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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382화 (383/388)

382. 전조 (1)

불티가 열풍을 타고 날아올랐다. 페르난데스는 건조한 눈을 꾹 감으며 뜨거운 바람 속에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다시 눈을 뜨자, 검게 타들어 간 대지 위로 시뻘건 용암이 흐르는 평야가 보였다. 암녹색 하늘엔 찢어지는 비명을 내지르는 날개 달린 괴물들이 날갯짓하고, 갈라진 대지의 균열에서 새빨간 피부의 악마들이 속속들이 치솟았다.

너무나 익숙한 광경이었다. 페르난데스는 저도 모르게 픽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잠들었나.”

당연하게도 꿈이다. 그는 이것이 꿈이라는 것이, 아니. 꿈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 다소 유감스러웠다. 편히 잠들어 쉴 수 없게 되었으니.

자각몽이라는 녀석이다. 어느 순간부턴가 그에게 수면은 더 이상 휴식을 보장하지 않았다. 꿈은 점점 더 선명하고 가혹해져 갔다.

“이번엔 또 뭐냐?”

그는 이 꿈을 후회라 부르기로 했다. 과거의 죄악을 전시해 둔 진열장이었다. 오늘의 컨셉은 종말인가 보다. 그것이 퍽 우스웠다.

“어리석긴. 나는 종말 순간을 직접 보지 못했다.”

멸망을 향한 트리거를 당긴 편에 서 있기야 했지만, 사전적인 의미로 세계가 멸망할 당시에 그는 이미 사경을 헤매는 노인이었다. 타이반을 배신하던 그 순간에도, 세계는 아직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 꺾인 시점에서 엄밀히 따지자면 이는 종말이라 볼 수 있었고, 실제로 만신전의 대신들마저 물질 세계의 복구를 포기하기야 했으나, 어쨌건 종말 순간을 두 눈으로 지켜본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이 꿈은 그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가상의 편린이란 뜻이었다.

“아, 그러셨나? 그것 참 대단하군.”

그 순간, 뒤편에서 킬킬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페르난데스는 순간 웃음을 참지 못하며 뒤를 돌았다.

화려한 로브를 차려입은 노인이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반갑기라도 한가?”

“자신을 반가워하는 미친놈이 있나?”

페이자쉬는 그의 말에 낄낄거리며 손을 휘저었다. 찰나의 순간 마력이 얽히며 의자와 테이블이 만들어졌다. 그는 능청스럽게 의자에 앉아 찻잔을 만들어 내고는 페르난데스에게 권했다.

“들지. 지옥산 드렉스 잎에 마력으로 오염된 물을 덥혀 우린 거야. 명품이지.”

“아, 그리웠지. 이 맛도.”

“그러게나 말이야. 꿈이란 참 좋아. 추억 속 먹거리들을 마음대로 먹고 마실 수 있거든.”

페이자쉬와 페르난데스는 비슷한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기울였다. 악마 한 마리가 하늘에서 퍼드득거리며 떨어져서 바닥에 처박혔다. 페이자쉬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쪽 세상은 만족스러운가?”

“솔직히 이해가 잘 되진 않는군. 페이자쉬.”

“뭐가?”

“우린 분명 영혼을 합쳤어. 엄밀히 따지자면 영혼이 갈라진 이후의 너와 나 같은 구분이 더 이상 없다는 뜻이지. 페이자쉬도 페르난데스도 이젠 없지. 그러니—.”

“개별적인 이성을 지닌 내가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래.”

페르난데스의 물음에 페이자쉬는 낄낄거리며 손을 까딱거렸다. 뒤틀린 손가락이 허공을 긋자 마력이 얽히며 기묘한 궤적을 그렸다. 아무런 의미를 품지 않은, 그저 손장난에 불과한 매력 매듭이 허공을 노니며 스스로 맺히고 풀어지길 반복했다.

“꿈에서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일까.”

