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네가 같이 가야해.
한얼과 지혁은 편백나무 원목으로 제작된 고동색 테이블에 각종 서류를 올려두고서는,
각자의 노트북으로 PPT와 엑셀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한얼은 지난 5년간 SH그룹 미국지사의 실적을 제시하며 그 특징을 뽑아서 언급하고 있는 중이었다.
“SH그룹의 해외 미주 지사의 올해와 작년 매출이 다른 해에 비해서 두드러지게 차이가 나더군요.
실적 자체는 큰 변화가 없는데, 마이너스 성장임에도 오히려 매출액은 비정상적으로 높습니다.
이건 공격적 경영이라고 해도 이상한 점이 많은데요,
SH그룹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디스플레이 패널 부품 소자와 같은 고수익 분야에서의 투자는 줄어든 반면,
고위험성 분야로 투자가 집중되었습니다.
이는 회사 윗대가리들이 회사 망해먹기 위해서 미친 결정을 했거나, 자기네들이 편법적으로 받아쳐 먹고 싶은 게 있거나.
후자라면, 가공매출(허위수출)의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터엑티브한 테이블과 챠트로 구성된 PPT를 주시하며, 지혁이 건조한 투로 말했다.
“국내에서 분식회계(허위매출)를 통한 투자금 조달의 흔적은 없었나?”
“죄송합니만, 제가 갖고 있는 데이터로는 그걸 파악할 수는 없었습니다.”
“음..”
“어쨋든 SH미국현지지사는 Robson사라고 예전 유기 발광 다이오드 소재 분야에 많은 특허를 가진 회사 쪽으로 수주를 맡겨 돈을 지급한 흔적이 포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Robson사의 재작년과 작년 매출을 보니, 거의 잡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알아보니, 경영혁신을 이유로 전문 기술진들을 해고하고 CEO를 새로 교체했다고 하는데, 그 이후로 기업활동이 제로입니다.
과거에 취득하였던 특허만 가지고 있지, 내부적으로는 기업 활동 역량이 전무한 것이죠.”
지혁은 SH가 ‘Robson’의 지분을 어느 정도 갖고 있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 정도의 지분이라면, SH에 우호적인 CEO를 선임하는데 큰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Robson이 죽은 회사라면 더더욱.
“그렇다면 페이퍼 컴퍼니?”
“아마도요. 경영기획실의 오더라고 할까, 여튼 여기서 시작된 자금이 대략 130억 정도, 그것이 현지법인으로 흘러들었고, 그게 Robson사로 간 것으로 생각됩니다. Robson은 가공매출로 유상증자, CB발행 등을 하여 투자금 약 1,200억 상당을 유치한 것으로 자료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끝이 아니고 쟈오위안이라고 하는 중국측 디스플레이 하청 업체에 Robson 투자금액의 상당한 부분이 또 흘러갔습니다. 이 쟈오위안도 또다른 페이퍼 컴퍼니 혹은 유령회사로 추정되구요.”
“하아, 복잡하군. 여기 중국으로 흘러간 자금을 좀 더 볼 수 있을까?”
지혁이 엑셀의 파란 셀로 표기되어 있는 부분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중국측 자금 매수처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지만 38억 정도,
그리고 나머지 104억은 수입대금 가장 송금 등을 통해서 사적으로 편취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104억이 직접적으로 박광혁 계좌로 들어온 것이 아닌,
여러 개로 쪼개진 대포통장(차명계좌)으로 들어온 것으로 보이긴 합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손실을 매꾸기 위하여 투자조달금을 사적으로 편취했다..”
“네.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근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왜 중국으로 자금이 흘러들어갔느냐는 것이지.
더구나 중국은 투기 자본을 해외로 유출하기가 지극히 까다로운데..”
한얼은 헤프와 자금 추적을 하면서 대화를 나누던 순간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어제 새벽 늦도록 자금 추적을 하는 과정 중 헤프 박사가 어떤 이상한 예감이 들었는지 나의 일에 갑자기 끼어들었다.
그리고 중국 업체 쟈오위안의 새로 바뀐 CI(Corporate Identity: 통합적 기업 이미지)를 보고는 그의 얼굴이 변했었다.
헤프 박사의 낯빛이 유달리 창백하게 느낀 적은 어제가 처음이었고, 헤프 박사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튀어 나왔다.
감마족 변종 외계인, 바퀠라가 이 자금의 흐름에 개입하였고, 따라서 바퀠라가 SH그룹의 의사결정과정에 숨어있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헤프박사는 쟈오위안의 CI가 이전 감마족 황제가(皇帝家)를 상징하는 문장(紋章)과 거의 흡사하다는 사실도 강조하였다.
