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전지전능한 헤프박사님
국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 나서도, 여명을 보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식당 밖을 나서니, 가을의 끝자락이 가져오는 차가운 공기가 슬슬 느껴진다.
내 입가에서 문득 perished, glacial, frosty, frigid, cutting이라는 제법 수준 있는 영어단어들이 혀를 타고 또르르 움직이고 있었다.
모두 다 추위를 뜻하는 편입 영어 어휘들.
편입을 앞둔 나에게는 내 주위의 모든 사물들을 다 영어로 표현하는 습관이 저절로 생겨 버렸고, 나는 이 순간에도 그 습관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절박한 거겠지.
그리고 나를 절박하게 만든 사람이 무의식중에 내가 흘렸던 말들을 새겨 담았다.
“영어를 잘하시네요?”
“네. 잘합니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는지 지혁이가 살짝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럴 줄 알았다.
“제가 영어를 잘 하는 게 싫은가 보네요.”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아니면 『이 여자, 겸손의 미덕이란 건 엿 바꿔 먹었군.』 요리 생각하시던가!”
“하하, 제가 그럴 리가요!”
지혁이가 말은 그리 했지만 속마음은 잘난척한다고 여겼겠지.
다 보입니다.
“내가 겸손의 미덕을 발휘하기에는 상황이 그래요.”
“무슨 연유가 있으신지?”
“나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요. 넌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다. 잘 할 수 있다.”
“음...”
“기껏 힘들게 최면을 걸어놓고, 나 못하네, 그럴 수는 없잖아요. 자기를 배신하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아요.”
“영어에 목숨 거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어느 누군가에게 다가서는 유일한 통로니까.”
이 사람 눈을 오지게 쳐다보았다. 조금 당황스럽겠지.
“저.. 혹시 그 누군가가 누군지 알 수 있을까요?”
너라고 말은 못하지. 한발 뒤로 뺍시다.
“미국 할리우드 배우랑 사귀어 보는 게 제 꿈입니다.”
“음, 납득이 되는군요. 영어에 목숨 거는 게”
그와 보조를 맞추어 그의 차가 주자되어 있는 곳까지 천천히 걸었다.
주인의 신분과 품격을 상징하는 벤틀리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 차로 집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아서요. 술 취한 분과 같이 저승길 가고 싶지 않습니다.”
“음, 그럼 어쩔 수 없군요. 아까, 차로 병원까지 데려다 주어서 감사했습니다.”
“지혁씨가 알콜에 취한 상태였으니까요. 지금 꼭 대리 불러서 가세요.”
지혁이 의미모를 미소를 지었다. 마치 너나 잘하세요 그런 느낌.
“감사의 표시를 하고 싶어서, 한서씨의 전화번호를 알고 싶네요.”
씩 웃었다. 이 녀석이 한돌을 더 접촉하게 만들어야겠다.
“친오빠 것을 아시면 절 알게 될 겁니다.”
“그럼 연락하겠습니다. 제가.”
“뭐, 굳이 기다리진 않겠습니다. 제가.”
“다음에는 국밥 한 그릇으로 끝내지 않겠습니다. 제가.”
“여기서 언제까지 지혁씨 떠나길 기다려야 할까요? 제가.”
이 장난 재미있네.
“지금 연락했으니 대리기사가 곧 올 겁니다. 그때까지만 있어주시면..”
“안녕히 계세요.”
단호하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간다.
혼자 기다리십시오. 전 공사가 다망합니다.
등 뒤에서 그의 다급한 소리가 난다.
“오래 기다리게 하진 않겠습니다.”
누가 기다린데나? 자뻑이 심하군.
네 전화를 기다리는 사람은 내가 아니고 한돌입니다. 이성로서의 관심은 절대 사양이라구요. 네버.
그 뒤로, 한돌인 내게 지혁이가 전화를 했다.
역시, 예전과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 한서덕분이겠지.
헐, 역시 지혁을 찜쪄먹는 맛이 특별난 데.
그가 동생 전화번호 알려달라고 해서, 거들먹거렸다.
정보를 쉽게 알려줄 수는 없지.
나중에 한턱 크게 쏘는 댓가로, 자릿수 하나 틀리게 해서 알려주었다.
네가 내 뺨을 때린 것에 대한 소심한 복수다.
나중에 짜증내는 목소리 듣는 건, 뭐 별로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지만.
그 뒤 이한얼의 핸드폰으로 연락이 왔지만, 나는 그의 연락을 씹었다.
베팅에 판을 키우려면 때로는 베짱이 있어야지. 보아하니, 안달 난 쪽은 그쪽이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으면, 더 큰 보상을 안고 내게 다가오겠지. 그때를 천천히 기다리면 된다.
편입영어 시험 보는 날까지, 심지어 시험보는 전날까지 어김없이 난 낮에 쳐맞고 밤에 공부하는 생활을 지속했다.
사람이 집념과 신념을 갖고 공부하면, 더군다나 슈퍼두뇌가 장착된 대가리를 갖고 있다면 그 결과는 뻔할 것이다.
게다가 편입시험은 영어만 보는 것이라, 가뿐하게 부담없이 봤고, 가뿐하게 퍼펙트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
누군가 편입시험은 자기 몸에 깃든 찍신의 접신력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하는데, 나는 순전히 과학기술의 결정체로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 받을 수 없는 고득점을 얻었다.
그리고 난, 최초합으로 합격했다.
그토록 가고 싶었던 한국대를, 그리고 종철이와 지혁이가 있는 경영대를 들어갈 자격을 얻은 것이다.
붙으리라 예상을 하면서도, 막상 붙고 나니 눈물이 핑.
공부해야 할 시간동안, 헤프에게 존내 쳐맞고도 이 결과를 이룬 것에 대한 감상이겠지.
