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4화 〉그녀를 갖고 싶기는 하지만 (24/68)



〈 24화 〉그녀를 갖고 싶기는 하지만

얼은 다시 확인하듯 물었다.

“어디요?”
“경영후계자 같은 상류층 자제들이 오는 사교의 장소. 거기에 널 데리고 간다고.”

얼은 자신의 두 팔로 자신의 상체를 감싸 안고서는,  손바닥으로 어깨를 톡톡 쳤다.

“뭐하냐? 너?”
“제 스스로에게 상주는 겁니다. 그런데도 다 가보고 진짜 출세했다, 얼.”

박지혁은 얼의 의외의 반응에 살짝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

“놀러가는  아닌 걸 잘  텐데?”
“즐겁게 일을 해야 능률이 오르죠. 열심히 준비하겠습니다.”
“준비하다니? 뭐를?”
“그런데 까지 가면 밥값은 해야죠. 그 모임에 오는 사람들 명단을 알려주세요.”

박지혁은 얼이 언급한 밥값이 무엇인지를 추측해보았다.

“뒷조사를 하겠다는 건가?”
“저희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 혹은 해가 될 수 있는 사람을  추려보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기서 만날 사람들 파악  하려고요.”
“그건 쓸데없는..”
“쓸데없는 일이 아니죠. 우리가 언제 누구에게서 도움을 받을지 모르니까. 아니면 피해를 줄  있는 사람을 피할 수도 있고.”

한얼의 일리있는 지적에 박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우리가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NW입니다. 후계자 모임에 NW의 경영3세도 참석하는 자리라서 가시는 거 아닙니까?”
“그건 맞다.”
“당연히 NW에 대해서는 철저히 조사하겠습니다.”

박지혁은 눈을 번득이는 얼을 보며, 문득 그녀가  일에 얼마만큼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에너지를 쏟아 부었는지를 가늠해보았다.
아무리 돈을 받고 하는 일이라지만, 최선을 다해서 일 해주는 참으로 고마운 여자.
 짧은 시간 동안, 남들은 일주일 족히 걸릴 복잡한 자금 흐름 추적을 이틀 만에 뚝딱 해치우고 앞으로의 행동방향까지 제시할 정도로 똑똑한 여자.
내가 생각한  이상을 생각하고 움직이는 여자.
그 출중한 능력을 나를 위해 아낌없이 쓰고 있는 이 여자.
잡고 싶다, 이 여자.

―어쩌면 이 여자는 하늘이 내게 준 선물일 지도 모른다.

“저.. 선배.”

지혁의 생각이 얼의 말에 멈추었다. 아무 말 없이 지나치게 얼을 바라보고 있었던 탓인지, 얼은 매우 불편하다는 감정을 얼굴에 나타내고 있었다.

“어?”
“저를 칭찬해 주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그런 시선으로 보지는 말아 주세요. 으, 닭살 돋습니다.”
“후후.. 그런데  그 모임이 어떤 자리인지는 알고 있어?”


당연한 걸 질문한다는 듯 쳐다보는 한얼.

“후계자 모임이라면서요? 저는 비서로서 옆에서..”
“커플모임이야.”
“네??”

입이 딱 벌어지는 얼.

“커플모임 뜻 몰라? 적어도 갓 결혼한 아내나 결혼할 상대, 적어도 애인을 동반하는 모임이라고.”
“아.. 아..”
“넌 비서가 아니고 애인으로써 소개 받는 자리야. 매우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자리가 맞지?”
“아.. 그.. 그게”

얼은 의도치 않는 감탄사만 밖으로 꺼내놓고, 뭔가를 간구하는 눈빛으로 지혁을 바라보았다.

“나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그런 시선으로 보지는 말아줘. 닭살 돋아.”

그의 가볍게 조롱하는 듯한 말투를 반박할 여유가 없는 얼이 간절한 목소리로 말한다.

“제발요, 저 대신 갈 사람 없을까요?”
“없어.”
“아, 저 밀린 과제도 해야 되고, 할 게 많은 사람이라서..”
“넌 대안을 제시했고  그 대안대로 움직이는 거야. 그럼 대안을 제시한 사람이 책임을 져야지.”

얼은 세상이 다 꺼지는 듯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지혁의 굳은 의지를 보건대, 그녀가 그 모임에 빠지는 건 요원해 보였다.