“그러니까, 이건 나 스스로가 만들어 낸 환각에 불과하다? 페이자쉬, 네 존재는 실존하지 않는다는 의미인가?”

“굳이 심도 깊은 철학적 사유를 꿈속에서까지 하고 싶다면 어울려 주기야 할 텐데 말이야. 그럴 필요가 있나?”

페이자쉬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냥 즐겨. 삶을 즐기지 못해 쫓겨난 우리에게도, 꿈결 속을 거니는 순간 정도는 즐길 자격이 있지 않겠나?”

“자격…… 자격이라.”

“설령 물질 세계를 구하고 ‘온누리에 평강’을 가져온다 한들 우리에게 허락된 한 마지기 전답이나 한 아름의 곡식이라도 있겠어? 진심으로, 우리가 그것들을 우리의 마땅한 전유물이라 생각이나 하겠나? 평화…… 그 아름다운 그림 속에 우리의 자리가 있겠나? 페르난데스. 우리는, 엎어진 물을 닦아 내어 그 젖은 걸레를 다시 그릇 안에 짜내려 노력하는 머저리들에 불과해.”

그러니까 꿈 정도는 자신에게 허락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는 페르난데스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사실이었다. 본산세계를 위해, 정확히는 역천 의식을 위해 벌이는 지금의 모든 행위들은 그의 속죄이자, 자기기만이자, 후회이자 거래였다. 무너진 모래성을 다시 쌓아 올리기 위해 노력하는 어린아이의 치기에 불과하단 뜻이다.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저었다. 설령 꿈이라 할지라도 그에게 안식이 허락되어서는 안 되었다. 마법사에게 있어서 정체란 곧 퇴보를 의미한다. 멈춰 서서 숨을 돌리는 시간은 후퇴와 다를 것이 없다.

삶의 단 한 순간도 안주하며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지 않았나. 그것은 그의 영혼을 걸고 맺은 단 하나의 맹세였다.

페르난데스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일어섰다.

“즐거운 대화였다, 페이자쉬. 반갑기도 했고. 진심으로.”

“가려나?”

“그래. 해야 할 일이 많으니. 우리에게 걸맞은 해후는 언젠가 먼 미래에 내 마지막 날 정도가 적절할 것 같군.”

“하지만 명심하도록 해. 나는 네가 만들어 낸 너의 일부이며, 이 순간은 꿈을 빙자한 자기 회고에 불과하다는 것을.”

-쿠구구궁…….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 너머로 응당 보여야 할 밤하늘의 풍경이나 지반 아래의 모습 따윈 없었다. 그저 깊은 어둠, 깊고 어두운 심연뿐.

꿈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여전히 찻잔을 움켜쥔 페이자쉬가 멀어지는 그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따라서, 내 말은 곧 네 또다른 진심이야. 페르난데스 세르너드. 너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너 또한 휴식을…… 아니. 안식을 바라지 않나.”

“언젠가는.”

페르난데스는 멀어지는 페이자쉬를 일별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적어도 오늘도, 내일도 아닌 언젠가엔.”

-쿠웅!

세상이 어둠에 물들고, 온몸이 쓸려 내려가는 감각과 함께 꿈결이 무너져 내렸다.

* * *

페르난데스는 언제나처럼 눈을 뜨기 전에 몸 상태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손가락을 슬쩍 까딱이며 전신 근육을 천천히 풀어 내고 체내의 마력을 관조한다. 마력 회로의 기능이 정상에 가깝게 회복되어 있었고, 미약한 근육통을 제외하면 몸에 특기할 만한 부상이 느껴지지 않았다.

눈꺼풀 위로 햇살이 내리쬐어 따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큼직한 창문을 배경으로, 아벨이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어났느냐?”

잠시 멍하니 그녀의 푸른 눈을 바라보다가, 그는 자신이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곳은 그녀의 방이었다.