결국 그 자금은 예전 황제를 추존하는 바퀠라들을 양성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금일 수 있다는 걸 헤프 박사는 추론해 내었다.
한얼은 그 사실을 차마 지혁이에게 밝힐 수는 없었다.
대신, 다른 이유를 얼버무렸다.
“아마도 중국 측 프로젝트를 시행하기 위하여 구축해 둔 비자금이겠지요.”
“흠, 중국 측 자금은 뭐 그렇다 치고. 사적으로 유용한 것으로 보이는 102억의 행방과 Robson투자 차액인 1000여억의 사용처가 관건이겠군.”
“1000여억 증 일부는 위장급여, 부동산 구매 등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건 더 파볼 문제인데, 금이나 현물을 통해서 국내로 유입된 정황도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이건 제 추측인데, 이 자금들은 세탁을 통해서 지주회사의 성격인 SH캐피탈의 지분을 취득하는데 쓰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입니다.
추후 경영권 승계 및 방어를 위한 초석이 되겠지요.”
박지혁은 이한얼의 추측에 고개를 끄덕였다.
“박광혁이 취할 수 있는 패턴이군. 가능성이 높은 추측이야.”
“무엇보다도 국내로 들어온 102억 수준의 자금이 박광혁 개인 소유로 들어왔다는 증거만 잡으면 되는데, 현재로서는 그 증거가 없습니다.
그게 『스모킹 건(smoking gun)』인 건데...”
“박광혁 정도라면 그리 쉽게 흔적을 남기지는 않을 거야.”
“그럼 현 시점에서 저희가 취할 수 있는 조치를 대략적으로 4가지 시나리오로 짜 보았습니다. 그 다음 페이지를 보시면 됩니다.”
그 다음 슬라이드에 적힌 내용은 그녀가 급히 휘갈겨 쓴 듯하였다.
그가 그 슬라이드의 적힌 글귀를 보고 피식 웃자, 한얼은 얼굴이 빨개지며 ‘너무 시간이 촉박해서..’라며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박지혁은 3번항에 오타를 발견하고는 '박광현이 아니잖아. 박광혁이지.'라고 중얼거렸다.
4가지 방안
1. 금융감독원이나 언론에 제보하는 방안. 개인이 직접 해킹을 하여 취득한 자료는 불법이라, 무시당하거나 피고소 가능.
크로스 체크 과정이 길고, 그 과정에서 우리만 개씹창 가능.
자료 수집과정의 불법성으로, 박광혁 측에게 고발당할 가능성 업.
바로 되치기를 당하는 거지. 쓸데없이 우리 팀만 전면 오픈이 됨.
2. 미국 재무부 금융범죄단속반(FinCEN)에 고발. 애네들 지들 이름처럼 핀셋으로 집어다가 철저히 조진다.
SH 전체를 홀라당 다 태워먹기엔 아주 확실한 방안. 너 죽고 나 죽기에 최적화된 옵션. 박지혁 당신? 이 카드 받을 수 있어?
3. 이 정보를 경쟁 기업에 흘림. 경쟁업체에 선별적으로 박광현 불법 취득 자료 공유.
경쟁 기업에서 박광현에 대한 소문 퍼뜨리기. 대상기업은 디스플레이 경쟁업체 PLC 혹은 ??.
무엇보다도 SH 그 자체보다는 박광혁 개인을 혐오하는 관련 기업이면 O.K.
근데 이런 기업이 있나? 상대에 줄 매력적인 카드 필요.
족제비가 추진 중인 리듐폴리모배터리(전기자동차 배터리), BMS(배터리 관리시스템) ↔ 상대기업-가급적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 잘가, 박광혁.
4. SH 그룹 장녀 박하영측에 정보 전달. SH껍데기 말고 타회사껍데기로 접촉.
배달꾼은 한돌? 나는 안돼요.
박지혁은 특히 3번 항에 적힌 내용을 유심히 봤다. 그리고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얼을 바라보았다.
“이한얼, 넌 이미 가장 적합한 경쟁 기업을 알고 있군.”
“네. 하지만 좀 민감한 문제라서..”
“PLC은 아니지. 굳이 박광혁 개인에 악감정을 가질 리는 없고.
그렇다면 스마트폰 반도체 칩 개발에 관여중이며 과거 전기차 부품 개발 프로젝트를 했던 기업이라면..”
“뉴월드(NW)입니다.”
박지혁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얼, 넌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네?”
“예전, 네 친오빠가 클럽에서 내게 개구리의 비유를 말한 적이 있었지. 맹꽁이가 황소개구리를 이용해서 두꺼비를 죽이는 것.
