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검사 임정호-240화 (240/306)

240. 나의 구세주, 나의 한수정

“처음 대표님 체포되셨을 때, 제가 이 사건 해야 한다는 거는 알겠는데, 진짜 너무 하기 싫었어요. 너무 겁났거든. 대표님 구속되면 내가 못 견딜 것 같아서.”

“구속 안 됐잖아요.”

“그렇죠. 결과가 그렇게 나와서 정말 다행인데. 만약에 아니었으면 저 정말 못 견뎠을 거예요.”

나라도 그랬을 거다. 입장을 바꿔 한수정이 체포된 상태인데, 내가 영장 사건 변호를 맡았다면. 나도 정말 무섭고 겁나고 도망치고 싶었을 것 같다.

“미안해요, 한 변호사. 한변 입장을 몰랐던 건 아닌데,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알아요. 고석현이가 버티고 있는데 모르는 변호사 함부로 선임하는 거 아니죠. 저도 충분히 수긍했어요. 안 그랬으면 조사받을 때 그냥 안 나타났겠죠.”

“그래서 정말 고마웠다고.”

나는 원래 술 매너가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다. 그냥 혼자서 마시고, 즐기다가, 가끔 뻗는 스타일? 근데 오늘은 한수정한테 이걸 꼭 하고 싶네.

나는 내 앞에 놓여 있던 잔을 원샷 했다. 그리고 그 잔을 한수정에게 내밀었다. 일명 잔 돌리기. 이거 얼마나 비위생적이고, 구태의연한 술 문화인지는 나도 잘 알지만, 오늘은 정말

한수정에게 한 잔 주고 싶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한수정도 웃으며 내 잔을 받아주었다. 나는 소주병을 들어 그 잔을 가득 채워주었다.

“내 마음입니다.”

이렇게 느끼한 한마디도 얹어 주고. 한수정이 빙긋 웃더니 그 잔을 원샷 해 주었다. 그 모습에 내 마음을 받아준 것 같아서, 마음이 괜히 설렜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수정이 제 잔을 비워서 나에게 주었다. 내가 방금 준 잔이 아니라 원래 한수정 잔을. 그 잔을 받아드는데 기분이 아주 묘했다. 그리고 그 잔에 술을 가득

채워주었다.

“이건 제 마음입니다.”

와우. 나 사랑 고백받은 것 같은데? 사실 나는 한수정한테 잔 주면서 고백한 거였는데. 이걸 이렇게 돌려받으니까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

물론 한수정이 준 잔을 나도 원샷 했다. 이로써 나와 한수정은 서로 잔을 바꾸게 되었다. 이게 뭘까? 아무 의미도 없는 걸까? 적어도 나한테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 지금 우리

한수정의 진의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거 아세요? 저 이번에도 꿈꿨어요.”

내 머릿속 고민은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한수정이 해장국 국물을 떠먹으며 이렇게 말했다.

“꿈?”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싶었다. 근데 곰곰 생각해 보니까, 예전에 한수정이 의뢰인 구속하려던 검사를 꿈속에서 두들겨 팼었다는 얘기를 한 게 생각이 났다. 그럼 이번에는 강철원이가

두들겨 맞은 건가? 그럼 진짜 내 속이 시원할 것 같은데.

“꿈에서 대표님이 구속되셨어요.”

“아, 언제 꿨는데요?”

“아까 재판 끝내고 집에 와서 잘 때. 기각 결정 나기 전에요.”

“아이고, 그랬구나. 기분 되게 안 좋았겠다.”

내가 이렇게 말하자, 한수정이 조금은 어두워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번에는 강철원이가 두들겨 맞은 거예요?”

내 말에 한수정이 설핏 미소 지었다. 그래. 오늘은 좋은 날이니까 웃어야지, 한수정.

“그건 아니고요. 대표님 구속된 다음에 제가 서울구치소로 접견 가는 꿈이었어요. 근데 대표님이 수의 입고 걸어 나오는 거 보고 그냥 주저앉아서 대성통곡했잖아요.”

“그랬어요?”

듣기만 했는데도 내 마음이 너무 아팠다. 만약에 내가 구속됐다면 한수정이 정말 그렇게 울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만약에 한수정이 내 눈앞에서 그렇게 울었다면 나도 너무 가슴이

아팠을 것 같네.