숙면으로 마비된 정신이 천천히 돌아오며, 그는 잠들기 전까지 그가 아벨의 몸을 치료하고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킹스게이트 공성전 당시에 입은 부상으로 아벨의 영체가 손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잠들었소?”

“앗, 더 누워 있어도 된다. 고작해야 서너 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 정도면 충분하오.”

디모니카였던 시절에도 사흘에 한 번, 네 시간의 수면으로 충분했던 그였다. 심지어 지금의 육신은 디모니카의 것과 크게 차이가 없기까지 했으므로 네 시간이라면 이미 사치스러울 정도로 넉넉한 수면 시간이었다.

페르난데스는 허리를 우득 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벨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 이른 아침이다. 페르난데스. 요기를 하겠느냐?”

“괜찮소. 몸은 좀 어떠시오?”

“네가 해 온 고난에 비하자면 별것 아니었다. 하지만 고맙구나. 아주 생생하다.”

“다행이로군.”

그는 고개를 돌리다가 문가를 바라보며 잠시 멈칫했다. 문 앞에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키르하스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넌 또 왜 그러고 있냐.”

“아주 불공평해요. 아주, 아주, 아주 불공평해요!”

그녀는 씩씩거리며 다가오더니 페르난데스의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꼬리가 살랑거리며 일어서서, 제 허벅지를 툭툭 치기 시작했다.

“자, 여기 누워요. 네 시간만 더 자요! 세상에, 은공. 혹시 아세요? 일반적인 사람들은 하루에 여덟 시간 정도 잠을 자야 한대요! 네 시간 주무셨으니 이제 절반은 제가 베개 할게요.”

“그런 취미 없다.”

“저는 있는데!”

“없었으면 좋겠군.”

페르난데스는 그녀를 뒤로한 채 문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문고리를 쥐고, 그는 키르하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일은 어떻게 됐지?”

“진짜 너무하시네! 정말 아주 속상해요. 저도 다쳤거든요! 저 막 뺨도 뚫릴 뻔하고 아주 큰일이었어요!”

“고생 많았다.”

전혀 그렇지 않다는 듯이 말하는 페르난데스를 보며, 키르하스는 씩씩거리며 성을 내려다가 곧 꼬리를 축 늘어트렸다. 상처 입은 고양이처럼 갸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녀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은공이 아벨 무릎 위에서 자는데 제가 일이 손에 잡히겠어요?”

“실패했어?”

“아니, 애초에 할 수도 없는 일이었어요! 아예 말이 안 통하던데!”

키르하스가 와락 소리를 지르며 말하자, 페르난데스는 그제야 웃으며 그녀의 머리칼을 헝클였다.

“그건 괜찮아. 아벨이랑 같이 밥이라도 먹고 있어. 오늘 저녁엔 어전에서 승전 축하연이 있을 것 같으니, 그게 끝나는 대로 오랜만에 아나에게 연락이라도 해 보자. 호족 연합의 동향도 들을 필요가 있겠고.”

“네!!”

키르하스는 귀를 쫑긋 세우며 싱그럽게 웃었다. 페르난데스는 그녀에게 짧게 일별하고는 문고리를 비틀어 열었다.

“아, 그렇지. 그 작자들이 지금 어디에 있던가?”

“성하대로 아래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더라구요! 아무도 그 근처에 다가가려 하질 않아서 찾기 어렵지는 않으실 거예요.”

“하여간, 사제들이란.”

페르난데스는 툴툴 웃으며 방을 빠져나갔다.

* * *

“저…… 그…… 기사님. 혹시 어떤 것 때문에…….”

“…….”

“뭐가 필요하시다든지……?”

“…….”

