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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380화 (381/388)

380. 네 죄를 사하는 것은 (4)

“야아- 이! 나쁜 새끼야!!”

막상 막기야 했는데, 아에렌은 죽을 맛이었다. 황소같이 미친듯이 달려드는 통에 아에렌이 할 수 있는 것은 막거나 흘리거나 걷어차여 구르는 것뿐이었다.

방패로 어떻게 공격을 흘려낸다고 들이밀었는데, 결국 방패째로 박살 나며 바닥을 구르고 말았다. 아에렌은 아찔한 머리를 휘휘 젓다가, 떨어지는 도끼를 노려보며 이를 악다물었다.

-콰앙!

팔이 떨어지는 것 같은 충격과 함께, 아에렌은 다시 한번 바닥에 굴렀다. 키르하스가 몇 차례 지원을 하려 했으나 그녀는 놈의 몸에 생채기 몇 줄을 더 만들어 내는 것에 그쳤다. 놈은 거칠게 몸을 뒤틀어 키르하스를 떨쳐 내고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죽음이 두렵나?]

놈의 눈에 비웃음이 걸렸다. 유황 냄새가 훅 하고 풍겨 왔다. 아에렌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누구도 영원히 살 수는 없는 법이지……. 오직 영광만이 영원할 뿐!”

-쒜에에엑!

그녀의 등 뒤에서 단검 한 자루가 뽑혀 나왔다. 그녀는 섬전처럼 단검을 내질러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그러나, 지기스문트는 비죽 웃으며 가슴팍으로 단검을 받아 내었다.

우득, 단검이 피부 아래 일정 이상 파고들지 못하고 멈췄다. 근육이 수축하며 단검을 물자, 아에렌은 어금니를 바싹 씹으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치이익!

단검 칼자루에서 어마어마한 열기가 느껴졌다. 단순히 온도뿐만 아니라, 어떤 불경한 것이 놈의 몸에 틀어박힌 단검을 통해 밀려오는 것만 같았다. 아에렌의 이마 위로 핏줄이 툭툭 불거졌다.

[네 신을 부르짖어 봐라. 구해 달라 소리쳐라! 네 절규를 주인님께 바친다면 얼마나 큰 은총을 하사하실지 궁금한 참이니!]

“네 주인은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파직!

지기스문트가 승리감에 고취되어 이죽거리던 찰나, 놈의 두 눈 앞에서 섬전이 튀어 올랐다. 이명이 울리고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놈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 몸을 돌렸다.

페르난데스와 비센테가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지기스문트는 비릿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외쳤다.

[너희의 발악은 즐거웠다. 필멸자들이란. 언제나 제 한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또 새로운 수를 짜내곤 하지. 하지만 이제 놀이는 끝이다. 이 계집을 죽이고—]

“말이 많군.”

-파앙!

다시 지기스문트의 고개가 휙 돌았다. 그는 턱에서부터 웅웅 울리는 고통에 저도 모르게 붙잡고 있던 아에렌의 팔을 놓았다.

키르하스가 재빨리 다가와 아에렌을 안고 뛰어나가자, 지기스문트는 어금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무슨 짓을 한 게냐!]

놈의 같잖은 주문 따윈 통하지도 않아야 했다! 지기스문트는 아직도 아릿하게 울리는 턱을 붙잡고 연신 으르렁거렸다. 어느새 사면 위로 올라선 페르난데스가 그를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다.

“내가 전위에 있으니 우스워 보였나?”

[뭐……?]

“마력 한 줌, 수인 한 획…….”

페르난데스는 손을 까딱이며 천천히, 과시하듯 수인을 짚기 시작했다. 그는 섬세하게 손가락을 움직이며 말을 이어 나갔다.

“또는 한 문장 아래의 주문. 이것조차 버겁도록 온 사방에 주문을 흩뿌려 놓고도, 네 발을 이 시간까지 묶어 놓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너는 네 무력함을 알았어야 했다. 이 머저리야.”

[짐은—]

“타이반이 신경조차 쓰지 않을 꼭두각시지.”

페르난데스는 싸늘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

“그 멍청한 황소가 다른 누구에게 신경이나 쓰리라 생각했나? 네게 부여된 그 힘은 네 종말을 여흥 삼아 즐기는 놈의 오락에 불과했다. 육신의 성능에 취해 영혼의 상태를 직시하지 못했나? 너는 악마로 승천조차 하지 못한 반편이에 불과해.”

[네놈이 그분의 이름을 어찌……!]

“따지고 보면, 내가 네 선배였으니까.”

