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 첫 번째 토끼 사냥
도심을 한참 벗어난 외곽의 어느 창고. 늦은 오후 볕을 받은 그곳은 화사하게 피어난 5월의 꽃들로 꽤 근사한 풍경을 자랑하고 있었다. 창고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건 간에
너무 평화롭고 또한 고즈넉했다. 고석현은 창고를 등에 지고 무심하게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최현태를 잡기는 잡았다. 두 마리 토끼 중에 첫 번째. 근데 배를 갈라보니 있어야 할 황금알이 없었다. 꽤 오랜 시간 공을 들였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걸 놓쳤다. 그래서 고석현은
매우 짜증이 났다. 일을 이렇게 망쳐버린 저 양 상무나 팀장이나 최현태랑 같이 묻어버렸으면 좋겠다. 벌레 같은 새끼들 같으니라고.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그 황금알이 과연 어디에 있는 걸까. 고석현은 담담하게 서서 제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어차피 계획대로만 진행되리라 생각한 건 아니었으니까.
갑작스러운 변수가 생겼다 하더라도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그때 창고 문이 삐걱거리며 다시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양 상무가 인사를 끝내고 나온 모양이었다. 그래도 같은 건달 새끼라고, 마지막 인사는 하겠다고 나서는 게 좀 가소로웠다.
그렇게 애틋하면 애초에 배신을 말았어야지.
“인사는 다 했어요?”
양 상무가 제 뒤에 서자, 고석현은 이런 제 생각들을 숨기고 그린 듯이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예, 배려해주신 덕분에.”
양 상무 대답을 들은 고석현이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현태가 생각보다 더 지독한 것 같아요.”
“저도 저 정도로 버틸 거라고 생각 못 했습니다.”
“서로 안 지가 20년이라면서요.”
“…….”
고석현 말에 양 상무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분명히 어제까지는 세상 누구보다 잘 알고 친한 사이였는데. 오늘은 생판 모르는 타인처럼 낯설게 느껴지니까.
“그 동영상, 어디에 뒀을 것 같아요?”
“제가 아지트는 다 뒤져 봤는데, 없었습니다.”
“정말 없는 거 확실해요?”
“무슨… 말씀이신지…?”
“아니, 나도 걱정이 돼서. 자꾸 오차가 생기니까 불안하잖아요.”
고석현이가 턱을 삐딱하게 치켜든 채로 이렇게 말했다. 고석현이는 양 상무보다 키가 작은 편이다. 10센티 이상 차이가 나니깐. 보통 키가 크면 기선 제압을 하는 데 유리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양 상무는 고석현이 앞에만 서면 체격의 이점 같은 걸 생각할 수가 없었다.
양 상무는 이번에 또 실수하게 되면 다시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다음번에는 제가 저 창고 안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니
신중해야지. 다시는 실수하지 않도록. 그것만이 제가 살길이니까.
최현태가 사용하던 아지트는 두 곳이었다. 최현태가 데리고 다니던 꼬봉들이 그곳에서 보통 숙식을 해결했었다. 아무리 최현태가 별 개념 없이 사는 인간이라고는 해도 그런 곳에 그
중요한 동영상을 두지는 않았겠지. 어쨌든 무수히 많은 놈들이 오가는데. 제대로 된 금고 같은 것도 없고.
그래도 혹시 몰라 충분히 뒤져볼 만큼 뒤져보기는 했다. 아무것도 찾지는 못했지만. 그래서 어제 최현태를 찾아가 도피자금을 건네며 동영상을 은밀하게 찾아보려고 했던 건데. 결국
들키고 만 거지.
“없는 게 확실한 것 같습니다.”
확신에 찬 양 상무의 대답을 들은 고석현이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은행 대여금고 같은 건?”
양 상무는 다시 한번 신중하게 고민했다. 최현태는 따로 돈 관리를 하지 않았기에 저 모르게 대여금고 같은 걸 만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에 거래 은행에 대여금고를 뒀다면
지점장이 먼저 그 사실을 알려왔을 테고. 그러니까, 대여금고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겠지.
“최현태가 그런 걸 이용할 만한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건 나도 그래 보여요. 그래도 혹시나 해서. 또 실수하면 안 되니까. 안 그래요, 양 상무?”
“……!!!”
“양 상무가 실수를 크게 두 번이나 하고 나니까, 내가 양 상무님 말을 그대로 믿기가 좀 그래. 이건 참 안타까운 일인데. 사람이 사람을 못 믿는다는 거.”