이 감격의 눈물은 헤프의 몫이다. 쓰불.
8월부터 12월까지 5개월간, 그 피나는 훈련으로부터 나는 많은 진척이 있었다.
라테카움을 이용하여 싸이킥 에너지를 뽑아내고 그 에너지를 쓰는 방법, 감마족이 살던 행성에서만 나오는 유동금속 라트를 통해 만든 무기들의 활용법, 그리고 실전같은 모의전투.
헤프는 훌륭한 과학자이면서도 동시에 무자비한 사부였다.
결전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보았는지, 그는 무섭게 독려했고, 나는 오기로 버티며 그걸 견뎌냈다.
이제 헤프가 새해부터는 자율훈련으로 돌린다고 하였다.
그 말은 즉, 더 이상 헤프에게 쳐맞는 일이 없다는 이야기지. 나 혼자 알아서 훈련하라는 말이겠고.
그럼 이제부터 자유시간이 늘었다.
그래봐야, 그 시간에 알바를 할테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대학생활을 시작하기 전, 난 한 가지를 결정해야 했다.
지혁이를 구워 삶으려면 어떤 이의 지원사격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 어떤 이는 내 머릿속에 한 명 있다.
바로 서종철, 내 죽마고우다.
중학교 시절, 그가 일진으로부터 두들겨 쳐 맞는 것을 구한 게 나다.
유서를 손에 쥐고 옥상에 올라는 걸 막은 것도 나다.
내 인생에서 딱 한 가지 착한 일이 있다면 그를 구한 것이고, 그는 그 뒤부터 나를 왕처럼 떠받들며 살았다.
그래서, 이 놈은 믿을 만하다. 절대 날 배신할 놈이 아니거든.
그래서 종철이한테 사실을 공유하고 도움을 요청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에게 한서와 이한얼을 소개해야지.
그리고 한서를 공개할 기회는 아주 자연스럽게 왔다.
무슨 알바를 해볼까 인터넷 사이트를 뒤지고 있는데, 확 눈에 띄는 알바 공지 하나.
이름하여, ‘코스프레 전시회 행사 알바 모집’.
조건은 오후 12시부터 밤 8시까지 근무. 장소는 일산 컨벤션 센터.
가장 중요한 일당이 메쿠(메이크업)와 의상은 본인이 직접 준비.
아, 돈에 환장하다 보니 잘못 봤다. 일당은 하루 세전 15-20만원. 토/일 중에서 하루만 근무하면 된다.
이 정도면 경쟁이 치열하겠지. 코스프레 사진, 사복사진 보내고, 기타 유관한 정보를 보내면 업체에서 선발하는 걸로.
이거 완전 꿀빠는 알바아닌가? 되기만 한다면.
해보지 뭐.
음, 문제는 의상 준비인데.. 퍼득이는 생각이 있어서 헤프한테 쪼르르 내려가 본다.
헤프는 거진 이집 지하의 연구실에서 혼자만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헤프박사님~”
“훈련이 필요해서 내려 온 것인가?”
“미쳐도 전 곱게 미칩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말하기가 좀 그런데.
“감마족이 동네 마실가면 주로 어떤 거 입어요?”
“뭣이?”
“거기도 아줌마들 몸빼 바지 같은 거 입을 거 아니에요?”
“몸빼? 그거 뭔가?”
아직 이 분은 현지화가 덜 됐군.
헤프 박사가 그의 눈에 낀 렌즈로 뭔가를 찾아보고 있는 듯 했다.
저걸, 메씨카움(특수전자렌즈)이라고 했던가?
“이..이걸 말하는 건가?”
생전 처음 들어본다. 헤프 박사의 저 당황한 말투.
근데 ‘이걸’은 뭘 말하는 거야?
“네. 그거요. 감마족 여자만 입을 수 있는 그런 옷 없어요?”
“감마족은 성별이 처음부터 구별되어 있지 않는다. 어느 시점에서, 스스로가 성별을 선택하고, 추후 황제의 추인을 받지.”
황제라는 새끼가 별 거 다한다.
그럼 감마족은 그거 할 때에도 "폐하, 섹스를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이 지랄을 떠나?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그럼 아무 옷이나 줘 봐요. 입고 다니는 천쪼가리 있을 거 아녀요.”
“우린 천쪼가리 입지 않는다.”
“엉? 그럼 헐벗고 다녀요?”
“라트 성분의 유동 금속을 걸치고 다니지.”
젠장. 금속을 어떻게 입어. 납중독에 걸리시겠다. 참. 감마족 옷이 안 된다고 하시면..
“혹시 옷 제작 가능해요?”
“옷?”
“헤프 박사님, 전지전능하시잖아요.”
“셀리카움으로 형상을 떠주는 건 어떠한가?”
도리도리. 그거 입고 8시간 후 뒈지라고?
“헤프 박사님은 옷 디자인도 가능하죠?”
헤프 박사가 한숨을 쉬더니, 내 손에 돈을 쥐어준다.
“가서 사. 여기서 이러지 말고.”
헤프는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는 전지전능의 신은 아니었다.
어쨌든 우연찮게 십만원 득템.
인터넷으로 겨울왕국 엘사 드레스를 구입했다.
달리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다.
그게 가장 싼 거라.
그럼 이제 메이크업은?
다시 지하 연구실로 쪼르르 내려간다.
어이없어 하는 헤프 박사가 말없이 내 손에 십 만원을 투여.
이 손에 쥔 십만원으로 미용실에서 풀메를 한번 해봐야 겠다.
이번 일로 내린 결론은, 외계인도 잘 이용해 먹으면 ATM머신기가 된다.
그래, 헤프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다. 전지전능한 돈줄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