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재벌후계자 모임에 갑니다.
점차 3월의 추위는 사그라지고, 이제 봄의 기운이 활짝 피는 4월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지혁 선배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바쁜 일이 있는지 모처로 사라지는 경우가 많았고,
나와 종철이는 어김없이 학교 생활을 잘 영위하고 있었다.
중요한 인생의 이벤트를 맞이하기 전까지, 나의 일상은 밥 먹고, 수업 듣고,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집에 오고, 밤늦게 전투훈련을 하는 도돌이표 싸이클(cycle)대로 흘러갔다.
참, 종철이에게 약간 큰 일상의 변화가 생겼다.
어떻게 엮어졌는지는 모르지만, 언제부터인가 그의 곁에 여학생 한명이 은근슬쩍 보이기 시작했다.
한국대 음악대학 재학 중인 승지라고 했던가, 여튼 생일이 좀 빠른 동갑내기인데, 종철이를 찾아 하이애나처럼 돌아다녔고,
종철을 만나면 사납게 쪼아대기 일쑤였다.
종철은 쪼다같이 아무 말 못하고 그 역정을 다 받아내곤 했었고.
내가 보기에는, 그 여학생이 종철의 어떤 약점을 쥐고 있는 듯 했는데, 종철이가 도통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그 사정을 알 수가 없었다.
말조심하라는 내 충고를 왜 나한테만 그리 충실하게 적용하는지 원...
그래서 그냥 내가 내린 결론은, 제법 귀엽고 예쁜 승지가 종철이가 말하는 7의 여자라는 것이다.
어떻게든 그녀와 잘해보기 위하여, 종철이가 고난의 세월을 애써 견디고 있는 것이라는 추정을 해 보았다.
근데, 또 그렇다고 보기에는 승지를 보는 종철이의 표정이 두려움으로 가득 차있기는 한데...
모르겠다. 둘이 알아서 하겠지.
나의 주변도 곧 긴박하게 돌아갔다.
감정이 없었던 헤프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란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고,
앞으로 보름 후 화성에 위치한 감마 콜로니(colony)의 중앙제어 동력장치가 재가동되면,
바퀠라(변종외계인)들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라는 헤프의 전언이 있었다.
이제 정말로 본격적인 전투가 임박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한 인생의 전투도 코앞에 있었다.
바로 나의 존재를 유력한 재벌 자제들에게 처음으로 선보이는 경영후계자 커플 모임.
나는 박지혁 선배로부터 행사 이틀 전에서야 참석 명단을 받았고, 참석자 한 명 한 명 데이터를 취합하여 정리 분석하는 일로 하루를 꼬박 보냈다.
특히 NW그룹의 차기 경영 후계자로 주목받은 송준수에 대해서는 그의 습관에서 경영관까지 얻을 수 있는 모든 데이터를 취합하여 정밀하게 분석하였다.
그리하여 그에 대하여 내린 결론은, “크레믈린같은 수재(秀才)”라는 것.
아마도 박지혁보다 한 두 수 위에 있는 능력자라고 할까?
경영자 모임 참석자 중에는 이외로 뛰어난 인물들이 많았지만, 송준수는 참석하는 모든 인물들의 수준을 쌈 싸먹는 아우라로 빛나는 자였다.
이 자와 치열한 두뇌싸움을 할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오기 시작하는군.
나는 예정대로 지혁의 애인 신분으로 그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피하고 싶었던 신분이었지만, 결국 대사를 위해 나의 불편한 감정은 잠시 접어두기로 하였다.
다행히, 지혁과 사인까지 교환한 계약서도 있기에 불미스러운 일은 없을 거라고 스스로를 자위하면서.
물론, 나중에서야 그게 얼마나 나의 큰 방심이었는지를 깨달았지만.
그리고 기대와 불안으로 점철된, 경영후계자 커플 모임이 열리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목욕재계하고 다시 한 번 참석자들에 대한 정보를 머릿속에 입력하였다.
특별히 이번 일을 위하여, 감마족의 과학 기술을 이용해 먹기로 하였다.
실시간으로 정보를 검색하거나 필요한 정보를 취득하기 위하여 메씨카움(렌즈)을 눈에 끼었고,
반경 최대 500m이내 소리를 선택하여 들을 수 있는 하피카움(인이어)을 귀에 깊숙하게 착용하였다.
