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준비 다 되었습니다.
나는 지금 편의점 의자에 앉아 캔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1+1 묶음 판매로 산 캔커피.
그 중 하나를 다 마시고 나머지 하나로 얼굴에 흐르는 땀을 식히는 중이지.
땀을 닦은 이 캔커피를 지혁이 줄까 혼자 마셔버릴까 고민하고 있는데,
여기 편의점 알바하는 젊은 남자가 흘긋흘긋 나를 쳐다본다.
예전에 나도 알바 경험이 나서, 수고한다며 웃어주었다.
그냥 별 뜻은 없었는데.
그가 고개를 숙이며 내 시선을 피해버렸다.
살짝 당황스럽군.
그나저나 지혁이 녀석, 급하게 이곳으로 달려오면, 목이 마르기는 할 거다.
소매로 캔커피 뚜껑 따는 부분을 쓱싹쓱싹 닦았다.
이거, 지혁이한테나 줘야지.
편의점 창 밖에 제법 있어 보이는 외제차 한 대가 섰다.
그 차에서 익숙한 얼굴이 내린다.
약간은 밥맛인 인물, 지혁이다.
지혁이가 다소 얼빵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펴보다가 유리창 너머 내 시선과 마주쳤다.
씩 사람 흘리는 웃음으로 웃어주었다.
지혁이도 나를 따라 바보같이 웃어주다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지금 도대체 누구에게 웃고 있는 것인지, 웃고 나서 새삼 헷갈린 거다.
그가 스마트폰을 들어 연락하며 나를 쳐다본다.
내가 스마트폰을 받지 않자, 다시 고개를 꺄우뚱하며 편의점 안으로 들어온다.
지혁선배가 ‘이 발직하고 요상한 것’ 대사를 입에 뿜으며, 안광이 형형하다.
“너 이한얼 맞지? 왜 전화 안 받아?”
별 거 아닌 것 가지고 저 자식이 짜증내니, 나도 슬 열 받는다.
“서로 마주 보고 있음 나인 줄 알 텐데, 굳이 통화할 필요 없잖아요.”
“분장을 그리 해대서 사람이 변했는데, 내가 헛갈릴 만하잖아!”
“분장을 그리 안 해도, 전 평소에 충분히 예뻤습니다.”
지혁이가 벙 쪄 있다. 뭐, 어떤가? 사실인데.
“겸손한 척이라도 좀 하지 그래. 겸손 할 줄 모르나?”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그가 말을 좀 재수 없게 뱉는다. 음.
어벙하게 날 보고 실없이 웃었던 것에 대한 쪽팔림이 있어서 저러나?
“칫. 지혁씨가 약속시간보다 늦게 왔으니 벌금 내야하지 않나?"
“정말 날 못 뜯어 먹어서 안달이군."
“좀 뜯기면 어때요? 그렇게 베풀며 사는 거지."
“뜯기면 호구지. 그게 자선사업가인가?”
이 자식, 평소보다 좀 까칠하게 나오는데?
지혁이의 기분이 별로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씨바, 이딴 자식 주려고 캔커피를 왜 챙긴 겨?
편의점을 나가면서 캔커피 남은 하나를 편의점 알바님께 말없이 건네주었다.
근데 점원이 그 캔커피를 자기 볼에 한참 갖다 댄 후 다시 선반에 둔다.
그 캔커피 당신 마시라고 준 건대.
지혁의 차를 타고 가면서 나는 가슴에 손을 안고, 급하게 치솟아 오르는 심장박동을 애써 억누르고 있었다.
다소 창백해진 내 얼굴을 보며, 지혁이 차 앞좌석 수납공간에서 생수를 꺼내 건네었다.
“마셔봐. 나름 진정이 될거야.”
“네. 지혁씨. 감사합니다.”
“좀전부터 계속 날 지혁씨라고 그러는데, 평소에 부르던 대로 부르지?”
“사람들 만나는 자리에 가서, 형이라거나 선배라고 부를 수 없으니까요.
오빠는 너무 경박하구요. ‘지혁씨’가 가장 무난해서, 지금부터라도 그 호칭을 입에 붙여두렵니다.”
나는 차가운 물을 목에 넘기지 않고 잠시 입에 물었다.
