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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화 〉충분히 자신있습니다. (21/68)



〈 21화 〉충분히 자신있습니다.

인천국제공항.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정신없이 차를 몰고 공항까지 온 지혁은 입국게이트 로비에서 누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곧, 뉴욕발 비행기에 탑승했던 승객들이 각자 짐을 가지고 입국게이트를 통해서 나오고 있었다.
지혁은 담담히 오고가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었고, 이윽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선글라스  젊은 여인을 보자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잘 지냈냐? 승지?”

이게 웬 정신 나간 놈이냐는 듯이 바라보는 승지.
그 의아한 시선의 원인을 알아낸 지혁이 황급하게 말한다.

“Oh, I have plastic surgery.(성형수술했어.)”


승지가 그를 뻔히 쳐다 보더니 썩은 미소를 내비친다.

“Ça fait longtemps. (오빠, 오랜만이야.)”
“넌 미국에서 왔는데  불어?”
“멋있잖아. 영어는 너무 구태의연해. 개나 소나 다 쓰는  영어니까.”
“넌 진짜 하나도 변한 게 없군.”
“Mon frère a tellement changé. (오빠는 너무 변했어.)”

지혁이 승지의 근본없는 불어에 썩소를 내비쳤다.

“한국말 써라.”
“몽 프허 뗄망 샤쥐.”
“한국 발음으로 말하라는 거 아니거든.”
“참나 깐깐하기는. 어서 가자구.  앞에 차 세워뒀지?”

그는 승지로부터 건네 받은 케리어를 질질 끌고 자신의 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승지가 계속해서 투덜대었다.


“야,  다리 아프다고! 정기사 오라 했으면 편히 갈 것을, 왜 너만 온거야?”
“그럴 사정이 있으니까. 조금만 가면 되니까 입 닥치고 따라와 줄래?”
“그게 하나밖에 없는 동생한테 선사하는 주둥아리야?”
“젠장. 저것도 동생이라고.”
“내가 널 위해서 뭐 했는지 잘 기억하라고.”

지혁이가 잠시 가는 길을 멈추고 승지를 쳐다보았다.

“너, 서류하고 usb는 잘 가져왔지?”
“흥, 그거 없었음 나보고 걸어오라고 했겠다?”
“잘 아네.”
“씨발. 족제비(박광혁) 줘버릴 걸.”


동생으로부터 욕을 들어 먹은 지혁이의 눈썹이 8자가 되었다.


“오빠한테 하는 말버릇이  곱다?”
“시끄러. 빨리 가.”


차까지 가는 도중에 승지는 계속 오빠에게 궁시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짐을 지혁이의 차 뒷칸 트렁크에 싣고 나서, 지혁의 옆 자리에 앉은 승지의 궁시렁거림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콘트라베이스는?”
“소중하게 따로 부쳤어. 악기는 함부로 다룰 수 없다는 거 잘 알잖아.”
“학교 오늘로 개강이다. 내일부터 당장 복학하고 수업 들어가야지.”
“몰라, 악기도 없는데. 대충 이번   거야.”

지혁은 뾰로통한 승지를 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승지는 독특한 동생이었다.

SH그룹 박회장의 철없는 막내딸.
지혁이보다 두 살 어린, 같은 배에서 난 동생.
한국대학교 예술대학 기악과 현악 전공.
악기 다루는 것에 별 흥미를 가지지 못했지만, 비싼 악기를 다뤄야 좋은 학교를 갈 수 있기에 택한 것이 콘트라베이스.

3학년 휴학하고 표면적으로는 1년간 교환학생을 갔다 와서 오늘 귀국함.
귀여운 외모와는 달리 사람에게 날카롭고, 안하무인인 성격.
그녀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나 박지혁.
지혁은 승지를 보면서 연상되는 사실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이제, 그 서류와 usb를 줄래?”
“이거 주면 차에서 쫓아내려고?”
“내가 미쳤냐? 앞으로  왼팔이 될 사람을 쫓아내게?”
“흥. 그런 인간이  이렇게 짐짝 취급하다니.”


그녀는 궁시렁대면서도 서류와 usb를 그에게 넘겨주었다.
지혁이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그녀의  다른 정체는 해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자신의 외로움을 컴퓨터를 통해서 풀었고,
어쩌다 보니 해커의 길로 빠져들었으며,
각종 보안업체의 보안방어막을 뚫는  훈장처럼 여기며 살아왔다.
해커 전문 그룹까지 찾아가서 은밀하게 교육을 받고,
멀웨이를 개발하거나 여러 기업들을 감염시키는 DNS봇등을 통해서 고객 정보를 빼내는 불법 행위까지 저지른 경험이 있는 실력 있는 해커였다.

“너 같은 인간은 처음 본다.
네가 운영할 회사의 서버에 침입해서 금융정보를 빼내라는 건 대체 무슨 이유야?”
“그게 내 회사인가? 족제비 것이지.”
“어쨋든 미국 지사의 전산망에 침입하는 건 좀 힘들었어.
보안업체에서 여러 차례 파이어월(fire wall)을 촘촘하게 구축하고 있어서 말이지.
우회로 침입하는데 애 좀 먹었거든.
물론, 해킹프로그램을 풀 수 있도록 서버에 접속할 수 있었던 건 내 신분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녀는 오빠앞에서 자화자찬을 하였다.
그녀는 오빠로부터 수고비를 올려 받을 심산이었던 것이다.


“고맙다. 승지야. 오빠가 꼭 보답하지.”
“근데 왜  자료를 귀찮게 얼굴 보면서 달라고 한거야?”
“너도 알잖아. 왜 이렇게 하는지? 그리고 내가 혼자 널 데리러 온 이유도.”

