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사기적 부정거래(1)
“부사장님, 부사장님께서 질문을 해 보시겠어요?”
갑자기 한수정이 대놓고 나한테 이렇게 말했다. 한수정의 의도가 뭔지 전혀 감도 안 잡혀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김재필 회장님, 제가 양해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저보다는 우리 부사장님이 이쪽은 훨씬 전문가세요. 제가 상담을 진행하는 것보다는 더 잘하실 것 같은데,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와, 역시 한수정. 그냥 정면돌파. 일생이 직진인 여자네. 나도 그렇게 살아온 인생이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무대뽀로 직진할 줄은 감히 상상도 못 했다. 진짜 멋지다. 하지만 이건
내 생각이고, 지현준이나 김재필은 완전히 멘붕이겠는데?
“아유, 우리 한 변호사님 겸손하시기는. 너무 그러시면 사람들이 오해한다고, 그러지 좀 말라고 내가 누누이 말씀드리는데도 그걸 못 고치시네. 우리 한 변호사는 사람이 너무
양심적이야. 김 회장님, 이런 변호사 본 적 있어요? 나 못한다고 이렇게 딱 인정하는 변호사. 진짜 최고 아닙니까?”
지금 이 상황이 저렇게 둔갑할 줄이야. 지현준 입 터는 건, 가히 세계 최고네. 김재필도 황당하다는 듯이 지현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김재필 입장이면 나라도 아주 황당해 미쳐버릴 것
같다.
“회장님, 내가 장담하는데, 여기 진짜 드림팀이에요. 이분들이 회장님 사건 맡아 주기만 하면 반은 된 거라고. 나 봐요. 따봉 엔터 때문에 무슨 일까지 겪었는지 우리 회장님도 다
아시잖아요. 이 팀 아니었으면 나 지금 여기 못 있어요. 그러니까 믿으세요, 회장님. 믿고 다 맡기시라고.”
지현준이 아주 진지하게 이야기하는데, 나도 막 설득이 될 것 같다. 저놈이 또 저런 능력이 있었구나. 하긴. 저러니까, 투자자들이 선뜻 자기 지갑을 열고 돈을 내놓는 거겠지.
“우리 지 대표가 그렇다면 그렇겠지, 뭐. 나야 사건 처리만 잘 되면 되는 거니까 누가 질문을 하든 무슨 상관이겠어. 허허.”
거짓말. 김재필 회장이 아주 불안해 죽는구만. 나도 이 사건 진짜 하기 싫었는데, 지현준, 한수정이 양쪽에서 이렇게 협공하니까 어쩔 도리가 없다. 내가 안 하면 안 했지,
시작했으면 또 어설프게는 못하잖아.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보여줘야지 뭐. 나도 진지하게 자세를 고쳐잡고 김재필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그때 10억 투자하고 받은 구주 거래 내역은 가져오셨나요?”
“거기 있을 겁니다. 한 변호사님이 보고 있는 서류들 중에.”
한수정이 제가 보고 있던 서류를 뒤적거리더니 증권계좌 거래내역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별거 없어요. 주식 받고 불안해서 바로 팔아버렸거든요. 그때 주가가 너무 출렁거려서 그냥 가지고 있을 수가 없겠더라고요.”
김재필 말이 맞기는 했다. 주식 받고 얼마 안 돼서 매도하기 시작했는데, 막판에는 주가가 반토막나서 간신히 똔똔한 수준이다. 근데, 아까 분명히 이득 본 게 없다는 말이
거짓말이었는데 그건 뭐지? 이거 말고 다른 거래가 있었던 건가?
“10억 투자한 거 말고 다른 거래는 없는 거예요?”
“예, 그때 이거 말고는 주식한 거 없죠.”
“그럼 주식 말고 다른 거는요?”
김재필 얼굴이 빨개졌다. 음 다른 게 있구나.
“원래는 그냥 그 정도만 하려고 했는데, 하도 자금이 펑크났다고 난리를 쳐 가지고 ….”
“그래 가지고?”
“제가 인수자금을 추가로 빌려줬죠. 20억 정도요.”
“전체 액티브원 인수자금이 얼만데요?”
“120억 정도로 기억합니다.”
인수가액이 120억 원이면 상장사 인수대금치고는 작은 규모다. 그런데 그중에 30억을 김재필이가 댔다면 검찰이든 금감원이든 김재필에게 주목하지 않을 수 없지. 그리고 이 자금에
대해서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못한다면 김재필이한테는 매우 불리한 상황이 되고 말 것이다.
“20억 언제 빌려줬어요?”
