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네가 박지혁?
“도대체 넌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았기에?”
주점에서 만나자마자, 종철이는 나의 장발 머리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호모사피엔스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로 역진화한 현장을 종철이가 목도하고 있으니, 동공의 크기가 벼룩 눈깔만 해지는 저 종철의 반응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허리까지 오는 전기가발(라테카움)을 벗고 왔어야 했는데,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쓰고 와버렸으니.
나의 껍질은 기괴할 것이고, 당연히 종철은 이걸 대화 주제로 질겅질겅 씹을 것이다.
“너, 이 새끼, 야한 생각을 얼마나 많이 하고 다녔으면?”
“야한 생각 할 필요도 없어. 항상 라이브로 보고 있으니.”
말마라. 내가 지금 누구네 신체 렌탈 중이란다.
“오호. 그럼 네 껀 항상 용솟음치는 겨?”
“용솟을 거시기가 없다니깐.”
“와, 이 쓸데없는 겸손의 미덕 보소. 너 보고 있다는 라이브 나도 좀 보자.”
“시끄럽. 보긴 뭘 봐!!”
직접 보여줄 수도 없고 정말.
“종철, 넌 컴퓨터나 끊어 새꺄. 맨날 컴퓨터 붙잡고 이상한 짓이나 하고 말이지.”
“해커라는 위대한 직업을 누구네 뒷간 휴지로 아는 새끼한테 말해 뭐하냐.”
“그래서 야동으로 꽉꽉 채운 USB 10개를 생일선물로 준 거냐?”
“거 참 말 많네. 즐길 걸 다 즐겨놓고 불만이냐?”
그렇게 가볍게 입씨름을 하고, 나와 그는 본격적인 대담에 들어간다.
대담의 주제는 중구난방. 이 녀석과 대화하다 보면 옆으로는 가는데, 앞길이 보이지 않는다.
길이 보이지 않는 격랑의 파도 속으로 대화를 이끌어 나가볼까? 그럼 주제는 뻔하지.
“종철, 넌 연애 안하냐?”
“너는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을 하고 있거든.”
“그래, 알 거 같다. 우리 둘 다.”
“이런 걸 선문답이라고 하지.”
한 동안의 침묵.
“돌아, 인생 참 단순해. 만민 앞에 평등한 건 법이 아니라 외모였어.”
“그런가?”
“젖과 꿀이 쥐뿔도 흐르지 않는 외모에는 공부도, 돈도, 자신감도 다 필요 없더라고. 안 생겨. 여자가.”
저렇게 나한테는 말 잘하는 놈이 왜 여자한테는 저런 드립력이 나오지 않을까?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야, 종철. 넌 그렇게 말 잘하는 놈이 왜 소개팅가서 여자한테 관우가 누군지 묻고 다녔냐?”
“그거야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여자한테 써먹으면 대박날 것이라고 해서..”
“그 여자가 삼국지 관우를 알던?”
“자기 옆집 아저씨 이름이라고 하던데?”
그럴 줄 알았다.
문맥에도 맞지 않게 뜬금없이 관우를 물으면, 어떤 여자 분이 제대로 답변을 하겠는가?
“종철아, 너 심지어 여자 앞에서 최전방 GOP에서 겪었던 똥탑이야기를 해주었다며?”
“그랬지..”
“네가 GOP갔다 왔냐?”
“아니, 친척형이. 난 방위고.”
이 자식은 친척형의 드립을 표절해서 사용하기까지 했군.
또라이는 내가 아니고 이놈이 맞는 것 같다.
“도대체 네가 다녀온 것도 아닌데, 그걸 왜 꺼냈냐?”
“재밌을 거 같아서. 겨울에 수세식 화장실 쓰면 언 똥이 쌓이고 쌓여 다보탑 된다는 이야기 재밌잖아.”
“넌 참 소개팅을 엿같이 만드는 국보급 재주를 가지고 있어.”
둘 다 한심했다.
이 놈이나 나나.
그래도 내가 종철이에 비하여 딱 하나 경쟁력 있는 건 군대를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고아는 면제니까.
