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엘사를 영접할 때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엘사 드레스를 구입한 이후부터 좌절에 빠졌다.
이건, 드레스로만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무사히 드레스를 구입했다손 치더라도, 엘사 분장 하나에 그토록 많은 화장품이 필요한지는 예전에 몰랐다.
컨실러, 파운데이션, 쉐도우, 다이아몬드 파우더, 아이라인, 속눈썹, 뷰러, 마스카라, 브러쉬, 네일아트용 스톤,
그리고 전에는 듣도 보도 못했던 메이크업 도구들에 입을 다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간신히 일차 방정식을 푸는 초등학생에게 벡터나 미적분 문제가 주어졌을 때처럼,
화장을 해 본 적이 없는 나한테 엘사 화장법은 너무나도 까다로운 일이었다.
결국, 거의 밤을 새다시피 너튜브를 보고 하나씩 따라한 끝에, 용모를 엘사 비슷한 뇬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쓸데없는 오기와 집념으로 이룬 인간승리라 할 수 있겠다.
바로, 코스프레 사진을 찍어 보내서 업체에 보냈고, 얼마 안 있어 그 업체에서 연락이 왔다.
솔직히 화장 실력이 엉망인데, 누가 보더라도 짭엘사가 분명해 보였을 것이다.
다만, 그 업체에서 내 외모를 잘 봐주었던 것 같았다.
"이거 화장 두번 했다가는 내가 죽을 거 같아."
나는 더 이상의 엘사 화장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고, 행사 당일에는 미용실 언니에게 엘사 화장을 부탁하기로 하였다.
다시는 코스프레 따위는 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면서.
오늘은 코스프레 알바를 하면서 종철을 만나기로 한 날 새벽에, 집을 떠나기 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였다.
정말 간만에 화장대에 앉아 기초화장을 하면서, 오늘의 할 일을 입에 되새기고 있었다.
오늘은 그에게 중요한 진실을 알려줘야 하기에, 그를 만나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내가 혼자 끙끙대며 갖고 있는 진실을 그에게 알렸을 때, 그는 무슨 반응을 보일까?
화를 낼 것인지, 아니면 수긍할 것인지, 아니면 어쩌구니 없어 할 것인지.
모든 것이 예측할 수 없는 안개 상태에 있었다.
“휴, 될 대로 되겠지, 뭐. 날 죽이기나 하겠어?”
단발머리를 대충 매만지며, 바쁘게 집을 나선다.
일산까지 가는 길 1시간 반.
더군다나 미용실을 중간에 들려서 갈려면 훨씬 서둘러야 한다.
이한얼의 모습대로 외출을 하면, 가끔 치근덕 거리는 사람들이 있던데, 오늘 만큼은 가는 길에 신경 쓸 만한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
[종철의 시점]
돌이 이 자식이 코스프레 전시회에서 있었던 날에 대해서 나의 감상을 적어 달라고 부탁했다.
이게 2년전 일인데, 기억이 나야 말이지.
돌이가 자기 인생 자서전을 쓰는데 참고하겠다고 했으니까, 도와주기로 했다.
대신, 글의 질은 장담하지 말라고 했다. 대충 기억나는 거 아무거나 쓸 거니까.
돌이가 전화건 것이 수요일이었던가?
해외 축구 하이라이트를 보던 중, 돌이에게 전화가 왔다.
이 녀석은 카톡으로 대화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지. 궁상맞게 남자가 쪼그리고 앉아 뭘 보내는 게 우습다며, 주로 음성통화를 즐겨 한다.
“여보시오.”
<나다. 돌.>
“알고 있다.”
<잘 살지?>
“뭐, 그럭저럭”
정확하게 사내들의 대화패턴을 따르고 있다. 할 말이 많다는 건 일상생활을 깨는 변고가 생겼다는 것, 그건 별로 좋은 징조는 아니다.
<방학인데 뭐하냐?>
“알바. 과외도 하고. 이것저것.”
<이번 주 토요일날 보자.>
“왜? 토요일 좀 바쁜데.”
<내가 쏠게. 밥과 술>
사람이 갑자기 안하던 짓을 한다는 것, 이것도 별로 좋은 징조는 아니다.
“엉? 구두쇠께서 웬일로?”
<그냥 시간 비워놔.>
누구의 시간을 뺏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채워놓을 수 없기 때문에.
“나 남자랑 토요일날 안 만난다.”
<그럼, 여자를 만나라. 나!>
뚫린 게 다 입은 아니지.
“이게 씨방 미쳤나?”
<나를 여자로 상상하고 만나주면 안 되냐?>
어처구니 없는 상상을 강요하는 것도 폭력이다.
“얼씨구. 진짜 토하게 할래?”
<힛. 좋아. 진짜 여자 만나게 해줄게.>
가끔은 말도 안 되는 희망이 큰 힘이 되는 법이다.
“네가 아는 여자가 다 있어?”
<뭐, 생겼다. 여자. 하루아침에 펑.>
“오! 새끼쳐주는 것임?”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하지?
“이쁘냐?”
<우리 수준에 바랄 걸 바래야지. 걍 평타.>
반딧불이 없는 것은 가로등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다 바랄 수는 없기에.
“음 좋다. 뭐, 그럼 나가주지.”
<너 코스프레 알지?>
“그걸 모를 리가. 근데 왜?”
<너 만날 여자가 코스프레 알바하거든.>
“오호. 흥미로운데. 어디로 가면 돼?”
