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 흑마법사의 이단심문법-384화 (385/388)

384. 전조 (3)

대륙 동부를 휘몰아친 한바탕 혼란을 뒤로하고 보다 더 서쪽, 이름 모를 깊은 산맥의 인적 드문 숲을 건너 더 은밀한 곳까지 접어들면, 주인 없는 땅들이 도처에 널린 울창한 산악 지대가 나타난다.

각 왕국들의 행정적인 경계선, 또는 제국의 최외곽. 개척에 필요한 인적 자원에 비해 얻을 수 있을 만한 자원도, 지리적 이점도 없는 버림받은 미개척지.

문명의 불빛이 대륙 전역에 퍼졌다고 여겨지는 지금 이 시대에도, 인간의 발이 닿지 않는 이런 지역은 여전히 찾기 어렵지 않다.

벌목을 한들 한 해면 복구되고 마는 수준의 울창한 잡목림. 얻을 수 있는 목재 또한 산업을 일구기엔 너무나 부실한 수준이고, 산지의 광맥을 탐침해 보아야 채산성이 밝지도 않다.

이런 산지엔 산적이나 화전민들조차 살지 않는다. 근처에 무역로는커녕 왕래하는 행인조차 없는 깊은 산중에 산적이 있을 까닭이 없고, 제아무리 조세를 피해 달아나는 화전민들이라 할지라도 이런 산지에서 안전을 도모할 수 없는 탓이다.

그렇다. 안전이다. 문명 사회의 빛이 닿지 않는 곳엔, 인간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존재들이 몰려들기 마련이므로. 빛을 피해 달아나는 해수들은, 기약 없는 증오와 혐오를 품고 이런 산그늘 아래에 모인다.

“진정들 하라고.”

엘프들의 전설에 따르면, 심해엔 눈 없는 괴물들의 복마전이 있다고 한다. 빛이 들지 않는 깊은 바닷속, 보는 것을 포기한 고대의 괴수들이 퇴화해 탁한 눈을 희번덕거리며 냄새와 촉감으로 먹잇감을 찾아 배회한다고 전해진다.

이 순간, 청년은 그 고리짝 전설이 담담한 서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대낮에도 볕이 파고들지 못하는 이 깊고 울창한 삼림 속에서, 청년은 주위를 둘러싼 존재들의 기척을 느끼며 어설프게 웃었다.

피 냄새 탓이다. 청년의 몸에 짙게 밴 혈향뿐만 아니라, 그가 어깨에 들쳐 업고 있는 상처 입은 먹잇감의 냄새가 이 짐승들을 자극하고 있었다.

청년은 자못 위협적으로 들고 있던 횃불을 흔들었다. 키익, 킥. 목 메인 소리와 함께 네 발 달린 짐승 하나가 발작하듯 뒤로 물러섰다.

불빛 아래에 드러난 것은 두 눈이 없는, 거미처럼 길고 얇은 네 다리를 사방에 뻗은 기묘한 곱사등이 같은 원숭이였다. 청년은 혐오감을 숨기지 않으며 으르렁거렸다.

“물러나라! 물러서!”

그는 팔뚝을 걷어붙이며 외쳤다. 그 순간, 주위를 감싸던 짐승의 누린내가 한결 옅어졌다. 기운이 약한 놈들은 낑낑거리며 꼬리를 말고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청년의 팔뚝엔 붉은 인장이 떠올라 있었다. 보기에 따라서 글자 같기도, 의미 없는 반점 같기도, 빛의 번짐에 따라 짐승의 머리 같기도 한 인장이었다.

“영락한 것들. 네 주인은 패퇴했고, 너희들에겐 어떤 희망도 남지 않았다! 복종하고, 길을 내어라!”

“인간의 음성으로 인간들의 말을 내뱉는다 한들 이치들이 알아듣기야 하겠습니까?”

어둠 속에서 요사스러운 목소리가 흘렀다. 짐승들의 숨소리가 짓눌리듯 사라지고, 풀벌레 한 마리도 울지 않는 끈적한 고요가 숲의 그늘 아래로 내려앉았다.

청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사락, 사락. 비단이 스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가면처럼 새하얀 얼굴이 어둠 속에서 떠올랐다.

숨이 멎을 듯한 미인이었다. 도자기 같은 피부와 매끄러운 콧날이 짙은 그림자 속에서 홀로 떠올라 있었다.

