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10의 여자
박지혁은 스마트폰으로부터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알람소리 때문에, 힘겹게 눈을 떴다.
그가 누운 상태로 한쪽 팔을 쭉 뻗어 스마트폰을 찾아 시간을 확인하니 오전 9시.
그는 숙취로 인한 두통을 느끼며, 서서히 상체를 반즈음 일으켰다.
자신의 상태를 살펴보니, 옷을 온전히 입은 상태로 침대에 앉아 있었고, 입에서는 아직 알콜 냄새가 자욱하게 풍겼다.
지금 이 룸에는 그 외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박지혁은 다시 침대위로 엎드렸다.
침대보위에서 은은한 처녀의 향기가 풍겨왔다.
그 향기로 그는 한얼을 생각해냈고, 곧 쓴웃음을 입가에 맺었다.
박지혁은 어제 밤부터 오늘 새벽까지 있었던 일을 찬찬히 되감아 보았다.
어제 호텔 바에서 혼자 술을 먹다가, 간만에 은성을 불러서 같이 술잔을 교환한 것 까지는 기억이 났다.
은성이 멱살을 붙잡고 뭔가 험한 소리를 주고받은 것 같기도 하고, 곧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한 장면까지도 언뜻 생각나기도 하였다.
그리고 거기가 끝이었다.
객실에 도대체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사라진 상황이었다.
마침, 그의 스마트폰이 울린다. 발신자는 이한얼. 그는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
<잘 잤어요? 오빠오빠오빠오빠오빠오빠오빠.>
“아침부터 이게 무슨?”
<전 선배 소원대로 했을 뿐입니다.>
소원대로 하다니? 지혁은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내가 혹시 어제 너한테 뭐 실수한 것이 있었나?”
<많죠. 곤히 잠든 날 깨게 만들어 인사불성인 은성씨 처리까지 다 내가 한 거.
무거운 당신 부축해서 호텔방까지 올라온 거. 또, 개진상 피운 거. 와, 한 두 개가 아니네.>
개진상? 그 말에 지혁은 미간을 좁혔다.
“어떤 개..진상을 했나? 내가?”
<제 멱살을 붙잡고 흔들며, 형 말고 오빠라고 불러 달라구.>
“음....”
<그리고 변기잡고 왜 울었데? 누구 이름 부르면서 대성통곡하던데요?>
“미..미안하군.”
<괜찮아요. 미안해 할 필요 없어요. 나중에 피해 보상 신청해서 다 돈으로 받을 거니깐.>
마지막 말 할 때는 얼의 목소리 톤이 고조되어 있었다.
지혁은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하였다.
“당신, 집으로 가는 길인가?”
<집에 가서 씻고 또 나가볼 데가 있어요. 참, 선배. 아침 안 먹었죠?>
“지금 막 일어나서 네 전화 받은 거라, 아침 아직 안 먹었다.”
<거기 호텔 조식은 먹지 마세요. 평가 최악이야. 대신, 인천댁 해장국이라고 맛집이 호텔 근처에 있거든요.
걸어서 5분 거리고. 제가 먹어봤는데 맛이 좋습디다. 거기에 돈 달아 두었으니,
식당주인에게 『영원한 밥줄』 왔다고 말씀하면 선지해장국 하나는 내어 줄 겁니다.>
역시, 이한얼 답군. 엉뚱한 구석이 충만한 여자다.
“영원한 밥줄이라.. 너무 노골적이군.”
<그럼, 월요일에 봐요. 우리가 각자 갖고 있는 USB 보안 신경 쓰시고요.>
그는 한얼과의 통화를 끝내면서, 사소하지만 중요한 문제까지 언급하는 그녀를 개인비서로까지 고용할 생각을 하였다.
물론 그녀가 졸업할 때를 기다려야 하겠지만. 지금이라도 필요하면, 학교를 그만 다니게 하고 스카우트를 할 의향이었다.
어쨌든, 지금은 박광혁 궤멸 프로젝트부터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게 중요하므로 한얼의 고용 건은 더 이상 생각지 않기로 했다.
―USB 암호처리는 승지에게 맡겨야 겠군.
그는 꼼꼼히 짐이나 서류 등을 챙기고 호텔방을 깨끗하게 정리한 다음 체크 아웃을 하였다.
그리고, 곧 한얼이 알려준 식사 장소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속을 달래줄 따뜻한 국물을 생각하면서, 나름 툴툴거리면서도 챙길 건 다 챙기는 그녀가 점점 지혁이의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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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집에 도착하고 나서 바로 욕조로 직행했다.
어제부터 시작해서 전혀 씻지를 못했기 때문에 찌뿌둥한 온 몸에 활기를 넣어주고 싶었고, 새벽의 불쾌한 기억을 개운하게 씻어내고 싶었다.
구은성.
참으로 구역질나는 놈이다.
새벽에 지혁으로부터 술취한 목소리의 전화를 받고 호텔 바(bar)로 급히 내려갔는데, 거기서 구은성을 만날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었다.