“죄송합니다, 회장님. 다시는 실수가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나는 그 부분은 걱정 안 해요. 근데 노력한다고 해서 다 되는 게 아니니까, 그게 걱정인 거지.”
말끝에 고석현이가 씩 웃었다. 양 상무는 그 모습을 보면서 등골이 오싹해졌다. 아무래도 제가 사자 아가리에 대가리를 디밀고 서 있는 사슴 새끼처럼 느껴져서. 이번에도 실수하면
고석현은 바로 목덜미를 물어서 숨통을 끊어 버릴 테니까. 이런 놈인 줄 모르고 갈아탄 건 아니었지만, 막상 부딪쳐 보니 생각보다 훨씬 더 무서웠다.
최현태는 머리가 나쁘고, 능력도 부족하고, 성질도 더러웠지만, 그래도 아래 사람들을 품어주는 맛은 있었다. 하지만 고석현은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실수를 하는 사람은 가차 없이
내치지. 원래 양 상무도 내쳐져야 했지만, 최현태의 최측근으로서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에 다행히 지금껏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과연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연명해 갈 수 있을까. 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양 상무는 틀림없이 이 일을 처리해야만 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최현태 집이나 위테크 사무실이라는 건데…….”
“집은 볼 필요 없을 겁니다. 자기 집도 아니고. 거의 잠만 자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그 말에 책임질 수 있어요? 정말 집은 볼 필요 없는 거냐고.”
“……!!!”
양 상무는 또다시 시작된 고석현의 진지한 지적질에 급소를 맞은 사람처럼 숨이 콱 막혔다. 그런 반응을 지켜보던 고석현이 양 상무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면서 빙긋이 웃었다.
“뭘 이렇게까지 긴장해요? 그냥 내가 확인한 건데. 아니 근데, 최 회장은 돈도 많이 벌었으면서 집도 하나 없나?”
“가정을 안 꾸리셔서….”
“그러니까. 그 나이에 가정도 못 만들고. 저렇게 떠나면 참 가련한 인생인 건데.”
양 상무는 고석현의 말에 목이 턱 막혀왔다. 20년 세월의 무게가 갑자기 제 어깨를 누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럼 남은 건 위테크 사무실이라는 건데.”
“…….”
“그러니까 어떻게 위테크를 그렇게 맥없이 뺏기냐고. 그때 우리 양 상무님이 양쪽 흔들면서 딱 차고 들어갔어야지. 그게 나는 참 아쉽단 말이야.”
“죄송합니다, 회장님.”
이 문제 때문에 양 상무는 그동안 수도 없이 고석현 앞에서 고개를 숙여야 했다. 이 정도로 사과했으면 이제 그만할 때도 된 것 같은데.
솔직히 그때 임정호가 위테크를 그렇게 공격해 올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나. 적대적 M&A를 그렇게 순식간에 저질러 버리다니.
솔직히 위테크와 관련해서는 양 상무도 고석현한테 할 말이 많았다. 처음 ‘타임 사태’로 위테크 주가가 곤두박질쳤을 때, 최현태는 신태연을 찾아가 어떻게든 살려달라고 빌었었다.
그런데 그걸 단칼에 거절한 건 고석현이었고.
정말 저에게 힘을 실어줄 생각이 있었다면 그때 고석현이가 저를 제대로 밀어줬어야 했다. 그랬으면 최현태도 밀어내고, 임정호도 쳐 버리고, 제가 위테크를 차지했을 텐데.
어쨌든 다 지난 일이다. 그리고 고석현 앞에서 할 수 있는 얘기도 아니고. 그래서 양 상무는 저 얘기를 꾹 삼키고 다시 한번 머리를 조아렸다. 고석현 앞에서 살아남을 방법은
이것밖에 없으니까.
“우리 양 상무가 생각할 때도 위테크 그 사무실에 있을 것 같다는 거죠?”
고석현의 물음에 양 상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우리 양 상무는 그 사무실에 있는 동영상을 나한테 왜 못 가져왔을까?”
고석현의 질문에 양 상무 이마에 식은땀이 삐질 흘러내렸다.
“최현태 회장이… 아니, 최현태가 다른 곳은 몰라도 거기는 틈을 잘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나름 여기저기 살펴보기는 했는데….”
“그런데도 못 찾았다?”
“예.”
“하지만 다른 데 없으니 아무래도 거기 있는 것 같다. 이런 결론인 거네?”