“그 패잔병들 사이에 귀인이 오셨으니 어떤 징조일까요.”

“마녀. 누구를 섬기는 몸종이냐?”

“한때 무저갱의 군주를 섬겼으나, 이젠 세월과 운명을 섬긴답니다. 그 어떤 위대한 군주들조차도 피하지 못한 단 하나의 존재이지요.”

말을 하면서도 그녀의 입이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청년은 어깨 위에 들쳐 업고 있던 자루를 내려놓았다. 바닥에 던져지며 자루 속에 있는 사람이 꿈틀거렸다.

“불쌍한 아이 하나를 데려오셨군요. 제물로 쓰기엔 너무나 미력하고, 고운 말로 돌려보내기엔 너무나 많은 길을 건너온…….”

“나는 카를로마노 파빌로스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름은 이곳에서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하지요. 당신의 것도, 제 것도…….”

-사락.

비단이 나풀거리는 소리가 다가왔다. 카를은 반사적으로 허리춤에 찬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귀뚜라미가 우는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귀인의 칼날로 제 몸을 해쳐 보시겠습니까? 재미있는 유희가 되겠군요.”

“다가오지 마라. 마녀. 난 네게 볼일이 없고, 너희는 나를 해칠 수 없다!”

“둘 다 사실이 아니군요. 귀인께서 하고자 하는 일은 저를 지나쳐 할 수 없고, 저는 능히 귀인을 상하게 할 수 있답니다.”

곤충의 날갯짓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지고, 곧 횃불 아래로 검고 긴 막대가 드러났다. 새하얀 얼굴이 점점 더 높은 위치로 떠오르고, 그 아래로 윤기 나는 갑각을 지닌 거대한 검은 곤충이 몸을 드러냈다.

그건 거미였다. 사람의 얼굴을 등 위에 올린, 기름진 침묵 속을 거닐며 새하얀 점액을 흘리는 거미가 번뜩이는 노란 눈으로 카를을 바라보았다.

“귀인께선 놀라지 않는군요.”

“너희는 나를 모르는군. 나는 너희와 같은 족속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

페이른 헌팅 스쿨, 국가 수호의 기치 아래 해수와 괴물, 짐승 등을 토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교육 기관. 카를은 헌팅 스쿨이 배출한 역사상 가장 뛰어난 사냥꾼이자 현직 교수로 활동하고 있었다.

오랜 역사 속에서 헌팅 스쿨이 쫓은 수많은 짐승과 괴물 중엔 이런 종류의 것들도 있었다. 말로 사람을 홀리고 사람의 피부를 모사하고 사람의 고혈을 탐하는, 어둠 속의 짐승들.

공포를 빨아먹는 존재들. 한때 놈들은 인류 문명의 위협이었으나, 이제 저들은 패잔병에 불과하다. 문명의 빛 너머로 도망친 버러지들에 불과했다. 카를은 두려움 없이 꼿꼿하게 서서 놈을 바라보았다.

카를이 횃불을 들고 자못 위협적으로 휘둘렀다. 불빛의 궤적에 따라 숲의 그림자가 거세게 일렁였다. 그림자 사이에 숨어든 짐승들이 쉿쉿거리며 몸을 낮추고 분노했다.

“너희가 두려워하는 것, 너희가 증오하는 것들, 너희의 약점과 너희의 생각……. 너희가 품은 고대의 비밀이란 것들은 낡은 우화 속 농담에 지나지 않지. 그런 시대다. 한때 밤과 새벽의 지배자였던 너희도 이젠 과거의 찌꺼기에 불과하며, 너희의 시간은 다신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귀인께선 어째서 저희를 찾으셨습니까?”

거미는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감히, 카를은 입술을 씹으며 그것을 노려보았다. 거미의 갑각 덮인 다리가 다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바닥을 짚었다.

“내가 너흴 찾았다고? 아니, 너희가 내 길 앞에 놓인 것뿐이다. 이 자리에서 너흴 만나지 않았다면, 너희는 결코 내 앞에서 같은 높이에 눈을 맞추고 서 있지 못했을 테니.”

“아, 귀인께선 착각하고 계시고 있군요. 귀인의 몸에 새겨진 그분의 표식…… 그 길을 따라 오셨을 테니. 이 에 숨은 역사를 알아내신 그 지혜에는 기꺼이 탄복하겠으나, 귀인께선 이미 늦으셨습니다.”

