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그녀를 보고 싶다
지혁은 바로 몸이 얼어버렸다.
지혁은 넋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블랙홀 같은 가스나’
우연히 본 진공 청소기 광고가 머리 속에 맴돈다.
『뭐든지 깨끗이 빨아들입니다.』
그녀는 그의 모든 것을 다 빨아들이고 있었다.
지혁이의 마음과 그리고 정신줄까지 모두.
광택이 찬란하게 빛나는 백옥의 피부.
그녀의 오똑한 콧날,
진홍빛 선율이 아로새겨져 있는 선명한 입술.
그 입술 사이로 부드럽게 새어나오는 옥음.
그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듯 하였다.
―아..우....
눈을 떠보니 맨날 편의점 오던 그 사이코의 면상이 시야에 꽉 찬다.
바로 혀를 놀려 욕을 한다고는 했는데, 말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다.
입안으로 스며든 피를 머금은 신음소리만 날 뿐.
왜 한필 이 새끼야.
그나저나, 지금은 셀리카움이 완벽히 해제된 상황으로 내 본 모습이 나와 버렸다.
내 본 모습을 이 자식이 보면 좀 거시기한데.
“아, 죄송합니다. 괜찮으십니까?”
우씨. 난 그 새끼한테 향기를 주고 그 놈에게서 악취를 받았다.
고약한 술냄새!!
화난 표정에, 그가 나한테 가까이 대었던 얼굴을 떼었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헤프 말 잘 듣는 건대.
그 외계인 말을 괜히 의심했구나.
헤프에 면목이 없으면서도 어쨌든 지금은 이 민망한 사태를 피하고 싶었다.
다행히, 이 사이코가 내 심정을 눈치 챈 듯 내 몸에 손을 댔던 자기의 손들을 원위치 하였다. 나는 애써 손을 짚고 일어섰다. 아직 다리가 후들대었다.
“제가 숙녀 분께 실례를 했습니다.”
“잘 아시네요.”
드디어 말이 나왔다. 휴우.
“피를 많이 흘리셔서, 병원에 가보셔야 할 거 같습니다.”
그가 자신의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누리끼리한 것이 이 녀석의 찐한 악취가 느껴진다.
“설마 이걸로 제 입을?”
이 녀석이 당황해서 손을 내젖는다.
그 꼴을 보던 난 소매로 얼굴을 북북 문질러 댔다.
코와 입에서 난 피가 묻어나왔다. 이 정도 피에 죽지는 않겠지.
“이 정도는 제게 늘 있는 일이니, 걱정마세요. 괜찮습니다.”
나는 품을 뒤져 알약을 꺼냈다.
부상을 대비하여 헤프가 준 것인데 갖고 오기를 잘 한 듯 했다.
그걸 꺼내 캡슐을 입에 넣고 물을 마셨다.
아마, 이 사내는 내가죽을 병에 걸려 오래 못 살 처량한 아가씨쯤으로 치부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 괜한 호승심이 날 잡아 죽일 뻔 한 줄은 꿈에도 모르겠지.
“아무래도 제가 병원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가만 보니, 이 사내, 내가 셀리카움으로 평범한 여자 행색 하고 있을 때는 반말만 지껄이던 놈이었다.
이렇게 존대말 꼬박 쓰고 친절한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유난을 떤다.
“댁은 참 오지랖이시네요.”
“네? 제가 오지랖이라뇨? 전 님을 돕기 위해서..”
“저 죽을 병 걸린 거 아니고, 폐병 있는 것도 아니거든요. 여기 바닥에 덜어진 피는 달마다 찾아오는 자연의 섭리라구요.”
얼굴 팔리지 않고 당당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또박또박.
“네?”
“그거라구요. 그거.”
“그게, 그거를 입과 코에서 하는 게 말이 되나?”
쫙 노려본다.
“네. 알겠습니다.”
바로 수긍하는 그 사내. 은성이라고 불리는 이 사내가 난처한지 양 볼에 빨간 꽃이 폈다.
이제 내가 흘린 피가 무엇인지 납득이 되겠지.
물론 개뻥이지만, 내가 눈을 부라리며 설명하는데 믿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여기는 편의점 점원만 들어올 수 있어요. 나가주세요.”