피난민 대열 근처에서 간단한 먹거리를 팔고 있던 상인은 자신의 앞길을 떡하니 막아 서고 있는 기사를 향해 더듬거리며 말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행상인들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이 사내 또한 제법 단단한 체구와 큰 키를 가졌다. 그러나 눈앞의 기사는 그보다 배는 넓은 어깨와 한 뼘은 더 큰 키로 그를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투구 바이저 아래로 보이는 서늘한 눈빛 탓에, 상인의 간담은 이미 쪼그라든 지 오래였다. 말을 꺼내는 것조차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겁에 질린 이 시골 상인은, 덜덜 떨며 주머니에 손을 옮겼다.

“혹, 혹시 자릿…… 자릿세가 필요하신 거라면…….”

“…….”

“힉! 아니, 아니시면 공, 공납금…… 아니시면 어…… 어……!”

기사의 눈빛이 불쾌하게 변한 것을 깨닫고 상인이 확 움츠러들며 동전을 되는 대로 움켜쥐기 시작했다. 그는 킹스게이트 공성전 당시 이 무시무시한 기사들이 페이른의 정예병들을 말 그대로 도륙하는 것을 똑똑히 봤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눈앞의 기사는 그때와 다를 바 없는 차림을 한 채로, 날 선 장검을 허리춤에 비껴 차고 있었다.

-팅!

그때, 기사의 어깨 너머에서 반짝이는 구리 동전 한 닢이 날아들어 상인의 손 위에 턱 떨어졌다. 상인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기사 너머를 바라보았다. 가벼운 튜닉 차림의 청년이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거면 육포를 좀 살 수 있겠나?”

“예, 예! 나리!”

제아무리 무도한 기사라 할지라도 백주 대낮에 무고한 이들을 도륙할 수는 없는 법이다. 심지어 알트베르트의 성하에선 더욱이. 상인은 목격자가 제 발로 나타난 것에 감사하며 재빨리 육포 묶음을 꺼내 넘겼다.

청년은 무표정한 얼굴로 육포 다발을 받아서 그대로 옆에 선 기사에게 건넸다.

“…….”

“막토 수페를라우도, 형제여. 혹 필요한 것이 이것이었는지?”

기사는 잠시 청년을 똑바로 바라보고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청년은 당황한 상인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 기사분은 사정상 말을 할 수 없으시네. 그대가 이해하게.”

“아이고! 이해라 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촌것이 무지하여 세상 사정을 잘 모릅니다요! 다 제 잘못입니다!”

“그럴 것 없네. 넉넉히 챙겨 주어 고맙군.”

더 줄 수도 있으니 빨리 사라져 달라는 상인의 간절한 눈빛을 보며, 청년은 픽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기사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청년을 내려보고 있었다.

“성 바르톨로메오 수도원의 서품 사제, 페르난데스 세르너드가 만리타향의 형제님을 뵈어 반갑기 한량없습니다. 형제님, 혹시 군영에 성하의 사절이 도착해 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

잠시 육포와 페르난데스를 번갈아 가며 힐끔거리던 기사가 곧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를 돌아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그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베이타서스 교회의 교황은 침묵의 서원을 한 기사들을 세속의 전쟁에 통보 없이 출전시키면서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을 정도로 무능력하고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다. 당연히 기사단 내부에 대화가 가능한, 교황청 출신의 인사가 동행하고 있을 터였다.

그자를 만나야 했다. 교황청이 이 전쟁에 개입한 이유를 알기 위해서.

교황의 개입인가. 만신전 교회가 물질 세계 왕가들과 직접 마찰을 일으킬 각오를 한 것인가. 베이타서스 교회의 단독 행동이었나? 공의회 선언이 붕괴되었다면 각 교구들 간의 관계는 어찌 되는 것인가.

하나하나가 자칫 얇은 얼음장 같은 평화를 무너트릴 중요한 화두였다. 각 교구간의 분쟁으로 일이 불거지기라도 한다면 만신전의 해체는 곧 종교 전쟁으로 비화될 가능성마저 있었다.

부디 그렇지 않기를 바라며, 페르난데스는 순례기사를 따라 알트베르트의 관문을 넘어 평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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