“그게 아마 잔금 치를 때쯤 해서 제가 빌려줬을 거예요.”
“그럼 10억은?”
“그건 계약 체결할 때 넣었죠.”
“액티브원 인수대금이 122억 5천만 원인데, 계약을 4월 30일에 했고, 잔금은 두 달 지나서 지급했습니다.”
경영권 인수 계약서를 열심히 보고 있던 한수정이 정확하게 답변해 주었다. 한수정이 아주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길래 나도 한수정을 보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생각해 보니 지현준 말대로 나, 박주환, 한수정이 드림팀이라는 게 맞는 것 같기는 하다. 박주환과 나는 이미 금조부 시절에 드림팀으로 날린 사람들이고, 한수정은 내가 인정한 최고의
변호사잖아. 그럼 이미 환상의 드림팀인 거지. 의뢰인 앞에서 자기가 부족한 부분을 드러내는 거. 그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물론 무모하기야 하지. 다음에는 절대 그런
짓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해야겠지만, 어쨌든 나는 그래서 한수정이 좋다고. 그런 패기나 당당함. 이게 가르친다고 해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나는 내 앞에 놓여 있던 노트북을 박주환에게 밀어주었다. 드림팀의 일원으로서 박주환도 박주환 잘하는 걸 이제 슬슬 해야지.
“박 사무장님, 액티브원 공시 찾아 주시고, 주가도 좀 확인해 주세요.”
“예.”
내 얘기가 끝내자마자, 박주환이 부지런히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 체결한 계약 내용이 어떻게 돼요, 박 사무장님?”
“최대주주 지분 18.5%랑 경영권을 122억 5천만 원에 넘기는 거였어요. 계약금이 12억 원이고, 잔금이 110억 5천만 원이고 주식은 잔금 치르면서 전부 받는
원샷딜이었네요.”
계약금 12억 중에 10억이 김재필 거고, 잔금 110억 중에 20억이 또 김재필 거고. 잔금 중에 상당 금액은 인수한 주식을 담보로 마련했을 테니까 결국 김재필이가 인수대금 거의
다 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다. 이건 매우 좋지가 않은데.
“김 회장님, 그래서 20억은 언제 회수했어요?
“회수하는데 좀 시간이 걸렸죠. 몇 번 나눠서 받았는데, 나중에는 제가 쫓아다니면서 간신히 받아냈거든요.”
“20억 조건은 어땠는데요?”
“원래 이자를 월 2부 받기로 했는데, 그거 다 못 받았어요.”
20억에 2부면 4천. 이걸 매달 받는다면 절대로 적은 금액은 아니네.
“그럼 이자로 총 얼마 정도 받았어요?”
“2억인가 3억인가 받은 것 같아요. 그건 통장 확인해 보면 됩니다.”
“그럼 이득 본 게 없다는 말은 사실이 아닌 거네요. 이자 받았으니까.”
“이 정도 이자야 당연한 건데, 그게 무슨 이득이에요.”
이 새끼 계산 한번 이상하게 하네. 이자가 어떻게 이득이 아니고, 당연한 거야? 그 돈이면 웬만한 월급쟁이 연봉을 훨씬 넘어가는 건데. 하여간에 있는 놈들이 더 하다니까.
“20억 빌려줬다가 이자까지 받았다는 얘기는 금감원에다가 했어요?”
“그때는 안 했죠. 묻지를 않았으니까.”
“그럼 다른 사람들은요?”
“모르겠어요. 했다는 얘기는 저도 못 들었는데.”
이 얘기를 누구든 했을 것이다. 특히 그 후배 놈. 이 얘기를 하면서 사실 이 회사는 김재필이가 인수한 거고, 나는 그 밑에서 일만 한 거였어요, 라고 했을 것 같네. 내가 그
후배놈이라면 그런 식으로 빠져나갔을 것 같으니까.
사실 20억 부분은 말을 안 했어도 언젠가는 밝혀질 만한 사실이기는 했다. 이런 사건에서 검사가 제일 먼저 하는 게 인수대금 흐름을 파악하는 일이니까. 그런 측면에서 김재필이 먼저
얘기를 하는 게 좋았는데. 선수를 빼앗긴 게 매우 아쉽군.
“그 후배는 무슨 돈으로 우리 회장님 20억을 갚은 거예요?”
“그때 주식 팔아서 갚은 거라고 했어요. 최대주주 지분 말고도 사이드로 주식을 더 가지고 있다고 했었거든요, 그 후배가.”
사이드로 주식을 더 가지고 있었다고? 미친놈. 죽을라고 환장했구만.
“20억 빌려주고 담보 같은 건 안 받았어요?”
