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직 검사 임정호-267화 (267/306)

267. 천 회장이 재단법인을 설립하면(1)

“아이고, 이게 누구야. 심 팀장 왔구나.”

문을 열고 심도현이가 모습을 드러내자, 박주환이 벌떡 일어나 아는 척을 했다.

“주말인데 좀 쉬시지. 천 회장님 출국하고 이래저래 정신없었을 것 같은데.”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저는.”

이러면서 심도현이가 씩 웃기는 했는데. 얼굴 보니까 하루 만에 살이 쏙 내렸다. 마음고생이 많았던 모양이다. 당연하겠지. 저놈도 눈치가 보통은 아닌데.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 정도는

느꼈을 것이다.

“혹시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그런 거 없어요. 그리고 있으면 우리가 얘기하지.”

“예, 뭐든 말씀만 해 주세요.”

박주환과 심도현이 서로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고 나자, 심도현이 내 쪽으로 걸어왔다.

“대표님, 어제는 잘 들어가셨습니까?”

“심 팀장이 차 보내줘서 아주 편하게 집에 잘 왔지. 공항은 잘 다녀왔어요?”

“예, 잘 다녀왔습니다.”

“…….”

간단한 인사를 끝내고 나니, 뭐라 할 말이 없다. 둘 사이에 아주 어색한 침묵만 흐르는군. 그런데 계속 내 앞에서 쭈뼛거리며 서 있는 걸 보니까 아무래도 무슨 할 말이 있는

모양인데. 그 할 말이라는 게 도대체 뭘지, 상당히 궁금하다.

”대표님, 혹시 지금 시간 되시나요?“

이것 봐. 심도현이가 할 말이 있어 보였다니까. 나도 저놈이 무슨 말을 할지가 상당히 궁금해서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섰다.

”갑시다, 어디든.“

심도현이 앞장서고 내가 그 뒤를 따랐다. 어디로 가나 봤더니 천 회장 사무실이었다. 심도현이 문을 열고 들어가고, 나도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이제 이곳은 정말 주인 없는 방이 되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니까 방이 매우 썰렁해 보였다.

심도현도 마음이 좀 그랬는지, 잠시 주춤거리며 서 있더군. 나도 기분이 이런데, 저놈은 더 하겠지. 그래서 괜히 아는 척하지 않고, 나 혼자서 씩씩하게 소파로 걸어가 앉았다. 잠시

뒤 심도현도 내 맞은편으로 와 털썩 주저앉았고.

”어제 회장님은 잘 떠나셨나요?“

”예, 별일 없이 잘 나가셨습니다.“

그건 이미 나도 알고 있지. 박정우가 나중에 전화해서, 천 회장 못 잡았다고 아주 지랄 지랄을 했으니까.

”다행이네요.“

”좀 서운하기는 한데, 저는 차라리 잘 된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 계셨으면 여러 가지로 많이 힘드셨을 거예요.“

”그렇죠. 나이도 많은 양반이 견디기 쉽지 않았을 겁니다.“

”맞아요. 그래서 저도 그냥 다행이다 생각하려고요.“

말을 분명하게 하지는 않았지만, 천 회장이 다시 한국에 들어오기 쉽지 않다는 걸 심도현도 아는 눈치다. 차라리 잘 됐다. 그런 얘기를 나중에 내가 해야 하면, 그것도 참 골치

아프니까.

”근데, 천 회장님 대신 심 팀장이 많이 괴로울 수 있어요.“

”그럴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실은 서류상으로 제가 회장님 아들입니다. 입양됐거든요.“

”예?“

내가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심도현을 바라보았다.

야!! 정말 천 회장은 끝까지 기대를 저버리지 않네. 아니, 그 와중에 무슨 입양까지 해? 야, 정말 뭐라 할 말이 없다.

그럼 이제 심도현이가 천 회장의 진정한 후계자가 된 건가?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해? 지금까지 내가 천 회장을 대했던 것처럼, 심도현도 그렇게 대해야 하는 거야? 근데, 그건……

좀 그런데.

”이런 상황이 될 줄 알았으면, 회장님이 입양 얘기 꺼내셨을 때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는 건데 그랬어요. 나는 그냥 노인네 늘그막에 수발이나 좀 들어주면 되는 줄 알았거든요.“

“입양이 언제 된 건데요?”

“회장님 구치소에서 나오시고, 바로 했어요. 혹시 오해하실까 미리 말씀드리는 건데, 저는 재산 같은 건 관심 없습니다. 회장님이 입버릇처럼 재산은 누구한테도 안 주고 떠날 거라고

말씀하시기도 했고.”

