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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화 〉저는 이한얼입니다 (18/68)



〈 18화 〉저는 이한얼입니다

동네의 조그만 카페치고는 손님이 제법 들어차 있는 ‘하루의 휴식’ 안에,
멋들어진 패션으로 테이블 의자에 앉아 있는 한 청년이 있었다.
아직 추운 겨울의 자취가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얇아 보이는 쥐색 세미슈트 하나로 온 몸에  들어맞는 터틀넥 레이어드 긴팔 티셔츠를 감싼 모습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그의 옷차림에서 부잣집 도련님의 어떤 부유함이 느껴졌다면,
반대로 그의 표정에는 유독 빈약한 여유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한껏 찡그리고 있는 짙은 눈썹과 날카로운 콧날이,
그가 입고 있는 티셔츠에 유려하게 새겨진 ‘be sharp’라는 캘리그라피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톡.톡.톡

지혁은 턱을 괸 채로, 손가락 끝에 힘을 주고 탁자를 여러 번 두드리고 있었다.
두드리는 소리가 너무 컸던 탓인지  테이블에 앉아있던 젊은 아가씨가 잔뜩 인상을 찡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지혁은 그 여자의 불만 어린 시선을 무심하게 받아 넘길 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 앞에 놓였던 커피가 차갑게 식혀질 무렵, 카페의 문이 소심하게 열렸다.

화장기 하나 없는 단발의 20대 초반의 젊은 여자가 들어왔다.
 색 경량 패딩에 빛바랜 청바지를 대충 입고 온 여자.
그리고 그 복장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미모를 지닌 여자.
지혁은 자기도 모르게 절제해야 할 웃음이 입가에 머물렀다.

그리곤 다시  웃음을 지웠다.
지혁과 눈이 마주친 여자는 다소 긴장된 모습으로 그가 앉은 곳으로 다가갔다.
지혁의 코로 스며드는 체리향의 냄새. 평소 같으면 황홀할 향기였겠지만, 지금은 묘한 긴장감의 냄새로 그에게 다가온다.

“오랜만이네요. 지혁씨.”
“누구 때문에 오래간만에 보지.”

지혁이 차가운 반말을 그녀에게 선사했다.

“그래서 직접 여기까지 왕림하셨군요.”
“난, 상대가 내 머리 위에서 말하는 건 질색이야. 자리에 앉아.”

지혁이 눈짓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잠시 멍하게 지혁을 바라보던 그녀가 자리에 앉았다.

“잘 지냈어요?”

피식. 지혁이의 이죽거림이 유달리 거슬렸다.

“잘 지냈을 거 같아?”
“왜 그걸 저한테 물으세요?”

순순히 굽히고 들어가지 않겠다는 그녀의 의지에 지혁은 반가우면서도, 한쪽 이마를 찡그렸다.

“지혁씨 혀는 이제 상대를 가리지 않는군요. 저한테도 말이 짧으신  보면.”

이전 한서와의 만남에서는 존댓말을 꼬박하던 지혁이었다.

“네 까짓 게 뭐라고..”

그의 중얼거림에 표정이 어두워지는 한서.

“오빠랑 같이 오라고 했을 텐데?”
“댁이 무례하게 오라마라 할 입장은 아니거든요.”
“그 얍삽한 새끼가 내말을 무시했군.”

그녀가 눈에 쌍심지를 켰다.

“지혁씨, 싸움 잘해요?”
“뭐라고?”
“제 친오빠, 타고난 쌈꾼입니다. 무시당하면, 지 성질 못 참고 주먹 휘두르거든요. 그래서 저만 온 거예요. 사고날까봐.”

피식.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하는 지혁이 냉기를 담는다.

“같잖네. 없이 사는 놈의 쓸데없는 자존심.”
“뭐야?”

한서가 발끈하며 자리에 일어섰다.

“한번 해보라고 하지.  얼굴에 한방 먹이는 순간, 그 녀석의 인생은 골로 가는 거야.”