오늘은 내가 쓸 수 있는 지능은 모두 써야할 상황.
그 상항을 대비하기 위하여, 헤프로부터 받았던 신경안정제 한 알을 꺼내 먹었다.
고도의 집중력으로 긴박한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한 것이지.
—얼아, 넌 할 수 있어. 자신감을 가져. 넌 최고야.
몇 번씩 나 자신에게 최면을 걸며, 나에게 주어진 이번 기회를 반드시 잡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를 가져본다. 주먹 불끈!
오늘은 오전 수업만 마치면, 오후 스케쥴은 모임의 격식에 맞는 드레스를 착용하고 외양을 꾸미는 것으로 시간을 짰다.
후계자 커플 모임 시각은 오후 6:30분.
시간에 비하여 서둘러야 할 일들이 많았다.
하지만 시간을 아껴 써야 하는 상황 가운데서 생긴 조그만 변수.
지혁 선배가 학교에서 청담동 근처의 미용실까지 친절하게 차로 모신다고 했다가,
바쁜 일이 있어서 오후에 청담동 근처에서 직접 보자는 긴급 메시지를 남겼다.
약속을 펑크낸 것이다.
어쨌든 버스 타고, 걸어서 청담동의 미용실을 찾다가 귀중한 시간을 소비하였다.
생전 청담동 올 일이 있어야 말이지.
땀 빨빨 흘려 걸은 끝에 “현숙부띠끄”라고 쓰여진 미용실 문을 살짝 여니,
파머하거나 커트 중인 이쁜 아줌마들과 아가씨 모습이 보였다.
다들 화사하게 세련된 옷으로 입고 있었는데,
나는 수명이 다한 중고 통돌이 세탁기에서 빨래하여 선풍기로 급히 말린 헌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살짝 내 자신이 초라하고 자존심이 상하...는 거 개뿔도 없고, 오직 아리따운 처자 분들이 앉아 있는 모습만 눈에 들어왔을 뿐이다.
난 애초에 남 비교하여 자기 처지 한탄하는 한가한 투정은 버린 지 오래다. 나 목숨부지하며 죽지 않고 살기에 바쁜데,
그런 걸 어떻게 다 일일이 신경을 쓰겠는가?
“안녕하세요. 손님.”
20대 후반 정도의 미용실 아가씨가 반색하며 나를맞이하였다.
나는 모자와 마스크를 벗고 생얼굴과 단발머리를 보였다.
그 미용실 아가씨가 경탄해 마지않았다.
―미인이시네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미용실 점원은 부러운 듯 내게 속삭였다.
"머리 어떻게 해드릴까요?"
“저.. 박지혁씨 소개로 왔습니다.”
“아, 이리 오세요.”
원장인 듯싶은 미용실 아줌마가 뭔가 야시꾸리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맞았다.
“전 이 미용실 실장입니다. 박지혁씨가 부탁하신 가발과 맡겨주신 옷, 벨트, 그리고 이건 구두네요. 우선, 저희 샾에서 특별히 엘레강트한 포인트를 살리는 메이크업을 하시고, 다음에 얘네들을 착용하시면 됩니다.”
"챙겨서 입어야 할 것이 많네요?"
"남자친구 분께서 꽤 중요한 모임이라고 강조하셔서."
실장이 너무 당연하게 나와 지혁의 관계를 단정 지었다. 아니라고 할까? 아니라고 하기에는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할 듯싶어 그냥 입을 다물었다.
미용실 실장이 가리키는 손끝에 갈색 빛깔이 은근히 풍겨 나오는 가발이 눈에 띄었다.
윤기가 쫘르르 흐르고, 뒷목을 모두 덮을 수 있을 정도로 긴 고급스러운 가발이다.
저 가발을 쓰면, 정말 비단 같은 머릿결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 듯 했다.
머리 카락 끝이 웨이브의 형태로 살짝 말려 들어가 풍성한 볼륨감도 느껴질 정도였다.
실장이 내가 입을 옷을 소개한다.
“이건 크레이프 가공을 거쳐 고급스런 느낌이 나는 네오로멘티시즘 스타일의 투피스입니다.