근데 한편으로는 기분이 좀 좋은 것 같기도 하고. 한수정이 나를 위해 대성통곡까지 했다잖아. 엄마 말고 나를 위해 대성통곡까지 해 줄 사람이 어디 있겠나. 꿈이기는 해도 듣는데 좀

울컥했다. 나는 감동해서 한수정을 바라봤는데, 한수정은 쑥스럽다는 듯이 내 눈길을 피했다.

누군가를 위해서 울어준다는 거 아무한테나 해 줄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아무리 꿈이었어도. 이런 생각이 드니까 갑자기 얼굴에 열이 확 올라오고, 심장도 콩닥거렸다. 어쩌면 한수정도

나랑 비슷한 마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만약에 한수정이 나와 같은 마음이라면. 그럼 나 어떻게 해야 해? 그렇다면 가만있을 수는 없는 거잖아. 한번 고백해 봐? 근데 고백했다가 한수정이 거절하면? 설마. 아무 감정도

없는데, 날 위해서 울어준다고? 오늘은 로비에까지 내려와 나를 기다렸는데?

몰라. 됐고. 한수정 마음이 아무것도 아니라 해도 그냥 한번 가 보는 거다. 혹시나 잘 안 되더라도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말하기 너무 좋은 상황이니까. 구치소에 갔다가 방금

나왔는데. 그 핑계 대면 모든 게 용서될 수 있을 것이다.

“대표님, 왜 이렇게 못 드세요? 혹시 몸이 안 좋으신가?”

한수정은 해장국 한 그릇을 싹 비웠는데 나는 반도 못 먹고 있으니까, 한수정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근데 지금 밥이 대수겠냐고. 당연히 밥이 안 넘어가지.

“밥맛이 없네요.”

이렇게 말하고는 나는 아예 숟가락을 놔버렸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어떻게 고백을 하는 게 좋을지를 고민했다.

근데 한수정은 내 상태도 모르고, 내 앞에서 내 사건과 관련된 얘기들을 계속해서 쫑알댔다. 그 얘기가 내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지만, 그냥 한수정이 내 앞에서 환하게 웃으며

얘기하는 게 그저 좋았다.

좋으면 좋을수록 마음이 조급해졌다. 뭐든 해 보고 싶은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니까. 지금 시간에 지현준한테 전화 걸어 물어볼 수도 없고. 거참. 막막하구만.

“어머나,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한수정이 핸드폰을 확인하고 깜짝 놀라길래, 시간을 확인했더니 벌써 2시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그냥 시간이 가버렸다. 어쩌면 좋지? 오늘이 딱 기횐데. 한수정한테 맥주 한 잔

더 마시자고 할까? 뭘 하든 우선은 같이 있어야 기회가 생기든 말든 하는데. 이 상황에서 한수정이 집에 들어가 버리면 모든 게 도로 아미타불이 되는 거지.

근데 한수정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벌떡 일어서 나가 버렸다. 한수정이 일어나면 나도 일어날 수밖에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일어나 계산하고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밖에 나오니, 한수정이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나도 한수정 옆에 가서 하늘을 바라보았는데, 하늘에는 여전히 별이 하나도 없었다.

“괜찮아요?”

“괜찮았는데, 나오니까 핑 돌아요. 이제 긴장이 좀 풀렸나 봐.”

나는 그 얘기를 듣고 은근슬쩍 내 팔 하나를 디밀었다. 그러자 한수정이 피식 웃더니 내 팔을 덥썩 붙잡았다.

예전에도 나는 한수정에게 내 팔을 빌려준 적이 있다. 금조부에서 조사 참관하던 날. 하이힐에 혹사당하고 절뚝거리며 걷길래. 그때는 한수정이 내 팔에 손을 살짝 얹는 정도였는데.

근데 지금은 내 팔이 무슨 기둥이나 되는 것처럼 두 팔로 붙들고, 머리까지 기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한수정 무게가 온전히 내 쪽으로 쏠렸다. 그 느낌이 너무 황홀해서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한수정이랑 헤어지기 싫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나? 한수정 집에 도착하기 전에 뭔가를 하긴 해야 하는데. 그래서 우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었다. 생각할 시간이라도 벌어야 하니까.

“집에 가서 눕고 싶네. 이제 피로가 몰려오는 것 같아요.”

