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0화 〉사악한 여자 (20/68)



〈 20화 〉사악한 여자

“얼, 그거 나도 좀 해주면  돼?”


이 자식이 어디까지 들은 걸까?

“아니, 선배가  나이에 소개팅하려구요? 에이, 노땅은 참으시죠.”


지혁이의 요청에, 나는 딱 거절했다. 눈치를 보던 종철이가 쓱 말을 꺼낸다.

“형, 같이 할래요? 소개팅?”

종철이가 제발 입을 다물어 주셨으면 한다. 이 상황에서는.


“진짜? 나, 웬만한 여자는 눈에 안차는데? 얼, 소개팅 주선 가능하겠어?”
“아뇨. 저도 여자친구가 없...”


말실수했군.


“얼씨구? 얼씨, 레즈였어?”
“선배 같은 눈치 없는 사람에게 소개시켜 줄 제 친구가 어딨겠냐는 말입니다.”
“근데 쟤는 왜 해주는 건데? 소개팅 난이도로 치면 종철이가 더 극악아닌가? 그것도 매주!”
“종철이는 이미 자세가 됐거든요. 쟤는 얼추 여자다 싶으면 무조건 감사할  아는 애입니다.”

간만에 종철이의 성품을 칭찬해 주었더니, 종철이가 억울해 한다.

“얼아, 아무리 그래도 내가  정도까지는..”
“맞아. 넌 그 정도로 인성이 좋은 놈이야. 자신을 자학하지마.”
“그게, 자학이 이렇게 쓰이는 단어가 맞나?”

나와 종철간의 입씨름을 잠시 감상하던 지혁이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성격이 더러워서 감당이 안 된다?”
“웬만한 여자 싫다면서요? 제가 알고 있는 여자들은 다 웬만한 여자들이거든요. 형은 불가능해요.”

나도 모르게, 처음으로 지혁을 형이라고 불렀다.


“형?”
“그냥 넘어가요. 쪼잔하게 호칭을 문제 삼기는.”

지혁이가 피식 웃으며 말한다.


“됐어. 나 소개팅 안 해.”


지혁이의 거절에 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대신, 얼이 네가 해주면 되지.”
“뉏?”


이 자식이 사람을 공개적으로 놀라게 한다.


“네가 나 만나주면 소개팅 일절 안할게.”


나는 순간 벙쪄있고, 종철이의 표정도 살짝 안 좋아 보인다.

“지혁이형은 얼을 잘 아세요?”

종철의 말 끝에 약간 상한 기분이 드러난다.
서로 안 지 얼마나 되길래, 이런 농담을 하느냐는 나름대로의 의사 표현이겠지.

“편의점에서 얘 근무할 때, 매일 봤거든. 얼, 재밌는 친구잖아.”

나는 지금 이 상황이 재미없다.
저 지혁의 입에서 어떤 말이 튀어 나올지 조마조마하다.

“근데, 지혁과 얼, 너희 둘 꽤 친해 보인다?”

물음표를 동반한 그의 대사에는 재빨리 반응을 해줘야 한다.


“종철이가 쌍둥이 친오빠의 베프라서, 자주 우리 집에 놀러왔어요.”

이번에는 지혁이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거의 우린 남매지간과 마찬가지죠.”

종철이가 딱 부러지게 말하며, 나의 어깨를 잡고 자신에게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뒤따르는 나와 종철이의 어색한 웃음.
이 모습을 보던 지혁이의 입가에서 냉소가 스쳐 지나갔다.
세 명 사이의 분위기가 살짝 애매해 진다.
하지만, 애매한 분위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지더니, 빼빼마른 체구에 금테 안경을 쓴 교수가 수업을 하러 강의실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교수가 이때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난 더 곤란한 상황에 처할 뻔 했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수업이 끝난 후, 지혁 선배가 일이 있다며 급히 어디론가 나갔다.
점심을 함께 먹기가 거북한 탓인지, 같이 먹자는 종철이의 요구를 무시하면서 뛰어 나갔다.
뭐, 그건 그렇고. 오늘 학교에 편입한 기념으로 종철이한테 한 끼 식사를 얻어먹어야 하는데.

