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예기치 못한 재회
“남자 화장실에는 무슨 볼일이 있어서, 오셨을까?”
드라마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온갖 불량스러운 폼에 사각턱 호피무늬의 남자.
엑스트라의 역할은 뻔하지.
이죽이면서 씨부렁거리는 것은 항상 기본옵션으로 장착하고
지금처럼 최대한 눈 까집고 여주의 길을 막으며 치근덕거리는 것.
그래 이거까지만 해도 너의 역할을 충실히 잘 했어.
그러니까, 퇴장해.
더 버릇없이 굴면 이빨 몇 개 씹어 먹고 나동그라지는 볼 폼 사나운 꼴을 당할 테니.
가만, 낯선 체취가 강하게 느껴졌다.
살짝 기분 나쁜 체리향? 아몬드 냄새?
특유의 냄새가 알콜 냄새와 섞여 코끝을 자극했다.
이거 마약 냄새 아닌가?
그럼 여기서부터는 형사물인데.
뽕 맞은 녀석이 이글거리는 정욕으로 여자의 손목을 잡아채고 질질 끌고 가 으슥한 곳에서
그 짓을 하는 장면이 생각난다.
높은 확률로 그런 장면이 나오지.
불쾌하다. 그런 씬과 그런 캐릭터를 현실에서 본다는 것이.
“쓰발. 아가씨. 사람이 말을 하면 대답을 해야 할 거 아냐.”
-말 못해. 특히 너 따위 잡것들한테.
말 대신 입술을 깨물고 눈썹을 찡그려 노려 보았다. 술이 덜 깨니 이런 표정 짓는 것도 쉽지가 않다.
정신 차려, 이한얼.
“어쭈? 절라 무서운데. 무서워서 쫄겠어.”
상대의 눈이 희번덕거린다. 뽕 맞은 눈은 무섭다.
“이뿐이, 이것도 인연이니, 오늘 좀 뜨거운 시간 좀 보내보는 건 어때?”
이게 진짜. 오늘 클럽도 처음 와보는데, 뽕쟁이도 처음 와서 본다.
버라이어티한 첫 경험이군.지금, 첫 경험 말할 때가 아니지.
공중 부양하여 저 자식 턱조가리에 강력한 킥을 날리려면 각도 조절을 해야겠다.
조금 뒤로 물러서 거리를 확보하고, 45도 각도로 날아 올라서, 짧고 굵게.
한 방에 싹.
썩을. 짧고 굵게 한 방에 싹 내 손모가지를 잡혀 버렸다.
아직 술이 정신을 먹어서인지, 제대로 방어도 못하고 잡힌 것이다.
뽕 맞은 놈은 이래서 싸우지 말고 피하랬던가?
자기 피통 깎아먹는 대신 버퍼 오지게 받는 포션 먹은 마냥 이 자식 힘이 더럽게 세다.
내가 이럴 군번이 아닌데, 화장실 변기 있는 곳으로 질질 끌려간다.
당황해서인지 머릿속이 온통 공백이다.
나, 당하는 거야?
굻은 저음의 남자 목소리로 절규하면서 온 몸을 혹사당하는 그림, 끔직하다.
진짜, 헤프는 나한테 뭘 가르쳐 준 거야?
연습 때 쳐 맞는 건, 실전 때 맷집 있게 쳐맞기 위한 큰 그림이었던거야?
갑자기 엑스트라 임무에 충실하던 빌런이 퍽하는 소리에 억하고 눈앞에서 꼬꾸라진다.
그래, 언제나 이런 그림이었어.
여주를 괴롭히는 빌런의 등 뒤로 날아 차기를 시전하며 짜잔 나타나는 슈퍼 히어로... 지혁?
뺨 때리고 억지로 술 먹이고, 이 그림이 오는 상황을 완벽하게 세팅했던 이 새끼가 실제 이 상황에서 나타나더니,
너무 현실감이 없잖아.
잠시 멍 때리고 지혁의 등장을 바라본다.
