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타겟 박지혁
평창동 저택가. 부자들만 주로 사는 곳인지 깨끗하기 이를 데 없는 으리으리한 집들.
한 30분을 돌아다닌 끝에, 내가 타겟으로 하는 박지혁의 집을 찾았다. 역시 SH그룹의 자택이라 꽤 커 보이긴 했다.
사람 기죽이는 철제 정문에, 넓은 정원도 있어 보이고, 저 하얀 벽돌집의 멀리 서울 한강을 바라보는 방향에는 통유리로 도배를 하였다.
완전 24시간 커피숖 같은 분위기. 저 안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전망 좋은 곳을 찾아 드라이브하지 않아도 되겠다.
박지혁이 사는 자택을 둘러 본 후, 나는 최종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목적지는 편의점. 박지혁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매우 가까운 곳이다.
이곳에는 종종 TV에서나 보는 사모님들이나 대저택의 집사들, 그리고 운이 좋으면 부자집 따님들도 만나 볼 수 있는 곳. 한마디로, 눈도장 찍기 좋은 곳이다.
약간 앞머리가 휘 넓으신 편의점 주인이 재차 확인한다.
“밤 11시부터 아침 9시까지 철야근무 가능한 거 확실하죠?”
“넵. 제가 제일 자신 있는 게 밤새는 겁니다.”
이 타임 대 알바를 구하기 힘들었는데, 다행이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도 이 시간대는 싫다. 박지혁, 그 자식이 이 편의점을 이용하는 시간대가 딱 그 시간이니, 내가 맞출 수 밖에.
“그래서 언제부터 가능한지?”
“네. 오늘 바로 당장. 마음의 준비 다하고 왔습니다.”
박지혁을 조질, 아니 박지혁을 낚을 계획을 다 세우고 왔지요.
“혹시 언제까지?”
“사장님 마음에 들 때까지 하겠습니다.”
뭐, 지혁이와 안면만 트면 내일이라도 때려 치울 겁니다.
“일한 경력이 전혀 없는데, 편의점에서 어떤 일 하는지는 알아요?”
전혀 없기는. 다양한 인생 경험을 했었다. 내가.
“넵. 물건계산, 수시로 페이스업 하기, 물류, 쓰레기 정리, 유통기한 확인, 청소, 정리. 담뱃재고 세기, 각종 인스턴트 음식 데우기. 그리고 없으면 찾아서라도 하겠습니다.”
항상 고용주는 적극적인 자세의 피고용인을 좋아하지.
없으면 찾아서라도 해라. 안되면 되게 하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보다는 해내겠다.
노동력을 착취하는데 도가 튼 자들의 현란한 레토릭에 많은 사람들이 넘어가긴 한다. 바보들 같이.
점주는 내 말에 만족하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요. 내일부터 근무 시작할까요?”
“아뇨. 지금 당장 하겠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박지혁을 꼬셔야 합니다. 점주님.
“그게 가능해요?”
“오늘부터 근무 뛸 알바를 구한다고 하셨지 않았습니까?”
“뭐.. 좋아요. 그럼 오늘부터 하시던가.”
“감사합니다!”
점주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하여, 절도 있는 90도 인사를 시전한다.
“근데, 목소리가 참 고우시네.”
무슨 뜻인지 알겠다. 저 사장 입장에서는 내가 목소리만 고운 거겠지.
외모, 말투, 행동이 다 거칠고 남자 같을 것이다.
저 사장의 표정에 담긴 아쉬움을 난 읽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사장이 떠난 후, 난 잠시 거울을 봤다. 셀리카움이라는 전자껍데기가 보여주는 가짜 외모.
크고 맑은 눈을 가린 커다란 안경, 살짝 여드름이 보이는 피부, 제 맘대로 뻗어대는 헝크러진 머리카락.
내 진짜 얼굴로부터 파생되어 나올 수 있는 가장 평범한 얼굴이지. 그래, 나는 이런 평범한 모습으로 하고 다녀야한다. 예쁘면 내가 고생이다.
내 얼굴 보고 나서, 인터넷에서 우연하게 얻은 박지혁의 사진을 감상하였다.
진짜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못생긴 와꾸를 갖고 다닌다.
혹시, 사고라도 당했었나?
고갱의 미술 작품 모델로 데뷔하면 딱일 만큼 거칠고 촌스런 얼굴.
