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새로운 나를 알아가기
셀리카움에 대해 들었을 때, 난 마법봉이 생각났다. 어릴 적 보던 만화 속 여자 주인공들이 앙증맞은 목소리로 마법봉을 휘두르면서 주문을 외웠더랬지. 그럼, 여주가 엄청난 미녀로 짠 하고 변신하던데. 아, 물론 변신과정에 밍키나 세일러문의 가슴이 확 커졌고, 난 가슴을 벌렁댔었다. 셀리카움이 그때의 감동을 구현해 내려나?
아, 그럼 나도 아싸리 벗어야 되는 건가? 보통, 변신은 홀딱쇼이던데 내가 지금의 모습에서 남자로 변한다면?
―고추야, 생겨라. 얍~
설마, 주문이 이런 대놓고 원색적인 주문은 아니겠지. 소추도 문제고, 대추도 문제고, 여튼 덜렁이는 결코 좋은 그림은 아냐. 그래, 요즘은 변신시킬 때 적어도 속옷은 입힌다고 하던데, 삼각팬티보다는 그 곳을 안전하고 완전하게 가리는 기능성 트렁크를 입어야겠다.
“무슨 생각하나?”
“변신 시, 인상적인 포즈를 생각 중입니다.”
“쓰잘데기 없는 사고일세.”
외계인 주제에 창의력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다.
“뭐, 휘두를 거 안줍니까? 마법봉은 아니더라도 작대기 같은 거.”
“입으로 외치면 된다.”
“나, 변신 이렇게 말입니까?”
“너 병신이냐?”
헤프라는 외계인이 나보고 병신이란다. 그럼 대체 변신을 어떻게 하는 건데?
“모르는 걸 알아가는 중생입니다. 과격한 발언은 삼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후후.. 그렇지. 아직 넌 채울 것이 많은 바보군. 변신을 발동시키는 주문은 간단하지. 셀리카움, 이렇게 외치면 된다.”
뭐야? 너무 간단하지 않은가?
“바보군, 잘 듣게. 자네는 두뇌이식 하면서 세 가지가 달라질 것일세. 지능이 급격하게 발달할 것이라는 것과,”
“까짓 바보가 머리가 좋아봤자...”
헤프가 무섭게 쬐려본다. 씨. 언제는 바보라더니.
“싸이킥 에너지를 활용한 일정량의 초능력 사용이 가능해지지.”
“와우, 초능력? 그거 시간을 멈추게 하고 사람을 투명하게 만들고, 그런 능력이 진짜 가능한 겁니까?”
“이 몽매한 종자여, 어디서 얼토당토 하지 않는 것들만 보고 왔구나. 그건 불가능한 일일세. 그저 남들보다 행동이 빨라진다거나, 기운을 모아 남을 쓰러트린다거나 그 정도일 뿐이지.”
병신에 바보에 몽매한 종자 추가. 그럴 거면, 왜 날 똑똑하게 만드는 건데!
“마지막으로, 감정의 기복이 심해지며 에스트로겐 분비가 많아질 것일세.”
에스트로겐. 여성 호르몬을 의미하는 것. 앞에 말한 두 가지에 비하여 마지막은 나한테 사형선고나 마찬가지군. 점점 여자를 돌같이 보게 되고 남자에 환장하게 된다는 그.. 그런 상황인거지?
헤프박사의 말을 종합적으로 결론을 내리자면, 결국은 겁나게 똑똑하고 허벌나게 힘센 뇬이 된다는 거구먼. 아쉽지만 그런대로 살아가야겠군. 가만,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고 하던데?
“이렇게 날 만든 이유가 뭡니까?”
“후후.. 드디어 본질을 파고드는군.”
“제가 지불해야 할 비용이 있을 것 같은데요.”
나의 촉은 날카롭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건 만고의 진리거든.
“내가 너한테 무엇을 바랄 것 같은가?”
“그냥 바라지 마세요.”
고개를 좌우로 내젖는 헤프 박사.