고.. 고맙긴 하다.
뺨 맞은 거 괜찮으시냐고 물어 본다.
뭐지? 이 이율배반적인 상황은?
아니다. 이럴 시간이 없다. 주인공은 여기서 빌런과 싸우게 놔두고 난 음성변조기 찾으러 간다.
지혁, 너 때문에 그런 것이니 네가 알아서 이 사태 책임지도록 하세요.
**
클럽 옥상에서 지혁은 담배 한가치를 피우며 허공에 도넛을 날렸다.
밖의 시원한 공기를 맞으면 좀 나아질 까 싶었는데, 그것은 헛된 기대였을 뿐이었다.
구은성이 잠시 잊고 있었던 자신의 그리움을 꺼냈고, 그 그리움에 가슴이 아파진다.
송혜정.
나는 그녀를 구했고, 형은 그녀를 죽였다.
과거의 악연을 단절할 각오로 성형을 해서 나타나면 그녀가 나를 한번 더 봐주리라 기대했는데,
그녀의 더욱 차가워지고 단단해진 외면이 그가 접한 현실이었다.
그래 외면은 괜찮다. 영혼이 죽어버린 그 눈빛만 내게 보이지 않았더라면...
―쿡, 쿡, 쿠욱.. 하하하.
왜 미친 듯이 웃음이 나왔던 걸까? 그녀를 사랑했던 것이 덧없어서?
이럴 줄 다 알면서, 그녀에게 목숨을 걸었던 내 자신이 한심해서?
어렸을 적부터 같은 시간을 공유했던 추억의 무게 탓에, 그녀에 대한 감정도 무거웠고,
가득했던 감정을 비워내는 건 더 큰 고통이었다.
하루에 하나씩 비워내는 연습. 그게 필요하겠지.
그리고 비어진 마음을 복수심으로 하나하나 채워갈 것이다.
족제비, 김광혁. 그래, 네가 있어서 내가 지금 살 수 있다.
고맙다. 이 개자식아.
시간을 확인하고자 폰을 다시 바라보았다.
폰의 배경화면을 채우는 또 다른 송혜정, 옆 얼굴 그녀를 또 보게 된다.
송혜정과 희한하게 닮았다.
아니, 더 고운 사람이다.
누구에게 반한다는 건 나의 모든 것을 타인에게 기꺼이 항복하여 행복을 얻는 것.
송혜정을 닮아서 그녀를 그리워한다면, 난 아직 송혜정에게 여전히 항복한 상태인가?
단지 더 고와서 그녀를 그리워한다면, 난 새로운 그녀에게 항복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일까?
폰에 담긴 그녀의 화난 표정을 보며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지혁이는 천천히 클럽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구은성, 녀석은 싫지만 그의 배경은 이용해야 하니까, 그 녀석을 지금은 잘 달래야 한다.
내 복수를 위한 디딤돌. 그 역할로 너는 딱이지.
-피곤하군
이 피곤한 생각들을 시원한 물로 씻고 싶었다.
그는 그렇게 화장실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화장실 입구에 들어가자마자, 어떤 남자가 여자를 질질 끌고 가려는 것을 보았다.
마치 먹이를 봤다는 듯 정욕으로 빨개진 눈빛의 남자.
여자의 뺨에 선명한 손자국.
그리고 당황한 표정의 여자.
그리고 그 여자는!!
그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바로 공중을 날라 그 양아치의 등을 정통으로 가격하였다.
충격을 온 몸으로 받은 그 사내가 땅바닥에 굴러버렸다.
지혁은 숨을 헐떡이며, 그 여자의 하얗게 질린 얼굴을 흘끔 바라보았다.
뺨이 부어오른 것으로 보아, 이 양아치에게 맞은 듯싶었다.
“뺨맞은 거 괜찮으세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엉뚱하게도 바닥을 짚고 일어나는 양아치의 입에서 나왔다.
“개새끼. 너 죽었어.”
