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5화 〉쥐약같은 그녀의 사업설명회 (15/68)



〈 15화 〉쥐약같은 그녀의 사업설명회

나는 지금 전람회 출구 앞에서 간질대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서성이고 있었다.
어느덧 밤 8시를 갓 넘기고 있는 시각, 코스프레 행사는 성황리에 잘 끝났다.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올 그녀를 기다리며, 왜 내게 이런 축복이 왕림하셨는지를 곰곰이 계산하고 있었다.

돌이가 최대심박수를 극한으로 뽑아내는 미녀를 소개시켜주는 것에는,
무엇인가 꿍꿍이가 있을 것이라는 제법 날카로운 분석을 해 보았다.
한돌, 좋은 건 자기가 다 차지하는 야망캐가 설마  여자를 순순히 내게 소개한다?
신세계, 영화 속에  배우의 대사가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이거 쥐약이다. 먹으면 아마도 다 뒈질거야. 그런데 시발, 나로서는 안 먹을 수가 없네.

대체,  몹쓸 대사가 왜 생각나는 것인지 모르겠다. 나한테는 그녀가 쥐약 같은 가스나인가?
골똘하게 생각 중인데, 내 어깨에 가벼운 두드림이 느껴진다.

“저기요!”

단발머리를 한 엘사이다.
에메랄드빛 드레스를 입었었던 모습과는 다르게, 수수하게 차려입은 지금의 모습이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흰  경량 패딩에 톤다운된 컬러의 흰 색 바지를 입어서 여전히 백색나라 공주의 사복 패션 같은 느낌이다.
다만, 그녀의 왼손에 쥐어진 배부른 쇼핑백이 현실  그녀가 평민임을 실감케 한다.
실제 공주가 있다면, 보디가드들이  쇼핑백을 들어 주겠지.
그리고 난 알아서 그 쇼핑백에 손이 간다.
내가 보디가드는 아니더라도, 머슴의 자격은 되니까.

“무거워 보이시는데, 제가 들어 드릴께요.”
“고맙습니다.”

하얀 이를 보이며 웃는다.
보통은 여자들이 손으로 입을 가리던 데, 이 여자는 그냥 자신의 구강구조를 보인다.

“오늘 돌이가 너무 늦네요.”
“오늘 그 친구, 안온다고 했어요.”

나한테는 연락을 안했는데?

“음. 이런. 돌이가 오늘 한턱 쏜다고 했는데?”

말해놓고 살짝 당황했다.
이러면 내가 쪼잔하게 보이지 않을는지?

“그럼 돌이 친구 분이 쏘세요.”
“네. 당연하죠.”

좀 전의 말실수를 만회하듯 힘차게 말했다.

“농담입니다. 알바비도 받았으니, 오늘 저녁은 내가 냅니다.”
“아, 아뇨. 소개팅으로 만난  만남인데, 제가 당연히 내야죠.”
“이 자리는 소개팅이 아니니까, 제가 낼께요.”

그녀가 소개팅이 아니라고 말하는 순간, 한숨이 나왔다.

“그럼 어떻게 아시고 오시게 된 건지?”
“소개팅 자리는 아니고 사업설명회라고나 할까요?”

이건 ‘도를 아세요’의 신종 버전인가?
사업설명회라고 하니 머리가 쭈빗 섰다.
혹시 다단계 판매의 세계로 발을 들어 놓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그럼 그렇지, 미녀가 공짜로 날 만날 리가 없었다.

“죄송한데, 전 안삽니다.”

그녀가 가는 걸음을 멈췄다.
의아하게 나를 쳐다보던 그녀가 무엇인가를 알았다는  빙그레 웃었다.
저리 웃으면 내가 버틸 재간이 없는데.

“종철씨가 생각하는 그런 자리 아닙니다.”
“제 이름을 아시네요?”
“돌이에게 들었으니까요. 참, 제 이름은 이한얼입니다.”

이.한.얼?
전혀 지금의 모습과 연상되지 않는 이름이다.
이름만 보면, 광활한 만주벌판에서 독립운동하고 계셔야 될  같았다.

“이름이  독특하시네요.”
“지구에서 독립운동 중인 할배가 지어준 이름이네요.”
“네?”
“그냥 그렇다구요. 배고프네요. 순대국밥 땡기러 갑시다.”