그래서 천 회장이 대해 그룹도 해체해 버리려고 하는 건가?

“오해 안 해요. 심 팀장이 회장님한테 잘한 건 내가 아는데.”

“진짜 저 멘붕이에요. 이제 어떻게 하면 좋아요?”

그래서 어제 잠을 못 잔 모양이구나. 나도 심도현 입장이라면 멘붕 오고도 남았겠다. 재산도 못 받으면서 설거지만 오지게 하게 생겼으니까.

”대해 그룹 건은 내가 진행한다 쳐도, 나머지 일들도 장난이 아닐 것 같은데.“

”그러니까요. 이걸 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아주 난감합니다.“

진심으로 심도현에게 애도를 표한다. 그 노인네, 사람 하나 반 죽여 놓고 갔네.

“우선 제일 급한 게 재단 만드는 거예요. 형사 문제는 임 대표님이 알아서 잘 정리해 주실 것 같으니까.”

”재단이요?“

”회장님이 말씀 안 하셨어요? 재산 대부분 기부하신다고?“

”아, 그 말씀은 하셨는데, 구체적인 방법은 못 들었거든요. 재단 설립 방식으로 하는 모양이구나.“

”예. 그래서 얼마 전에 재단 설립은 시작했어요. 송앤채에다가 맡기셨다고.“

”송앤채면 심 팀장이 크게 걱정 안 해도 될 거예요. 어쨌든 우리나라 톱을 먹는 로펌이니까.“

송앤채가 일은 잘하지. 돈만 많이 준다면. 그러고 보니, 조태관 변호사나 이채훈은 잘 있나 모르겠다. 이 일 마무리 되면 이채훈 면회라도 한번 가야지.

”그렇기는 하지만, 제가 이런 쪽은 너무 모르니까 너무 걱정되는 거예요.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다 마음에 걸리고.“

심도현이가 한숨을 내쉬면서 얼굴도 잔뜩 찡그렸다. 그동안 같이 다녀보니까 심도현이가 나이에 비해서 일머리도 좋고, 생각도 깊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모습 보니까 그것도 아니네.

저러니까 제 나이로 보이고, 좀 귀엽기도 하다.

”재단 설립은 거의 주무관청 상대로 행정절차 하는 거니까. 딱 변호사들한테 맡기면 돼요. 그리고 필요하면 한 변호사가 옆에서 다 도와줄 수 있고. 그리고 나도 있는데.“

”정말 그래 주셔야 돼요. 저는 진짜 이런 쪽은 아무것도 모르고, 할 줄도 몰라요. 게다가 그 재단 설립되면, 대해 그룹 주식들도 다 그 재단에 담아서 관리하라고 하셨거든요.“

그렇구나. 이번에 대해 그룹 경영권만 정리하면, 내가 맡은 일은 끝나는 거니까. 이후에는 재단에 맡겨서 관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 주식 가지고 허 회장 계속 괴롭혀 주고

싶었는데. 하지만 뭐 어쩔 수 없지.

”한쪽으로 다 모아서 관리하면 오히려 편한 면도 있을 거예요. 근데 그렇게 되면 심 팀장은 좀 힘들 수 있겠다.“

“그렇다니까요. 어차피 저는 혼자서 뭐 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아예 없어요. 그러니까 대표님이 저 꼭 도와주셔야 해요, 약속하시는 거죠?”

“도와준다니까. 그리고 한 변호사도 있는데. 못할 게 뭐 있어.”

“그럼 저랑 약속하신 겁니다? 나중에 딴 얘기하시면 안 돼요?”

아니, 얘 왜 이렇게 보채는 거야? 괜히 기분이 싸한데.

“알았어요, 도와준다고. 벌써 몇 번이나 말했는데. 내가 약속할게.”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진짜 대표님만 믿을 거예요.”

심도현이가 두 손을 모으고는 정말 좋아했다. 이게 이렇게도 좋아할 일인가? 뭔가 이상해.

내가 심도현을 돕는다면, 앞으로 나도 그렇고 한수정도 그렇고, 많이 바빠지겠네. 만약에 한수정이 이 재단 일을 하게 된다면, 앞으로 먹고사는 건 전혀 걱정 안 해도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내가 한수정의 사무장으로서 오랜만에 제대로 영업한 것 같아 뿌듯하네.