이 얼굴을 보고 누가 재벌질 아들이라고 할지.
키는 178정도 된다 하니 그럭저럭.
근데 정말 특색 있게 애매하다.
코, 눈, 입, 귀 하나하나의 생김새는 예술작품인데, 하나로 모이니 전위예술이 된다. 해석이 난해한, 애매모호함의 극치.
그래도 뭐, 지금으로서는 개성 있게 생기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내가 한 눈에 알아보니까.
알바 첫날. 철야 시간대의 부유한 주택가가 자리잡은 곳이여서 그런지, 편의점에 손님이 거의 없었다. 무료해진 나는 이것저것 편의점 물건들을 정리하거나, 청소하거나, 재고 정리 등을 하며, 정말 편의점 사장이 좋아할 만한 짓거리만 골라서 했다.
그리고 짬짬이 셀리카움을 해제시켰다. 헤프에 의하면, 셀리카움의 전자파를 신체가 견딜 수 있는 시간이 한 번에 최장 8시간이라고 했으니, 중간 중간 해제시켜놔야 평범한 여자의 모습을 오래 유지할 수 있다.
그나저나, 그 악마 같은 놈의 새끼. 지금도 온 몸이 욱신거린다.
훈련시간동안 나를 개 패듯 후들겨 패고, 매치고, 던지고.
실제 칼로 나를 엄청 찔러댔다. 상처 없게 한다고 했지만, 몸에 느껴지는 고통은 장난 아니었다.
그리고 아프고 힘들어 지칠 때면 마약 같은 알약을 건네준다.
그걸 먹으면 콘디션이 발딱 선다. 그럼 다시 몽둥이질 당하는 복어 신세로 유턴.
허리까지 출렁이는 머릿결이 그의 손에 포승줄이 되어, 질질 끌려가 찜찔을 당한다.
그 외계인 할배는 날 존나게 패고, 난 맷집있게 맞는다.
최상급 품질의 돼지 등심을 돈가스로 만드는 요리사의 심정을 그 자식은 느끼고 있는 거다. 지금 돈가스가 된 나는 입에서 빨고 있는 알약의 효과로 버티고 있는 거고. 거칠게 알약을 빨아대고 있는데, 첫 손님이 왔다.
“어서 오십시오.”
나도 모르게 꾸벅 90도 인사. 야구모자 쓴 내 또래의 남자가 바로 계산대로 왔다.
모자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담배!”
빨리 달라는 듯 재촉한다.
“어떤 걸 드릴까요?”
그가 담배를 고르다 말고 내 얼굴을 보고 말을 건다.
“음? 못 보던 얼굴이네. 새 알바셔?”
녀석을 보고 억지로 웃었다.
“네. 방금 일 시작했습니다. 손님이 첫 손님입니다.”
“이번 알바는 군기가 빡 잡혔네.”
“네?”
“제대 언제 했어요?”
그가 오늘 나눈 대화 중 유일하게 존댓말을 한다.
“미필입니다. 사정이 있어서.”
내가 남자였던 것처럼 무의식중으로 답변하였다.
“평발? 약물 중독? 수감자? 뭔 사정?”
생각해보니, 난 지금 여자다. 그리고 상대는 놀리는 거고.
“손님, 장난은 좀.”
“아냐. 난 심각하다고. 난 2* 사단에서 막 제대했거든.”
“......”
“됐다. 말해 뭐해. 말보르 골드 줘.”
한필, 말보르 골드가 내 손이 닿기가 쉽지 않는 선반 위에 있었다.
발레리나처럼 발가락을 세워 집었다.
“아니, 그거 말고. 레종 필까?”
이번엔 레종을 집었다.
“아니다. 다시 말보르 골드 줘. 피우던 걸 피워야지.”
저게. 내 표정이 구겨졌다. 또 발가락을 세워 담배갑 하나를 쥐었다.
“아냐. 하나 말고, 깨끗하게 포장된 세트로 살거야. 찾아서 줘.”
입술 꽉 깨물었다. 이 새끼 박아버리고 알바 때려쳐?
“지금 말보르 골드 세트로 포장되어 있는 것 없습니다.”
“있을 텐데?”
“그냥 남아 있는 말보르 골드 3갑 챙겨 가세요.”
“뜯은 거잖아. 난 이미 누구 손에 더렵혀 진건 싫어.”