이 여자, 조금 이상한 거 같기도 하다.
사고구조가 좀 독특할 거 같은 그런 아가씨이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할배 순대국밥집이었다.
저녁식사 시간을 훨씬 지나서인지, 손님은 다른 테이블에 하나, 그리고 딱 우리만 있을 뿐이었다.
다른 테이블에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는 젊은 장정 셋이 자꾸 우리 쪽을 훔쳐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내 맞은편에서 복스럽게 식사를 하고 계시는  아가씨를 감탄어린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여자는 전혀 남의 시선에 개의치 않은 듯싶었다.
거침없이 먹고, 거침없이 말한다.
그렇게 우리 둘은 순식간에 국밥을 비웠다.
이 여자가 말하길, 돌은 일이 있어서 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아마도, 소개팅을 주선하는 입장에서  자리에 빠져준 것 같았다.
역시, 상황판단이 빠르고 머리가 좋은 녀석이다. 그를 칭찬하는 마음을 가득 담아 카톡을 보내었다.

[종처리: 대박. 내게도 이런 날이. 고맙다.]
[종처리: 근데 혹시  여자 성격씹창임?]
[종처리: 말투도 좀 이상한  같기도 하고.]

“손이 바쁘시네요?”

내가 카톡하는 걸 지켜본 모양이다.

“아, 네. 돌한테 보낼  있어서. 실례했습니다.”

그녀가 잠시 자신의 폰을 확인하더니,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 듯 했다.
그리고는 입가에 한 가닥 짓궂은 미소를 보인다.

“연애를 못 해본 티를 내는 거야? 뭐야?”
“네?”
“성격씹창 좋아하네.”

이 여자가 사람을 당황하게 한다.
갑자기 이 여자의 말이 짧아지며 분위기가 순식간에 변한다. 뭐지?

“저, 제가 한얼씨한테 뭐   한 거라도?”
“밥을 다 먹었으면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말이 좀 짧아지셨군요.”

이 여자가 뭘 잘못 먹었나?

“응. 불알친구한테 존댓말을  수는 없잖아.”
“자꾸 그렇게 나가시면, 그럼 나도 이제부터 반말 씁니다만?”
“너 이미 쓰고 있거든, 반말.”

그녀가 나와 돌 사이에 오고 갔던 대화창을 그녀의 폰으로 보여주었다.
아마 그 것을 바라보는  표정에는 경악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싶었다.

“요게 어찌된 일이오?”

갑자기 나와 버린 나의 사극 톤 말투에 그녀가 으름장 놓듯 짧고 굻게 말한다.

“새꺄,  한돌이다.”
“뭐라구...?”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

“잘 들어.  한돌이라고. 믿기지는 않겠지만 믿어.”
“...............”

한돌이라 주장하는 이 여자.
내가 의심하는 눈초리로 눈알을 부라리며 그녀를 쳐다보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는 곧, 우리  만이 알 수 있는 비밀스러운 추억을 담담히 이야기하였다.
정확하게 맞는다.
일자, 시간, 장소 모두를 빠짐없이 바르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도,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을 믿는 것에는 시간과 확인이 필요하였다.

“당신이 한돌이라는 건.. 물론, 당신이 하는 이야기는 다 맞아. 맞긴 한데 도저히 내가 납득이 안가..요.”
“네가 스스로 믿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러나 믿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주지.”

그녀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이 식당에는 우리  밖에 없었다.
저쪽 자리에 앉아 있었던 장정 셋은 아쉬운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며 식당을 나선지 오래였다.

그녀의 입에서 외계어 같은 주문이 외워지자, 그녀의 목 부위에서 반짝이는 빛이 세 갈래로 생겨나더니,
그녀의 머리를 순식간에 덮어 버렸다.
그리고 생겨난 익숙한 얼굴은 바로 그의 죽마고우, 한돌이었다.
머리는 남자, 몸통은 여자인  시각적 불균형 속에서, 나의 의심은 턱없이 무너져 버렸다.

“너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야? 대체?”

금세 미녀의 모습으로 돌아온 한돌이 무심하게 내 질문을 받았다.

“기가 막힌 일이 일어났던 거지. 누구도 믿을 수 없는.”