“그래도 주위에 나 같은 사람이 있구나생각하면 위안이 돼. 지혁이 형 봐봐. 심지어 그 돈 많은 형도 연애를 못 해서, 와꾸를 고치잖아.”
지혁.. 생각지도 못한 데서 중요한 정보가 나왔다.
“와꾸?”
“면상을 갈았다고. 그 형이 말야.”
어라? 박지혁이 성형수술을 했다니. 이것은 없던 정보였는데.
“그 재벌집 금수저 말이지?”
“그렇다니깐. 그 수술 때문에 이번 한 학기 휴학했다는 소리도 있고 말이지.”
“오호. 새로 탄생한 박지혁인가 누군지 궁금한데? 사진 있나?”
“여자도 아닌데, 뭐가 좋다고 폰에 모셔 두냐?”
바로 수긍이 된다.
그래도 여기서물러서지 말고, 어떻게든 실마리를 풀어볼까.
“지혁이라는 사람, 되게 궁금해지는데. 혹시 술 한잔 같이 하자고 하면 안될까?”
“왜? 재벌이라고 동하냐?”
“동하지. 혹시 아냐? 공짜로 꼬냑 루이13세를 영접할 지도.”
“그래?”
종철이가 잠시 생각하더니, 폰을 든다. 그에게 통화해 볼 의향이다.
“내가 재벌 아들에 기대서 뭐 하려고 그러는 거 아니다. 네가 부탁한거야?”
“이 기회가 아니면 내가 언제 호사를 노리겠니? 그러니 잘 좀 통화해봐.”
종철이는 바로 박지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찰칵 소리가 들렀다.
그리곤 곧 전화상 대화가 시작되었다.
2분간의 짧은 통화가 끝나고 종철이가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왜, 온데?”
“고맙다. 똘아. 너 덕에 클럽 구경 가겠다.”
“뭐?”
“한 턱 크게 쏘겠다고 클럽 오라네. **동 페가수스로 오면 된다고.”
“와이씨. 대박이다.”
난 살면서 클럽 가본 적이 없었는데 박지혁을 보러 가게 생겼다.
돌 하나에 두 마리 참새 명중.
“똘, 지금 가면 되겠다.”
“지금 몇 시지?”
“밤 8시인데?”
“여기서 클럽까지 얼마나 걸리지?”
“한 한 시간.”
시간이 애매하다.
셀리카움을 작동시킨지 벌써 4시간이 되어 간다.
이제 남은 시간은 4시간.
이 잔여 시간 동안에 박지혁에게 뭔가 강렬한 인상을 남겨줘야 할 텐데.
클럽 페가수스의 간판은 화려했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젊은이들이 페가수스 앞에 모여들고 있었다.
나는 만약을 대비하여 산 흰 마스크를 주머니 속에 대충 구겨 놓고는 종철이를 따라 클럽 안으로 들어갈 채비를 하였다.
들어가던 도중 가드가 한 차례 길을 막았으나, 누구로부터의 전화를 받고는 나와 종철이를 즉시 통과시켜 주었다.
클럽 안에 들어오자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귀에 방방 울리고 있었고, 클럽 안은 홀을 가득채운 젊은이들의 열기로 후끈했다.
섹기어린 춤을 추는 여자들의 뒷모습을 감상하며 종철이의 뒤를 따라 걷는다.
“흐흐. 방으로 오란다. 지혁이 형이.”
“룸까지 따로 잡은 거야?”
“SH그룹 재벌집 아들이 그 정도 재력과 힘은 있지 않겠냐?”
역시 재벌집 아들들은 달라도 뭐가 다르다.
오늘 운이 좋으면 뭔가 벗겨 먹을 만한 것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뭐. 당연히. 아, 근데 박지혁이라는 사람 어떤 사람이지? 정확히?”
“그냥 웃긴 사람? 우리랑 어울리는 거 보면 재벌집 아들 답지 않게 털털하다는 정도?”
“오케이. 접수했어.”
“참, 근데 선배가 자기 친구랑 같이 있다고 그러네. 괜찮겠지?”