눈에 초점이 없는 상태의 사내가 지혁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그래, 오늘 나 살고 넌 죽는다.”
지혁은 옆으로 가볍게 피하고는 주먹으로 그의 옆얼굴을 강타했다.
다시 퍽 쓰러지는 양아치.
폼에서 무엇인가 반짝이는 도구를 꺼냈다.
길고 날카롭게 반짝이는 주머니칼.
그 칼에 비친 양아치의 이죽거리는 웃음에 슬쩍 광기가 비친다.
“재밌다. 졸라 재밌어. 이걸로 사람 담구는 맛이 죽여주거든. 오늘 간만에 재미를 느껴보겠네.”
지혁은 그 사내의 눈빛에서 그가 정상이 아님을 알았다.
―젠장. 재수 옴 붙었군. 뽕쟁이 새끼를 건드렸어.
주위를 돌아보니,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 화장실에는 그와 저 사내, 단 둘 뿐이었다.
그 사내가 칼을 빙그르르 돌리더니, 칼로 자신의 혀를 살짝 베었다.
사람을 해칠 때 하는 의식처럼.
“왜? 피 보니까 무섭지? 오줌 지리지? 그러기에 왜 날 건드려, 새꺄.”
“쪼다 같은 새끼가 혀가 기네. 어서 와, 새꺄.”
칼을 들고 비틀거리며 달려드는 사내.
지혁은 정확하게 그 사내의 발을 걸어 무릎을 꿇게 만든 후 팔꿈치로 그의 얼굴을 찍어 버렸다.
바닥에 쓰러진 사내의 가슴 위로 지혁이 재빨리 걸터앉았다.
그리고, 원투쓰리 주먹을 사내의 안면에 먹였다.
찢어진 입술과 코로부터 흘러내리는 피가 그 사내의 입가로 흘러 들어가도 그 사내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웃어?”
“흐..흐.. 재밌..다. 난.. 맞는 게.. 즐겁거든.”
“뭐야?”
“너도 한번은 받아봐야지. 내 선물을.”
그 말을 듣자마자, 지혁은 불타오르는 듯한 통증이 그의 팔에서 느껴졌다.
그의 팔에 쑤셔져 있는 날카로운 칼.
잠시 지혁이가 시선을 돌린 사이, 양아치가 지혁의 얼굴에 한방을 날렸다.
뒤로 꼬꾸라지는 지혁.
양아치가 자기 얼굴에 묻은 피를 자기 손으로 닦더니, 서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너 한번 뒈져봐. 시발.”
그가 발로 쓰러진 지혁의 복부를 걷어차 버렸다.
우욱~~
“그래, 그거야. 고통속의 그 얼굴.”
또 한번 세게 지혁을 걷어찼다.
지혁은 극심한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는 옆으로 몸을 웅크리고 자신의 배를 감쌌다.
“아직 시작도 안했어. 왜 그래 벌써.”
잔인한 미소를 남기며 지혁에게 다가오는 사내를 보며, 지혁은 고통속에서도 반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
퍽~~~~~
지혁은 뒷덜미를 잡으며 쓰러진 양아치의 형상 뒤로, 분질러진 빗자루를 든 그녀를 보았다.
“뭐해요? 어서 가요.”
그 여자가 자신의 손을 잡았다.
“여긴.. 어떻게?”
“잔말 말고 빨리 튀어요.”
지혁은 그 여자의 손에 자신을 맡기고 뛰었다.
“내가 이길 수 있었는데.”
“거 되지도 않을 자존심 부리지 말고, 갑시다. 쫌.”
이 여자 앞에서 자존심만은 세우고 싶었던 지혁.
“이렇게 피하는 게 능사는 아닌 거 같은데.”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가소로운 듯 씩 웃는 이 여자의 미소에 지혁은 무장해제되는 느낌이었다.
내가 이 여자를 구했고, 이 여자도 나를 구했다.
이 순간만큼은, 이런 기회를 준 그 뽕쟁이 새끼가 고마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