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1. 전란의 책임
사태 수습과 전후 처리, 산적한 모든 문제들을 내려놓고 지금 당장 할 이야기가 있다는 페르난데스의 말에, 비센테는 선뜻 궁성의 어전으로 향했다.
반쯤 뜯겨 나간 지붕과 외벽 너머로 피난민들의 행렬이 보였다.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이들과 이 도시에 남기를 선택한 자들, 그리고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뛰어다니는 지친 병사들.
저들 중 다가올 겨울을 버틸 수 있는 자들이 얼마나 될 것인가. 이 땅은, 데인을 넘어 이 동부는 과연. 백성들을 지켜 낼 여력이 남아 있을 것인가.
비센테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렀다. 그는 시선을 돌려, 고개를 숙이고 있는 페르난데스를 내려다보았다.
궁정의 드넓은 어전. 만검의 회랑. 빗물이 추적추적 떨어져 내리는 이 장소에, 도시를 구한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
“정리하자면.”
비센테의 목소리는 어느새 지독한 피로감에 절어 메말라 있었다. 그는 잠시 운을 떼고 말을 이었다.
“동부의 기아를 의도한 것이 그대렷다.”
“그러합니다. 전하.”
“동부 전역의 약탈이 그대의 명에 의한 것이고?”
“그렇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제국의 원조를 받게 하고, 그 빚을 지워 항구적인 속주로 남아 제국 황실에 충성하게 만들려 했다는 뜻이고?”
“……예. 전하.”
“어째서인가?”
비센테는 스스로도 자신의 감정을 명확히 정의 내리기 어려웠다. 배신감? 우스운 이야기가 아닌가. 당장 저 청년은 스스로 두각을 나타내기 전까지만 해도 알려진 바 없는 이방인에 불과했다.
데인의 세르너드 영지 출신이라는 점, 그리고 베이타서스 교회에 투신하게 되었다는 점. 제 일가족을 스스로의 손으로 참살하고 영지의 주인으로 독립했다는 점. 이런 것들을 제외한다면, 비센테는 저 청년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다만 하나. 위기에 빠진 데인을 구했었다는 것…….
그리고 굳이 첨언하자면. 가는 행보마다 모든 지역을 구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었다는 것.
그것이라면 충분하다고 보았다. 비센테는 그 삶의 태도가 지극히 높은 위치에 있는 수신의 경지라 보았다. 기사가 가져야 할 응당한 도덕, 따지자면 정언이었다.
그러니, 그가 느끼고 있는 것은 배신감인가?
‘아니, 모르겠군.’
비센테는 눈가를 꾹 누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배신감이라기보단 실망…… 혹은 슬픔. 친구라 여겼던 자를 잃은 것에 대한 슬픔. 아비에게서 왕좌를 찬탈한 그에게, 어린 시절부터 궁중의 보살핌에서 벗어나 편력 수행을 떠나야 했던 그에게 친구란 단어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으니.
“제가 동부의 소식을, 페이른의 봉기를 전해 들었을 때. 이미 손을 쓰기에 너무 늦은 상태였습니다, 전하. 페이른의 군세는 막을 길이 없고, 지기스문트의 정략은 장차 동부 전역을 오염시킬 준비가 끝나 있었습니다.”
“데인은 굳건히 버텨 낼 수 있었다.”
“데인은…… 수성을 택해야 했습니다. 페이른이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하기 전까지, 전력을 가다듬고 식량을 비축해야 했습니다.”
“지금…… 지금 나를 비난하는 것인가……? 내가 페이른 왕실의 학살을 묵인하고 놈들과 손을 잡기라도 했어야 한단 뜻인가!”
비센테는 버럭 소리쳤다. 지친 왕의 분노가 어전 위로 쏟아져 내렸다. 빗물 속에서, 페르난데스의 눈동자는 그 어떤 순간보다 무감각하게 왕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데인이 수성을 택했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겁니다. 오히려, 시간을 얻은 페이른이 동부의 소왕국들과 결탁하여 동부 평정을 시도했겠지요.”
“……뭐?”
“최선은 지기스문트의 왕위 계승을 차단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이 정국에 개입할 때, 이미 페이른은 놈의 손아귀에 온전히 떨어진 이후였으니 의미 없는 가정입니다. 그리고 최악은, 데인의 항복과 동부의 완전한 타락이었습니다.”
페르난데스는 빗물 속에서 그대로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덤덤히 말을 이어 나갔다.
“차선은 전하의 수성이었습니다. 데인의 국경을 방비하고 원탁 기사들과 함께 데인을 굳건히 지켜 내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도착할 때까지, 제국군과 북부군이 도착할 때까지. 그리고 아이언사이드와 사제들이 동부의 타락을 견제할 때까지.”
