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7화 〉최악의 시나리오 (17/68)



〈 17화 〉최악의 시나리오

남자가 여자로 변하는 소설을 보면 생리에 적응하지 못하는 주인공이 당황해 하는 에피소드가 꽤나 나온다지?
솔직히, 난  당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여자가 된다?
그럼 당연히 여자들이 겪는 대표적인 관문이 생리인 것은 다 알 것이고,
인터넷을 치기만 하면 생리의 정의부터 각종 케이스까지 어마어마한 데이터가 나오는데,
트랜스젠더된 주인공이 생리를 낯설어 한다는 게 좀 말이 안 된다고나 할까?
주인공이 기본 상식이 있고, 자판을 칠 손가락만 있다면, 그 당황함은 나올 필요가 없는 것들이다.
보통 당황이라는 건 준비되지 않는 자의 게으름일 뿐.

나는 쓸데없는 당황을 피하기 위하여 여자라면 겪어야  것들을 잘 준비해두었다.
대형부터 울트라슬림, 팬티라이너까지 각각의 쓰임새와 사용 시기 등은 다 머릿속에 넣어 두고  써오고 있다.
그럼에도, 나를 당황케 하는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생리가 매우 불규칙하다는 것.
나를 괴롭히는 건 생리 그 자체가 아닌, 생리의 불규칙한 주기였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인 것인데, 그 변수가 오늘도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이건, 너무 빨라.”

아침에 일어나 이불에 묻은 핏자국을 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어제 배가 슬 아팠던 것은 단순히 술이 몸에 맞지 않아서였다고 잘못 판단했다가, 결국 그 보답을 받은 것이지.

“빨아야지, 뭐.”

피 묻은 속옷과 이불을 번갈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시각은 오전 10시.
막 화장실에서 일을 처리하는 그 때 종철이에게 전화가 왔다.
어떻게 이 녀석과 다시 연락할까 고민했던 밤사이의 시간이 무색할 만큼 이 녀석은 일어나자 마자 냉큼 전화를 한 것이다.
이 전화를 받아야 겠지..

“아침부터 일찍 왜?”

최대한 아무렇지 않는  받고.

<뭐하냐?>

상대도 아무렇지 않는 듯 안부를 묻는다. 이외다.

“생리대 간다.”

그냥 미동도 없이 담담하게 내가 하고 있는 일을 깐다.
전혀 창피할 일이 아니니까.

<웅?>
“애써, 놀란 척 하지 마라.”
<그..그래? 어. 진짜 너 여자 맞구나.>
“네가 생각하는 여자는 아닌데, 생물학적으로 완벽히 남자는 아냐.”
<흐흐. 네가 어제 일은  뻥이야 할까봐 걱정했거든. 네가 여자라서 다행이다.>

하등 도움이 안 되는 말들.

“왜 전화했냐고?”
<네가 그리 물어 볼 처지는 아닐 거 같은데? 내가 전화해 준 게 고마운 거 아닐까?>
“내가 고마워야  이유가 뭔데?”
<어처구니 없는 부탁을 하고, 내 면상에 펀치를 날리며, 더군다나 돈도 안내고 토낀 자식을 안쓰러워서 전화했다. 내가. 이게 말이 되냐?>
“미안하다.”
<........>

이 녀석, 나한테서 어떤 지랄을 기대한 거 같은데, 그 기대가 꺾이니 말을 못한다.
미안한 건 사실이니.

“생각해 보니, 내가 어제 너한테 그렇게 하는  아니었어.”
<맞아.  내게 팔짱끼며 오빠앙~ 하면서 다가섰어야지. 애교있게.>
“오빠~ 제발  좀 도와줘.”
<.........>

또 종철이가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듯 말을 못한다.

“친구로서 부탁할게. 너밖에 나를 이해해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어제 내게  부탁은 진심이었군.>
“내 진심을 전달하려고  진실을 너한테 깐거야. 누구도 아닌 너에게만.”
<꼭 그렇게  형에게 접근해야 해?>
“한번즈음은 인생에서 큰 베팅을 해 보고 싶어서.”
<이건  위험해 보이는데. 자신있어?>
“나는 평범하게  적이 없었어. 평범하게라도 살았다면 그럭저럭 살았겠지.”

평범하게라도 살고 싶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이 되기 위한 나의 굳은 행보에 많은 좌절이 있었더랬지.
과거의 추억은 나한테 미화되기 어려운, 무거운 시간들일 뿐이었고.
항상 개소리를 입에 달고 다닌 것은 그 무거운 늪에서 스스로를 건져 내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었다.

지금과 같이, 평범 보다 못한 삶을 계속 연명하는 건 무의미하다.
그럼  가지 남은 것은, 평범한 사람도 안 될 바에야 비범한 인생을 사는 것이지.
그러기 위해서는 남은 운을 모두 모아다가 투기를 해 보는 것. 그 것 밖에는 없어 보인다.

“지금처럼 사는 건 자신이 없어, 종철아.”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이건 리스크가   투자이지만.. 그래, 지금  투자를 안 하고서는 언제 해보겠나?>
“그럼?”
<오케이.  뜻은 접수. 단, 어제 나한테 그따위 짓 한 거는 쉽게 용서가 안 돼. 그래서 말인데..>
“뭔데?”
<나랑 일주일에 한번은 데이트 좀 하자. 나도 이 기회에 존예랑 다니고 싶다고.>
“... 쳐돌았냐?”
<설마, 이정도 댓가도 없이 내게 부탁한 건 아니겠지?>

이걸 노렸군. 이 녀석이. 저 녀석도 역시 경영대 마인드가 있다는  지금 깨달았다.