“……뭐?”

카를은 거미의 말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정보가 잘못되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놈…… 대황야의 성자, 그 괴물 같은 놈은 결코 잘못된 정보를 찾는 법이 없었다.

놈이 의도하여 거짓 정보를 푸는 경우는 있더라도, 이번 것은 그런 경우에 대항하지 않는다. 이건 놈이 죽음을 각오하고 떠나며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장이 아니었던가.

물질 세계에 봉인된 마지막 대악마의 흔적. 그런 값진 정보를 잘못 흘렸을 리가 없었다. 카를이 눈을 가늘게 뜨자, 거미가 부산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저희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귀인께서 앞서 말했듯이 저희는 패잔병이랍니다. 저희의 우둔한 군주께선 그 위선자의 손에 몰락하셨으나, 패잔병들에겐 패잔병만의 방식이 있는 법.”

거미의 눈이 폭력의 유혈을 담고 즐겁게 반짝였다. 카를은 그 모습에서 본능적인 위협을 느껴 뒤로 주춤 물러섰다.

실수였다. 본디 짐승들은 겁먹은 사냥감의 기척을 본능적으로 알아채는 족속들이었다. 거미의 몸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거미의 몸집이 부풀어 보였다. 실체가 어지러지고 현실이 일그러지는 감각, 사냥감과 사냥꾼의 위상이 뒤바뀌는 느낌……. 카를은 반사적으로 칼자루를, 그리고 품 안의 석궁을 집었다.

“두려워 마시지요. 귀인. 저희가 설마 귀인을 해하겠습니까? 그러고자 했다면 귀인께선 이 자리까지 올 수도 없었겠지요.”

“폐광이라 들었다. 애초에 폐광이라면 인적이, 그 흔적이나마 남아 있어야 마땅하다. 너희 같은 족속들이 숨어들 수 없어야 했다.”

“맞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이 자리에 있지요. 그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너희의 주인이란 작자가…… 그분의 무덤을 먼저 발견했구나. 아마도…… 최근에.”

카를은 한 마디, 한 마디 씹어 뱉듯이 말하며 길게 탄식했다. 그러나 그는 곧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느낌을…….

타이반. 그 고대의 악마가 잠들어 있는 봉인지를 이자들이 먼저 발견했고, 그분의 봉인을 푸는 것에도 성공했다면, 어째서 그에 마땅한 징조가 없단 말인가?

천상 전쟁 이래로 그 어떤 대악마도 지상을 온전히 밟지 못했다. 그러니 대악마가 봉인에서 풀려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추측과 몽상의 영역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이 있다면, 대악마의 강림이 이토록 고요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단순히 지옥 마력에 의한 오염과 같은 저열한 수준의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악마는, 특히 대악마는 관념적인 존재다. 물질 세계에 그런 존재가 거닌다는 의미는 곧 물질 세계를 이루는 현상적인 관념들이 일그러지고, 세계의 법칙이 뒤틀리는 결과를 낳아야 했다.

카를은 거미를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의문을 느끼고, 거미는 노래를 부르는 듯이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귀인께서는 현명하시군요. 과연 그분이 지목하신 사도답습니다. 귀인의 생각이 옳습니다. 제 주인은 그 존재의 봉인을 풀어내지 못하셨지요. 그건 산 자의 피와 잊혀진 지식, 그리고 이를 활용할 수 있는 지혜와 힘이 필요한 일입니다. 저희는 할 수 없지요.”

거미는 다리를 딱딱거리며 다가와서, 바닥에 널브러진 자루 근처에 묻은 혈흔을 발끝으로 문질렀다. 신선한 붉은 핏물이 갑각질 다리 끝에 엉겨 붙고, 거미는 그것을 음미하듯 들이켰다.

“하지만…… 우리의 대적자. 그 천 번 저주받을 배신자가 할 일을 미리 알아채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놈의 계획을 읽었다고?”

“제 주인께선 놈의 정체를 알게 되셨지요. 놈에 의해 무너져 내린 이후에, 주인께는 생각할 시간이 아주 많았답니다. 놈의 계획이 무엇일지, 저 높은 하늘 위의 겁쟁이들이 무엇을 바라고 있을지. 그리고 마침내…… 이 세상이 얼마나 가냘프고 허무할지에 대해서…….”