<일산 컨벤션 센터. 코스프레 전람회하니까 오후 6시즈음 와서 둘러봐.>
“그래 그럼 그때 보자고.”
<참, 난 한 시간 정도 늦을 거거든. 네가 가면 그 여자가 아는 척 해줄 테니까 너무 쫄지 말고.>
돌이가 여자를 소개시켜 주는 것은 역사상 처음이었다.
이 녀석은 지금까지 여자들에게 눈 한번 제대로 못 맞춘 놈이었다.
실제 소개시켜 준 적은 없었다.
어쨌든 나는 속는 셈치고 가보기로 하였다.
만날 그 분이 못생겨도 된다.
나는 돌이가 나의 이성문제를 처음으로 신경써주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기로 하였다.
벌써 기분이 가라앉고 있지만, 첫 술에 배부를 일은 별로 없다. 절대 기대안한다. 진짜로 그 분이 여자다운 형상만 하고 계시면 된다.
토요일 컨벤션 센터.
사람이 이외로 붐빈다.
아이들을 데려온 가족 동반 관람객도 많았고, 애니나 게임 덕후들도 여러 보였다.
정말 현실 속에서 볼 수 없는 코스튬을 입은 모델들이 많았다.
맨날 책상에서 공부만 했던 나에게 코스프레는 정말 신세계였다.
그리고 왜 이렇게 모델들이 이쁘고 다들 잘 생겼는지, 기대안했던 내 마음에 조심스럽게 기대감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그 자식이 코스프레 알바 하시는 분 소개시켜 준다고 하는데. 누구지?’
구체적으로 어떤 캐릭터를 담당하는 여자를 소개시켜주는 것인지 돌이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이러면, 모든 모델들을 다 만나봐야 하잖아.’
그래도 폐장 시간까지는 좀 시간이 남아 있어서 모든 모델을 다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일러 문도 본 거 같고, 삼국지 인물들도 다 본 거 같고, 건담 인물들도 본 거 같고, 쿠엔틴타란티노 감독의 킬빌 영화의 캐릭터도 본 거 같고.
얼추 대부분의 캐릭터를 다 보아 가는데도, 한돌 녀석은 나타나지 않았다. 카톡으로 메시지를 남겨도 소식은 없었고, 전화는 받지를 않았다.
점점 걱정이 들었다.
아무래도 난 바람맞은 것이 아닐까.
1시간은 걸어 다녔는데, 나를 아는 척 해주는 코스프레 모델들이 아무도 없었다.
다리도 아프고 짜증이 슬 밀려오려고하는 그때.
한 무리의 인파가 어떤 한 코스프레 모델을 둘러싸서 사진을 열심히 찍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모델은 머리에 금빛 가발을 쓰고 있었고, 에메랄드 빛깔이 영롱하게 수놓아져 있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겨울왕국의 엘사를 코스프레했군.
문득 그녀가 영화 속 엘사에 버금가는 미모를 지녔는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봤다. 그리고 감탄의 한숨.
제길, 드럽게 이쁘다.
내가 글발이 딸려서 달리 표현할 부사나 형용사가 없었다.
그냥 ‘드럽게’가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최고 한계치였을 뿐이었다.
그 드럽게 이쁜 모델 분께서 화사한 미소를 관객들에게 띄우며, 사진을 같이 찍어 주고 있었다.
저 아우라가 느껴지는 용모에서 나오는 미소가 많은 남정네들의 마음을 낚고 있는 거 같았다.
나도 같이 사진을 찍어 볼까 하다가,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저 모델도 이리저리 사람들한테 치일 텐데, 나마저 그들 틈에 끼게 된다면 저 모델의 오늘 하루가 더 고달플 것이다.
가던 길을 다시 되돌려 가는데, 짙은 향기가 내 손목을 잡았다.
“기다려요.”
고개를 돌려보니 엘사다. 이 여자, 사람들 앞에서 과감하게 내 손목을 잡았다.
이건, 나한테 역사적인 순간이다.
“가지 말고 잠깐만.”
“네?”
설마 한돌의 소개로 만나자고 했던 아가씨가 이 분인가?
“뒤돌아가는 발걸음이 쓸쓸해 보이시네요.”
“네?”
“사진 한번 같이 찍어요.”
“네?”
삼연타 ‘네?’. 내가 생각해도 병신 같았다.
나는 가려 하는데 대비 없이 엘사가 왔다.
그러니, 내가 무슨 준비해 둔 말이 있었을까?
눈에 그윽한 매력을 담고서 나를 보고 말하는데, 내가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녀의 눈가에 다이아몬드 빛 스톤이 흩뿌려져 있어서, 광채까지 빛났다.
엘사가 나를 끌어들여 그녀의 사진기로 어색한 나와 그녀를 찍었다.
“잘 나왔네요.”
“네? 하하. 네.”
“사진 보냈습니다. 확인해 보세요.”
진짜로 내 폰으로 카톡을 통해서 사진이 전송되었다. 난 엘사에게 내 폰 번호를 알려준 적은 없었다. 오늘 처음 본 여자인데 사진을 내게 보냈다면..
“혹시, 그럴 리는 없겠지만, 돌을 아세요?”
다짜고짜 추궁해 보았다.
“훗. 그를 모를 리가 없겠죠.”
그렇다면, 돌이가 소개시켜 주겠다는 사람은 바로 이 엘사였단 말인가?
“진짜, 그럴 리는 없겠지만, 님께서 오늘 만나실 분이 혹시..”
“제 눈앞에 계시잖아요.”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지금이 꿈이라면, 아무도 나를 깨우지 않았으면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