“그렇습니다.”
고석현이가 잠시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다. 그래서 양 상무도 숨죽이고 가만히 서 있었다.
“도대체 어디에 숨겼을까? 양 상무는 사무실 어디에다가 숨겼다고 생각해요?”
“제가 찾아볼 수 있는 곳은 대충 다 찾아봤었습니다. 책상, 금고, 책장….”
“그런 데도 없었다는 거네?”
“예.”
“그렇다면 그 사무실 안에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최현태만의 은밀한 공간이 있었다는 건데….”
고석현이가 팔짱을 낀 채로 턱을 괴었다. 깊이 생각에 잠길 때마다 고석현이가 종종 하는 자세였다.
“최현태가 위테크 사옥 인수하고 나서 제 사무실에다가 공을 아주 많이 들였다던데, 맞아요?”
“그때 그랬죠. 본인 사무실 관련된 거는 본인이 직접 다 컨펌하면서 진행했으니까.”
“그 사무실에 뭔가를 비밀스럽게 설치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네. 그거는 확인 안 해봤어요?”
“…….”
고석현의 질문에 이번에는 양 상무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때만 해도 최현태와 양 상무 사이는 매우 좋았고, 비밀도 거의 없었었다. 그런데 만약에 저도 모르는 비밀공간을 최현태가
만들었다면. 양 상무 입장에서는 이것은 좀 충격일 수 있었다.
양 상무가 사무실을 뒤졌을 때 그런 비밀공간까지 염두에 두었던 건 아니었었다. 그러니까 이번에 다시 찾아본다면 그때와는 다를 수 있겠지. 충분히 새로운 게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제가 제대로 찾아보겠습니다.”
“어떻게? 뭘?”
“위테크 사옥 인수했을 때 내부 인테리어 자료를 제가 아직 가지고 있으니까 그 안에 뭔가 나올 수도 있겠죠.”
“좋은 생각이네. 그리고?”
“위테크 사옥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래야겠죠. 그건 어떻게 할 겁니까?”
“…….”
진지하게 고민하는 양 상무를 보더니 고석현이가 깔깔대고 웃었다.
“뭘 그렇게 고민을 합니까. 임정호가 빼앗아 갔으니까, 우리도 빼앗아 오면 되는 거지.”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임정호도 한 걸 우리라고 못 할 이유가 있겠나? 정 안 되면 그냥 망가뜨려도 되고. 안 그래요?”
“만에 하나 임정호가 그 동영상을 먼저 확보하게 되면 어떻게 하죠?”
“과연 확보할 수 있을까? 내가 몇 년을 공들여도 못한 건데.”
“그렇긴 하죠.”
“그리고 만에 하나 확보를 했어도 못 쓰게 망가뜨리면 되는 거니까. 안 그래요?”
“맞습니다, 회장님. 대단하시네요, 이렇게 정리를 다 해 주시고.”
양 상무가 정말 놀랍다는 듯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양 상무가 건달치고는 꽤 머리가 좋기는 했다. 하지만 딱 건달치고 좋은 거고. 온갖 전문가를 수족처럼 부리고 있는 고석현 눈에는 그저 허접한 건달 새끼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제
옆에 두고 있는 이유는 양 상무가 최현태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그 덕분에 최현태를 잡을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효용가치가 끝나면 양 상무도 끝나는 거지. 그만큼 위험부담이 큰 새끼라서 사전에 싹을 잘라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럼 이제 양 상무님은 위테크를 다시 가져올 방법이나 고민해 보세요. 또 실수하면 안 되니까 제대로 계획을 세워보라고.”
“예, 알겠습니다, 회장님. 절대 차질 없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겠습니다.”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하고. 서둘러 준비하세요.”
“예.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고석현은 빙긋이 웃으며 제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양 상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양 상무가 어디까지 준비할지는 모르겠지만 우선은 지켜볼 생각이었다. 그러자면 기를 꺾으면 안
되니까, 적당히 격려해 줄 필요가 있지.
고석현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고개 숙인 양 상무를 뒤로 한 채 제 차에 올라탔다. 제가 떠나야 첫 번째 토끼사냥이 마무리될 거라서. 그리고 곧 두 번째 토끼사냥도 시작되겠지. 그게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면 제 손안에 대한민국 정치판이 들어오게 될 것이다. 그러면 아무도 저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제 아버지조차도. 그런 생각을 하자 고석현은 가슴이
뿌듯해져서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