페르난데스는 손가락을 접어 수인을 완성했다. 동시에, 마치 뺨을 때리는 듯한 충격이 지기스문트의 머리를 후려쳤다. 그는 혼란에 휩싸여 고개를 연신 흔들었다. 어떻게? 대체 어떻게? 어떻게 인간 주제에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곧 그의 정신이 돌아왔다. 놈은 주문술사다. 거리를 좁히면 극도로 무력한. 한주먹거리도 되지 못할 나약한 육신의!

[죽여 주마!]

“그 전에 나와 볼일이 남지 않았나?”

-카아앙!

지기스문트의 도끼가 허공에서 멈췄다. 어느새 비센테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서 칼날을 모로 눕힌 채 비스듬하게 도낏자루를 얽어내고 있었다.

도끼날과 부딪치지도, 놈의 공격에 닿지도 않는. 정확히 힘과 힘의 연결부를 칼등으로 받쳐 흘리는 기예다. 타이반의 은총은 공격의 적중 이후 파괴의 발생이었고, 이런 교착에선 순수한 힘 이외의 성능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어떻게 그 취약점을 파악했단 말인가? 그리고 이 속도에서, 어떻게 이런 기교로 자신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있단 말인가? 지기스문트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비센테를 바라보았다.

비센테는 껄껄 웃으며 외쳤다.

“알베르트 경. 이거 정말 죽여주는군!”

“왼팔입니다. 전하.”

“그래! 알겠네!”

지기스문트가 힘을 주려는 찰나, 비센테의 칼이 교묘하게 미끄러져 나갔다. 지기스문트의 도끼가 맥없이 허공을 긋고 바닥에 내려찍혔다.

비센테는 물살을 타고 흐르는 물고기처럼 부드럽게 그의 왼쪽 옆구리를 스쳐 지나가, 순식간에 어깨를 밟고 올라섰다. 그의 검이 하늘을 향해 뻗어 올랐다.

[이 버러지 같은 것이—!!]

놈의 마력으로 물들어 버린 잿빛 하늘 아래에서, 비센테의 백금발이 사자 갈기처럼 너울졌다. 마력이 검신을 타고 흐르고, 어느 순간 멈추었을 때—

[죽여 버리겠다!!]

빈틈을 노려, 지기스문트의 오른팔이 땅에 박힌 도끼를 뽑아내 어깨를 밟고 서 있는 비센테를 향해 뻗어 나가고.

-촤르륵!

비센테의 몸에 닿기 직전, 어디선가 뻗어온 검은 쇠사슬이 그의 오른팔을 감싸는 순간.

비센테의 장검이 선명히, 그러나 결코 느리지 않게. 유려한 곡선을 그려 내며 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 * *

칼날의 움직임이 너무나 선명해서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다. 잿빛 하늘이 커튼처럼 갈라지며, 그 틈을 타고 흘러내린 햇살이 검신을 화려하게 물들이며 난반사한다.

-콰드드—

어떤 경지에 도달하면, 모든 기술은 대개 비슷한 형태를 띠게 된다. 흔히 ‘정점’이라 불리는 경지에서 바라볼 때라면 더욱이.

이를 만류귀종이라 높여 부를 필요는 없다. 정점에 도달한 검사와 대가의 경지에 달한 마법사, 혹은 목공, 또는 대장장이, 하다못해 소작농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분야에 있어 최후의 고지를 넘겼다는 것을 깨닫는 자들에게선 잡기가 사라진다. 단순한 행동 하나하나에 의념이 담기는 경지. 수신의 지고에 달하는 그 순간을, 사람들은 ‘정점’이라 부르며—

-콰드드드—

행위에 의념을 담아 관념을 이룩하는 것. 그 경지에 도달한 자들이 추구하는 가장 이상적인 기술이란 으레 그렇다. 따라서, 이는 만류귀종이 아닌. 어쩌면 수렴진화에 가까운 모습이니.

-콰드드드득!!!

베고자 하니 베었다. 강철로 단조된 평범한 장검 한 자루로. 물질을 넘어서 관념을 품고.

공간을 벤다. 그것이 데인 왕의 검예, 그가 생전 추구했던 마지막 일격이다.

백성을 억압하는 거인. 그 압제자들을 도살한 일격.

거인 학살자의 검. 그 신화의 편린이 지금 이 순간, 비센테의 한 손에서 떨어져 내려 지기스문트의 왼팔을 완벽하게 갈라내었다.

공간이 갈린다. 그 사이에 얽힌 모든 물질들도. 그리고 손에 쥐인 장검까지도. 비산하는 쇳조각에 뺨이 베이고 옷이 찢어지면서도, 비센테는 끝까지 지기스문트를 노려보았다.

