기사는 이 시대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많지 않으리라.

“아니, 이것이 우리 시대의 마지막 신화이길 바란다.”

“그럴 겁니다.”

말을 받아내며, 페르난데스는 메마르게 웃었다. 이 단 한 번의 전투를 위해 포기해야 했던 것이 수도 없이 많았다. 내버려야 했던 것들과 희생된 영혼 또한 셀 수 없이 많았다.

이런 일이 두 번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문명 사회는 이 이상의 출혈을 감당할 수 없으며, 지금조차도 한계에 가까웠다.

“그래야 합니다.”

그러니 부디 마지막이기를. 페르난데스는 칼을 고쳐 쥐고 지기스문트를 노려보았다.

* * *

비센테는 피부 위에 들러붙는 화염을 애써 무시하며 칼을 휘둘렀다. 한 손으로 펼치는 검술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정점에 도달한 기사의 손에서 펼쳐진다면 그 자체로도 필사의 일격이 된다.

-카앙!

유려한 궤적으로 허공을 그어낸 장검이 놈의 손톱 아래에 어긋나게 물리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그 강인함 힘을 느끼자마자, 비센테는 재빨리 칼을 회수하고 몸을 굴렸다.

-후우웅!!

숫제 기마가 지나치는 듯한 거대한 바람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슬쩍 들썩거렸다. 흉맹한 힘을 담은 놈의 오른손이 방금까지 비센테가 서 있던 공간을 찢어발기며 사라졌다.

-콰득!

[이 쥐새끼 같은 것들이!!]

그 순간 빈틈을 찾아 페르난데스가 달려들어 칼을 찔러 넣었다. 검붉은 피부 아래로 한 치 이상 칼날이 파고들지 못했으나, 벌어진 놈의 피부 사이에서 선혈 대신 화염이 붉게 번졌다.

페르난데스는 검을 회수하고 뒤로 뛰었다. 콰앙,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며 놈의 굵은 다리가 대지를 짓이겼다.

[그래! 피하고 도망쳐라! 너희의 죽음에서 벗어날 수는 없으리라!]

“뻔하고—”

“따분하군!”

페르난데스와 비센테는 놈의 말을 받아치며 재차 칼을 휘둘렀다. 살갗을 치는 것에도 금속성이 울리고, 매 공격은 생채기 이상의 상처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불리한 싸움이다. 비센테와 페르난데스 둘 모두는 단 한 번의 공격에도 치명상을 입을 테니. 그러나 두 사람은 결코 위축되지 않고 연신 칼을 휘두르고 몸을 빼내며 싸움을 이어 나갔다.

-카앙!

그 아슬아슬한 교착을 중단한 것은 지기스문트 쪽이었다. 놈은 으득하고 이를 갈며 뒤로 크게 뛰어 물러섰다. 분노와 광기가 점철된 육체를 따라서, 전신에 문신처럼 새겨진 생채기 위로 화염이 흘렀다.

[파리 같은 것들!! 네놈들의 재롱은 이제 끝이다!!]

지기스문트의 몸 위를 기어다니던 화염이 핏물처럼 뚝뚝 떨어지며 기묘한 문양을 그리기 시작했다. 페르난데스는 열기로 이글거리는 아지랑이 속에서 그것을 노려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상처 거부의 부적을 지닌 줄 알았는데, 자카스밀 쪽이었군.”

“그게 뭔가?”

“진홍대공의 피 흘리는 도끼……. 놈의 성물입니다.”

칼날이 안 박히는 꼴을 보니 부적 쪽을 지니고 타이반의 가호를 얻었나 싶었는데, 저 문양을 보니 성물을 얻은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칼날을 튕겨내는 내구성은 육신의 본디 성능이었다는 뜻인데—

‘생각보다 더 큰 가호를 받았군.’

타이반의 영역은 파괴다. 따라서 당연하게도 가호가 담긴 보호의 부적 따위보다는 병장기의 형태를 띤 성물이 더욱 강력할 수밖에 없었다. 자카스밀은 동시대 성물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성유물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오직 파괴 하나에만 특화된 심플한 성능. 타이반의 권능이 파편으로 박힌 유물이다. 페르난데스는 피로 그려진 문양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섬칫한 검붉은 도끼날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의 대지를 박살 내고, 너희의 백성을 짓뭉개고, 너희의 이상과 신념을 으스러트려 주마! 그 모든 순간이 끝난 뒤의 고요 속에서, 너희를 직접 죽여 버리겠다!!]

마침내 핏물처럼 흐르는 화염을 품은 도끼를 완전히 뽑아낸 지기스문트가 쩌렁쩌렁한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놈의 몸에서 상처가 사라지며, 머리 위에 화염으로 이루어진 왕관이 삐뚜름하게 얹혔다.

비센테는 경계심 어린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속삭였다.

“일단 유아 퇴행을 한 것 같긴 한데, 그것 말고 주의사항이 있나?”

“맞으면 안 됩니다.”

“그건 원래도 그러지 않았나.”

“아니요, 전하. 저 도끼날에 설령 칼날이나 방패, 또는 갑옷이라도 맞으면 안 됩니다.”

자카스밀. 타이반의 권능, 파괴가 어린 도끼. 저 날에 닿는 것들은 그 어떤 견고한 물체라 할지라도 그대로 으스러져 찢겨 나간다. 우르카시아의 권능이 닿는 모든 것들을 부식시키듯이, 저것 또한 그런 종류의 유물이었다.

숙련된 전사의 손에 들릴 경우, 대단히 까다로운 무구가 된다. 그리고 타이반의 가호를 받은 자들은 모두가 숙련된 전사가 된다. 페이자쉬는 저 무기를 혐오했으나, 상대해야 하는 입장에선 막막하기 이를 데 없는 병장기였다.

“그러니까 지금, 막으려는 시도도 하지 말라는 뜻인가?”

“예, 전하.”

“거 참…….”

비센테는 툴툴 웃고는 끈을 풀러 땀이 찬 투구를 바닥에 던졌다. 격전 속에서 반쯤 부서진 갑옷마저 털어낸 이후, 얇은 튜닉 한 장만 걸친 채로 대검을 빙글 돌려 어깨에 얹었다.

“차라리 시원해서 좋군.”

갑옷마저 소용없는 무기를 상대해야 했으니, 차라리 무장을 스스로 해제한 것이다. 그 담대함에 페르난데스는 저도 모르게 웃고는 그를 따라 갑옷 버클을 부수고 털어냈다.

두 사람은 각자 무기를 꽉 움켜쥐고, 분노에 찬 황소처럼 질주하는 지기스문트를 향해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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