별 거지같은 쉐끼가.
“없으면 없는 대로 사세요. 가계에 말보르 골드 3갑밖에 없어요.”
“어허, 점원이 강매하네. 3갑을 다 사라고?”
“지금 장난해요?”
결국 그에게 눈을 부라렸다.
“하나 살게. 하나만. 어이구. 무서워서 어디 사겠나.”
그가 신분증을 내밀었다.
혹시 박지혁일까 싶어 자세히 보았으나, 구은성이라는 이름.
신분증 사진과 지금 야구모자 쓴 인간의 체형이 얼추 비슷했다.
“5,000원입니다.”
“6,000원 드릴께. 1000원짜리로 거슬러 줘.”
그가 5,000원 지폐 하나랑 1000원짜리 지폐를 내민다. 이게 또 뭐하는 수작이지?
참다못해 소리 질렀다.
“야!”
“하하. 수고해. 천 원 당신 가지시고.”
그대로 부리나케 사라져 버리는 싸이코. 정말 내 인생에 저런 녀석은 처음 봤다.
그 이후로, 나는 기분이 상해 입이 뾰루퉁 나온 채로 일했다.
첫째 날, 박지혁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알바 두 번째 날도, 야구모자 사내가 말보르 골드 사는 것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알바가 끝나는 시간까지 박지혁은 나타나지 않았다.
알바 세 번째 날, 역시 야구모자가 첫 손님으로 담배 사러 편의점을 찾았다. 역시 박지혁은 안 나타났다.
알바 네 번째 날, 야구모자가 편의점 문을 열고 등장하자, 그 사내로부터 반말 듣기 싫어 나는 알아서 말보로 골드를 내밀었다. 야구모자가 씩 웃으며 말했다.
“말보르 골드 사러 온 거 아닌데?”
“그럼 어떤 담배로 드릴까요?”
“추천해봐.”
이게 자기가 필 담배를 추천해 달라니. 이상한 놈이다.
그리고 재수 없는 놈이다. 여전히 반말하는 건 여전하다.
“한국인은 국산 펴야죠. 디스하세요.”
“댁은 목소리가 참 좋으시네. 목소리만.”
“뭐야?”
“디스하라면서?”
이놈의 새끼, 이거 작업인가? 시덥지도 않는 농담을 가지고 슬슬 웃으며 나한테 다가선다.
아무리 여자가 궁하기로서니, 나한테까지 이런 짓을 하다니.
“이거, 저한테 사과하실 일인데요?”
“당신도 손님한테 반말했는데? 『뭐야?』 이렇게.”
무지개매너인 놈. 한번은 참는다. 더 중차대한 일이 있어서 소란은 금물이지.
“담배, 뭐드려? 그럼?”
“말이 짧은데?”
”요즘 같은 초시대에 누가 말을 길게 해? 셀프로 ‘요’자 붙이시던가?“
이 녀석이 화를 낼 줄 알았더니 씩 웃는다. 재밌는가 보군.
야구모자 사내가 담배 대신 붉닥 컵라면을 집어오더니 만원을 낸다.
“이거, 천이백원인데.”
“요!”
“여기, 거스름돈”
“요!”
짜증난다. 이 새끼.
“지금 뭐하자는 거야?”
“요자 붙이라며?”
“나보다 나이 많아 보이는데 왜 이리 유치하지?”
“내가 아가씨보다 나이 많아 보이는데 왜 반말이지?”
아쭈, 내 말에 라임 맞추며 놀린다.
“당신이 먼저 했잖아, 반말. 꾸준하게. 3일 전부터.”
“내가 나이 많지, 내가 손님이지, 그래서 한 건대 뭐 잘못되었나?”
다시 말 걸기도 귀찮아졌다. 지금은 대업을 앞두고 있는 상태, 그냥 보내자.
그리고 나중에 골목길에서 이 자식 잡아다가, 먼지 나게 두들겨 패리라.
“알았어요. 그냥 가세요.”
“뭘 알았는데?”
“.........”
짜증나서 입을 다물었더니, 이 녀석이 씩 웃는다.
“오케. 말하기 싫다 이거지. 그래, 나 때문에 수고 많았으니, 거스름은 너 가져.”
그리고는 등을 돌려 사라지는 싸이코. 성격 진짜 이상한 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