“야, 종철. 네가 나보다 선배지?”
“너 3학년으로 편입한 거면 동기가 되는 거 아닌가?”


종철이가 친구를 위해 밥 한 끼 기꺼이 살  알았는데 이외다.


“종철아, 네가 나보다 여기 학교 오래 다녔으니 밥 사죠.”
“이봐요, 아줌마. 그게 무슨 논리세요?”
“이 학교에서 네가 나보다 연식이 좀 되었잖아?”
“그래서 뭐?”

종철이가 일부로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한다.

“골동품 가게에 가면 연식이 좀 된  가치가  높대. 그러니까 가치가 높은 네가 사.”
“말도 안 되는 소리! 야구 트레이드 시장에서는 나이가 젊은 사람을  높게 쳐준다. 그럼    어린 사람이 사야 되는  아냐?”
“그래, 종철아. 말 잘했다. 내가 너보다 나이가 더 많아요. 2개월 차이로. 그러니까 네가 사.”
“헐! 네가 몇 월생이지?”

음, 할 말을 잃어 버렸다.
 녀석, 바보인거지?
자기가 말해놓고,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손가락으로 개월 수를 세려고 하고 있다.


“종철아. 한 끼 안 사주려고 바보가 되지는 말자.”
“몰라, 이씨.. 내가 너한테 얻어먹은 기억이 없거들랑!”

하긴, 예전부터 둘이 만나면 밥도 술도 거진 종철이가 샀지.
불만이 있기는 하겠다.
근 10년동안 내가 쏜 게... 없군.
그럼 학식 정도야 내가 쏠까?
한 7천원 정도면 둘이 먹을 수 있겠지?

“좋아,  크게 누님인 내가 쏘지.”
“아이구, 감솨합니다. 그럼 정문 밖 엉터리 소고기집 어떠하신지요?”
“떽! 안돼. 시간 없어. 학교식당에서 제일 비싼 거 먹어.”


어디서 감히, 불쌍한 중생에게 고기를 뜯어 먹으려고!

“에게? 학식에서 제일 비싼 건 돈가스 3600원, 일반 점심 3200원. 이게 크게 쏘는 거냐?”
“내 처지에 큰  투자한 거야. 감사한  알고 먹어.”
“지혁이형도 없는데, 더 크게 쏘지?”
“지혁이가 없으니까 학식에서 제일 비싼 거 먹을 수 있는 거야. 운 좋은지 알어.”
“와 진짜 독한 뇬.”

나에게 손가락질 하는 종철이  놈의 새끼.
이런 놈에게 굳이 밥을 사줘야 하나?

“머?  들려.”
“뇬이 아니라 놈이라고 했다고요. 밥  끼 얻어먹기 힘든 분께 한 끼 기어코 먹고 마는 내가 독한 놈이라고. 뇬이 아니라 놈! 독한 뇬이 아니라 독한 놈!”
“에이씨. 감사할  모르는 청개구리에게 밥 쏜다는 내가 바보지.”
“에이씨. 한턱쏠 줄 모르는 자린고비에게 밥 사달란 내가 바보지.”


아쭈. 이 녀석이 라임을 맞춘다. 뭐 오늘은 말싸움에서 내가 져주지.
종철이 녀석, 돈가스를 제일 싫어하는데도,
학식에서 제일 비싼 게 돈가스라고 그걸  시켜 먹었다.
돈가스 한 조각 먹고 한숨 쉬고, 또 한 조각 떼어먹고 한숨 쉬고.
 녀석의 쓰잘데기 없는 승부욕은 도대체 어디서 생겨난 걸까?
종철이를 한심하게 바라보다가도, 돈가스를 똥 씹어 먹는 듯한 녀석의 표정이 가관이라 깔깔대고 웃었다.


내가 이래서 종철이가 좋다.
편하게 웃으면 세상 걱정 없으니까, 나를 편하게 웃게 하는 사람은 종철이 하나뿐이다.