내 팔에 머리를 기댄 한수정이 잔뜩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하면 한수정을 집에 안 들여보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나는 화들짝 놀랬다. 저렇게 피곤해하는데. 오늘은 그냥

포기해야 하는 건가?

“대표님은 왜 검사 하신 거예요? 연수원 성적에 맞춰서 검사하신 건 아니죠?”

“그건 아니지. 그랬으면 판사 했겠지. 나는 처음부터 검사 하려고 했었어요.”

“와. 왜요? 보통은 검사 하려다가도 성적 좋으면 판사로 바꾸고 그러잖아요.”

“나는 거짓말하는 놈들이 그렇게 싫었어. 그래서 거짓말하는 나쁜 놈들 다 처넣으려고 검사한 거지.”

“검사하면서 그건 많이 했겠다.”

“많이 했죠. 그래서 보람찼었고.”

그래, 아주 보람찬 시간들이었다. 나는 적어도 내가 검사했던 시절은 후회하지 않는다. 그것 때문에 내가 지금 요 모양 요 꼴이 되었어도. 그리고 한편으로는 지금이 영광스러운 훈장

같기도 했다. 내가 어설픈 검사였으면, 저런 새끼들한테 표적이 되지도 않았을 테니까.

“한 변호사는 왜 변호사 했어요?”

“저는 성적 때문에 변호사 했던 거예요. 저 좀 지진아예요. 사법시험도 잘 안 돼서 고시 공부도 꽤 오래 했어요. 연수원 성적도 별로 좋지 않고. 공부는 진짜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성적이 잘 안 나오더라고요.”

“실력이랑 성적이랑 상관없어요. 특히 연수원 성적은 실무에 나오면 별 의미가 없더라고.”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아닌데. 이거 진짠데.”

내 말에 한수정이 웃기 시작했다. 팔을 통해서 그녀의 웃음이 진동으로 전해지니까, 나도 웃게 되었다.

우리는 말없이 한동안 그렇게 걸었다. 새벽 2시. 5월의 서초동 거리. 그 위에 부서지는 가로등 불빛은 마치 오래된 흑백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거리는 한산했고, 날씨는 적당히

선선했고, 나와 한수정 숨소리만 귀에 들릴 만큼 또 고요했다.

그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황금매니아든, 거산회든, 또 동영상이든. 한수정과 둘이서 이렇게 걸을 수 있다는 거, 그거 하나면 충분히 행복하고 좋았다.

“나는요, 변호사 하는 게 참 싫었어요. 처음부터 원해서 한 것도 아니었고. 백현수 변호사 보면 의뢰인들 등쳐먹고 사니까. 나도 저래야 먹고 살 수 있는 건가 싶은 생각도 들고.”

한수정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현수 변호사, 참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네. 이채훈한테 사기 처먹다가 나한테 들켜서 엄청 욕 들어 처먹은 양반인데.

”근데 이번에 대표님 사건 하면서 내가 변호사라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변호사라서, 대표님을 구해줄 수 있었던 거니까.“

한수정 얘기를 듣는데 내 심장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그 순간 내 머릿속 모든 생각들이 싹 다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오직 한수정의 체취와 한수정의 숨결만이 나를 휘감았다.

나는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어서 우뚝 멈춰 서버렸다. 내가 멈추자 한수정도 멈춰서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한 변호사, 아니… 한수정.“

나도 몸을 틀어 한수정을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한수정에게 변호사 없이 한수정이라 부른 순간. 우리 둘의 시선이 그대로 마주쳤다.

”내가 아무래도 한수정을 정말 많이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래, 고백이라는 게 별거냐. 나 같은 놈 머릿속에서 나와 봤자 거기서 거기지.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투박한 말밖에 없다. 그래서 한수정에게 좀 미안하지만, 그래도 이게

나니까. 나도 어쩔 수가 없네.

”그래서 내가 지금 키스를 할 건데, 싫으면…….“

싫으면 뭐? 싫으면…… 음, 어떻게 해야 하지? 근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수정 눈이 스르르 감겼다.

나의 구세주, 나의 한수정. 한수정이 있어서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건데. 나는 떨리는 손으로 한수정 얼굴을 부여잡고, 내 입술로 한수정 입술을 덮었다. 그 입술은

기대했던 만큼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