“원래는 제가 인수한 주식을 담보로 받아야 하는데, 상황이 그게 안 된다고 후배 놈이 하도 빌길래 그냥 액티브원 이사, 감사들 사임서 받고 끝냈습니다. 그거 가지면 회사 보드를
제가 맘대로 바꿀 수 있다고 해서요.”
“혹시 우리 회장님은 회사 경영에 참여는 안 했어요?”
“안 했어요. 이거 말고도 하는 사업이 있는데,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죠.”
거짓말. 아까도 이 부분에서 거짓말하더니만. 근데 내가 이런 거짓말 잡는 건 또 도사니까. 오랜만에 거짓말 좀 잡아볼까?
“우리 회장님 액티브원 사무실에 가신 적 있으세요?”
“사무실이야 갔죠. 이창후한테서 돈을 받아야 하니까.”
“후배 이름이 이창후에요?”
“예, 이창후.”
“얼마나 자주 갔어요?”
“글쎄요? 일주일에 한두 번?”
“회사 가서 회의에 참석하거나 사업 내용 보고받은 적은요?”
“그런 건 없었던 것 같아요.”
이것도 거짓말. 회의에 참석하고 보고도 받았던 것 같고.
“혹시 그때도 회장님이라고 불리셨어요?”
“이창후가 회장님 회장님 하기는 했는데, 저는 크게 신경 안 썼어요. 저는 그냥 20억만 회수할 생각뿐이었으니까.”
“액티브원 명함 같은 것도 있었어요?”
“명함이요? 어 … 명함을 파줬던 것 같네요. 그러고 보니까.”
“액티브원 회장님으로?”
“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 그거 받기만 하고 누구 주고 한 사실은 전혀 없었거든요.”
명함 가지고 뭘 했는지는 중요한 일이 아니고. 회사에 일주일에 한두 번 찾아가, 회사 경영에 관심도 가졌고, 게다가 액티브원 회장이라 불리면서 명함까지 있었다. 거기에 인수 자금
중에 30억 원이나 김재필이가 댔고. 이 얘기를 이창후가 제대로 포장해서 검찰에 들고 가면 골로 가는 게 이창후가 아니라 김재필이게 생겼네.
“아까 액티브원이 신규사업하려고 했다고 했잖아요. 그 사업이 뭐였어요?”
“중국 자금 유치해서 중국 시장 진출한다고 했었거든요. 그때 공시도 크게 내고, 신문기사도 나고 했어요.”
“이 사업에 대해서는 무슨 얘기 들었어요? 후배가 설명해 줬죠?”
“그랬죠. 나는 그때 내 돈 회수도 못 한 상황에서 회사가 잘못 될까 봐 계속 걱정을 했거든요. 그러니까 이창후가 걱정 말아라, 회사 이렇게 잘 간다 이러면서 설명을 해줬었죠.”
“그 사업 잘못됐다고 했잖아요. 그 이유는 뭐였어요?”
“그건 저도 잘 몰라요. 제가 20억을 회수하고 난 이후에 벌어진 일이라서.”
“그럼 우리 회장님은 20억 다 받고 난 이후에는 회사 안 간 거예요?”
“그렇죠. 그때 제가 이사로 넣은 동생 이사 사임서 보내주고 나서는 액티브원 사무실에는 일절 안 갔어요. 나도 아주 징글징글했거든.”
흠. 이건 잘했네.
“중국 자금 유치한다고 했을 때 액티브원 주가가 확 올랐다가 사업 빠그러지면서 주가 하한가 맞았죠?”
“그랬을 겁니다.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나는 박주환 쪽을 쳐다보았다.
“박 사무장님, 주가 어땠어요, 그때?”
“중국 투자유치 공시 나고 나서 일주일 상한가 쳤고, 그다음에도 계속 올라서 한 달 후에 주가가 5배까지 갔어요. 이 상태가 한 2~3개월 이상 유지되다가 투자 철회되면서 연속으로
하한가 맞고 주가가 쭉 빠져 버렸습니다.”
답 나왔네, 답 나왔어. 김재필이 이거 좆됐다. 김재필 진술 대로라면 이건 똑 떨어지는 사기적 부정거랜데. 요즘 주가조작보다 대세인 범죄가 바로 사기적 부정거래잖아. 그렇다는 건
아주 무지하니 고생을 해야 한다는 거지. 게다가 운 나쁘면 몇 년 빵에서 썩을 수도 있고.
이런 사건을 단 일주일 만에 준비해서 처리한다고? 과연 될까? 아무리 기본 실력이 좋고 성실해도 이게 쉬운 일이 아닌데. 걱정이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