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9화 〉개강 첫 날 (19/68)



〈 19화 〉개강 첫 날

―하아~~

정말 힘든 하루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바로 침대로 달려가 그냥 쓰러져 버렸다.
등에서는 땀이, 밑에서는 피가, 위에서는 열이 나고 있었다.

지혁과 대화를 하면서, 정말이지 칼끝을 걷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를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한마디 한마디가 나의 목숨줄을 쥐고 흔드는 상황.
머릿속에 온갖 상황을 그려놓고, 때로는 즙 짜는 연기까지 하면서, 지혁의 눈치와 기분을 치열하게 봐야만 했다.

집을 나가기 전까지, 지혁이가 무엇 때문에 우리 집 근처까지 찾아왔는지 그 이유를 치열하게 고민했고,
결국  고민은 통했다.
한돌과 한서와의 관계에 대한 의심, 그리고 유전자 검사 확인서.
나중에 한돌과 이한얼의 관계를 밝히는 증빙자료로 혹시나 해서, 갖고 있었던 자료를 여기서 바로 쓰게 될 줄은 몰랐다.
헤프 박사의 과학적 기술로 교묘하게 만든 자료라서, 상대방이 완벽하게 속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내가 이한얼임을 확실히 밝히고 나서, 지혁은 예의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장난스럽고 개구진 모습으로.  변화가 너무 드라마틱하여 믿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근데  자식이 그렇게 나올 줄이야.”

나는 힘없이 중얼거리며 그가 했던 말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네가 원하는 소원은 날 설계하고 싶은 거지?”
“설마,『애인이 되어주세요.』이런  아닐 테고.”
“나를 설계하고 싶으면, 어디 한 번 해봐!”
“내가 황금 동아줄일지 썩은 동아줄인지 확인해 보라고.”
“너의 능력에 따라, 날 줄 수도 있어.”

그는 이미 나의 생각과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마지막 표현은 음, 소름끼쳤다.
박지혁 자신을 나한테 바친다는 거, 자신을 노예로 부려 먹어도 좋다는 이야기인가?
그가 가진 권력과 부를 준다는 이야기인가? 아니면 말 그대로 '호빠 포주가 되시오' 이건가?
얘는 사람을 되게 헛갈리게 만드는 언어 사용법을 가지고 있다.
나한테 남자새끼는 필요 없는데.
줄려면 너 말고 SH그룹을 줘야지.

근데, 박지혁, 생각보다 재미있는 놈이다.
그의 제안과 말들이 가슴 가득 승부욕을 불타오르게 한다.
그래, 상대는 판을 깔아 준 것이다.
가슴에 감췄던 모든 카드를 다 꺼내놓고, 투기장에 올라가 같이 싸우자는 이야기겠지.
그럼 그 판에서 칼춤이라도 추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칼춤은 생각보다 격렬할 것이고, 나의 목숨을  수도 있을 것이다.
 칼춤의 대상은 박지혁일 수도 있고, 박광혁일 수도 있고, 변종외계인일 수도 있고, 바로 나 자신일 수도 있을 것.
대상이 누구든지 간에, 결단코 패해서는 안 되는 싸움.
리스크는 보상보다 훨씬 크지만, 그 작은 보상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인생의 게임이 이제 막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저런 고민에 휩싸이던 나는 결국 그날의 나머지를 침대에서 끙끙거리며 보냈다.

새로운 학기의 시작. 그리고 개강 첫날.
나는 헝클어진 단발머리에, 커다란 뿔테 안경, 듬성듬성 보이는 주근깨가 특징인 평범한 외모를 하고서는, 한국대학교 교정을 걷고 있었다.
복장도 후줄근하기 이를 데 없어 누구의 눈에도 띠지 않는 매우 평범한 여대생의 모습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수업에 늦지 않기 위하여 바쁘게 뛰어가는 학생들, 대학교 교정이 익숙하지 않은 듯 학교 주위를 둘러보는 신입생들의 모습이 개강의 첫날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나도 역시 여기 뛰어가는 학생들처럼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경영대 건물 정문에서 종철이와 만나기로 한 약속시간이 거의  되었기 때문이지.

저기, 종철이가 있다.

아직 지금의 내 모습을 알지 못하는 종철이의 시선이 나를 아닌, 다른 사람으로 향하고 있었다.
자식. 저리 눈썰미가 없다니.
종철 옆을 지나며 팔을 힘차게 휘둘러대다 그의 뿡알을 살짝 스쳤다.
약간의 고의와 다수의 실수라고나 할까. 종철이가 외마디 고통의 절규를 힘차게 내지르며, 고개를 숙인다.
살짝만 스쳐서 아프지 않을 텐데, 오버액션이 좀 심하다.

“죄송합니다만...”

내가 고개를 숙이고 사과하니, 종철이가 썩은 얼굴로 괜찮다면서 가라한다. 그리고는 곧 딴 데를 응시한다. 엘사 분장을 했던 나의 또다른 모습을 찾는 것이겠지.  꿈을 깨주어야겠다.

