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 D-DAY
“근데, 강태영은 뭐냐?”
“임정호 작업 친 거 증거 나와서 들어간 거 아냐?”
정 총재 질문에 허 회장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내가 그걸 몰라서 물어보겠냐? 그러니까 내 말은, 검찰이나 언론이 그걸 어떻게 알아서 저렇게 떠들고 있냐는 거지.”
“석현이 말로는 강태영이가 실수를 많이 했대. 그리고 강태영 아들이 이번에 임정호도 놔줬고.”
“진짜?”
“강태영이가 자기가 알아서 다 정리하겠다고 나섰다가 일을 완전 엎어 버렸다나 봐. 그거 보고 석현이가 열 받아서 정리해 버리겠다고 하더라고.”
“아니, 그런다고 그걸 저렇게 정리하면 어떻게 해? 우리한테도 안 좋을 것 같은데.”
“석현이가 알아서 잘 처리할 거야. 이런 일은 걔가 또 잘하잖아. 그리고 어차피 강태영이는 오래 갈 카드는 아니었어. 이쯤 돼서 한번 갈아엎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럼 강태영 다음은 누구로 해? 그건 나랑 상의해야 하는 거 아냐?”
“당연히 정 총재랑 먼저 얘기를 하지. 석현이는 윤선호를 얘기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좀 두고 보자 그랬어. 내가 볼 때는 거기도 너무 기반이 없잖아. 강태영이나 윤선호나, 거기서
거기지.”
“그래도 윤선호가 훨씬 낫지. 검찰총장 출신이랑 검사장 출신이랑. 그게 어떻게 똑같냐?”
“어차피 정치 초년생들인데. 나는 이번엔 좀 베테랑이었으면 좋겠어. 그런 풋내기들은 확실히 어설프거든. 그리고 자꾸 장태준이 연상돼서 그것도 싫고.”
허 회장이 정말 싫은지 손사래까지 쳐대면서 말했다.
“다 장태준 같겠냐? 윤선호는 사람이 괜찮아 보이던데. 음흉하지도 않은 것 같고. 그리고 큰일을 해 본 사람이잖아. 그런 면에서 강태영이는 좀 함량 미달이었어.”
“그랬냐?”
“그래서 내가 몇 번이나 얘기했잖아, 너한테도. 근데도 거기로 간다고 하니까, 나도 더 이상 아무 말 안 한 거지.”
“어쨌든 나는 임총이나 끝내고 생각할 거야. 그래서 석현이한테도 천천히 두고 보자 그랬어.”
“잘 얘기했어. 서둘러서 좋을 거 하나도 없으니까. 지난번 대선 때 말이야. 특검이며 뭐며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그냥 대충 무난한 놈으로 올렸다가, 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떨어졌잖아. 내가 대선을 5번인가, 6번인가 치렀는데, 저번 선거처럼 무참하게 깨져 보기는 또 처음이다.”
“그 선거를 제대로 했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지금 내 재판도 이렇게 고생하지 않았을 거라고.”
“그걸 왜 모르겠냐. 우리 마음대로 안 돼서 그런 거지. 예전에는 적당히 후보 메이크업해주고, 바람몰이 좀 하면서 돈 풀면 됐는데, 요즘은 정말 옛날 같지 않더라. 인터넷에서 별게
다 튀어나오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는 거야.”
“맞아. 그때 막판에 여자 문제 튀어나와서 아주 망가져 버렸잖아.”
“그러니까. 아유, 나는 생각도 하기 싫다. 그때 놀란 거 생각하면.”
허 회장과 정 총재는 씁쓸하게 웃으며 이제는 식어버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정 총재, 형님 건강은 요즘 어떠시냐?”
“안 좋지. 이젠 나도 못 알아보실 때가 많아졌어.”
“그 정도야?”
“그럼. 그 양반 쓰러진 게 벌써 몇 년인데. 근데 점점 심해지니까 이젠 감추기도 어렵다.”
“그것 참 큰일이네.”
허 회장과 정 총재는 심각한 얼굴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김정한 전 대통령. 대한민국 역사 속에서도 대단한 인물이었지만, 거산회 그리고 이 두 사람의 인생에서도 그는 매우 상징적인
인물이었었다. 그런 인물이 이제 인생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으니까, 이들도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때 형님만 쓰러지지 않았으면 장태준이가 그렇게 나오지는 않았을 거야.”
“특검 얘기하는 거야? 그거야 당연한 거지. 형님 쓰러지시니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막 터져 나왔잖아. 그때 나도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여기저기 뛰어다녔는데, 말이 안 먹히더라고.”