승지가 지혁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너, 다 해킹당하고 있구나?”
“아무도 믿을  없고 아무것도 안심할 수 없어. 박광혁은 점점 그룹 내에서 자기 세력을 굳혀 가고 있고,
그 세력이 이젠  부근까지 먹어 들어가고 있으니까.”
“지혁이 오빠, 불쌍해서 어쩌냐? 쯔쯔쯔.”

지혁은 송혜정과의 사건 이후로 사람이 이상하게 변해 버린 박광혁의 모습을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그의 눈빛에서 점점 사람의 감정이 사라져가고 있었고, 그의 표정은  차가워져만 갔다.
그리고 지혁을 바라보는 표정에서 그는 무심한 살인자의 냉혹함이 떠올려졌다.

—너와 나, 그리고 엄마가 살기 위해서라도, 나는 무엇인가를 해야 


“나는 지금부터라도 내 사람들을 만들어 볼 거야. 하나씩, 하나씩. 그리고 그  사람은..”


지혁은 승지를 보면서 말했다.

“바로 너라구. 승지야.”

그리고 승지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지랄하고 있네.”




승지는 지혁이에게 몇 가지 조건을 걸었다.
학교에서 절대로 아는 척 하지 말 것,
그녀가 어딜 가든, 무엇을 하든 절대로 터치하지  것,
그리고 지혁이가 보유하고 있는 자산의 일정 부분을 자신에게 배당할 것.
그 외에 세세한 조건들을 내세웠고, 지혁은 모두 승낙했다.

그녀는 박덕성 회장의 막내 딸답게, 친오빠를 상대로 여러 가지 협상을 벌였고,
그 결과는 그녀에게 매우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결국 승지는 오빠의 사람이 되기로 결정하고 협상을 타결시켰다.
승지가 문서로 계약서를 작성하여 친오빠와 공식적으로 싸인을 주고 받은 것은 후일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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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난 어제와 같이 평범한 여성의 모습으로 학교를 갔고, 오늘도 종철이와 지혁은 나와 같은 수업을 들었다.
개강 첫 주라 수업이 빨리 끝나기는 하겠지만, 그리 반갑지는 않았다.
공강 시간에 달리 할 일이 없기 때문인데, 어디 갈 곳도 마땅하지가 않았다.


종철이를 만나서, 데이트 일정을 잡자고 했더니, 그녀석이 말을 흐리며 급히 도망가 버렸다.
저럴 거면 말도 꺼내지 말지, 계획 없이 샀던 원피스에 들어간 돈이 아깝네.

지혁과 같이 수업을 듣는 동안, 지혁은 무엇인가 고심에 가득한 눈빛이었다.
종철과 나를 보고도 말 한마디 없이 거만하게 인사를 받더니, 수업시간 내내 과묵함을 유지하였다.
무엇인가 일이  안 풀리는 것 같은데, 한번 슬쩍 무엇 때문인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데서 그의 고민을 알 수 있는 계기가 생겼다.
‘회계의 원리’ 수업이 끝난 후, 교실을 나가려는 나를 그가 붙잡았다.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뭔데요?”
“한 가지 부탁을 하려고.”
“부탁이요?”


그가 주머니에서 USB를 꺼냈다.


“여기 USB에 든 금융정보 자료를 자세하게 분석해 줄  있을까 싶어서.”
“네?”
“특히 경영기획실 관련 자금의 흐름을 추적해 볼까 하는데, 자료가 방대해서  혼자 힘으로는 어려울 거 같고.”
“이거 선배 회사 캐는 겁니까?”

박지혁 선배가 씁쓸하게 말했다.

“뭐, 그렇다고 할  있지.”
“저를 뭘 믿고 이 고급스러운 일을 부탁하십니까?”
“네 친오빠 문제로 너를 만났을 때, 네가 보인 그 자신감.”
“.....”
“그 자신감과 담대함은 남들에게   없었던 거거든. 너라면 할 수 있을 거란 막연한 생각이 들었어.”


처음으로 박지혁이 내게 일을 시키려고 한다.
그리고 희미한 신뢰 하나를 내게 내어주고 있다.

“전  없이 공짜로 해드릴 생각 없거든요? 얼마 주실래요?”
“음..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큰 걸 줄 수 있어.”
“그 혹시, 예전처럼 『날 줄게』 이러시는 거 아니죠?”

그렇지. 예전에 이 선배가 나를 줄 수도 있다고 농담처럼 말했었다.
농담임을 알면서도, 나는 그 말에 사래가 들렸지. 선배가 슬쩍 웃었다.


“내 사람이 될 수 있는지 능력을 보고 싶은 거야.”

내 사람이라, 듣기 거북하네.

“절 여자취급하면 안할 겁니다.”
“이한얼, 널 여자로 취급하는  아니라 사람으로 취급하려는 거다”
“음..”
“도와줘.”


도와 달라는 그의 표정이 어딘가 모르게 절박하다.
지금껏 보지 못한 그의 새로운 모습. 내 마음속에서 흥미가 돋는다.

“알겠어요. 오빠.  보죠.”

오빠라는 소리를 처음으로 해 본다.
순간 사래가 걸린 지혁이 급히 기침을 한다.


“충분히  수 있습니다. 자금 출처 분석 이번  내로 해서 드릴 께요.”
“가능하겠어?”


빙그레 웃었다.

“나는 이한얼입니다. 아마 저랑 일하다 보면 놀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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