“여기서 내가 『미친 새꺄 개소리 집어쳐』 그러면, 네 협조는 없는 거겠지?”
<잘 아네. 그리고, 한 가지 더,  바지와 생얼 싫다. 데이트 때 신경써라.>
“.......”
<그럼 안녕. 조만간 연락할께. 하하하하>

전화를 끊었다.
아무래도 내가 생각이 짧았던 것 같았다.
섣불리 이 녀석에게 비밀을 보여주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 종철이에게 뭔가 중요한 패를 넘겨줘 버렸다.
뭐, 까짓 데이트해주는 거야, 꿈에 대한 투자로서는 그리  비용이 드는 것도 아니니까, 일단은 해준다.
일단은.

그 날 내내 생리 탓인지 몸이 뻐근하고 안 좋았던 관계로 집에서 머물렀다.
헤프 박사는 무엇인가를 연구하고 있어서 인지 내내 지하실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아,
결국 나 혼자만 이 넓은 집에 머물고 있는 셈이었다.
사실 집에 있는다고 한가한 것은 아니다.
곧 개강을 맞이하여 인터넷으로 사야  것들도 있었고, 처분해야  것도 있었다.
그리고 누구 때문에 의도치 않는 원피스를 구입할 때는  숨 쉬고 있었고.

“미쳤군. 내가. 이걸 내 돈 들여 사고 있다니.”

싸구려 원피스를 아무 생각 없이 구입한 다음,
예전 용산전자상가 업체에서  달 일한 댓가로 가져온 지포스 RTX 3070 그래픽 카드를 적절한 값에 처분한다고 중고나라에 올리기도 하였다.
사실 그 그래픽 카드를 내 컴퓨터에 끼워 쓸까도 생각했지만,
헤프가 준 컴퓨터는 지구의 어떤 슈퍼컴퓨터보다도 성능이 우수하여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정말로, 헤프가 준 컴퓨터는 대단했다.
헤프가 승인을 해준다면, 각종 보안시스템에 칩입하여 감쪽같이 해킹이 가능했으며,
데이터용량과 접속속도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지경이었다.
특히, 컴퓨터 사용자의 니즈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전문가의 피드백보다 더 높은 수준의 컨설팅을 제시하는 AI 자가 분석 시스템은 지구의  기술력보다 몇 수 앞서가는 과학기술의 정수였던 것이다.

나는 이것을 이용하여 SH그룹의 각종 정보를 탐색할 수 있었고, 지금은 1시부터 시작되는 수강신청에 사용하고자 한다.
남들은 수강신청도 전쟁이라고 하지만, 나는 다른 의미에서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지.
박지혁의 수강신청 내역을 정확하게 파악한 후, 나도 가급적 박지혁과 같은 과목을 신청하고자 하는 것이다.

―찌이익~

이한얼의 폰으로부터 울리는 진동소리. 폰을 확인해 보니, 발신인이 박지혁이다. 한 달 만에 오는 전화인가?
한달 전에는 자주 한서를 찾는 전화를 했었는데, 내가 받지를 않으니 포기한 줄 알았다.
그럼, 지금도 받지 않을련다.

 앞에서 한서의 등장은 가급적 꺼려지는 것이 사실이다.
즉흥적으로 한돌의 쌍둥이동생이라고 했지만, 결국은 드러날 거짓말일 것이고.
나중에 정말 필요할 때, 그때 정체를 드러낼 계획이다. 지금은 전과 같이 깔끔히 무시하리라.
이번에는 한돌의 폰으로 전화가 온다.
오늘, 이 형 끈질기네. 목소리 변조기를 킨다.

“지혁이 형님 잘 지내셨습니까?”
<한서는?>
다짜고짜 가짜 여동생을 찾는다. 근데 목소리가 꽤 차갑네?
“지금 없는데요?”
<후후후...>

싸늘한 웃음 소리. 뭔가 예감이 이상하다.

<한돌, 넌 내가 우스워 보이냐? 오냐 오냐 하니까 내가 만만해?>
“네? 무슨 그리 섭한 말씀을?”
<가증스러운 새끼..>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아 있다. 이거  나겠군. 심상치가 않다.

<나 지금 너의  근처에 있다.>
“넷?? 우리 집을 어떻게 아시고?”
<너의 집에 쳐들어 갈 수도 있어. 장난질 하지 말고, 한서 오라고해.>
“사..사실, 한서가 어제 밤을 새서 지금까지 잠을 자고 있어서..”

다..당황하면 안된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연스럽게 말을 해야 한다.

<아니면, 너도 한서랑 같이 오던가. 아, 그게 낫겠군.>

이녀석,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
무엇인가를 확인해 보려고 전화한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든다. 이것을 어쩐다?
이 위기를 타개할 묘수를 생각해 내야  것 같군.


“형님, 그럼 한서만 보내겠습니다. 제가 가봐야 형님한테 뺨밖에 더 맞겠습니까?”
<아니, 생각 바뀌었어. 같이 와. 너희  근처 커피숖 ‘하루의 휴식’으로.>
제길,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네. 내 머리 속에는 이미 최악의 시나리오가 가동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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