우습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토록 바라고 탐내던 이 물질 세계가 누군가의 꿈결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거미는 다각거리며 속삭였다. 카를이 인상을 찌푸리자, 거미는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아직 거기까진 알아내지 못하신 모양입니다. 이곳에 있다 보니 말이 길어져 큰일이군요. 귀인이시여.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귀인께서 찾는 것은 더 이상 이곳에 없습니다.”

“봉인지를 옮겼다고 말하는 건가? 그게 가능하긴 한가?”

“범상한 경우엔 불가능한 일이지요. 하지만 모든 일에는 방법이 있는 법이랍니다. 제 주인께선 그 방법을 찾으셨고, 저희를 이 자리에 보내셨지요. 이곳에 남아서 찾아오는 이에게 전하라고. 아마도, 그분께선 그 배신자가 우릴 먼저 찾으리라 여기셨을 겁니다.”

“놈에게 무슨 말을 전하라는 거지?”

“하늘을 향해 승천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지상을 향해 추락하는 것 또한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거미는 악의적인 농담이라도 한 듯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지독한 부패의 악취가 놈의 몸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카를이 뒤로 주춤 물러서자, 거미가 어둠 속에 몸을 묻으며 속삭였다.

“돌아가서 놈에게 전해 주십시오. 이제 이 곳에 돌아오지 마세요. 귀인의 주인께선 당신을 직접 찾아오실 겁니다. 이제 제가 섬기는 단 한 분은 오직 운명뿐이며, 운명은 언제나 그랬듯이 당연히 있어야 할 결말을 향해 내려올 겁니다. 당신의 주인에게도, 그 대적자에게도, 이 세계에도.”

“적어도 나에겐 아니다.”

그 순간, 카를의 뒤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울렸다. 거미와 카를 모두가 움찔 떨며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카를은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기랄, 정말…… 일이 지랄 맞게 꼬이는군. 왜 이리 빨리 온 건가. 응?”

카를은 고개를 내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천천히 한 줄기 빛이 피어올랐다. 서늘한 빛줄기가 창날의 형태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거미의 입에서 짓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때까치……!!”

“네가 섬긴다는 그 운명이란 것이 오늘 내가 오리란 것은 점지하지 못했나 보구나, 악마.”

“너는 그분의 가장 우스꽝스러운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쒜에에엑!

대답 대신 공기를 찢어발기는 소음이 들렸다. 카를은 자신의 뺨을 스쳐 지나간 것이 그의 등 뒤를 완전히 박살 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챘다. 소리보다 빠르게 날아든 물체가 방금까지 거미가 서 있던 자리를 으스러트리고 그 뒤의 나무 수 그루를 관통했다.

오래된 잡목들이 뒤틀리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짐승들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형형한 눈을 이글거리며 다가오는 존재가 보였다.

다리안. 귀기 어린 눈으로 그를 똑바로 노려보는 상처 입은 맹수가 허리춤에서 칼날을 뽑아 올리고 있었다.

“들어 보게, 쉬라이크 경. 잠시만. 저 뒤에……. 이 세계를 뒤바꿀 마지막 힘이 있다고. 어찌 경 혼자 교회의 위선자 모두를 대적하고 끝내 성공할 수 있겠나? 힘을 합치거나 우리를 따르라는 소리가 아니야. 합리적으로 생각해. 그저 같은 목표를 가졌으니, 잠시 함께 움직이자는…….”

카를은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분명코 칼을 뻗어 닿지 못할 거리였음에도, 카를은 자신의 목을 스치고 지나가는 칼날을 선연히 느낄 수 있었다.

어느새 그의 곁까지 다가온 다리안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너머에 목 없이 허물어지는 자신의 몸이 보였다.

이렇게 허무하게 갈 수는 없다. 카를은 두 눈을 부릅뜨며 절규했다. 그의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는 일은 없었다.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카를은 다리안의 목소리를 들었다.

“신을 죽이고, 악마를 죽이고, 인간을 구한다.”

지독한 광기마저 느껴지는 집념에, 카를은 천천히 사그라드는 의식 속에서 생각했다. 저건 이제 더 이상 사람이라 부를 수 없다. 인간의 형태를 띤 자연 재해일 뿐.

폭풍이나 해일을 두 손으로 조작하려 들었으니 이런 꼴이 되는 것인가. 카를은 그것이 우습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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