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5. 전조 (4)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까. 페르난데스는 흐린 하늘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알트베르트 성하 야영지 중 하나가 철수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던 탓이다.
북부인들의 야영지가 빠르게 수습되고 있었다. 이들은 지금 대단히 미묘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 자리에 남아 있는 피난민들 대부분은 저들의 손에서 도망친 자들이었고, 그런 이들이 대뜸 페이른 군대에 맞서 전투를 도와주었으니.
적인가 아군인가. 마냥 적대하기에도 적잖이 걸리는 바가 많고, 적대한다 한들 대적할 방법이 없으니. 피난민들은 그저 공포에 질린 눈으로 이 장대한 전사들이 성큼성큼 걸어 다니는 길을 피해 다닐 뿐이었다.
“이야! 페르난데스!!”
저 멀리에서 아에렌이 그를 알아보고는 경쾌하게 뛰어왔다. 잿빛에 가까운 창백한 금발이 나풀거리는 모습이 그림 같았다. 사자 갈기처럼 머리칼을 흐트러트리며, 그녀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그래도 가기 전에 얼굴이나 한번 보려 했는데, 잘됐군! 왜, 내가 저 성에 들어가는 것은 꼴이 우습지 않나?”
“하이 야를. 긴히 할 말이…….”
“아하하, 하이 야를이라니. 무슨 말을 하려고 그리 격식을 차리는 거지? 편하게 해, 편하게.”
아에렌은 시원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입장에서 페르난데스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나 다를 바 없었다. 위험한 일은 저 홀로 처리하고, 콩고물만 얻고 북부로 향해도 이미 월동 준비는 끝인 셈이다.
더군다나 제국과 엘프, 대륙의 두 강대국과의 수교가 단단하게 이루어졌으니 더없이 좋았다. 겨울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무역을 시작해도 좋고, 용병업을 시작해도 좋았다. 돈 벌 일들이 늘어날수록 굶주리는 북부의 백성들이 적어질 테니.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여전히 딱딱한 낯을 유지하고 있었다.
“잠시 주위를 물러 주시겠소.”
“아, 여기 녀석들은 다 믿을 만한 놈들인데? 흐으음…… 그래, 뭐. 심각한 일인가?”
“다소.”
“좋아. 다들 귀 막고 뒤돌고 쉰 걸음 물러나라!”
아에렌의 외침에 호기심을 보이던 북부인들이 후다닥 물러섰다. 페르난데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야영지의 의자에 걸터앉았다.
“음. 내가 손님이 된 기분인걸?”
“앉으시오. 이야기가 길어지진 않겠지만.”
“뭔데 그렇게 분위기를 잡지? 요르문간드도 때려잡은 녀석이 이러니 아주 으시시하군.”
아에렌은 수통을 뜯어 나무잔에 채워 건넸다. 붉은 와인이 넘실거리는 나무잔을 쥐고, 페르난데스는 다시 말을 골랐다.
“대륙은 북부를 적대할 거요.”
“음……. 동부의 샌님들이야 그렇겠지. 아무래도 우리가 약탈자들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나?”
“동부뿐만 아니라 제국과 교회들도 그대들을 적대할 거요. 아에렌, 그대는 대륙 전체의 공적이 될 것이고 북부는 언젠간 처리해야 할 인류의 대적들로 남게 될 거요.”
“……왜?”
아에렌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페르난데스는 잠시 잔을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교회가 그대들에게 호의적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소?”
“음. 만신전은 종교에 배타적이지 않으니. 우리 입장에서도 무스펠과 요르문간드를 직접 찾아와 처리해 주니 고맙기 그지없지.”
“그리고 그대들이 약탈한 동부의 소국들 대부분은 최근 만신전 교회와 거리를 두려 했고.”
“…….”
페르난데스는 잔을 기울여 입을 한 차례 축였다. 쓰임새가 다한 팻감을 버리는 일엔 이골이 나 있었지만, 그 시절의 페이자쉬와 그는 엄밀히 다른 존재다. 지금에 와선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북부인들이 돌연 제국의 배를 탈취해 동부 정세에 한 발을 걸친 일이 우연일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왕족들이 있을 거란 뜻이군.”
“이야기가 빠르군.”
“내가 바보로 보였나, 페르난데스?”
기실 간단한 논리였다. 교회는 최근 북부와 연을 맺기 시작했다. 이는 지난번 십자군 소동으로 군세를 끌어모았던 베이타서스 교회에 의해 드러난 사실이었다.