한서의 성난 눈매가 독하게 그를 향했다. 그가 그 시선을 응대하며, 또박또박 말한다.

“네 오빠와 너! 내가 누군지 알잖아.”

그가 쏘아 붙이는 말 한마디의 의미가 한서에게 날카롭게 다가왔다.
한서의 꽉 쥔 주먹이 흔들렀다.

“같잖네요. 있게 사는 놈의 알량한 자존심.”
“내 머리위에서 말하지 말라고 했다. 앉아!”
“명령하지 마. 네가 뭔데?”

제법 목소리가 컸는지, 그 카페에 있었던 모든 손님들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지혁은 어이가 없는 듯 실없이 웃었다.
지혁은 주먹을 쥐고 있는 그녀의 하얀 손에 시선을 돌렸다.

“어차하면 그 주먹에 내가 맞는 건가? 성깔 더러운  그 놈이 아니라 너인 듯 싶은데?”

그녀가 한숨을 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누구말대로 인생 종치는 일,   거야.”
“반말을 하겠다?”
“존대할 만한 가치가 없으니까.”

한서는 그에게 굽힐 생각이 없었다.
범은 꼬리를 내리고 도망치는 적에게 더 가차 없다.
범이 싫어하는 것은 달려드는 적의 투지가 아니라, 도망가는 적의 비겁함이다.
지혁은 분명 범의 습성을 지닌 인간이었다.
 그래야만 한다고 한서는 생각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나를 괴롭히는 이유가 뭐야?”
“괴롭힌다? 내가 너를?”

한서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그녀가 추정하는 그의 분노의 원인을 입에 담았다.

“혹시 친오빠와 나의 관계 때문에?”
“끝까지 친오빠라 하는군.”

지혁이가 갑자기 자신의 얼굴을 그녀의 턱밑까지 내밀었다.

“이런 무례한 짓을!”
“한서는 참 아름다운 여자야. 한번 보면 잊혀 지기 어려운 존재라고 할 수 있어.”
“..........”
“그런데, 네 오빠 한돌은 굴러다니는 돌 마냥 흔해 빠지게 생겼거든. 못생기고, 교활하고, 입만 나불대는 놈이지.”
“박지혁,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그녀는 이글거리며 바라 보는 그의 시선을 그대로 마주보았다.

“돌과 너의 관계. 솔직하게 말해봐.”
“남매지간인 걸 어떻게 더 말해?”
“후후후.. 끝까지 잡아 떼는 군. 알고 보니 한돌은 천애고아였어. 형제자매 없이 보육원에서 자란 놈인데, 여동생이 있을 턱이 없잖아?”
“박지혁, 너, 치사하게 우리 뒷조사를 하고 다닌 거야?”

이한얼은 지혁을 쬐려보고 있었다.

“누군가 나를 속이는 거, 난 절대 가만두지 않거든. 설사 상대가 너 같은 미인이라도, 참지 않아. 이제 불어보시지.”
“만약 돌이와 나 사이가 친남매가 아니라면 어떻게 할 건데?”
“너희 둘,  나라에서 살기 어려워지게 될 거야. 둘이 작당하고 날 털어먹을 심산이었다면, 그 마음먹은  평생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어.”

그녀는 한숨을 쉬웠다.

―결국 내 예상이 맞았구나. 지혁이 한돌과 한서 사이를 의심하는 거.

“박지혁, 네가 틀렸다면 어떻게 할 건데?”
“글쎄.. 돌과 네가 친남매라는 걸 증명할 수 있을까?”
“만약 우리가 남매사이가 맞다면, 내 소원 한 가지를 들어 줘.”
“자신 있는 건가?”
“내가 패를 쥐고 있는데, 자신 없을 리가 없지.”

박지혁의 눈빛이 반짝인다.

“우선 밝힐  있어.  한서가 아니야. 이한얼이지.”

박지혁이 의외라는 듯 입을 벌렸다.