나를 보자마자 사냥감을 노리듯 끈적이게 바라보던 은성이의 그 승냥이와 같은 눈빛,
독한 술을 먹고 정신이 없던 그 와중에도 내게 끊임없이 스킨쉽을 시도하던 그 인간의 천박함이 치가 떨리게 싫었다.
재생되는 새벽의 기억들, 은성의 건들거리던 말투가 기억난다.
“그때 그 클럽에서 마주쳤던 여자가 너였구나.”
“......”
“지혁이 고자새끼한테 붙어 있지 말고 나한테 와. 완전 뽕 가게 해줄게.”
그 말 듣자마자 그 녀석 뒤통수에 주먹 한방 날리고 바로 기절시켰다.
워낙 내 펀치가 빠르게 급소를 가격하여, 은성은 자기가 술 먹고 뻗은 걸로 알 것이다.
그래도 대리운전 불러서 집까지는 안전하게 보내드리긴 했지.
왜 지혁은 은성 같은 인간과 같이 어울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런 유형의 인간은 틈이 있으면 배신하고, 철저히 자신의 이득을 위해 살 사람이다.
지혁은 대체 그에게서 어떤 이용 가치를 본 것일까?
어쩌면 박광혁보다도 더 질이 떨어지는 사람일 수도 있을 터.
저런 사람은 박지혁의 앞날에 스크레치를 낼 수 있는 요주의 인물일 것이다.
그리고, 박지혁.
그는 대체 누구일까?
어제 밤, 나는 그대로 골아 떨어졌고, 지혁은 거의 무방비 상태인 나를 건들 수 있었다.
누구나 혹할 미인과 한 공간에 같이 있는데, 당연히 내가 남자라도 신체적 접촉을 시도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를 피해 호텔방을 나가서, 호텔바에서 술을 먹었다.
정말 누구말대로 고자 같은 자식이지만, 이외로 자신의 사람을 아낄 줄 아는 면도 가지고 있는 거겠지.
먼 미래의 목표를 향해서, 눈 앞의 욕망을 참을 수 있는 인내심,
그리고 그 목표를 향해 꾸준히 걸어갈 수 있는 추진력, 이러한 리더로서의 좋은 자질들을 그는 갖추었다.
오늘의 지혁은 내게 절제력과 자기 사람에 대한 애정을 보여 주었다.
세삼, 내가 선택한 박지혁이 기특했다.
나의 선택이, 나의 배팅이 틀리지 않다는 걸 보여주었던 그의 행동들이 고마웠다.
자식. 지금대로만 하다오.
난 샤워를 마치고, 설렁설렁 머리를 말린 후 검은색 트레이닝 복으로 갈아입었다.
한돌 시절부터 입던 옷인데, 나름 편안하여 집에서 항상 애용 중이다.
집에서 편안히 공부하기에는 이 패션이 딱이지.
자, 이제는 효과적으로 과제를 하기 위해서 메씨카움(특수렌즈)을 껴 볼까나!
메씨카움.
헤프가 준 특수전자렌즈로 자체 초격막 투명 칩이 렌즈에 삽입되어 있고, 여타 감마족 장비와 같이 음성인식으로 작동한다.
지구의 인터넷과 연결되어 검색어를 말만 하면 관련 정보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고 하였다.
하피카움(인이어)과 동기화시키면 동영상 소리도 들을 수 있다지?
전투 중에는 라테카움(전자가발)과 연계하여 생체융합지수라는 수치로 상대방의 전투력을 보여준다고도 했다.
나는 이 메씨카움을 전투가 아닌, 내 학교 과제 수행에 유용하게 써먹고 있었다.
정말 말도 안 되게 편리하다.
생각나는 검색어를 말로만 하면 일반 정보뿐만 아니라 분석된 정보도 주르륵 뜬다.
한마디로 손 안대고 코풀기?
모든 과제를 개꿀로 만드는 이것만큼 나한테 소중한 게 없다.
집중모드로, 조직행위론과 경영학원론 수업 과제를 연달아 끝마치고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2시 30분.
종철이를 4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시간이 촉박했다.
대충 컵라면으로 점심을 떼우고, 어제 외출복으로 착복했던 원피스를 다시 입었다.
끙끙 맡아보니 냄새가 나는 것 같아 페브리즈를 뿌렸더니, 인공향이 물씬 풍겼다.
뭐, 발냄새나 암내를 풍겨도 그 녀석은 좋다고 만나줄 인간이긴 하지.
1주 1번 데이트를 고집했던 종철이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거리를 빛내는 미녀의 모습으로 종철이를 만나 주련다.
자식, 행복한 줄 알아야 하는데.
종철이를 만나러 가는 길. 마스크를 얼굴에 쓰고 있어서 다행히 사람들이 집적이지는 않았다.
다만, 원피스로 살짝 드러난 몸매의 윤곽을 대충 곁눈질하는 사람들은 좀 있었다.
