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 전조 (5)
종말의 형태는 무수히 많지만, 그것이 가져오는 결과는 늘 같다. 교회와 이단, 그 두 집단 모두가 동의하는 말이었다.
따라서 교회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최소한의 악행조차 용인하지 않겠다 천명했고, 이단들은 제각기 다른 이상을 품고 자신이 꿈꾸는 종말을 향해 질주한다.
적어도 이 시대의 사람들은 그랬다.
“하지만, 그자들 모두가 종말을 그저 막연한 소문과 은밀한 신화로만 알고 있을 뿐이지.”
누구도 종말의 순간을 직접 목도한 적 없다.
지금의 물질 세계에서 단 두 사람을 제외한다면. 페르난데스는 자신을 제외한 남은 한 사람을 향해 말했다.
늙고 깊은 눈을 지닌 왕, 전성기의 강대한 전력을 여전히 온존한 저 먼 신화 속 군주가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제르올렌. 엘프 삼왕조의 마지막 남은 초대 군왕. 그는 술잔을 들고 페르난데스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래, 적어도 우리는 종말이 어떤 형태를 가지는지 알고 있지. 날 찾은 이유가 무엇인가?”
“일찍이 카를 대제를 도왔던 그 방식을 빌리고 싶소.”
“음……? 그리핀을 타고 싶다고?”
천상 전쟁 말엽, 샤를 대제가 당대의 대악마를 직접 격살하며 물질 세계의 평화를 이룩했던 그 시절에 제르올렌은 자신의 그리핀에 대제를 싣고 전장으로 향했다고 한다.
하지만 제르올렌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당시 샤를 대제가 적진 속을 파고들 때와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다르지 않은가.
그 당시 물질 세계엔 악마들이 대제국을 건설하고 있었다. 대악마의 목을 치기 위해선 수십, 수백만의 악마들을 관통해 나아가야 했으나 지금 이 시대는 그렇지 않다.
은밀히 이동할 필요도 없고, 적들이 산적한 깊은 군영 속도 아닐뿐더러 이 대륙 위엔 그의 부름에 따라 군기를 들어 올릴 군주들이 충분히 많았다.
대체 그리핀 같은 이동 수단이 왜 필요하단 말인가.
“어디로 가고 싶다는 거지? 빠른 이동 수단이 필요하다면 차라리 해역을 통과해 수로로 움직이는 편이 더 안전하고 편안할 텐데.”
“샤를 대제가 마지막으로 눈을 감은, 대악마를 죽여 없앴던 그 땅. 그 정확한 위치를 아는 자가 이제 물질 세계 위에 당신밖에 없으니까.”
페르난데스는 항구에 짐을 하역하는 잡부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인퍼머르, 한때 엘프들의 땅이었던 이 거대한 항구는 능히 엘프 기함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한 항만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접안선과 끌차, 수레, 도르래가 복잡하게 얽힌 크레인 따위가 식자재 등을 하역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이 제국에 전달된 지 열흘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엘프 왕가의 기함이 동부에 구휼 식재를 선적하고 나타난 것이다.
모든 것들이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짜여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전쟁이 끝났다는 소문이 제국 정계 중앙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귀르의 항만에서 제국 전역의 식량을 선적하고 있었다는 것도, 때마침 대단위 운항이 가능한 엘프 기함이 귀르에 정박하고 있었다는 것도, 그 누구도 섣불리 의문을 표하지 않은 채로.
이들이 해상을 장악하기 전에 타이밍 좋게 북부인들이 원양으로 도주했고, 순례 기사단들은 그들의 퇴각을 ‘안타깝게도’ 저지하지 못했다.
제국은 ‘지난 내전의 지원에 대한 대가’로 데인에 식량을 원조했고, 데인은 동부의 소왕국들에 ‘싼값과 저렴한 이자’로 구휼미를 공급했다.
각처의 공급망과 분배 계획은 시의 적절하게도 흩어져 있는 데인의 원탁 기사들이 감독하고 있었으니.
이제 데인은 명성과 실리를 모두 챙기고 동부의 패권국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되었다.
그 누구도 이 치밀한, 그리고 대단히 공교로운 우연을 의심하지 못했다. 당장 입 안에 들어오는 빵 한 조각이 호기심보다 더 값어치 있기 때문이다.
“카를로가 죽은 것이 천 년 전 일이야. 그 시절의 흔적이나마 남아 있을 것 같지 않군.”
“내겐 천 년 전 망자의 넋에게도 귀 기울일 수 있는 수단이 있소. 얼마나 걸릴 것 같소?”