학식을 다 먹고, 수업시간까지 시간이 남아서 기어이 학교 내 커피숖을 갔다.
내가 투자한 6800원의 점심식사 값을 생각하며, 어쨌든 커피는 얻어먹을 심산으로 종철이를 카페까지 억지로 끌고 간 것이지.
종철이는 자판기 커피를 고집했지만, 내가 투자한 자본만큼 수익을 얻기 위해서는 자판기 커피는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카페에서의 커피 값을 계산하니, 얼추 점심식사 값과 또이또이 되는 것 같았다.
풍만한 만족감이 밀려들었다.
그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나는 라스베리트러플 모카, 아이스로.

“이름이 신기해서 시켜 봤는데 괜찮네. 넌 언제나 아메리카노 좋아하는구나. 여기 아메리카노 너무 연해서 싫은데.”

슬쩍 골려본다.


“씨바. 내가 너랑 다신 같이 안다닌다.”
“왜 일주일마다 데이트하자며? 그 날이  배때기에 기름 채우는 날이야. 물론 공짜로.”


종철이를 신나게 놀려대었다. 참다못한 저 자식의 입가에서 나를 다정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사악한 뇬이라고.
어찌겠는가? 네가 자초한 것인데.
배때기에 기름 채우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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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노을이 서서히 들어오기 시작할 무렵, 말쑥하게 검은 양복을 차려입은 한 사내가 한 여인을 주시하고 있었다.
단발머리의 그 여자는 흰 마스크를 얼굴에 착용하고 있었고, 백팩을 등에 매고서는 총총히 걸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그 여자는 170에 가까운 키에, 피팅 모델로 활동하기에 손색이 없는 여리여리한 몸매를 소유하고 있었다.
보통의 남자라면 그녀가 풍기는 외모에 마음이 흔들릴 법도 하지만,
그러나 이 검은 양복의 사나이에게서는 일체 감정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그 사내는 광각 카메라를 활용하여 여러 각도로 그녀에 대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잠시 후,  사내는 카메라를 내려놓고는, 자신의 방향으로 걸어오는 그녀를 향하여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또각또각

두 사람은 조금씩, 조금씩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50, 40, 30, 20, 10, 1m
그녀의 과일향기와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의 샤넬블룸퍼퓸이 서로 마주하는 순간,
그 사내의 손에서 어떤 불빛이 반짝이다가 사라졌다.

저절로 벗겨지는 그녀의 흰 마스크와 날카롭게 잘라진 귀를 덮는 머리카락 한 올,
그리고 거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귓가의 상처.
흰 마스크의 끈이 떨어져 나가며 그녀의 하얀 얼굴이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들의 움직임과 함께 드러났다.
그녀의 백옥같은 얼굴에 순식간에 드러나는 당혹함의 빛깔.
그리고 흔들리는 눈빛. 모든 것은 찰나였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은  사내의 렌즈에 완벽히 담겼다.

“괜찮으십니까?”


예의바른 언어, 그러나 감정이 배제된 건조한 말투.
그녀는 잠시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곧 계면쩍은 웃음을 지었다.

“갑자기 마스크가 벗겨졌네요. 감사합니다.”
“가끔은 예상지 못한 일이 생기기 마련이죠.”
“그러네요. 그럼, 이만.”

그녀는 곧 땅에 떨어진 마스크를 챙겨 그 사내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녀가 충분히 멀어져간 것을 확인한 그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박광혁 기획실장님, 박지혁 주위를 맴도는 여자의 사진을 보내겠습니다.”
<수고했어요. 하비천 비서.>
“아직, 이 여자와 박지혁의 관계가 어디까지 이루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경계할 필요는 있을 듯 합니다.”
<흠, 벌써 사진이 전송되었군.>


그리고 통화 너머로 조용히 울리는 탄성.

<휴우, 지혁이가 완전히 빠질  하군.>
“한번 만나보시겠습니까?”
<크크흐.. 조만간 이 여자를 만날 기회가 있을 거야. 그때즈음이면  수 있겠지, 그녀가 지혁이에게 미치는 비중을.>
“이한얼에 대해서 더 알아볼까요?”
<음..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 우선은 철수하게.>

하비천 비서라는 사내는 곧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그는 무심한 미소를 얼굴에 품고는  그 미소를 죽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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