“정 총재가 그때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내가 잘 알지.”
“내가 무슨. 고생은 우리 허 회장이 했지.”
“아유, 모르겠다. 나는 우선 임총부터 해결하고. 다른 건 그다음에 생각해야지.”
“그래. 임총 끝나고, 같이 형님한테 내려가 보자. 이제 천가 놈도 없는데, 우리라도 자주 찾아뵈어야지.”
정 총재 말에 허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누군가 서재 문을 두드렸다. 허 회장과 정 총재가 문으로 시선을 돌리자, 문이 열리고, 허 회장의 수행비서가 다급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회장님.”
별말 하지 않았지만, 표정이나 말소리만으로도 안 좋은 소식을 들고 왔다는 게 느껴졌다.
“무슨 일이야?”
“이것 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비서가 허 회장과 정 총재 사이에 태블릿 하나를 내려놓았다.
“이게 뭔데?”
흥미롭게 태블릿을 보던 허 회장과 정 총재의 얼굴이 서서히 굳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허 회장이 보고 있던 태블릿을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머리를 맞대고 같이 보고 있던 정
총재도 따라 일어섰고.
“이게 도대체 뭐냐?”
허 회장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비서 눈앞에 태블릿을 흔들어댔다.
“이게 도대체 뭐냐고!!!”
“그게… 뇌물이 오가는 현장이라고 설명은 되어 있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이게 왜 인터넷에 올라온 거냐고!! 아니, 그것보다 이거 누가 찍은 거야? 도대체 어떤 새끼가 이런 걸 찍어 올렸냐고!!!”
“지금 계속 확인 중인데요, 찍은 사람은 아직 확인이 안 됐고, 올린 건 정치 유튜버인데 ….”
“유튜버? 신문, 방송도 아니고, 겨우 유튜버?”
“예. 근데 구독자가 10만 명이라….”
“그동안 니들은 뭘 한 거야!!! 이런 거 하나 거르지를 못하고!!! 어떻게 이런 게 올라올 때까지 모르고 있을 수가 있냐고, 이 개 같은 새끼들아!!!”
허 회장이 분통을 터트리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정 총재가 앞으로 한 발자국 나섰다.
“허 회장, 너무 흥분하지 말고. 우선 가라앉혀. 그러니까, 우리 비서님, 이게 언제 올라온 거예요?”
“오늘 아침 5시에 첫 영상이 올라온 것 같습니다.”
“첫 영상?”
“그리고 나서 30분마다 하나씩 올라오고 있는데…….”
“뭐? 30분마다 하나씩? 그럼 도대체 몇 개나 올라온 거야?”
옆에서 듣고 있던 허 회장이 다시 흥분하며 끼어들었다. 지금 이 상황을 보고해야 하는 비서만 죽을 맛이었다.
“지금까지… 5개 올라왔고, 곧 여섯… 번째 영상이 올라올 것 같습니다.”
“이런 게 6개나 올라왔다고? 아니 6개나 올라오도록 니들은 도대체 뭐 하고 있었던 건데!!! 이런 개새끼들이 빠져가지고!! 홍보팀 당장 뛰어오라고 해!!”
“그렇지 않아도 지금 홍보팀에서 영상을 내리는 데 총력을 다 하고 있는…….”
“저기, 이 영상들 조회수가 얼마나 되는 거예요?”
정 총재가 흥분하는 허 회장을 뒤로 밀고서 다시 앞으로 나왔다.
“아까 봤을 때 맨 처음 올라온 게 10만은 되는 것 같았는데….”
“하!! 십만!!”
“지금 어떻게든 퍼지는 건 막아보려고 하는데, 새벽에 기습적으로 올라온 거라서…… .”
“이런 젠장!!!”
허 회장이 화를 이기지 못하고 태블릿을 그대로 내동댕이쳐버렸다. 태블릿이 파삭 깨지는 소리와 함께, 화면이 수만 개의 실선으로 갈라져 버리고 말았다.
* * *
세상에 이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군.
고석현은 핸드폰으로 영상을 보다가 박장대소를 하고 말았다. 허 회장 10년 전 모습을 보는데, 왜 이렇게 웃음이 터져 나오는지 모르겠다. 제 앞에서는 그렇게나 대단한 사람인 양
거들먹거리더니, 정치인들 앞에서는 말 잘 듣는 개새끼처럼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대고 있구만.
저한테도 가끔 저런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으면 고석현도 그런 허 회장을 개새끼 예뻐해 주듯이 아주 예뻐해 줬을 것이다.