이참에 한수정한테 아예 사무실 접고, 재단 내 변호사 하라고 할까? 괜히 사무실 비용 나가느니 그게 더 낫지 않을까 싶은데. 그리고 한수정이 사무실을 접어도 이제는 나도 홀로 설

수 있다. 나중에 검사로 복직할 수도 있고, 그전에는 회사들 많으니까 거기서 월급 받으면 되고.

조 과장은 한수정 비서로 아예 넣어 버리고. 박주환이야 회사든 재단이든 뭐든 할 수 있으니까 됐고. 차준환은 박주환 따라다니며 일 배우라 해도 되고, 아니면 한수정 기사를 시켜도

되고. 지현준이야 어디 가서든 혼자 잘 먹고 잘살만한 놈이니까.

이거 괜찮네. 아무래도 제대로 한번 추진해 봐야겠다.

“지금 재단 규모를 어느 정도로 보고 있는 거예요?”

나도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알아야 할 것 같아서. 그래야 한수정과 그 떨거지들을 어떻게 밀어 넣을지 답이 나올 테니까.

“저도 다 파악한 건 아니라 정확한 건 몰라요. 신 실장님 말씀으로는 추징금이 얼마나 나오느냐가 관건이라고 하시는데. 지금 예상하기로는 그래도 재단에 들어가는 게 최소 5조는 되지

않겠냐고 하시더라고요.”

심도현이 너무 편하게 5조라고 말해서 나는 처음에 5억을 잘못 들었나 했다. 참. 5조란다. 그것도 다른 거 다 내고 남은 게 5조란다. 그것도 최소 금액. 5조면 1%만 수익을

내도 500억이다. 와, 진짜 눈 돌아갈 만한 숫자네.

갑자기 삶의 의욕이 딱 사라져 버리는군. 누구는 순 재산이 5조를 넘고, 누구는 얼마 전까지 마이너스 대출 포함해서 총자산이 6천이고. 정말 세상은 너무 불공평한 것 같애.

어쨌든 대한민국에 5조짜리 재단이 만들어지고. 거기에 대해 그룹의 핵심 주식들까지 담아진다면. 이건 거의 대한민국을 뿌리째 흔들어 버릴 수도 있겠어. 천 회장 참 대단하다. 이미

대한민국을 떠났는데도, 여전히 대한민국을 쥐고 흔들고 있구나.

“그리고 대표님.”

내가 속으로 감탄과 한탄을 하고 있는데, 심도현이 애절하게 나를 불렀다. 또 무슨 일인가 싶어서 심도현을 바라보았다.

“회장님께서요, 초대 재단 이사장은 우리 임 대표님 시키라고 하시던데, 얘기 들으셨어요?”

”예, … 예??“

내가 대충 흘려듣고 있다가 너무 놀라서 목소리까지 완전히 까뒤집히고 말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회장님이 다 얘기됐다고 하시던데, 아니신가 봐요?”

“무슨 얘기가 돼요, 되기는!!! 나는 재단 만드는 것도 몰랐구만!!! 아니, 회장님은 도대체가…. 진짜 내가 너무 황당해서…….”

“아이고, 그러셨구나. 어쩐지 좀 이상했어요. 대표님 성격상 그런 자리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은데.”

심도현이 참 안 됐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이것 때문에 아까 심도현이 그렇게 도와달라, 약속해 달라 설쳐댄 거였구만.

와, 천 회장이 심도현만 반 죽여 놓고 떠난 게 아니었네. 나도 완전 사지(死地)에 밀어 넣고 간 거잖아. 이 노인네 제정신 맞아? 혹시 정말 노망난 거 아냐? 아니고서야 이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난 못해요. 당연히 못하지. 5조짜리 재단인데. 그걸 내가 어떻게 합니까!!”

“그렇죠, 그게. 보통 일은 아닌데.”

“천 회장님은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거예요? 왜 이렇게 뜬금없이 일을 치냐고!!”

“그러게나 말입니다. 회장님이 원래 좀 그러세요. 그래서 저도 얼마나 고생했는데요.”

“하, 진짜!!!”

“근데요, 대표님.”

심도현이 매우 난처해하면서 또 나를 불렀다. 근데 이거 좀 불안하다. 뭔가 큰 폭탄이 터질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드니까.

“이걸 말씀드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는데… 이거 수락 안 하시면, 회장님이 대해 그룹 해체 프로젝트를 중단하라고 하셨는데…….”

“예? 그게 지금 무슨 소리예요?”

“대해 그룹 해체 프로젝트 중단하래요. 대표님이 초대 이사장 안 한다고 하면.”

와, 이런, 젠장!! 이 영감탱이가 돌았나!! 나랑 무슨 원수가 졌다고 이러냐고!! 도대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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