“그 모든 것들이 무위로 돌아갔으니, 차악을 선택한 것이라?”
“예, 전하.”
동부 정화 작전의 차악은, 페이른의 전력이 데인에 집중되고 동부의 소왕국들이 페이른에 결탁할 수 없는 극한의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었다.
데인은 이미 동부 연합 내에서 정치적 입지를 크게 상실했다. 이런 상황에, 페이른이 동부 소왕국들을 선동하기 시작한다면 데인으로서는 고립되는 것 외엔 선택지가 없었다.
데인의 본대가 페이른을 향해 진군한 것은 그런 미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이들은 명예와 기사도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자들이지만, 그렇다고 머저리들은 아니었다.
옥쇄를 각오하고 장렬히 깨어져 나가는 것보다, 적의 심장부를 향해 진군하기를 택한 것이다. 어리석은 선택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선택을 취한 비센테와 직접적으로 연락할 방도가 없는 입장에서, 페르난데스가 할 수 있는 수단은 많지 않았다.
‘페이른의 외교 라인을 끊어 낼 수 없다면, 페이른이 외교 대상으로 보는 소왕국들을 모두 혼란에 빠트린다. 데인과 페이른의 전쟁이 그들만의 전쟁으로 마무리될 수 있도록.’
페이른이 데인을 고립시키려 했듯이, 페르난데스 또한 페이른을 고립시키려 한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해선 동부 전체를, 서로에게서 고립시키려 했다.
작전은 성공했다. 동부의 모든 왕가는 타국에 간섭하기는커녕, 당장 직면한 겨울조차도 무사히 버틸 수 없을 지경이 되었으니.
“그 결과가…… 우리 모두의 몰락과 제국의 침탈로 이어진다?”
“악마의 발호를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
“스스로도 그렇게 믿고 있나?”
“…….”
비센테의 말에 페르난데스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필요한 희생이었다? 평소라면 덤덤히 수긍할 수 있을 말이지만, 적어도 이 사내 앞에선 아니었다.
작전의 실체를 모르는 상황에서도. 즉, 자기 자신이 죽을 것이 뻔한 자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비센테는 아무 불만 없이 스스로를 불태우며 수만의 적병 앞에 몸을 던졌다.
이런 자들을 영웅이라 불러야만 하리라. 필요한 희생이라면 오직 자기 자신만을 의미하는 자들. 제 한 목숨을 다해 타인을 위해 공양할 수 있는 자들.
그런 이들의 앞에서, 페르난데스는 그 이상으로 뻔뻔해질 수 없었다.
“알베르트. 아니…… 페르난데스. 세르너드의 페르난데스. 나는. 그대를 믿었다.”
비센테의 입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개를 숙이고 손을 얹은 탓에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서, 그리고 분위기에서. 참람한 심정이 절절히 느껴지고 있었다.
왜 아니겠는가. 자신에게 왕위를 돌려주고 왕가에 내려앉은 저주를 해소하여 국운을 구원한 영웅이, 제국의 속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심지어는 수만, 수십만의 양민들을 아사시키는 전략을 수립해 온 것이다.
“지금도 나는 경을 믿고 싶다. 그러니, 단 하나만 대답해 보라. 나와 나의 가신들이 페이른을 정벌할 때에, 경은 내게 복귀를 전달할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 돌아와 알트베르트를 구하고 페이른의 잔당을 소탕하라고.”
그 당시 비센테는 아국의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데인의 강역에 페이른의 본대가 상륙했다는 것만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뿐, 전황의 흐름을 알 길이 없었다.
그러니 그는 데인의 멸망을 상정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데인의 국토 내부엔 페이른의 본대를 막아 낼 병력이 없었다. 데인과 페이른 양국이 모두 멸망했으니 가신들에게 활로를 제공한 것이다.
망국의 왕으로 무너진 국토를 종주해 수도에 입성하는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비센테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경과 나, 그리고 경이 이끌고 온 북부의 전사들과 베이타서스 교회의 기사들. 이 모든 힘이 모여 페이른의 본대를 무찌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의 기사들…… 위대한 원탁의 장정들이 이 자리에 돌아왔을 때. 우리는 더 적은 피해로 더 확실한 승리를 거둘 수 있지 않았겠는가?”
지금 알트베르트의 성하에 몰린 피난민들을 통솔하고, 이들을 인도해 새로운 터전을 일구기 위해 차출할 병력조차 부족한 사정이다. 원정군이 무사히 복귀했다면 상황이 지금의 배는 더 나아졌으리라.