“이제 전쟁은 끝이다. 지기스문트 왕, 네놈의 죽음으로!”

* * *

“저게 저렇게 하는 거였군.”

페르난데스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오른손을 훌훌 털어 내며 중얼거렸다. 데인 왕의 기억 덕에 비슷한 경지까진 모사할 수 있었으나, 그 검의 정점. 가장 드높은 경지는 역시 어떤 깨달음이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물론, 비센테의 육신 성능을 주문을 통해 강제로 끌어올린 까닭도 있겠지만.

-치이익!

마력 회로가 과부하되어 완전히 퍼졌다. 사실 아까 전부터 아슬아슬하긴 했는데, 어찌저찌 여기까지 굴릴 수는 있었다.

이는 순전히 전생의 기억 덕이었다. 타이반의 마력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는 그로서는, 연산에 소모될 집중력만 충분하다면 놈의 허점을 파고들어 타격하는 것이 가능했다.

아군 병력의 피해를 최소한도로 줄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출혈을 감수했던 것이나, 이제 전황이 마무리되는 이 시점에선 어찌 되었든 상관없는 일이니까.

“이……놈들……!”

지기스문트는 어느새 인간의 형상으로 변해 헐떡이고 있었다. 떨어져 나간 팔에서 피가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와 바닥을 적시기 시작했다. 비센테는 싸늘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하.”

“알베르트 경. 고생 많았네.”

“마무리를 하시겠습니까?”

“경이 양보해 준다면.”

페르난데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비센테는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장검 한 자루를 주워들었다. 태양을 등지고, 그는 천천히 자세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민간인 학살과 무차별적인 파괴 행각, 국경 도발과 자국 침입, 약탈과 방화, 네 죄악을 나열하자면 그 끝이 없을 것이나. 데인의 드높은 의회가 선고할 판결은 간단하다, 지기스문트. 오직 죽음뿐이다.”

“살려 다오.”

메마른 입술을 뻐끔거리며 지기스문트가 피를 토하듯 말했다.

“살려 다오! 짐이 잘못했다. 협정을…… 동부의 협정을 따르겠다! 아니, 아니! 그래! 전통을 준수해라, 데인의 왕!”

“전통?”

“그래!! 왕은 왕을 시해할 수는 없다!”

지기스문트의 말에 비센테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페르난데스 또한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키르하스가 다가와 나지막이 속삭였다.

“무슨 전통 말인가요, 은공?”

“동부는 연합을 결성하기 전까지 오랜 세월 내전을 벌여 왔어, 키르하스. 알고 있지?”

“예. 전쟁으로 인한 피해 확대를 막기 위해 연합을 구성했다는 것까지는…….”

“그 시절 왕들은 그 누구보다 전쟁을 사랑하는 족속들이었지. 하지만 본디 가진 자들이 더욱 죽음을 두려워하는 법이니. 왕들의 전쟁엔 오랜 전통이 있어.”

그 어떤 패배 앞에서도, 결코 왕을 죽일 수는 없다. 이는 동부의 소왕국들이 서로를 향해 걸어 둔 최후의 보험과 같은 것이었다. 설령 패배하더라도 죽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으니, 그 협정이 이루어진 이후부터 동부의 세속 왕가에 전쟁이란 유희와 도박 이상의 성격을 갖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거의 오백여 년을 넘게 지속되어 온 전통이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라면 모르되 적어도 데인은, 동부 전체를 뒤집어도 한 손에 꼽힐 정도로 지독한 전통주의자들인 이들에겐 ‘전통’이란 단어가 갖는 무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비센테는 혐오감이 뒤섞인 눈으로 지기스문트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지기스문트는 쿨럭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전통이다! 너희 마구간지기들이 그리도 따르는 전통! 너의 선조들, 너희의 선조와 그 선조들마저 이 전통을 준수했다. 그간 아국이 너희를 패퇴시킨 적이 없었을 것 같나? 그러나 너희의 핏줄이 이어질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다! 이 전통에서 근거한 자비 덕이었다! 그러니 짐에게 존중과 자비를 보여라!!”

햇살을 등지고 있었기에, 비센테의 얼굴에선 두 눈만 형형히 빛날 뿐 안색이 비치지 않았다. 지기스문트는 헐떡거리며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지혈을 하고 짐을 후방으로 이송하라. 종전 협정을 하자! 바라는 것들을 모두 내어 주겠다. 땅과 백성, 황금과 곡물. 너희의 나라가 부서진 만큼 네겐 그것들이 필요하겠지……! 이제 곧 겨울이 다가오지 않더냐!”

“네 목숨을 살려 주마. 페이른의 왕.”