“그건 안 되지. 싸이킥 에너지를 감당할 수 있는 두뇌를 찾기 위해서 내가 들인 공이 얼마인데.”
“싸이킥 에너지..요?”
헤프 박사가 자상하게 설명해준다.
“싸이킥 에너지.. ThkffkThkffkThkffk... 두뇌줄기세포.. ThkffkThkffkThkffk.. 추진력... ThkffkThkffkThkffk.. 두뇌가 파괴되지.”
음.. 난 병신에 바보에 몽매한 종자가 맞군. 나의 띨띨한 모습을 알아차리고, 헤프 박사가 다시 이야기한다. 차근차근.
“싸이킥 에너지는 정신에너지라고 생각하면 된다네. 두뇌 줄기세포가 생성하는 뉴런(neuron: 신경세포)간의 전기적 파장을 극대화하여 조직체의 신체적 활동과 두뇌활동에 엄청난 추진력을 갖게 하는 에너지라고 보면 되지. 그 싸이킥 에너지의 양이 크고 강할수록, 두뇌에 가해지는 부담감이 극심해지는데, 대부분의 지구인들은 그걸 견딜 수 없어, 두뇌가 파괴되지.”
“뭐라고요?”
“이른바, 슈퍼두뇌를 가진 극소수의 지구인만 그 싸이킥 에너지를 견딜 수 있지. 너처럼.”
내 두뇌가 상위 0.1%안에 해당되는 최고 명품이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돌려 말하면 자칫하면 내 두뇌 개박살난다는 거지.
“내 두뇌를 전시할 건 아닐 거 같고, 혹시 제 두뇌를 어따 쓰시게?”
“전사의 두뇌로 쓸 것이다.”
전사의 두뇌? 그럼 악한 적과 싸우는데 내 머리를 쓴단 말인가?
‘전사의 두뇌’라는 말에 혼란스러워 하는 나를 보고 헤프가 말을 잇는다.
“후후. 내가 너를 살릴 때부터 너와 나 사이에 계약이 성립되는 것이지.”
“계약이라 함은?”
“나에게 고용된 전사로서, 지구인의 두뇌에 기생하는 변종외계인인 바퀠라와 싸우는 것. 그래서 지구와 감마인을 지키는 것. 그것이 너의 숙명일세.”
젠장. 이럴 줄 알았다. 전쟁의 씨받이가 되라는 이야기군.
3일 후, 드디어 내 모든 신체기관의 제약이 풀렸을 때, 비로소 내 자신의 몸 곳곳을 자세히 관찰하였다.
봉긋한 가슴, 하얀 살결, 기막힌 허리라인, 허리까지 차오르는 찰랑대는 머리카락, 그리고 길고 매끈한 다리. 더 이상의 구체적인 기술은 안 할랜다. 내가 19금 야설 작가도 아니고 기껏 자신의 여체를 보고 흥분할 미친 놈도 아니다. 앞으로 살아갈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 새로운 나를 분석할 목적으로 구체적으로 살펴본 것뿐이다. 그리고 내린 결론.
“이 외모로 살긴 어렵겠어.”
십중팔구 이 외모 정도라면 사람들이 환장하고 달려들 건데.. 더군다나 내가 맥아리가 없어 보이는 체구인데, 혹시라도 나쁜 마음을 품은 건장한 남자들에게 당할 수도 있겠다. 이 외모로는 졸라 신경 곤두세우고 다녀야 할 거 같다. 그럼 엄청 피곤하겠지. 안되겠다. 너무 이쁘면 생활하기 어렵고 조금 더 평범한 정도가 살아가는데 좋겠다. 평범보다 살짝 호감을 줄 수 있는 정도면 베스트.
“헤프 박사님. 이 사진 속 여자의 모습으로 셀리카움 형상을 하나 만들어 주시겠습니까?”
나는 현재의 내 얼굴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지만 평범해 보이는 여인네의 사진을 내밀었다.