그러나 비센테는 페르난데스를 미심쩍게 바라보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제국 황제의 명을 수행하고 있었다. 제국 황제는 동부를 속주로 전락시키기 위해 그를 파견했으며, 실제로 그 계획은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런 입장에서, 비센테는 페르난데스가 의도적으로 군대를 해산했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제국은 데인의 주체적인 재건을 바라지 않을 것이었으므로, 그 근간을 무너트리려 했다고밖엔.
“전하의 선택이 옳았기 때문입니다.”
“군대를 해산한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
“전하. 크고 넓게 보소서. 원정군이 무사히 귀환해 데인의 강역을 수복한다 한들 미래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미 농경지는 황폐화되었고, 소출은 기대하기 어렵나이다. 데인뿐만이 아니라, 동부 전역이 매한가지입니다. 전하께서 그들을 해산해 동부의 전역에 편력 수행을 명하지 아니하셨다면, 동부의 소왕국들에 남은 미래는 잔혹한 겨울과 불신, 의심과 끊임없는 소모전뿐이었을 겁니다.”
소왕국들은 자신의 곳간을 확보하기 위해 타국에 눈을 돌릴 것이고, 빈곤한 백성들은 살아남기 위해 도적 떼가 되어 날뛸 것이다. 겨울이 지난 이후 동부엔 생명이 자라날 수 없다. 악인과 빈자만 남은 지옥이 되어 영원한 난세가 시작될 운명이었다.
그러나, 그런 운명을 조장한 자가 할 말인가. 비센테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자,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제가 이 시대를 열었습니다. 제가 직접 약탈을 명하고, 빈곤을 조장하고, 의심암귀를 저 세속의 왕가 사이에 풀어놓았나이다, 전하. 이 동부를 난세로 이끈 것은 오로지 제 두 손이었습니다.”
빗물이 머리칼을 타고 흘러내려, 곱슬머리가 뺨 아래로 길게 늘어졌다.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들어 머리칼 사이로 비센테를 바라보았다. 형형한 눈빛이 잿빛 하늘 아래에서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크고 넓게 보소서. 전하께오선 데인의 군주이시기에 앞서 만국의 위엄이 될 겁니다. 동부 전역에 흩어진 원탁 기사들은 데인의 본을 보일 것이며, 오늘의 승전은 곧 이 땅 위 천하 만민의 귀에 들어갈 겁니다. 빈곤과 가난, 기아와 절망, 전쟁의 참사 앞에서 오롯이 서서 대적을 막아 낸 기사의 이야기로.”
제국의 지원이 들어온다. 데인의 국토에 있는 피난민들은 이번 겨울을 풍요롭게 보낼 것이며, 이 소문은 곧 빠르게 동부 전역에 퍼져 나갈 것이다.
치안의 공백 사이에서 원탁 기사들은 스스로의 편력을 수행할 것이다. 악인을 참하고 불의를 벌하고 백성을 구할 것이다. 도덕이 땅 밑에 떨어진 이 시대에서, 진창길을 마다 않고 무릎을 더럽히며 두 손으로 그것을 다시 주워 올릴 기사들의 이야기가 곧 동부를 휩쓸 것이다.
대저, 백성의 주린 배를 채우지 못하는 영주와 세속의 왕가들이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백성들이 데인을 향해 이탈할 때, 그들은 감히 데인을 비난하지 못할 것이다.
원탁 기사들의 무력을 소원한 것이 그들이었으므로.
제국이 데인의 뒤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으므로.
그리고, 단 두 사람으로 수만의 군대를 물리친 영웅 서사시의 주인공들이 데인에 있으므로.
“전하께선 대제국의 군주가 되실 겁니다. 예, 제국의 지원을 받아야 하며 추후 제국 황실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하겠지요. 당연합니다. 하지만 동부는 이제 천 년을 이어 온 내전을 청산하고 진정코 하나 된 국가로 거듭날 겁니다. 당신의 이름 아래에서.”
무겁고 기름진 침묵이 어전 위로 내려앉았다. 페르난데스의 말에 비센테는 아무런 대답 없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슴이 뛰지 않는다면 거짓이리라. 그 또한 사내였고, 그는 아직 젊었다. 비센테는 짧은 순간, 동부 왕국의 가장 북쪽에서 가장 남쪽까지. 데인의 국기가 게양되는 모습을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바르지 않다.”
“전하.”
“경의 의도를 알겠다. 제국의 입장에서도 불만을 가진 군벌 수십이 난립하는 것보다 단 하나의 왕정이 충성하는 편이 더 이롭겠지. 나 또한 이 나라의 백성들이 풍요와 안전 속에 살아가길 바란다. 그러나 그것은 바르지 않다.”