“비센테 왕!!”

아에렌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빽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비센테는 표정 하나 바뀜 없이 그저 묵묵히 지기스문트를 내려볼 뿐이었다.

“협정은 없다. 네게 보일 수 있는 내 마지막 자비는 단 하나뿐이다. 오십 호의 소작농을 부리는 작은 마을만을 내어 주겠다.”

“비센테!!!”

아에렌은 더 참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그러나 페르난데스가 손을 들어 그녀를 막았다.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페르난데스를 노려보자, 그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잠시 지켜보시지요.”

페르난데스는 무표정하게 비센테와 지기스문트를 바라보았다. 저 말은 곧, 지기스문트의 그릇이 소작 농가의 촌장 정도에 불과하다는 모욕이었다. 공식 석상에서 군주가 다른 군주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모욕.

그러나 지기스문트는 이를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하겠다!”

“틀렸다, 지기스문트. 너는 이 모욕을 부정하고, 차라리 죽음을 택해야 했어.”

“……뭐라고?”

-퍽!

비센테는 지기스문트의 가슴팍을 거칠게 차며 그 위에 올라섰다. 지기스문트가 컥, 하는 단말마를 내지르자, 비센테는 칼을 길게 내려 그의 목젖 위에 얹었다.

“혀, 협정은! 전통은!!”

“나는 네게 왕으로 죽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준 것이다. 왕이란 무엇인가?”

“다스리는 자다! 위정자로다! 나는 천부권을 가진 대페이른 왕가의 마지막 왕혈로—”

“아니, 백성 만민의 앞에서 명예의 본이 되는 자다. 지기스문트. 네 마지막 명예가 사라졌으니, 너는 더 이상 왕이 아니며, 내가 너를 참하는 것은 동부의 전통에 위배되지 않으리라. 사제는 입회하라!!”

비센테의 외침에 페르난데스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고개를 숙였다.

“성 바르톨로메오 수도원의 서품 사제, 세르너드의 알베르트가 입회합니다.”

“사제는 이 죄인의 형을 집행함에 동의하는가!”

“세속의 죄를 사하는 것은 오직 주의 몫이나, 주의 곁으로 죄인을 압송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겠지요.”

“사제는 이 죄인을 위해 기도하라!”

페르난데스는 로사리오를 꺼내어 쓰러진 지기스문트의 머리 위에 내렸다. 촤륵, 쇠사슬이 감기는 소리와 함께 작은 열쇠검 로사리오가 천천히 진자처럼 움직였다.

“악마를 추종했으나 끝내 필멸하는 죄인아. 네 육신은 허물어졌으며, 네 영혼은 제육계의 노리개로 전락할 것이다. 네게 내려진 불경한 은총은 오직 네 파멸을 위한 유희에 불과했으나, 네겐 아직 마지막 기회가 남아 있으니. 기도해 보라. 아무 신에게나, 어떤 말이든. 간절히.”

“기도하겠다. 기도하겠다! 베이타서스! 샤일드! 맥라렌! 아니, 그 누가 되었든!! 살려 다오, 살려 다오!! 살려—.”

“사제는 기도를 멈추라. 데인은 너를 위해 만신전에 가호를 빌지 않겠다.”

-콰득!

“피고의 죗값은 사형이다.”

비센테의 검이 지기스문트의 가냘픈 목을 내려찍었다. 씁쓸한, 허탈한, 또는 분노에 찬…… 바라볼 때마다 다른 감정을 담은 눈으로, 그는 지기스문트의 떨어진 머리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사방에서 시끄럽게 울려 퍼지던 병장기의 소음과 고함, 또는 비명 소리가 천천히 잦아들었다. 빗방울이 투둑, 하고 떨어져 바닥을 적시기 시작했다.

전장을 휘몰아치던 열기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빗물은 메마른 대지 위로 싸늘하게 내렸다.

“가을 마지막 비가 되겠군. 이제 겨울이 오겠어.”

페르난데스는 하늘을 바라보며 낮게 속삭였다.

짧지만 불길처럼 동부를 으스러트린 내전이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굶주림과 기아가 예정된 기나긴 겨울이었다.

페르난데스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비센테의 곁으로 다가섰다.

“들어가시지요, 전하. 가야 할 길은 멀고, 시간은 적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많은 의미가 함축된 말이었다. 기적처럼 알트베르트를 지켜 냈으므로, 피난민들의 목숨은 이제 안전하다 한들. 데인은…… 아니, 동부는 자생할 여력을 잃어버렸다.

페르난데스는 입가를 쓸어 만지고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제 죄가 크고 깊습니다.”

늙은 흑마법사가 고개를 떨어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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