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2화 〉내가 믿어도 되겠습니까? (22/68)



〈 22화 〉내가 믿어도 되겠습니까?

주말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금요일 오후,
나는 커피숖 『하루의 휴식』에서 지혁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3월인지라 옷을 따뜻하게 입고 왔는데도,
차가운 기운이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와 하체를 싸늘하게 감싸고 있었다.
다른 날보다 오늘이 유독 3월의 냉랭함이 민감하게 체감되는 이유,
나는 그 이유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이놈의 원피스 치마를 이렇게 입게 되다니.

핑크빛이 감도는 원피스와 검은 스타킹을 착용한 것을 제외하고는 평소와 그리 크게 다르지 않는 패션이다.
지혁이가 풀메이크업  온갖 치장을 다 하고 나오라고 명령했을 때,
정말이지 나는 필사적으로 저항했고 생얼에 운동화, 헝클어진 단발머리는 지켜낼 수 있었다.
그래서 합의 본 것은 적어도 단정한 복장으로 치마정도는 입고 오는 것.
지혁의 요지는 그랬다.
데이트하러 나가는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어야 누가 보기에도 둘의 만남이 자연스럽다는 것을.

시켜놓은 핫초코 한 모금을 입에 물고 단 맛을 음미하며, 무거운 눈꺼풀로 빨갛게 충혈된 눈을 감추었다.
금융자료를 분석하는데 온전히 사용된 이틀의 시간이 무자비하도록 무겁게  눈꺼풀과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헤프가 준 피로 회복제 알약을 평소에 너무 헤프게 쓰는 거 같아서 자제하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밤을 새운 이틀의 여파를 제대로 실감하고 있는 중이다.
오늘도 오전에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수업을 듣고 간신히 정신줄 잡고 집에  것이고.
이러다가는 지혁을 만나기도 전에 쓰러질 것만 같았다.

—휴우, 자고 싶어. 미칠 거 같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머리가 점차 기울어지더니,
결국 탁자위에 걸쳐진 왼쪽 팔에 머리를 괴었다.
그렇게 괴고 나니, 교과서 몇 권을 모아서 베개로 쓰던 고등학교 시절이 시나브로 선명해지고 있었다.

나름 치열하게 공부했던 그 때 그 시절, 너덜너덜 떨어져 가는 수학의 정석을 베개 삼아 누울 때면,
학급 친구들이 책상에 꺼내놓은 깨끗한 새 책들이 눈에 들어 왔었다.
그때마다, 난 입꼬리가 긴 웃음을 입가에 남겼다.
나의 노력을 잘 견뎌준 낡은 정석책에 감사했고, 그 책이 주는 편안함에 포근하게 잠을 자곤 했었지.
항상 남들에 비해 무엇인가 부족하던 나에게 남들보다  뺨은 더 편안한 휴식을 가져다 준    순간,
그 순간이 지금 내게로 다가서고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조그만 잘께요.
그렇게 나는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미성을 허공에 남긴 채 잠에 빠져들었다.

박지혁은 차를 카페 앞에 주차시키고 황급히 문을 열고 들어섰다.
지혁은 가쁘게 오르는 숨을 부여잡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곧, 카페 구석에서 왼팔에 고개를 대고 자고 있는 얼을 자신의 시선으로 끌어 들였다.

—후후, 저리 자면 허리가 아플 텐데.

주위에 누가 있든 말든 상관없이 세상모르게 자고 있던 그녀 곁으로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녀의 맞은 편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피식

그녀의 입에서 탁자로 흘러내리는 초콜릿  액체가 달콤한 미소를 자아냈다.
저걸 휴지로 닦아줄까? 아니면 손가락으로?
지혁은 잠시 장난스러운 고민을 하다가 폼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예전,  소녀가 닦기를 거절했던 손수건이었는데, 끝내 오늘은 이 손수건에 얼의 자국을 묻어내고 싶었다.
그리고 천천히 다가가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술을 슬며시 훔쳤다.

얼은 입가의 낯선 감촉에 눈을 살포시 떴다.
그리고 부스스 일어나 아직 반즈음 감겨진 눈으로 두리번거리다가, 맞은편에 앉은 지혁을 동태눈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고양이가 양쪽 앞발로 사람을 부르는 듯한 마네키네코의 포즈처럼 양 손으로  눈을 부볐다.
그리고는  흐리멍텅한 눈빛으로 지혁을 보고 중얼거렸다.

“미친개가 언제 이렇게 젊어졌을까나?”
“미친개라니?”

다시 자세히 지혁을 쳐다보는 얼. 좀비의 눈깔이 사람이 되고서야, 지혁이를 인지한 듯 하였다.

“아, 학주가 아니구나..”
“학주라면, 혹시 고등학교의 그.. 학생부 주임?”
“응. 나랑은 같은 하늘을 머리위에 얹지 못하는 사이지.”
“철천지원수였던 모양이군”

그녀는 머리를 북적거리며 퉁명하게 말했다.

“이씨! 꼭 누구랑 같이 있으면 잠자리가 흉흉하단 말야.”
“거, 네 돈줄 앞에서 말  신경 써서 하지?”
“알았다고.”
“알았다구? 근데  언제부터 반말이냐?”
“아까 전. 당신이 늦게 와서 내 잠 깨운 이후로.”
“얼, 말 높여라”
“알게 뭐야.”


지혁이가 운전하는 멋들어진 벤틀리 차안. 모처의 장소로 이동 중이었다.
얼이 자기 이마를 열심히 비벼대며 지혁을 원망스럽게 쏘아 보았다.