건조한 입안에 습기를 가득 담아두기 위한 내 나름의 노력이였다.
“근데, 지혁씨, 후계자 모임이 열리는 장소가 구체적으로 어딘지요?”
“서울 외곽 경기도에 있는 호화로운 파티하우스를 빌렸지.
제법 규모가 큰 자택에 정원이 딸린 고급스러운 곳이야.
재무컨설팅을 주로 담당하는 맥킨코리아 파이내스 차희석의 소유이고.”
오늘 파티가 열리는 장소에 대해서는 미리 공개되지 않았었다.
공개되지 않았던 이유는, 혹시라도 언론이 냄새를 맡고 잠입취재를 할 가능성을 대비하자는 것으로,
당일 참석자들에게만 파티장소가 서면통보된 것이다.
―차희석이라...
나는 그에 대한 분석 내용을 기억해 내었다.
차희석. 재무컨설팅 재계2위맥킨코리아 파이낸스의 기획 본부장.
MATT가 맥킨코리아에게 투자유치 컨설팅을 의뢰했고, 그 컨설팅을 주관했던 책임자.
그 과정에서 MATT의 재무기밀 정보를 빼내어 박광혁의 MATT 채권 매입에 도움을 준 인사.
컨설팅업체는 그 컨설팅을 의뢰한 회사의 기밀정보를 유출할 수 없다는 기밀유지협약 때문에 차희석이 부린 술수는 바로 해킹 사주.
MATT의 정보가 담겨있는 맥킨코리아 파이낸스 서버와 SH그룹 서버를 동시에 해킹토록 해커들에게 사주를 넣은 것.
종종 해커들이 해킹한 두 기관의 정보를 스와핑(맞교환)해버리는 치기어린 장난을 한다는 걸 이용하여,
자연스럽게 맥킨코리아 서버 안에 있던 MATT의 정보를 SH의 서버로 이관.
최종 결과는, 채권을 야금야금 사들인 SH가 적대적 M&A를 통해 MATT를 흡수.
확실한 증거는 없으나 분명히 심증으로는 그랬다.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차희석, 그는 적색분자(적대적 세력)이며, 잔머리와 술수가 뛰어나지만,
인성과 품격은 갖추지 못한 인사라는 것이다.
차희석을 파면, 분명 맥킨코리아 파이낸스와 박광혁간의 불법적인 거래를 밝혀낼 수 있을 텐데,
박지혁이 차희석에 대한 나의 조사를 꺼려하는 눈치이다.
박지혁과 차희석 사이에 또 어떤 관계가 있는지 궁금해진다.
이 문제는 추후 천천히 파보도록 하고.
나는 우선 내가 갖고 온 장비를 키기로 하였다.
조용한 목소리로 ‘메씨안(메씨카움 전원 온)’과 ‘하피안(하피카움 전원 온)’을 나직이 외쳤다.
저주파의 파동이 살짝 느껴지면서 렌즈를 통해서 각종 수치와 문자가 리스트업되고 있었고 동시에, 귀에서는 초소형엔진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메씨카움과 하피카움의 작동이 시작된 것이다. 렌즈를 통해 나타난 시작 메시지.
『배류슈테츠(환영합니다.). 필요한 정보나 검색어를 메씨를 붙여서 발음해 주십시오.』
이제 장비 세팅은 완료했다.
대충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난 몇가지 궁금한 점을 지혁에게 물었다.
“이번 모임은 왜 커플모임이 된 건지요?”
“굳이 커플만 가능하다고 한 건 참석자 수를 제한하기 위한 거야.
어중이 떠중이가 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커플로 참여한 상대가 서로를 보증하는 거지.
중요한 사람이라는 걸.”
“근데 난 중요한 사람이 아닌데? 같은 과 졸업동기일 뿐이잖아요.”
“간혹.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을 데려오는 사람도 있어. 그러니까 재벌 2세, 3세 남자랑 일반인 여자.
혹은 그 반대의 경우도 있고. 그 때는 있는 집 자식 측에서 확실히 보증해 줘야해. 내 짝이 이 그룹에 어울릴 만한 클래스가 있다는 걸.”
일반인이라.. 지혁이가 은근슬쩍 아무렇지도 않게 계급을 나눈다.