“너.. 네가 이한얼이라고?”
“네가 편의점에서 만났다던 그 여자, 내 친구라고 했던 여자, 모두 나와 동일인이야.”

그녀는 자신의 주민등록증을 그 앞에 내밀었다.
박지혁이 그 주민등록증에 적힌 이름과 얼굴을 대조해 보고는 더 냉혹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 보았다.

“이름마저 속이다니.. 너.”
“이름마저 속여야 할 피치 못할 속사정도 있는 거야! 끝까지 들어.”

그리고는  앞에 서류 하나를 그의 앞으로 던졌다.

“유전자 검사 확인서. 한돌과 내가 남매라는 것을 밝혀주는.”

박지혁은 자기 앞에 던져진 서류를 꼼꼼히 읽어 보았다.
그 서류에는 ‘한돌과 이한얼은 부계나 모계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인자가 거의 동일함을 알려드립니다.’는 글귀가 써져 있었다.
박지혁은 다시 그 서류 일체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어떠한 조작의 흔적도 없어 보이는 깨끗한 서류였다.

“내가 왜, 당신 앞에서 이 짓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렇지 않으면 당신이 정말 우리를 해코지  거 같아서 알려주는 거야.”

박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녀의 입에서 나올 이야기를 주시했다.

“오빠와 난 어렸을 적 헤어져서 각기 다른 보육원에서 자랐어.   좋게 입양되었다가 파양되었고, 그 뒤로 오빠를 찾고자 십수년을 노력했으니까.”

그녀의 입에서 잘 짜여진 하나의 각본이 술술 나오고 있었다.

“어쩌다가 운이 좋아서, 오빠를 볼 수 있었고  검사를 통해서 친오빠임을 확인하고 만나서 같이 살 수 있었던 거야.
오빠는 여전히 한씨지만, 내 지금 성씨에는 생각하기 싫은 과거가 있는 거라고. 그래서 공식적으로 우리는 성이 달라.”

박지혁의 얼굴에는 다양한 감정이 교차하여 흘러갔다.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한얼이 목소리 톤을 바꾸어 말했다.

“지혁씨는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죠?”
“.............”
“많은 것이 없는 저한테는 제가 갖고 있는 이 아름다운 외모도 상처가 되요.
많은 벌들을 불러들이는 강한 향의 장미같은 거. 지혁씨가 나에 대해 가졌던  호기심, 그건 너무나 익숙한 거죠, 저한테.
사람들이 항상 지혁씨와 같은 호기심으로 날 바라보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호기심에서 그치지 않죠.
만지려고 하고 경험해 보려고 하고, 결국은 꺾어 버리려고들 하니까.
그거 알아요? 사람이 가진  없으면, 심지어  몸뚱아리 하나도 제게 아닌 게 되어버리는 것을.
딴 세상의 지혁씨는 평생 경험 못하고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일 겁니다.”

그녀의 목소리에 살짝 습기가 묻어 있었다. 박지혁은 그녀의 습기에 자신의 마음이 동함을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안전하게 잘 살아 오고 있어요. 내가 머리가 좋거든요.”

박지혁의 얼굴에서 차츰 냉기의 기운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따스한 온기가 차츰 그의 얼굴을 채우고 있었다.

“머리가 좋다?”
“전 스스로 장미의 향기를 없앴죠. 그때 당신이 편의점에서 처음 만난 이한얼처럼.”
“그래서 그렇게 일부러 못나게 하고 다닌 건가?”
“제 나름 살아가는 방식인 겁니다.”

지혁은 꿋꿋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한얼을 감탄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유전자 검사 확인서를 봤을  자신의 마음에 풍만했던 안도감을 되새기고 있었다.

"쉽게 믿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믿지 않을 수도 없군."
"맘대로 생각하세요. 제 이야기는 이게 다니까."

한얼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혁이의 머리 위로 그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다시 인사하죠. 전 한돌의 친동생이며 한국대 경영학과 입학할 이한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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