비센테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옥좌에 비스듬히 걸쳐 둔 장검을 빼 들고 어전 아래로 걸어갔다. 페르난데스가 무릎 꿇고 있는, 비 내리는 돌바닥을 향해서.
금지의 붉은 선을 넘어서, 그는 천천히 칼을 들어 올렸다. 싸늘한 칼날 위로 빗물이 엉겨 붙어 흘러내렸다.
“경의 직위를 박탈한다. 세르너드의 페르난데스. 그대는 더 이상 원탁의 일원도, 만검 의회의 일원도 되지 못하리라.”
“……예, 전하.”
“경의 국적을 박탈한다. 데인은 더 이상 그대를 아국의 백성으로 받지 아니할 것이며, 그대는 데인의 강역 위에서 어떤 원조도 기대하지 말라.”
“예, 전하.”
“베이타서스 교회에 대한 데인의 친선 또한 단교하겠다. 그대의 작전은 그대의 소행이었으나, 그대는 베이타서스 교회의 성자로서 일을 행했다. 교회 또한 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으리라.”
“예…… 전하.”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숙이고 왕의 벌을 기다렸다. 하는 말을 들어 본다면 목숨을 취하겠다는 뜻은 아니겠으나, 적어도 비센테는 위협을 위해 칼을 뽑는 사내는 아니었으니.
그러나 페르난데스의 어깨 위에 올라간 칼날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논공행상을 의논하자면 경에게 무엇을 내어주어야 하는가 고민했건만 그럴 수 없겠군. 경의 공은 경의 과로 덮겠다.”
칼날이 허공을 빙글 돌아 그의 왼쪽 어깨 위로 올라가서, 다시 툭 떨어졌다.
“경이 만일 이 사실을 끝까지 함구했다면 나는 경과 제국의 꼭두각시가 되어 왕 노릇을 이어 나갔겠지. 이에, 경에게 악의가 없었음으로 알고 경의 과를 다시금 공으로 덮겠다.”
마지막으로. 비센테의 칼이 페르난데스의 머리 위에 올라갔다. 비센테는 조심스럽게 그의 정수리를 툭 치며—
“이제 경에겐 과오도, 공로도 남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백성들은 곤궁하고 불의는 팽배하며 국운은 폭풍 속 등불과 같다. 그러니 나는 데인의 국왕 비센테이기에 앞서 경의 친우, 칼을 든 비센테가 되어 경에게 말한다.”
그대가 더 이상 기사가 아니며 나는 이 순간 왕이 아니니, 이는 명령이 아니다.
“경을 데인의 재상으로 초청하겠다. 친우로서, 나는 경에게 단 한 가지만을 부탁하겠다. 페르난데스 세르너드. 데인의 국운을 바로잡고, 백성들을 구휼하고, 동부의 안정을 되찾아오라.”
페르난데스는 움찔 떨며 고개를 들었다. 빗물 속에서 비센테는 하얗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페르난데스는 저도 모르게 탄식하고 말았다.
대저, 영웅이란 무엇인가.
난세를 통치할 능력, 일신의 무력, 끝없는 의지? 악인들에게도 있는 그런 요인들 따위가 아니다. 정의를 부르짖는 머저리들의 가냘픈 신념도, 타인을 위한다며 스스로를 위안하는 위선자들의 행태도 아니다.
그것은 낮은 자에게 눈을 맞추고, 한 서린 칼을 품는 순간에도 응어리지지 않는 곧은 마음이리라. 영웅이란, 그릇이다. 천하 만민을 두루 품고 포용할 그릇.
페르난데스는 결코 그 자리에 자신이 어울리지 않으리란 것을 알았다. 그는 영웅에게 독을 먹이고 선인을 장대에 거는 편에 속했던 사람이다. 그런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다. 어떤 업적을 쌓아 올리더라도, 영체의 업이 드높아 산 자의 몸으로 신성을 품게 되더라도. 그는 결코 저런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는 다시 고개를 깊게 숙이며 조용히 말했다.
“제게 일 년만 주십시오, 전하. 제가 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운명을 타고났다 하더라도. 어쩌면 다른 삶을 살아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아니, 다른 삶을 살아 보고자 지금껏 발버둥 쳐 온 것이 아닌가.
이제 일의 마무리가 머지않았다. 동부의 평정이 끝난 이 시점에서, 페르난데스는 단 하나의 고비만을 남기고 있었다. 이 시대에 남은 유일한 거악만을.
그 이후에, 모든 일이 끝난 이후에. 후련한 마음으로 그는 모든 짐을 내려놓고 이 자리에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저지른 일을 되잡아 돌려놓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