남자들은 혹해서, 여자들은 부러워서 발산하는 눈빛이란 걸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하아, 생각보다 사람들의 반응이 너무 잘 보인다.
내가 좀 둔감해 져야 하는데, 오히려 더 민감해 지니, 신경써서 아무 것도 못할 지경이다.
아무래도 다음부터는 보통 사람의 얼굴과 몸매로 변환해서 다녀야 할지 싶었다.
한국대학교 앞 카페 ‘울림’.
예전 다방과 같은 컨셉으로 지하에 위치한 곳이다.
어둑컴컴하면서도 동굴과같은 느낌으로 큰 소리라도 나면 금방 메아리로 돌아오는 공명현상이 심한 곳.
종철은 해커의 습성상 어둠의 경로로 노는 것을 좋아해서 인지, 꼭 카페도 이런 어둑컴컴한 곳을 찾는다.
어두운 조명으로 인하여 눈을 찡그리며 종철을 찾는데, 종철이 날 보더니 손을 들었다.
그리고 그가 있는 테이블로 가서 마스크를 벗었다.
종철이가 마스크를 벗은 내 얼굴을 보고 살짝 흠칫 하더니 평소의 담담한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종철, 만나자마자 뭔가 불만어린 표정인데? 뭐야?”
“난 아무래도 7의 여자를 만나야겠어.”
종철이가 손가락으로 7자를 만들어 나한테 보여준다. 얘, 뭐하는 거지?
“그게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본 건대, 여자의 외모를 1부터 가장 예쁜 10의 척도로 재면, 7 정도를 가진 외모의 여자가 가장 인기가 높데.”
“오호. 근데?”
“넌 10이라 부담스러워. 도통 사람하고 다니는 기분이 안 들거든.”
이게 웬 소 풀 뜯어먹는 소리? 그래도 기분은 살짝 좋았다.
“오홀.. 존예를 거부하시겠다?”
“그냥 넌 예쁠 뿐이지, 아무 감정이 안 들어. 씨바. 난 진짜 서경덕의 피를 타고났나? 나 절라 츤데레한데?”
그가 자랑스러운 듯 말한다.
저 녀석, 남들이 들으면 미쳤다 소리 들을 만 한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한다.
맞아, 해커는 저래야 한다.
남들한테 미쳤다는 소리 듣는 걸 즐겨야 유능한 해커가 될 수 있지.
“돌아, 앞으로 우리 개인적으로 만나면 남자의 모습으로 보자. 씨바. 내가 적응이 안돼.”
사뭇 진지하게 바라보면서 나에게 하는 말.
나를 예전 친구 그대로 대하겠다는 그의 말이 고맙다.
“후후후. 나도 바라던 바야. 나도 돌로 만나는 게 편해.”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수고비 3백 줘야지. 현찰로.”
나는 지혁에게서 받은 현금 뭉탱이에서 따로 챙겨둔 3백만원을 그에게 주었다.
종철이가 싱글벙글하며 현찰을 손으로 하나씩 세어본다.
귀엽군. 이 자식.
“참, 그리고 이 USB 암호 처리 좀 해줘. 무료 서비스로.”
각종 중요한 데이터가 들어있는 USB를 종철이 앞에 내밀었다.
“이것도 돈 받아야 하는데.. 오케이. 까짓 인심 쓰지.”
종철이가 그 USB를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
“야, 그거 진짜 소중하고 조심히 다뤄. 잃어버리면 우리 감옥갈 수도 있어.”
“아이고야. 고객님, 걱정 마세요. 내가 이런 일 한 두 번 하나?”
종철이가 USB가 든 자기 주머니를 툭툭 치며 말했다.
“근데, 종철아. 너 좀 긴장해야겠다.”
“왜?”
“지혁이 형이 더 이상 너한테 일을 시키지 않으려는 것 같던데?”
“에이씨. 의리라고는 밤톨도 없는 새끼.”
3백만원을 자신의 가방에 넣어두고 있었던 종철이가 다소 신경질을 부렸다.
“종철이형이 나름대로 해커를 고용한 거 같아. 그 해커가 뽑은 데이터를 내게 준 거거든.”
“그 해커가 어떤 새끼든 나한테는 안 될 텐데.”
종철은 해커로서 자신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서버를 해킹하는 데 있어서, 절대 자신이 남들보다 뒤진다고 생각안하는 놈.
어렸을 적부터 친구가 없어서 컴퓨터하고만 놀았고, 학급 급우들에게 학폭을 당할 때는 그 쌓인 분노를 해킹하며 풀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해커가 되어 버린 친구.
“내가 개인적으로 봤을 때는 종철이, 네 입이 싸서 문제야.”
“나 사람들한테 남의 비밀 함부로 말하고 다니는 사람 아니라고. 나 과묵한 사람이야.”
“그러냐? 근데 내가 어떻게 지혁이 형의 신분을 알았을까?”
“그..그러게?”
“말 좀 줄여. 네 혀를 조심해야 한다니깐.”
머리를 긁적이는 종철. 내 말을 허투루 듣지는 않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