은은한 클래식 구찌풍의 검은 벨트를 착용하면 더 이쁘실 거 같네요.”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다.
실장이라는 사람의 안내에 따라서, 자리에 앉았다.
실장이 거울 속 내 생얼을 유심히 보고 나서, 양 볼에 보조개를 피운다.
보기 힘든 최고의 재료를 앞두고 즐겁게 고심하는 예술가처럼 보인다.
"손님은, 조금만 기초화장을 하셔도 확 사실 텐데...“
“뭐, 저도 나름 꾸미면 예쁘긴 한데, 제가 평소에 화장을 할 줄도 모르고 잘 안하고 다녀요."
“호호. 지금도 충분히 좋습니다. 혹시 특별히 선호하시는 메이크업 스타일이 있으신가요?”
“몰라요. 그냥 알아서 잘 해주세요. 대충 찍고 발라서 여자다 싶게 만들어주면 되네요.”
미용실 실장이 어이없는지 웃는다. 뭐, 나도 내 답변이 썩 만족하지는 않는다.
사실 나도 격조 높은 사교 모임에 걸맞는 화장법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공부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내가 내린 결론은 자신이 없다면 온전히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
나는 이 미용실 실장의 30년 경험을 전적으로 신뢰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전문가적 솜씨에 내 얼굴을 맡기고 살짝살짝 잠이 들었다.
눈을 살짝 감고 있어서 내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도 알 수도 없었고 그냥 실장의 손 터치가 간지럽다는 생각만 들었다.
미용실 실장이 중간에 말을 걸 긴 하였는데 그냥 의례적으로 답변한 것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알지 못하는 무슨 패션 관련 용어도 한 거 같고.
-네네, 알아서. 네네, 그러세요. 네네, 좋을 대로 해주세요.
이 말들만 줄곧 한 것 같다.
“손님, 다 됐어요. 한번 거울을 보시죠. 그런데 손님..”
“네?”
“농담이 아니고 제가 30년을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활동해 왔는데, 손님 같으신 분은 거의 못 봤습니다.”
그래, 꾸미면 나도 경국지색이다.
결사적으로 안 꾸며서 미워 보이려고 해서 그렇지.
이 몸의 본 바탕은 그 헤프던가 하는 외계인이 심혈을 기울여 디자인한 모델이니까.
화장을 마친 후, 거울 속에 비친 나의 모습을 보았다.
화장의 힘인지, 속눈썹이 더 짙고 길게 보이며 턱 선은 더 가늘어 보이고,
입술은 립클로즈를 발랐는지 반짝이며 촉촉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단발머리는 가발로 덮여져서 선머슴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갈색 빛이 은은히 풍기는 웨이브 머리의 수줍은 아가씨가 내 앞에 있었다.
내가 뇌 이식 전 남자였다면지금 거울 속의 여자에게 한눈에 반해 밤을 몇 번 샜겠다.
진짜 곱다. 이쁘다.
그러한데도 이 미인은 나와 동화되지 않고 아직까지 어색하다.
두뇌는 과거의 나인데 나머지는 이름 모를 타인의 형상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나 자신을 가리기 위해, 거죽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뒤집어 쓴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
“진심으로 어떤 연예인보다 아름다우신데, 왜 평소에 패션에 신경을 안 쓰시는지.. 머리 좀 기르시고,
렌즈 끼시고, 기초화장만 조금 하시면 정말 몰라보시겠네요.”
“귀찮아서요. 그냥. 남자들이 따라다니면 귀찮으니까. 전 남 시선에 구속되지 않고 마음 편하게 사는 게 좋습니다.”
정말로 귀찮습니다.
하루에 꼭 한 번씩 누군가가 ‘저기요.’하고 다가설 때면,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신경 쓰는 것도 매우 귀찮은 일이지요.
“자, 이제 옷을 입어 보세요. 아마 이 투피스라면 손님의 미모를 더 빛나게 해드릴 거여요.”
커튼을 친 밀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으려는데, 아줌마와 처자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모아지고 있었다.
-죽고 나서야 볼 수 있는 천사를 살아 생전 보시다니, 댁들은 운이 좋은 겁니다. 힛.
가끔 나한테도 허파에 바람 들 날이 필요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