“지금 네 외모가 어때서?”
“부담스럽습니다.”
“셀리카움으로 만들어질 이 외모는 어디에 쓰려고?”
“가급적 환한 대낮에, 사람들과 만날 때 사용할 겁니다. 마음 편하게요.”
제발 부탁이오.
“셀리카움의 또다른 형상은 누구로 할까?”
“당연히, 과거의 저입니다.”
남자의 모습을 지켜달라고 간절하게 말했다. 난 아직 남자이고 싶고, 남자의 모습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 가끔 종철이와 같은 친구를 만나 술을 마실 때에도, 혹시 여자와의 데이트가 필요한 상황에서도, 과거의 남자의 모습을 끄집어 내야 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아직 과거의 내가 더 좋다. 너무 예뻐서 연약해 빠진 지금의 여자는 내가 너무 부담스럽다.
헤프는 나에게 새로운 신분을 부여하였다. 이름은 이한얼. 주민등록 번호 970802-2******. 나는 절대 미모의 여인이 찍혀있는 신분증을 헤프로부터 받았다.
“새로운 신분에 문제는 없겠죠?”
“걱정되는가?”
“항상 변수는 생길 수 있으니까요.”
나는 변수를 싫어한다. 그래서 어떤 일이 주어질 때 본능적으로 변수를 지워내고자 한다. 내가 제일 잘 하는 거. 플랜짜기. 가장 싫어하는 거. 대책없는 상황에 놓이는 거.
“감마인의 과학기술은 자네가 생각한 것보다 더 위대하다네.”
“이렇게 변조, 훔치는 것도 위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나요?”
헤프의 자긍심에 딴지를 걸어 보았다. 외계인 할배, 잘난체 하지 마시오.
“시니컬하군. 이건 누구의 신분을 훔친 게 아니네.”
“그럼 어떻게 한 거죠? 설마..”
“그 ‘설마’가 맞을 것일세.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 놓고, 해킹을 통해서 각 전산체제에 들어가 입력한 것이네. 출생신고에서부터 학적부까지. 모든 것을 다.”
“와. 헤프박사님, 당신은 정말..”
“대단하단 말인가?”
“간뎅이가 부었어요.”
감정이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헤프의 시선이 매섭다.
“한돌군, 자네 편입 본다고 했지?”
“그럼요, 제 목표는 한국대학교 경영학과 들어가는 건데. 맞다. 신분이 변해버리면, 편입시험 볼 자격이 안 될 텐데요. 아쒸, 큰일이네.”
“간뎅이가 큰 내가 누군가? 학점은행제를 이용해서, 필요한 학점을 이미 확보한 것으로 전산상 기록되어 있을 것일세.”
학점은행제까지 다 파악하고 있다니, 세삼 이 외계인의 지식의 오지랖이 엄청나다는 걸 느낀다.
“와, 그 짧은 시기에 모든 세팅을 다 끝내셨군요.”
“시간을 아껴야 하니까. 바퀠라(변종외계인)와의 싸움을 대비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니.”
“싸움을 대비한다는 말씀은...”
“전투를 대비한 훈련을 한다는 말일세. 바로.”
그러고 보니, 나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내가 목표로 했던 일.
“죄송하지만 전투 훈련에 돌입하기 전에 제가 해야 할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개인적으로 제 대어를 낚는 일입니다. 반드시 성공시켜야 할.”
“기간은?”
“열흘, 열흘이면 충분합니다.”
열흘 정도는 휴가의 개념으로 빼주겠지?
“내일부터 훈련 실시 한다.”
“뭡니까? 열흘을 달라니까.”
“낮에 훈련하고 밤에 그 일 하면 된다.”
내가 혹시 악덕고용주에 고용된 건가 의심이 든다.
“그럼, 나 죽어요.”
“죽지 않게 해주마.”
“그럴거면, 기간은 왜 물어 봤어요?”
“그냥. 습관적으로.”
니미. 이 능글맞은 할배가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