“가는 데에? 지금 이 일이 끝나면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그리핀 다섯을 끌고 가는 내내 갈아타며 이동하면 그 정도가 되겠군. 더 동행할 이들이 있나?”
“없소.”
페르난데스가 짧게 고개를 젓자 제르올렌은 어깨를 으쓱였다.
“위협을 홀로 감당하려는 자세는 물론 본받아 마땅한 것이지만, 주위 사람들의 걱정에도 가끔은 관심을 가져 보라고.”
“불필요한 조언이군.”
“고집하고는. 좋아, 가세나. 열흘 후에 다시 찾아오시게.”
그것으로 제르올렌은 할 말을 모두 마쳤다는 듯 고개를 돌려 다시 선착장을 바라보았다. 페르난데스는 그 시선에서 열망과 아련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영원히 지상에서 추방당한 방랑자들의 왕. 지상을 거닐던 시절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왕의 눈이었다.
* * *
식량 분배 작업은 순조로웠다. 굳이 페르난데스가 발 벗고 나서지 않아도 충분할 정도로.
실제로, 페르난데스는 큰 기획을 짜 올리는 것에는 능해도, 국가를 운영하며 치밀한 경제 계획을 구축하는 것에는 그리 숙달되지 못했다.
살면서 평생 방랑 마법사로 살아왔고, 음모로 영웅들을 암살한 적은 많았어도 행정 귀족으로 살아 본 경험이 없던 탓이다.
그러니, 지금 그는 아주 오랜만에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전쟁의 참화에서 재건되는 알트베르트와 데인의 국토들을 둘러보며 아주 느긋하게.
“저 마을을 기억하느냐?”
“벌써 이 년 전이군. 기억하오.”
“후후, 가끔은 이런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구나.”
아벨은 부드럽게 웃으며 페르난데스의 발에 맞추어 말을 몰았다. 그녀는 문득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키르하스를 그렇게 두고 와도 되느냐?”
“우리 중엔 그녀가 가장 유능하지 않겠소.”
“그건 부정하고 싶구나. 내 가치를 폄하하려 들다니!”
애석하게도 키르하스는 이 나들이에 함께하지 못했다.
선제후 섭정으로서 귀르를 운영하고, 대족장의 입장으로 군림해 왔던 그녀에겐 지금 이 순간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던 탓이다.
그녀는 지금 동부 전역에 흩어진 수인족 노예 문제와 제국과 동부 사이의 교역 문제에 대해 제국 귀족이자 수인 연합의 수장으로서 궁중에 머물러 있었다.
‘안 돼요! 이럴 순 없어!! 선조님들! 도와주세요! 저한테 이러지 마세요!!’
‘키르하스. 부정한다 해서 해야 할 일들이 사라지진 않는단다.’
‘이건 배신이야! 은공! 이제 은공은 은공이 아니에요! 배신자예요!!’
키르하스는 빽빽 소리 지르며 수십 번의 탈출을 시도했고, 그때마다 번번이 순례기사단의 손에 압송되어 다시 서류철 사이에 파묻혔다.
아벨은 그 광경을 떠올리며 쿡쿡 웃었다.
“그 아이가 잘해 낼 수 있겠느냐? 나는 아직도 그 아이에게 정치적인 감각이 있으리란 생각 자체가 들지 않는다.”
“그녀를 과소평가하지 마시오, 아벨. 키르하스는 귀르에서 평생 정치판의 구정물을 먹고 살아온 늙은 노괴를 홀로 대적해 승리한 군주요. 하는 말과 행동보다 더 유능한 정치가지.”
정치가들은 크게 세 가지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암수와 음모에 능통한 모략가, 허허실실의 심계를 감춘 배후자, 그리고 그녀와 같은 본능적인 투사.
그녀의 눈은 이제 전생 시절의 것에 가까울 정도로 완전히 개화했다.
즉, 단순히 전투에서 승리를 향해 작용하는 수준을 벗어나, 본능적으로 가장 완벽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진화해낸 것이다.
경험과 자질, 그리고 영혼의 업을 성실히 쌓아 올린 결과였다. 이제 키르하스에겐 어떤 함정도 쉽사리 통하지 않는다. 작은 단서와 짧은 대화 속에서도 키르하스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선천적인 영웅이 후천적인 노력을 다한 결과이리라. 그녀는 전생 시절에도 두 손 안에 꼽히는 위대한 군주였으며, 지금에 이르러선 한 손에도 수위를 다투는 영웅이므로.
“뭐, 나는 그 덕에 좋은 시간을 보내니 불만 없구나. 이제 어디로 가려느냐?”