그것도 네가 생각한 것이냐?”
“....그 개구리 이야기를 지금 말씀하시면..”
“맞냐고 물었다.”
박지혁의 목소리에 노여움이 담겨져 있었다.
왜 저토록 박지혁이 차갑게 돌변했는지는 모르지만, 얼은 어쨌든 박지혁의 뜬금없는 질의에 성실히 응답할 의무가 있었다.
“네. 접니다.”
“후후후.. 그렇군. 나에 대해 철저히 알고 있었군. 그렇다면 송혜정도 알고 있겠지?”
송혜정? 얼의 데이터에는 송혜정이라는 인물이 없었다.
처음 들어 보는 여자의 이름.
열의 머리 속에 순간적으로 NW의 회장 ‘송덕술’ 이름을 떠올렸다.
“혹..혹시, 송덕술 회장의 따님이신가요?”
송혜정이라는 인물을 잘 모르는 듯한 한얼의 모습을 박지혁은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재촉해서 물었다.
“맞아. 그런데 너는 어떻게 NW를 지명한거지?”
“그거야 박광혁측에서 불법적으로 NW 전기배터리 사업부 전문인력을 빼갔으니까요.
NW측에서 그 문제로 박광혁 개인에게 소송을 건다 만다 했었는데,
이례적으로 개인을 적시하여 소송한다고 해서 당시 좀 말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박지혁은 노한 표정을 풀고 다시 부드러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음. 그거였군. NW가 박광혁에 가지고 있는 적개심의 원천을 아직 얼은 모르고 있는 거야.
박지혁은 평상시로 돌아와 다시 캐물었다.
“대가가 재밌군. 상대와 우리가 서로 교환할 카드에 대해 물어볼까? 왜 우리는 전기배터리 사업 부분을 내놓고 왜 저쪽은 AP를 내놓아야 되지?”
“딱 맞을 옷을 놔두고 서로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송덕술 회장은 차 부품 사업으로부터 기업을 일군 사람이고, 각종 기계부품, 기계사업 등으로 추후 전기자동차 부분에 진출하는 것을 꿈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도체 관련해서는 일부 수탁생산한 것이 전부구요.
반대로 SH는 메모리 사업에 많은 투자를 해온 만큼, AP를 개발했을 때 선두주자인 퀄컴의 횡포에 대항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기배터리 사업만큼은 박광혁의 독단적인 판단만으로 추진되고 있으며,
SH그룹 자체가 기계사업과 관련된 시스템 스트럭쳐 구성을 등한시 하고 있습니다.”
박지혁은 박광혁을 죽일 수만 있다면 NW가 무엇이든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도 이런 박광혁의 불법행위에 대한 자료를 NW측에 넘기는 것도 고민을 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에게 풀기 힘든 가장 큰 문제 하나가 존재하였다.
그리고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방법을 지혁은 한얼에게 문의하였다.
“우리가 3번안을 채택한다면, 어떤 식으로, NW의 누구랑 컨택해야 하지?”
한얼이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솔직히 그 이상은 생각을 못했습니다. 3번도 적절한 안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지혁은 한얼의 자신 없는 답변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얼이 송혜정과 박광혁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을 알지 못한다면, 지금 지혁이 제시한 질문에 대하여 답변을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혁, 본인이 그 답을 알고 있었다.
답을 알고 있지만 쉽게 풀 수 없고 피하고 싶은 방정식이기에 최후로 미뤄놓은 것일 뿐.
그는 더 이상 미루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한얼이 지혁의 눈치를 보더니 나머지 4번안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4번안이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현실적이며 실행 가능한 안이라고 생각..”
“됐어. 한얼. 3번으로 가본다.”
“네?”
한얼은 지혁의 결정에 다소 물음표를 달았다.
“3번안은 내가 직접 풀어야 할 일이야. 마냥 미뤄둘 수 없는 나의 문제이기도 해.”
“선배가 직접 관여하면 위험합니다. 문제가 커지면 선배가 노출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4번안도 같이 실행하겠지만, 우선 3번안부터 해결하고 가야 4번도 가능해.”
“선배....”
박지혁은 노트북에서 시선을 돌려, 진지한 눈빛으로 한얼을 쳐다보았다.
“대신, 너도 같이 가줘야 해. 나 혼자는 힘들거든. 네가 필요하다. 한얼.”
부담스러운 시선과 발언에 거북해하는 얼. 살짝 지혁에게서 거리를 두었다.
“같이 가다뇨? 어디를?”
“그룹 2, 3세들의 후계자 모임. 그 곳에 널 데리고 갈 거야. 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