“내 도끼로 내 발등을 찍었군. 젠장!”
“얼, 너 말이 또 거칠어진다?”
“너, 말이 걸걸하고 버릇장머리 없는 사람을 여친으로 해  적 없지?”
“또 반말!”

여차하면 반말을 장전하는 얼을 보고, 지혁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절라 쪽팔려요. 당신 옆의 쌍년을 젠틀맨들이 다 보고 있다고 생각해봐. 그럼 당신도 쌍놈된다니까!”
“거기 안가면, 오늘 수당 안준다?”
“씨이.. 근로계약서에 철저히 싸인받아야 하는데. 사람을 잘못 믿었네.”

씩씩 거리는 얼을 재밌다는 듯 쳐다보는 박지혁.

“복수하려면 그 모임에 가서 날 상놈으로 만들어.”
“진짜 그래버릴까?”
“그럼 수당은 없지.”


수당이 없다는 말에 꼬리 내리는 얼.

“하, 이런 갑질도 없습니다. 세상에.”
“모임참석 하면, 오늘 수당 외, 따로 삼백 주지.”
“...... 진짜요?”


갑자기 관심이 동하는 한얼.
결정적으로 지혁이 액수를 더한다.

“오늘 천. 그리고 2주 후 커플 모임 끝나고 삼백.”
“잠시만요.. 생각 좀.”
“우리 임무가 성공적으로 끝나면 성공수당도 얹혀 줄  있는데..”

얼은 잠시 생각에 잠긴 눈치였다. 곧, 콜을 외친다.

“콜! 대신, 계약서  씁시다.”
“계약서라? 무슨 내용을 집어넣으려고?”
“쓸데없는 터치 금지. 불필요하고 과도한 표현 금지. 남들 앞에서 우리는 애인이라는 것만 보여줄 정도의 최소한의 말과 표현만 하자고요.”

얼은 가급적 상호 터치하지 말자는 강인한 의지를 피력하였다.

“좋아. 대신 나도 집어넣을 것이 있어. 전적으로 완벽히 꾸미고 온다. 내가 지정하는 패션과 스타일로 완벽하게.”
“선머슴을 공주 만들 일 있어요?”
“그 모임에 맞는 드레스코드가 있으니까. 그것은 그 모임의 약속이야.”

두 사람은 소뿔도 단김에 빼라고, 결국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계약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서로 사인을 교환하였다.

“이 계약서 내용 꼭 지키세요!”
“그러지, 너야말로 그 모임에서 상스러운 표현 하거나 함부로 반말하면 벌금 물리도록 할 테니 조심해.”
“적어도 상놈 소리는 듣지 않게 해드릴게요.”
“허허.. 참으로 감사합니다.”

지혁은 순간 한얼의 투정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칫. 오늘 받을 수당, 나만 받는 거라면 애초 자리 박차고 나왔을 건데. 씨이.”

“오늘 자료 분석에 관여한 사람이 더 있었나?”

“이미 선배가 시켜봐서 아시잖아요.  사람.”
“혹시 종철?”
“제가 중국 측 서버를 어떻게 뚫었겠어요? 종철이 도움 좀 얻은 거죠.”

―맞군. 종철도 승지처럼 실력 갖춘 해커였었지.

지혁은 예전, 광혁의 선물투자 건에 대하여 알아보기 위하여 경영기획실 자료를 빼낼 때, 종철의 도움을 받은 일을 떠올렸다.
그래서 쓸모가 있다 생각해서 종철이를 계속 옆에 두고 있었던 것인데, 이렇게 또 이번 일에 관여될 줄 몰랐다.
승지가 오면 종철이와의 관계를 끊으려 했던 것이 애초 지혁의 계획이었던 것인데,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어쩔 수 없지. 종철이도 당분간 안고 가는 수 밖에.

“그럼 오늘 일은  끝났으니  이만 가 볼게요.”

얼이 그의 상념을 깨는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녀는 조용히 그 앞에 손바닥을 내밀었다.
지혁은 가만히 그녀의 길고 맵시 있게 생긴 손가락을 쳐다보았다.

“왜?”
“돈 주셔야죠.”

지혁은 가방에서 현찰 꾸러미를 가져다가 그녀 앞에 내밀었다.