교회의 성자가 북부에서 모종의 비밀 임무를 수행했다. 중간 과정에서 다소 차질이 생겨 교회는 북부 정벌을 위해 군세를 끌어모았다. 그러나 성자가 귀환하고 미묘한 긴장감과 갈등 상황 속에서 소집령이 해제되었다.
세속 왕가의 군주들은 멍청이들이 아니다. 일련의 사건 속에서 풍기는 정치 공작의 악취를 누구보다 빠르게 맡는 들개들이었다. 교회의 소집령과 부연 설명 없는 해산, 그리고 곧장 벌어진 제국의 내전.
그 사이에서 일련의 상관관계가 있음을 깨닫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정국이 혼란에 휩싸이며 잠시 잊혀진 것일 뿐.
그러니, 북부인들이 제국의 선박을 타고 내려와 동부를 약탈한 이 상황은 언젠간 반드시 대두될 정치적 시한폭탄이라 할 수 있었다.
“네가 이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지. 그렇다면 애초부터 우리에게 지원을 요청한 이후 지금 이 순간까지 계획된 일이었어?”
아에렌은 상처 입은 눈으로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페르난데스는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그 자체는 얼마든지 부정할 수 있는 일이오. 그럴 생각이었고.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소. 우리 계획을 알고 있지 않소?”
“외팔이 왕이 죽고 무정부 상태가 된 동부에 새로운 왕조가 건설된다. 그런 계획이었지. 그래.”
“비센테 왕은 여전히 건재하고 심지어 그 홀로 신화를 써 내려가고 있소. 동부의 평정은 머지않은 일이나 그의 치세에 반기를 들 과거의 왕조들에게 있어서 북부인들은 좋은 먹잇감이 될 것이오.”
교회와 제국과 북부의 합종연횡, 그리고 그들의 힘을 빌어 세워진 새로운 동부의 대국. 권력을 잃은 과거의 왕조들에게 있어서 이는 좋은 명분이 될 수 있었다.
그러니, 새로운 왕국의 토대를 다지기 위해 북부를 버린다. 그것이 다시 써 내려간 페르난데스의 작전이었다.
“그대들은 북부로 퇴각할 것이고, 순례기사단들이 그대들을 추격할 거요. 잔당이 남아있을지 모르니 순례기사단은 자연스레 이 땅에 머무를 수 있고.”
성 요한 순례기사단은 특수목적군에 해당한다. 전술 목표가 완수된 이후에 더 이상 주둔할 명분이 없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무력을 상실한 데인과 동부 연합의 토지에, 잔당 소탕을 천명한다면 그들의 주둔에 명분이 생긴다.
이 명분은 비단 동부의 왕가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기실 가장 강력한 명분은 힘이며, 동부엔 순례기사단을 공공연히 적대할 군사력이 남아있지 않다. 그러니 이 명분은…….
“종교 전쟁을 막아 내기 위해서, 그대들이 희생해야 한다는 뜻이오.”
만신전 교회의 내분을 막기 위함이다. 순례기사단의 파견은 만신전 교회 전체의 뜻이 아니었다. 교황이 모든 종파의 동의를 받아 내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했던 탓이다. 그러니 이제부터, 만신전 교회에 보여 줄 명분이 필요했다.
각 종파는 이단 정화의 기치를 세운 순례기사단에 감히 반기를 들 수 없을 것이다. 성 바르톨로메오 수도원이 공식적으로 소실된 이 시점에서, 순례기사단은 이단과 사교도를 제거할 의무를 이양받은 셈이니까.
합법적으로 주둔하는 순례기사단의 군권을 쥐고, 원탁 기사들의 편력이 만들어 내는 선행과, 페이른에 대항해 홀로 대군을 막아 낸 위대한 왕이라는 명분을 쥐고. 그리고 뒤로는 제국의 막대한 원조를 받아낸.
이제 새로운 왕조가 동부의 주도권을 움켜쥘 것이다. 교회와 세속 양면에서 어떤 결점도 존재하지 않는,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왕조가. 데인 동부는 이 위대한 기사들의 국가에 복속될 것이며—
“교회와 왕실 양측에서 지원을 받는 네가 이 땅의 실권자로 군림하겠군.”
아에렌은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페르난데스가 의도적으로 말을 아끼고는 있었으나, 그녀는 멍청하지 않았다. 데인 왕가가 신화를 다시 써 내려가고 있다고? 아니, 그 신화 속에는 왕의 곁에서 적들에게 대항한 한 기사의 이야기도 분명 있을 것이다.