“그럼 혹시 데려온 상대가 그 그룹에 어울릴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를 테면 나!”
“그럼 문제 일으킨 당사자를 비롯하여 그 사람을 데려온 사람은 재벌가 자제라도 한동안 출입 못하지.
클럽 규약을 어긴 죄로. 이런 사교 모임은 언론에서 민감하게 반응하잖아.
그래서 신원을 모르는 일반인이 이런 모임을 언론에 제보하면 골치 아파지니까.”
“훗. 재밌네요. 제가 언론에 알릴까요?”
지혁이가 장난스럽게 나를 노려보았다.
“그래도 깽판은 치지 말고, 내 옆에서 애인인척 하면서 NW일 처리하고, 먹을 거 먹고 즐기다 가.”
“오케이. 배불리만 먹여주시면 아무 문제없습니다. 어우, 정말 배고프다. 아침부터 계속 긴장하고 돌아다녔더니.”
내 말이 끝나자마자 그가 잠시 차를 길어깨로 몰고 가더니 멈추어 섰다.
“이제 여기서 10분만 가면 목적지야.”
“근데, 왜 여기서 멈추세요?”
“너한테 줄 게 있어서.”
박지혁은 앞좌석의 수납장으로부터 고급져 보이는 포장봉투를 꺼냈다.
“이게 뭐죠?”
“안을 열어봐. 이거 때문에 내가 오늘 정신없이 돌아다녔으니까.”
내가 그 포장봉투를 열자, 화려하게 빛나는 귀금속 세트가 보였다.
0.5 캐럿이 박힌 다이아 반지, 크리스탈 블루 사파이어 목걸이, 그리고 사파이어 주위를 0.1 캐럿 다이아가 촘촘히 박힌 귀걸이.
“예.. 예쁘긴 하네요.”
“그거 착용하라고. 지금 이 상태로 밋밋하게 갈 수는 없잖아.”
“저, 이거 안 해도 되지 않을까요?”
“이한얼, 잘 들어. 이건 너를 꾸미기 위해서 산 게 아니야. 네가 내 애인의 타이틀로 참석한 이상은 SH그룹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는 거야. 내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겠지?”
“격에 맞게 놀아라... 그거군요.”
“맞아. 격에 맞게 놀기 위해 이것들이 필요한 거야.”
이렇게 되니 어쩔 수가 없었다. 모든 보석들을 다 착용할 수 밖에.
다행히 그가 사온 반지는 내 넷째손가락 마디에 딱 맞았고, 귀걸이도 어쩌다 잘 끼게 되었다.
다만 목걸이를 제대로 하기가 쉽지 않았다. 혼자 끼워보려고 낑낑 거리다가 결국에는 그의 도음을 요청했다.
“지혁씨, 이 목걸이 좀...”
나는 양 손으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들을 모아 쥐고 그에게 내 하얀 뒷목을 내밀었다.
지혁선배가 목걸이를 조심스럽게 손에 쥐더니, 내 목 주위로 목걸이를 조심스럽게 걸었다.
목 주위로 간지럽게 느껴지는 그의 떨리는 손가락이 애처럽게 느껴졌다.
-풋~
그냥 웃음이 나왔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간신히 채운 목걸이.
나는 내 외모에 악세사리로 걸려있는 반짝이는 것들의 안부를 그에게 물었다.
“어때요?”
“...........”
말을 못하고 얼굴이 발개진 지혁을 보면서 나는 장난이 동했다.
이걸 내가 못 참지.
“오빠. 그렇게 제가 사랑스러운가요?”
“가..가자. 시간 늦었다.”
그가 방긋이 웃고 있는 나를 애써 외면하고 차의 시동을 걸었다.
내가 너무 장난이 심했나? 너무 과분한 표현을 써서 그런가?
분위기가 살짝 이상해졌다.
지혁, 이 녀석이 전방에만 시선을 둔 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근데 너와 관련하여 한 가지 꺼림직스러운 것이 있어. 전혀 쓸데없는 기우일 수도 있는데..”
지혁이가 잠시 말을 끊었다.
이거 나의 호기심을 유발하는 녀석의 전략인가? 미칠듯한 궁금함으로 되물었다.
“그게 뭐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