“천만원 맞는지 확인해봐.”
“이거 현찰로 주시는 거, 혹시 추후 있을 계좌추적 때문에?”
“역시 똑똑하군, 친구.”
“근데, 선배, 돈이 많으시네요.”
“외할아버지에게 내 재능을 맡기고 빌린 돈이야. 허투루 쓰지 말라고.”
“흐잉~. 감사합니다.

지혁은 일어서서 화장실로 향하다가, 뭔가 생각난  얼을 보며 말했다.

“그런데, 남녀가 호텔에 같이 들어가서, 여자 혼자 일찍 나가는 건 좋은 그림이 아닌데?”
“네?”
“지금 네가 가는 건 너무 이른 시간이라고. 혹시 지켜보는 눈이 있을지 모르니까, 자정 이후에 나가라는 말이야.”

마침 얼은 지금 호텔 객실 상태가 너무 훌륭하여, 조금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급격하게 밀려오는 피로도 여기서 하루를 묵고 싶다는 욕망을 강하게 느끼게 하였다.
더군다나, 그녀는 유사 시 박지혁 정도는 한 주먹에 제압할 수 있는 무술실력을 갖고 있었기에, 여기에 머물러도 별 탈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남자와 호텔에 함께 있는 건 거림직했다.

“선배 말도 일리가 있네요. 그렇지만..”

그녀의 말을 갑작스럽게 끊어 버리는 지혁이의 놀란 모습. 지혁이의 시선이 얼의 인중으로 향하고 있었다.

“잠깐, 얼. 너?”
“왜.. 왜요?”
“코피 나.”

빨간 피 한 방울이 주르룩 서류 위에 떨어졌다.
곧, 또 다른 피 한 방울이 공기 중에 떨어져 서류 위를 적셨다.
박지혁이 재빨리 일어나서 휴지를 뭉탱이로 가져와서는, 그 휴지를 잘게 자른 후 한얼에게 건네주었다.
한얼은 그 휴지로 자신의 코를 막은 후, 바로 고개를 뒤로 꺾어 손가락으로 콧등을 강하게 눌렀다.

“이틀을 한숨도 못자고 내내 자료 분석을 했던 거지?”
“에휴.. 쩝.. 그게 누구한테는 인생이 걸린 문제잖아요.”
“참으로 미련하군. 잠깐이라도 쉬면서 하지 그랬어?”
“오빠 인생을 망칠 수는 없으니까.”

결국, 얼은 잠시 더 호텔방에 머물게 되었다.
한번 터진 코피가 잘 지혈이 되지 않았던 탓에, 코피가 멈추기를 기다려서 좀 더 있기로 한 것이다.
얼이 코피가 멈추기를 기다리는 동안, 박지혁은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하였다.

샤워를 다 한 후, 가운으로 온 몸을 가리고 나왔을 때, 지혁은 침대에 그대로 쓰러져 자고 있는 얼을 볼 수 있었다.
완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듯, 얼의 이름을 아무리 불러도 전혀 미동도 하지 않는 상태였다.
박지혁은 완전 기절 상태로 쌕쌕 거리며 자고 있는 한얼의 얼굴을 더 가까이 다가가 관찰하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그리고 그의 욕구에 순응했다.

따스한 숨결, 은은한 향,  쉴 때마다 흔들리는 머리카락 한 올, 정기적으로 느껴지는 가슴의 진동, 살짝 떨리는 속눈썹..
 모든 것이 달콤한 시어처럼 박지혁의 가슴에 깊이 박혀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눈에 들어 온 건, 그녀의 이마에 새겨져 있는 아미.

박지혁은 그 무엇보다도 그녀의 이마에 새겨져 있는 아미가 탐스러웠고,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입술로 그 허기진 탐스러움을 메꾸었다.
혀끝에서 느끼는 부드럽고 뭉클한 감촉.
짧은 접촉의 순간에만 살짝 몸을 움찔했을 뿐, 얼은 여전히 깊은 잠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지혁의 몸에서 점차 강한 욕구가 주체할 수 없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 여자를 갖고 싶다. 하지만.

지혁은 그녀를 지금 가져서는 안되는 지에 대한 이유를 절박하게 만들어 낸 후, 불타오르는 욕정을 애써 억눌렀다.
그리고 곧, 가운을 벗고 옷을 주섬주섬 입은  조용히 호텔방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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