“네? 네. 알겠습니다.”
그 남자는 자기가 무엇을 사야할지 잊어버린 채 내 말대로 그냥 편의점을 나가버렸다. 밖에 차량 기사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뭔가 이야기를 하는 것 같더니, 다시 허둥대며 들어왔다.
“제가 까먹고 담배를 안 사서요.”
말보로 골드를 그 앞에 대령한 나.
“손님 최애품!”
내 말에 의아한 표정의 이 사내. 만원을 내 손에 공손히 쥐어주고는 편의점 문을 나섰다.
그리고 또 금방 또르르 달려왔다.
“제가 까먹고 껌을 안 사서요.”
은성이라 불리우는 사내가 껌을 집더니, 또 만원을 내 손에 공손히 쥐어준다.
그리고 또 또르르 달려나가려는 찰나.
“잠깐!”
내 외침에 걸음을 멈춘 그 사내. 뒤돌아본다.
“왜...요?”
“살면서 사람 차별받는 느낌, 그거 엿 같은 거거든요.”
“무슨 말씀이신지?”
“못 배워서 혀가 짧은 줄 알았더니, 잘하네요. 존댓말.”
“뭐요?”
“당신 혓바닥에 차별을 두지 말란 말이야.”
누구한테는 존댓말, 누구한테는 반말. 그게 뚜껑 열릴 일인걸 이놈은 알려나?
오늘 편의점 마지막 날이다. 이 새끼 혼내고 가련다.
“제 혀가 뭐 어때서?”
“잘 때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자신의 만행을.”
사내가 고개를 꺄우뚱한다.
“그리고 잔돈 안 받고 토끼는 거 개멋져보이죠? 개미쳐보여.”
눈을 둥그렇게 뜨는 저 사내. 그동안 당하기만 하다가 한소리 쏘아 붙이니 아주 시원했다.
그가 약간은 풀이 죽은 듯 어깨를 축 내리며 돌아섰다.
“잔돈 가져가라니까.”
“님에게 지불하는 컨설팅 비용으로 생각하세요.”
“난 당신에게 컨설팅 해준 적 없거든.”
“바로 지금 하고 있잖아요. 내 개매너에 대한 코치.”
“.....”
“내일 또 컨설팅 받으러 오겠습니다.”
그는 그 말을 남기고 밖에 주차되어 있는 자신의 차로 돌아갔다. 차, 헉 소리 나게 좋은 거다. 벤틀리 슈퍼플라잉. 역시 있는 집 자제였군.
벤틀리는 망나니 자식을 태우고, 엔진소리와 함께 내 시야에서 금방 사라졌다.
잘 가라. 그리고 다시 보지 말자.
골목길을 서행하는 벤틀리 차안.
“기사님, 찍었어요?”
“네. 찍긴 했는데, 사진이 좀 흔들렸습니다. 근데, 이렇게 찍으면 불법인데?”
“그냥 공유안하고 제 폰에만 담아둘 겁니다.”
“혹시, 저 미모의 아가씨하고 어떻게 아시는 사이인지?”
“오늘 봤습니다.”
“오늘요?”
“너무 설레서, 마음에 간직하려고요. 가난한 제 마음을 채우는 선물입니다.”
지혁은 자신의 차에 전문가용 디지털 카메라가 있는 것이 세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편의점 그녀의 조각 같은 옆모습을 알 수 없었을 테니까.
-그런데, 그 여자가 내가 잘 피는 담배를 어떻게 알았지? 어제의 그 평범하게 생긴 점원인가? 게다가 목소리도 거의 비슷하고.
-아냐, 아냐. 완전 달라. 완전 다른 인물이었어.
그는 알고 싶어졌다. 카메라 속 이 여인의 이름과 정체를.
샹들리에 조명이 활짝 켜진 거실, 박지혁은 밤을 세우다시피한 어머니와 정면으로 마주했다.
박지혁에게 있어 어머니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살집 있는 얼굴과 몸매의 여자,
피부 관리를 잘 받은 덕분인지 주름살이 별로 없는 중년의 여인,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배다른 형과 누나에게 괄시받는 세컨드,
그러나 명동사채시장의 큰 손이며 거부(巨富)인 황정달의 장녀,
그리고 지금은 아들을 잡아먹을 듯이 매섭게 노려보는 암사자였다.