“요즘 시대에 어떤 겁대가리를 상실한 남자가 대낮에 다 큰 처녀 이마를 그리 쎄립니까?”
“내가 두 번 경고 했잖아. 말 높이라고.”
“당신이 늦게 와서 장난 친  진짜로 때려요?”
“꿀밤은 때리는 게 아냐! 먹이는 거지.”
“소리가 컸잖아요. 소리가! 사람이 그리 힘 조절이 안돼요?”

지혁이 얼의 이마를 쳐다보았다. 살짝 불그스름한 자국이 남아 있는 걸 보고 웃었다.

“내가  근육이 약하다 보니 그랬네.”
“그래가지고 딸이나 제대로 치겠어요?”
“거기서 딸이 왜 나와!!”
“여튼, 오늘 일 무덤까지 가져가겠습니다.”
“그렇게 소견머리가 좁아 터져가지고는.”
“말하는 투나 왜소한 근육으로 보아 오늘 내일 하실 분이네 그려.”

지혁은 실소를 터트렸다. 쓸데없는 말들을 쉴새없이 퍼붓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겠지.

“근데, 지금 어디 가요?”
“호텔.”

얼은 눈이 동그래졌다.

“아직 전기충격기를 준비하지 못했는데...”
“걱정마! 콘돔은 준비되어 있으니.”
“이 싸람이 진짜. 농담하지 말고 말해 봐요. 우리 어디가요?”
“진짜 호텔이라니까!!”

갑자기 그 말에 한얼이 진지한 모드로 변했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하였다.

“왜? 진짜 겁나서 그래?”
“아뇨. 호텔로 가자는 거에는 선배의 의도가 있을 거라고 생각되네요.”
“내 의도? 그거야 뻔하지 않겠어?”
“선배도 남녀 둘이 호텔가는 게 뻔하다고 생각하시죠? 보통 가는 의도가 명확한 장소가 적의 감시로부터 오히려 안전한 장소니까요.”
“음..”
“형, 요즘 박광혁에게 감시당하거나 쫓기고 있죠?”
“그거.. 부인할  없군.”
“이메일이나 다른 온라인으로 자료를 송부해도  텐데 직접 대면 접촉하여 자료를 건네준다거나, 어느  장소에서 머무르지 않고 자꾸 장소를 바꾼다거나, 그런 모습들을 보고 형의 현재 모습을 추측해 봤어요.”

박지혁은 한얼의 날카로운 추리에 제법 감탄을 하고 있었다.

“이럴  알았으면,  말대로 재벌 남자를 만날 기대에 흥분한 여인처럼 풀메이크업에 잔뜩 차려입고 나올 걸 그랬네요. 그래야 상대가  의심할 텐데.”
“우리가 신경을 쓰면 쓸수록 더 적으로부터 안전해 지니까 그랬던 거긴 해.  맞추었다. 얼.”

박지혁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기분이 좋아진 얼은 헤벌쭉 웃었다.

“근데,  왜 자꾸 날 보고 형이라고 하냐? 오빠면 모를까?”
“네? 제가 그랬어요? 오빠보다는 형이 발음하기 편하잖아요. 그냥 무시하세요.”


서울 P호텔. 지혁은 한얼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다.
투명창을 통하여 보이는 서울의 전경이 점점 더 넓게 보임에 따라서, 한얼의 맘속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그녀는 자신에게 들어오는 긴장감을 애써 털어버리고, 오늘 지혁에게 보고해야 할 내용 등을 머릿속에 상기시켰다.

“렌탈업체에 말해서 노트북 두 대를 우리가 예약한  앞에 갖다달라고 부탁했다.
우리가 굳이 전자 기기를 가지고 다니면 의심받을  있으니.”

지혁이 한얼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귀에서 느껴지는 그의 부드러운 숨소리에, 얼은 살짝 몸을 움츠려 들었다.

“당신의 분석 내용을 기대하지.”

지혁은 또다시 부담을 주는 말을 그녀에게 속삭였고, 얼의 얼굴은 더 긴장감에 얼어붙을 수 밖에 없었다.

호텔 23층에 위치한 한 객실.
 객실안에서 두 남녀는 사랑의 밀어가 아닌 사업 이야기를 하기 위한 준비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얼은 미리 준비했던 하드카피 자료들을 지혁에게 건넸고, 노트북에 관련 PPT 자료들을 띄어 놓았다.
얼이 준비한 하드 카피 자료를 잠시 훑어보던 지혁이의 얼굴에 놀라움과 심각함이 동시에 떠올랐다.

"이걸,  네가 준비하거야?"
"이틀을 꽁으로 세운 건 아니니까요."
"생각보다 대단한군. 얼."
"제가 분석한 내용을 말씀드리기 전에, 한가지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뭐지?"
"박지혁 선배는 정말로 저를 믿으십니까?"
"음.... 너를 믿지 않는다면 이렇게 요란스럽게 발표 준비를 시키진 아니하겠지?"
"그럼 제가 박지혁 선배를 믿어도 되겠습니까?"

박지혁은 그녀의 질문에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 머뭇거렸다.
여기서 예스를 하게 되면, 이제부터는 그녀는 나의 품안으로 오게 된다.
그것은 단순히 그녀를 포옹한다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전투의 전장에서 그녀를 위해 기꺼이 총알을 맞을 수도 있다는 걸 전제하는 것이다.
솔직히 그녀와 나에게 닥쳐올 앞으로의 파고를 생각하면 쉽게 Yes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에게 그녀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답변을 어떻게 한다?

"까놓고 말하자면, 현재로서는 나를 믿으라고 말하기가 어려워. 하지만  자신을 믿어 보는 것이 어떨까? 그러면, 나는 너의 믿음을 그대로 따라갈 자신은 있는데."

한얼은 지혁의 말에 잠시 사색에 잠겼다가, 빙그레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는 오직 그녀만이   있는 것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