국가가 가장 위급한 순간에 왕과 함께 옥쇄를 각오한 의로운 기사의 이야기가, 페르난데스가 말하지 않은 그 ‘신화’라는 것에 반드시 적혀 있을 것이다.
아에렌은 남은 술을 털어 마시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교회의 지지와 민중의 복종, 그리고 제국의 원조를 받은 위대한 왕가의 탄생이라. 왕의 이름 대신 네 이름을 넣어도 모두 들어맞는 그림이 되겠군. 페르난데스.”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게 아니었소만.”
“야망에 비해 겸손하기까지 하군.”
제국의 황제는 그에게 호의적이다. 데인의 외팔이 왕 또한 그랬고, 교황이라고 다를 바 없었다. 아에렌은 턱을 슬슬 쓸어 만지며 앉아 있는 페르난데스를 바라보았다.
“후일, 우리 모두가 사라진 이 땅에서. 역사가 너를 무엇으로 기억할지 궁금해지는구나.”
북부는 너를 괴물이라 기록할 것이다. 아에렌은 짙게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굳은살이 거칠게 박인 뻣뻣한 손을 크게 흔들어서 악수하며—
“이제 끝났나?”
“……무슨 말이오?”
“양심에 관한 이야기가 끝났냐는 말이야, 페르난데스. 우릴 배신한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그런 표정인데? 그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너나 나나 잘 알잖아.”
예상외로 아에렌은 한결 후련해진 얼굴이었다. 그녀는 악동처럼 킬킬거리며 말했다.
“북부는 막대한 식량과 자원을 얻었고 너는 명분과 안정을 찾았지. 우리 작전은 성공했어. 그게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지. 우리 둘은 역사에 길이 남을 악역이란 것. 내겐 북부의 백성들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고, 너는 네 악행에 떳떳할 의무가 있다.”
“그대는 괜찮소?”
“네 계획이? 아니면 내 악행이? 걱정은 고맙지만 양심과 도덕은 생존 이후의 문제라 생각하지 않나? 에리크가 일으킨 내전 이후로 우리 북부의 상태는 개판 그 자체야. 하루하루 빌어먹기도 힘든 놈들이 언제 눈이 뒤집혀 이웃을 도륙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고. 회개는 살아남은 이후에 하는 것 아니었나?”
아에렌은 진심이었다. 대륙과의 우호적인 관계? 이는 어차피 차후의 이득에 불과했다. 정세는 얼마든지 바뀌기 마련이고, 놓친 기회에 미련을 가질 만큼 미련하지 않았다.
이 유능한 씨족장의 웃음에, 페르난데스는 그간의 고민이 씻겨 나가는 것을 느끼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실권자들끼리 실효성 있는 이익에 대해 이야기해 보지. 악인들끼리, 사악한 음모를 꾸며 보자는 말이야. 나와 너 사이엔 아직 거래할 품목들이 더 남아 있거든.”
“특정 항구에 대해 약탈을 허용하겠소.”
“그렇게 나와야지.”
북부를 공적으로 삼아 내분을 무마시키겠다는 계획을 반대로 말하면, 북부가 행할 적대 행위를 묵인하겠다는 의미였다. 대륙이 북부를 공격할 때, 북부 또한 대륙을 공격할 명분이 충분했으므로.
아에렌은 이 기회를 ‘거래 품목’이라 불렀다. 그 뜻은 명백했다. 제아무리 완벽한 명분하에 통일된 국가라 할지라도 불만 세력이 없을 수는 없으니, 그들을 치는 도구가 되겠다는 뜻이었다.
대단히 세련된 용병 계약이었다. 기실 이번 전쟁의 양상에서 달라진 것은 없었다. 페르난데스에겐 적이 있고, 북부엔 자원이 부족하다.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거래다.
이것이 비인간적인 악행이며 끔찍한 음모라는 점을 제외한다면 그랬다. 교회의 성자와 전생의 천사는 악의적인 웃음을 띠며 고개를 악수를 나눴다.
‘대천사의 성정에 맞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의미 없는 물음이었다. 신성을 잃고 추락해 인간이 된 이상 전생과 같을 수는 없다. 기실 영성을 그대로 유지한 채 전생한 그조차도 전생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않던가.
그러나 대천사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퍽 유쾌해서, 페르난데스는 저도 모르게 털털 웃고 말았다.
“그럼 이제 넌 뭘 할 생각이지? 정복? 정치?”
“토벌이오.”
페르난데스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손을 털었다.
“마지막 과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