“오늘도 구은성이랑 놈팽이질 한거니?”
암사자께서 으르렁 거리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놈을 패고 왔습니다.”
술 먹고 서로 주먹질 한 걸 떠올리며 말했다.
“한국대학교 경영학과를 가서 기대를 많이 했는데, 어째 넌 갈수록 이 모양이니?”
“어머니, 모양 빠지시게 왜 저한테 기대 같은 걸 하십니까?”
“너, 지금 엄마랑 말장난 하자는 거얏?”
“지금 저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겁니다. 어머니.”
“무슨 최선을? 클럽가서 골빈 년들이랑 부비부비 하는게 최선을 다하는거야?”
-어머니, 나와 당신을 살리기 위해서 난 최선을 다하는 겁니다.
박지혁은 잠시 자신의 뜻을 몰라주는 어머니를 원망의 눈초리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다양한 인생을 경험해 봐야,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되죠.”
“너, 이따위로 하면 족제비 새끼한테 밟히며 살게 될 거야. 그게 좋아?”
족제비. 지혁의 어머니가 지혁의 손윗 형을 부르는 이름이다.
어머니에게는 증오의 대상이 된 박광혁. 그의 배다른 형.
그 증오가 모자(母子)에 파멸을 일으킬 수도 있음을 아직 지혁의 어머니는 모르고 있는 듯 하였다.
“밟히는 게 어때서요? 밟히면 단단히 다져질텐데. 오히려 꿈틀대면 더 밟혀요. 엄마.”
“웃기는 소리 그만하고. 너 오늘 내일 중으로 김정출 상무랑 만나봐. 내가 그사람 구워삶느냐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너한테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니, 가서 안면 좀 트고.”
-김정출 상무는 이미 족제비가 심어 놓은 그쪽 사람입니다. 어머니.
지혁은 마음 속의 말을 입밖으로 내려다가, 의기양양해 하는 어머니를 보며 입을 닫았다.
“알겠습니다. 시간 나면 보겠습니다. 전 이만 피곤해서.”
“너, 엄마 말 무시하면 진짜 연 끊고 살게 될거야.”
정작 엄마는 그러지 못할 거면서. 지혁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침대에 바로 몸을 누었다.
눕자마자 바로 무거워진 눈꺼풀에 의하여 세상의 모든 빛이 사라져 갔다.
그의 얼굴에 그녀의 머리카락 한 올이 간지럽힌다.
눈을 뜨니, 그의 앞에 숨막히게 아름다운 그녀의 나체가 있다.
그런데 왜 그녀의 얼굴 외에 그녀의 전신은 보이지 않는 것일까..
그녀의 숨소리가 서서히 내 얼굴 위로 올라와, 내 코와 마주한다.
그렇게 마주한 건 코만은 아니었다. 그녀의 입술이 정확히 내 입을 파고들었다.
부드러우며 격정적인 키스.
행복하다. 나는.
그런데, 슬퍼 보인다. 그녀는. 그리고 이어지는 습기찬 목소리.
“지혁씨”
“왜?”
“날 잊지 말아줘.”
“.....”
“나, 잊으면 안돼.”
“왜, 그런 말을?”
그녀가 눈가의 물기를 지우고 갑자기 방긋 웃는다.
“내가 네 마누라니까!”
그는 놀래서 눈을 떴다. 마누라라는 소리에 너무 설랬던가.
시계를 확인하니 오전 11시. 그는 일어나자 마자 스마트폰을 찾았다.
사진의 스마트폰에 배경사진으로 저장해둔 이름 모를 그녀. 자신을 쬐려보며 입술을 앙다물고 있는 이 여자의 옆모습이 다시 보고 싶어졌다.
전화번호를 어떻게든 알아내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생겼다.
-못 볼 게 뭐야. 지금 당장 보러 가면 되지.
그는 즉시 트레이닝복으로 갈아 입은 후, 어머니의 눈을 피해 뒷문으로 편의점을 향해 달음박질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