한돌은 내게 그 간의 모든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외계인 헤프를 만나서 지금의 여체로 두뇌이식을 당하였고, 삼단변신이 가능하며,
이제 곧 한국대학교 경영학과에 편입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까지 모두 털어놓았다.
식당 주인의 눈치를 보며 추가로 시켰던, 소주와 안주인 순대가 눈앞에 있었지만,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다.
한돌은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데 정신이 없었고, 나는 그 진실을 받아들이기에 너무 여유가 없었다.

“너,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살 거고?”
“지금 모습대로 살아야지. 잘.”
“지금까지 남자로서 산 삶을 쉽게 포기할 수 있어?”
“남자의 삶은 포기했지만,  꿈은 포기하지 않았거든.”

불길하게 들리는 그의 표현들.
그를 지탱할 수 있는 두 가지 중 하나는 하릴 없이 사라졌고, 다른 하나만을 힘겹게 쥐고 있는 느낌이다.
아니면, 자신을 붙잡기 위한 스스로에 대한 주문이던가.
문득, 묻고 싶은 게 있다.

“왜 오늘, 나한테 이 사실을 털어놓는 거지?”
“왜 오늘을 알고 싶은 거야? 아님 왜 한필 너인가를 알고 싶은 거야?”
“둘 다.”

여태껏 소주잔만 만지작 거렸던 그녀가 고개를 뒤로 돌려 잔을 마셨다.
그녀의 목을 타고 흐르는 곡선위의 하얀 솜털이, 아침에 눈을 뜨면 보이는 햇살에 반짝이는 하얀 먼지와 같았다.
나한테 그렇게 보인다.

“내가 관심 있는 사람이 있어. 반드시 잡아야 할 사람.”

그녀의 눈빛이 이전에  수 없었던 강렬함으로 채워졌다.
그 눈빛을 보며 난 그 사람의 존재를 유추해 보려고 했다.
그리고 그 인물을 입 밖에 꺼내었다.

“혹시 SH그룹의 박지혁?”
“빙고.”
“진짜로?”
“후후.. 말 그대로 올.인. 모든 것을 걸려고. 새로 생긴  능력까지 몽땅 건다.”

 자식이 야망캐이긴 한데 이 정도로까지 머리가 돌은 녀석이 아닌데..

“너, 미친 새끼!”
“SH 그룹의 가족관계, 그룹 경영구조, 투자지분. 주주성향, 경영실적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어. 그리고 박지혁에 대한 것도.”

이 친구가  무서워진다.

“이게 네가 말한 꿈이었던 거냐?”
“이미 한번 죽은 인생, 못할 것이 뭐 있어? 수렴청정 정도는 해 봐야지.”
“제 정신이 아니구나.”
“난 이번에 정말로 깨달았어. 재벌2세란 새끼들, 까놓고 보면 별거 아닌 년놈들이라는 거.
그렇게 우릴 바퀴벌레 보듯 하는 지혁이라는 그 새끼, 별  아닌 이유로 뺨이나 갈기는 그 새끼도 얼굴 반반하단 이유로 나한테 껄떡대잖아.
이건 분명히 되는 게임이라고.”

야망으로 불타오르는 저 여자의 모습이 매우 낯설다.
하긴, 오늘 처음 본 얼굴이지만, 이 여자의 껍데기에 감춰져 있는 한돌의 모습 또한 낯설다.

“그런데, 이 미친 도박이 성공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 누군지는 알겠지?”
“그래서 오늘 만나자고 한 거니?”
“날 좀 도와줘. 나의 유일한 내 편으로써.”

소주  잔을 입에 부어 넣었다.
밑에서부터 끌어 오르는 원인 모를 분노가  머리까지 치달아 오르고 있었다.
술잔에 소주를 다시 붓는다.

“난 곧 한국대학교 이한얼로 편입해. 그리고 많은 시간을 그와 보내게 될거야. 네가 중간에서 다리를 놔준다면.
아니 내가 하는 일을 이해만 해준다면 널 재벌 부럽지 않게 만들어 줄게.”
“야! 이 쥐약같은 새끼야~”

드디어 돌아버린 나는 극도로 흥분한 채, 술잔에 채운 술을 그녀의 머리에 끼얹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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