“흔적을 찾아볼까 하오.”
“흔적?”
“이단심문청이 소실되었다 하더라도 모든 이단심문관들이 한날한시에 죽었다는 말은 아니오. 하지만 순례기사단이 파견되었다는 것은 지금 교황청과 이단심문관들 사이에 교류가 끊겼다는 뜻이기도 하지.”
만일 이단심문관들이 모두 무사히 살아남아서 본청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지기스문트의 명백한 이단 사태에 이단심문관들이 나타났을 것이다.
교황이 무리수를 연발하면서도 순례기사단을 파견할 수밖에 없던 이유. 그 가장 큰 이유는 이단심문관들의 행방이 묘연해진 탓일 터.
이단심문청은 베이타서스 교회가 가진 가장 광범위한 정보 조직이었다.
수많은 토치맨들과 이들이 끌어모은 정보를 정제하여 보고하는 본청의 업무가 일시에 끊겼다면, 교황의 입장에선 초조해질 법도 했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광범위한 정보망이 본청의 소실로 일시에 증발했을 리가 없다. 다만 지금 보고 체계가 망가진 탓에 기능이 정지된 것일 뿐.
“그렇다면 이단심문관들은 지금 전국 각지에 임무 수행을 위해 흩어진 상태 그대로 고립되어 있을 수 있소.”
“그런 자들을 어찌 찾는단 말이냐? 그건 말 그대로 본청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에나 가능했던 일이 아니냐?”
“성 바르톨로메오 수도원 본청에 속하지 않은 이단심문관들이 있지 않겠소?”
“……응?”
“렐리기오사 말레디카. 저주받은 자들의 성소. 그자들은 아직 기능이 온전하오.”
헤레티카, 디모니카, 엔마기카로 대표되는 이단심문청의 세 분파는 본청의 소실과 동시에 기능을 멈췄을 가능성이 높다. 생존자들을 하나하나 찾기도 어렵고, 설령 생존자들이 은밀하게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했다 한들 그 위치를 파악할 수 없었다.
페르난데스가 이단심문청에 입단한 것은 고작해야 삼 년이 되지 않았다. 본청 소실과 같은 긴급 사태에 대응하는 프로토콜 따위를 익힌 적이 없었단 뜻이다.
그렇다고 두 손 놓고, 언제 올지 모르는 연락을 막연히 기다리는 것은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시간은 언제나 가장 소중한 자원이며, 설령 지금 남는 시간을 여가로 소비하고 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일을 다시 시작하겠다는 말에 아벨은 고개를 내저으며 깊게 한숨 쉬었다.
“말레디카 요원들은 정보 전달을 본청을 통해 하지 않소. 오직 내게만 허락된 경로로 보고가 오고 가지.”
페르난데스는 말에서 내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어느덧 인적이 드문 산길이었다. 그는 주위를 슬슬 둘러보고는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한 이후 손가락을 펼쳤다.
“오랜만에 산보나 나가자 하여 내 큰 기대를 했건만, 언제나 기대를 벗어나는구나.”
도시 내엔 교회측 인사가 많았고, 백성들에게 그는 마법사가 아니라 원탁 기사로 비쳐져야 했다. 위대하고 숭고한 기사. 따라서 그는 인적이 드문 깊은 숲길까지 거닐어 온 끝에야 주문을 시도할 수 있었다.
-화르륵!
마력 회로가 뜨끈하게 달아오르고, 이윽고 겨울철 쌓인 낙엽더미 위로 불씨가 타들어갔다. 녹색 불똥이 뱀처럼 또아리를 틀며 일어서서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열쇠검과 그 위를 감싸고 올라간 독사의 형상. 렐리기오사 말레디카의 인장이 나무 위에 잿불로 긴 흔적을 남기며, 그 사이에서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주인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암녹색 불길이 쉿쉿거리는 소음을 내며 연신 꿈틀거렸다. 페르난데스는 가만히 손가락을 교차한 자세로 이를 내려다보며 슬쩍 미소 지었다.
[하명하실 일이 있으시온지요.]
“이단 사건 하나를 일으켜야겠다.”
[위치와 목적을 말씀하십시오. 명대로 따르겠나이다.]
“페이른 외곽, 진홍형제단의 흔적, 서북부 능선을 따라서 다섯 마을 정도면 적당하겠군. 시간은 닷새 이내로.”
숨어 있는 이단심문관들을 찾는 가장 쉬운 방법이 무엇일까?
당연하게도, 이단이 되는 것이다.
페르난데스는 적어도 그 방면에 있어서 그 누구보다 전문가에 가까운 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