동영상을 끝까지 돌려보고 나서, 고석현은 제 핸드폰을 책상 위에 던져 버렸다. 지금까지 10개가 올라왔는데, 그중에 반은 허 회장이고, 반은 정 총재였다. 이걸 보고서 흥분했을 두
노인네 얼굴을 생눈으로 직접 봤어야 했는데. 그걸 못 본 게 참 아쉬웠다.
이 동영상의 출처를 제대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고석현은 이게 최현태의 동영상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양 상무가 제게 와서 했던 얘기와 딱 들어맞으니까. 저번에 봤을 때
동영상 못 찾았다고 잡아떼더니만. 그게 새빨간 거짓말이었네. 이번에는 임정호가 제법 깜찍했어.
근데 이런 소중한 동영상을 이런 식으로 사용해 버린 건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고석현에게 이 동영상이 주어졌다면 아주 제대로 사용했을 건데. 그렇기는 해도 우리 허 회장한테 제대로
물을 먹여준 거니까, 임정호에게 그에 대한 보답 정도는 해줘야겠다.
이번에는 어떤 선물이 좋을까? 저번에 나름 심사숙고해서 준비한 선물이 대실패로 끝났으니까. 이번에는 좀 평범하게 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운동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호텔 피트니스
회원권이면 괜찮을 것 같은데. 아니면 양주나 포도주를 보내주는 것도 좋을 것 같고. 아!! 샴페인. 축배를 들어야 하니까. 이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고, 송 이사가 사무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고석현은 그 상황이 맘에 들지 않아서 눈을 찌푸린 채 송 이사를 노려보았다.
“회장님!! 고 회장님!!”
“무슨 일인데, 이렇게 호들갑입니까?”
고석현은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서울중앙지검에서 회장님을 찾아왔습니다!!”
“서울중앙지검이요?”
“예, 지금 회장님을 찾아서, 우선은 저희들이 막고 있는데…….”
송 이사가 여기까지 얘기했을 때, 다시 문이 활짝 열리고 우르르 사람들이 몰려 들어왔다. 고석현은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그 사람들을 하나하나 쳐다보았다.
“고석현 씨 되시나요?”
맨 앞에 선 남자가 고석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고석현은 별다른 대답이나 행동을 하지 않고, 앞에 선 남자만 빤히 쳐다보았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이 사람을 어디서 봤을까?
“서울중앙지검 특수부에서 나왔습니다. 저는 검사 강철원입니다.”
강철원? 그 강철원? 지금 강태영 아들이 나를 잡으러 온 거야? 이런. 세상 정말 재밌게 돌아간다.
“최현태 아시죠? 최현태 살해 사건 피의자로 고석현 씨를 체포하겠습니다. 이게 그 체포영장입니다.”
강철원이가 체포영장을 내밀자, 고석현의 책상 옆에 서 있던 송 이사가 받아들었다.
고석현은 강철원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리에서 서서히 일어섰다. 최대한 냉정해지려고는 하는데, 입가에서 웃음이 삐질삐질 새어 나왔다. 도대체 이 강철원을 어떻게 하면 좋으냐.
“검사님. 제가 전화 한 통화 할 시간은 있는 거죠?”
“변호인에게 전화할 겁니까?”
“아니요. 제 지인한테 할 겁니다.”
“하시죠.”
강철원이가 아주 시원하게 대답했다. 고석현은 책상 위에 던져 놓았던 핸드폰을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한참 신호음을 듣고 있는데, 강철원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손짓을
했다.
“아, 참. 저희 부장검사님께서 전화기 꺼놓으신다고 말씀 전해달라고 하셨는데. 그러니까 혹시나 저희 부장검사님한테 전화를 걸고 있는 거라면 그만 끊으시죠.”
강철원의 말에 고석현의 얼굴에서 미소가 서서히 사라져 갔다. 그리고 제 귀에서 핸드폰을 떼어 냈고.
“내가 고석현 씨와 관련된 모든 증거를 부장님한테 보여드렸거든. 만약에 이게 사전에 유출되거나, 수사를 방해하면, 내가 우리 부장님부터 체포할 거라고 했더니, 전화기를 꺼놓겠다고
하시더라고.”
강철원이가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럴수록 고석현의 얼굴은 일그러져 갔고.
“고석현 씨. 귀하를 현 시각으로 최현태 살해 교사 혐의로 체포합니다. 귀하는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인을 선임할 권리가 있으며, 귀하의 모든 발언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미란다 원칙과 함께, 고석현의 손목에 차가운 수갑이 드디어 채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