“나야, 임마.”

그의 가슴을 치니 놀람의 감탄사를 품어낸 종철이가 의아스럽게 바라본다.

“누구세요?”
“이한얼이다.”
“잉?”
“이번에 편입한 한돌이라고.”
“.......왜...”

왜? 왜 그때 엘사  모습이 아니냐고 따지는 듯 했다.
과격하게 그의 목을 왼팔로 감아버렸다.

“대학교에서 만나니 존나 반갑다, 친구. 수업 들어가자”
“야..야.. 잠깐.. 아~ 아~ 씨.”

그렇게 질질 경영대 건물 안으로 끌려가는 종철. 아직도 괴롭게 나한테 목을 잡혀 있는 상태이다.

“야.. 아~ 씨. 돌, 이 모습이 과히 남들 눈에 좋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난 또라이라 괜찮아.”
“내 체면이 있는데.. 쫌! 헤드락 좀 풀어. 선후배 아는 사람 많다구. 여기.”
“그래?”

하긴, 이 녀석 입장에서는 여자에게 목을 잡혀서 켁켁 거리는 것도 이상하긴 할 거다.
하지만,

“그건 네 사정이고!”

종철이 녀석의 몸에 힘을 더 콱 준다.  여자로 생각하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를 온 몸으로 보여준 것이다.

전공필수인 조직행위론 과목.
100여명이 들어갈 수 있는 강의실이 거의 꽉 찰 지경으로 학생들이 봄비고 있었고, 나와 종철이는  좋게 뒷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아직 박지혁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알기로 박지혁도 이 수업을 수강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수업시간에  맞추어서 오는 모양이었다.
이제  수업이 시작할 타임이기에, 학생들이 노트북과 필기도구 등을 꺼내놓고 있었다.
내 옆 자리에 앉은 종철이가 남들이 하는 수업준비를 생략한 채, 잔뜩 불만어린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돌, 내가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얼로 부르렴.”
“얼, 내가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대화의 주제와 맥락에 어긋나는 것이면 묻지 마.”
“대화 시작도 안했다. 존나 과격한 여자야.”

존나 이후로부터 그가 붙인 호칭이 제법 멋지게 들린다.
나의 정체성과 맞아 떨어지는 표현을 듣고, 그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준다.

“뭔데? 좆을 가격당한 남자야. 이상한 소리할 거면, 한 대 맞고 시작하자.”
“이 미친 샊..내기씨, 진짜 궁굼한 건대. 넌 왜 이렇게 하고 다니냐?”

헝클어진 단발머리, 뿔테 안경, 주근깨, 상의 셔츠, 하의 청바지.
나의 이 미친 조합에 쓸데없이 적개심을 드러내는 종철에게 살포시 웃으며 그의 현실을 되새겨 준다.

“지혁아, 넌 왜  입는 스타일이 그 꼬라지냐? 양복바지에 흰 양말 조합이 그냥 기가 막힌다.”
“엉뚱한 데로 물꼬 틀지 말고. 내가 묻고 있잖아.”
“이게 내 스타일이야. 남들이 이해 못하는 너의 스타일이 있듯이 나만의 개성을 표현한 내 스타일이 있는 거야.”
“그 어여쁘셨던 엘사를 포기하고?”
“친구야, 덕후들의 걸쭉한 시선이 너의 온 몸을 샅샅이 감싸고 있다고 생각해봐.”
“그건 좀 그렇네..”

바로 수긍을 하는 종철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니까 난 지금이 좋아.”
“뭐, 좋아. 그건 알겠고, 얼, 너 약속 잊지 마라.”
“약속? 내가? 언제? 너랑? 뭘?”
“이게.. 정말. 이 뻔뻔한 닭대가리야. 일주일에 한번 그거 있잖아?”
“한 달에 한번 그거는 있어도 일주일에 한번 그런 거는 없다.”

종철이가 씩씩거리더니 화를 내기 일보 직전이다.
단순한 녀석 같으니라고.
더 놀리다간  녀석이 동네방네 소리를 지를 지경이었다.
알았다고.
약속했던 데이트 해준다.

“알았어. 종철. 표정 풀어. 해주면 돼지, 그 까짓 거.”

근데 내 말을 듣던 종철이의 표정이 갑자기 이상해졌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과 같은 표정?

“무엇을 해줘?”

나와 종철이가 대화를 하고 있는 반대의 방향에서 굵직한 소리가 들렀다.
그 굵직한 목소리의 출처는 키가 크고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였고,
그 남자가 내 옆 책상에 가방을 던져 놓더니, 의자에 덜썩 앉았다.

“무엇을 해 주는 건데?”
“지혁이형, 안..안녕하세요.”, “선배님, 안..안녕하세요.”

종철이와 내가 반사적으로 그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박지혁이 종철이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나를 보고 생긋 웃으며 말했다.

“얼, 그거 나도 좀 해주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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