당연히. 분명 그 친구도 배경이 빵빵한 인물일 것이고, 그런 인물은 많이 알아둘수록 인생의 도움이 된다.
대어 두 마리, 내가 오늘 회쳐먹는다.
지금 이 시점에서 나의 계획은 이렇다.
박지혁에게 나는 쌍둥이 여동생이 있다 할 것이고, 그 여동생이 곧 한국대학교 경영학과에 편입으로 진학하게 될 것이며, 아울러 여동생이 얼마나 SH그룹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지를 그에게 어필할 것이다.
내가 세운 계획을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점검하며,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인 채로 룸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박지혁의 나지막한 소리가 들렀다.
“어서와. 종철이와 함께 나를 보러 왔다고?”
“반갑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돌이라고 합니다.”
나는 꾸벅 인사를 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본 순간.
“...”
구은성?
“오호 이 녀석. 종철과 커플할 만하네. 진짜 이끼류였군.”
종철과 나를 세트를 묶는 별명까지 알고 있다. 종철이 녀석 어디까지 이야기한 거야?
“습한 응달에서 자라, 키가 크지 못한 이끼류. 크크”
저 재수 없게 말하는 본새가 여전하다.
“어이, 친구. 네 꼬봉들 왔냐?”
술에 취했는지 살짝 혀 꼬는 소리를 해대는 인간.
저 인간이 박지혁인가 보다.
옆에있던 종철이가 쩔쩔 매며 그 사내에게 가서 인사한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전 서종철이라고 합니다.”
혀 꼬는 사내에게 처음 뵙겠습니다? 그럼 저 사람은 박지혁이 아니고, 내 눈앞에 이 싱글싱글 웃고 있는 구은성이 박지혁?
“어이, 그만 쳐다봐. 자꾸 마음 설레게.”
“박, 박지혁?”
“허. 설렌 건 너네? 난 박, 박지혁이 아니고 박지혁이다. 임마.”
망했다. 쓰불.
“어이, 지혁. 클럽에 춤추는 여자애들 이제 본격적으로 꼬셔볼까?”
“안돼, 미성년자도 있는데. 애들 보내고 놀아야지.”
날 보며 지혁이가 쓱 웃으며 하는 말. 열 받네. 진짜.
“형님들. 저희 알 거 다 압니다.”
“야, 종철이 네 말투. 완전 웃긴다. 『여기는 우리 나와바리입니다. 형님』 해봐.”
“오, 나도 너 깡패새낀 줄 알았다. 한번 해보세요.”
은성으로부터 깡패새끼라는 말을 들은 종철이가 살짝 자조의 미소를 띄운다.
이놈들이 정말 사람 갖고 장난치나? 내가 깽판을 내버린다.
“여기는 우리 구역입니다. 형님!”
내가 깽판냈다.
나와바리를 아름다운 우리말로 바꿔주는 것으로 소심하게 복수를했다.
이채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지혁.
“재밌게 노네, 이 친구. 말 한마디 못하는 줄 알았는데.”
“애가 한번 입 틔면, 주둥아리 메시가 됩니다. 드립력이 대단하죠.”
지혁이가 나를 메시로 만들었다.
저런 되도 않는 거짓말을 하다니?
“은성아, 이놈들이 가소롭게 노는데? 어떻게 해줄까?”
“우리랑 어울릴 자격이 되려면 증명해 보여야지. 세상에 공짜는 없거든.”
“좋아. 그럼 나랑 여기 은성이를 웃겨봐. 지금!”
웃겨 보라니?
지혁이가 나를 강제로 개그맨이 되게 하였다.
“네? 지금요?”
“나와 은성이를 웃겨주면, 제대로 놀 게 해줄게.”
이건 마치 미국의 프래터니티 입단 신고식 같았다.
웃기면 오케이, 못 웃기면 굳바이.
지혁이가 잠시 서늘하고 차가운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우린 그렇게 쉬운 사람들이 아니야.”
그와 나의 경계를 짓는 서늘한 말투. 장난이 아니다.
"좋아. 웃겨 보이겠습니다."
한다면 한다. 그게 나, 한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