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8화 〉박지혁의 애인 (28/68)



〈 28화 〉박지혁의 애인

지혁이 운전하는 차는 파티하우스의 정문을 지나서 주차장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일몰의 오렌지 빛깔을 받아 반들거리는 벤트리 슈퍼플라잉이 중후한 엔진소리를 발산하며,
이름만 들으면 ‘헉’소리가 날 정도의 외제차들의 무리 안에 자연스럽게 안착했다.
지혁이가 차의 시동을 끄고, 엔진브레이크를 올린 후, 좌석벨트를 풀었다.

"자,  왔습니다"
“운전하시느냐고 수고하셨습니다. 지혁씨.”
“얼, 나가지 말고 잠시만 여기 앉아 있어.”
“네?”

그가 차 밖으로 나간 후, 시종이 귀족 영애를 모시듯 조수석 문을 정중하게 열었다.

“Mademoiselle, Sortez de la voiture (마두모아젤, 차에서 내리시지요.).”

그의 갑작스러운 불어에 나는 또박또박하고 침착하게 불어로 응대하였다.

“Merci Beaucoup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외네? 불어를 다 알고.”
“『감사합니다』 정도는 6개 언어로 알고 있어야죠.”

나는 그의 손을 가볍게 쥐어 잡고는, 하얀 허벅지를 차 밖으로 조심스럽게 내밀며  높은 힐로 땅바닥을 지탱하였다.
처음 신은 하이힐에 발목이 나갈 지경이었다.

“치마입고 내리기가  불편하네요.”
“자주 이렇게 내리면 좋겠군. 허벅지 속이 다보여서.”

나는 그를 매섭게 흘겨보았다.

“제가 지금 선배를 어떻게 해드릴까요?”
“음.. 장난이라고 가볍게 넘기거나, 수줍은 듯 웃으며 참아주면 되지 않을까?”
“흥 말도  돼는 소리!”

지혁의 복부에 가볍게 잽을 뻗었다. 복부에 정확하게 명중.

“욱! 이..이건 아프잖아.”
“쓸데없는 말 하지 말자고 그랬죠?”
“그.. 긴장된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그러다 골로 가십니다.”

나는 가볍게 경고했다.

“잊지 마세요. 딱 필요한 만큼의 접촉. 딱 필요한 만큼의 말”
“얼.. 지금  순간이  접촉이 필요할 때 아닌가?”

그가 강타 당한 자신의 복부를 왼손바닥으로 비벼대면서, 자연스럽게 오른팔을 내밀었다.

“내 팔에 네 팔을 얹혀 줘야지? 우리가 연인이라는 걸 보여줘야 할 시간인데”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 팔짱이라는 것을 껴주었다.

그와 나는 어색하게 팔짱을 끼고 천천히 연회장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잠시 하나의 생각에 사로 잡혀, 가던 걸음을 멈추었다.
나의  소리는 그의 구두소리에 먹혔고, 그는 잠깐 뒤떨어진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지혁씨에게 답을 들어야겠어요.”
“어떤 것에 대한?”
“지혁씨가 내게 솔직히 말해 주셔야  게 두 가지가 있는데요..”

잠시 주저했다. 이 질문을 던지면 그의 반응이 어떻게 나올지 예측이 되지 않았다.

“말해 봐. 최대한 솔직하게 말해주지.”
“첫번째는, 박승지와 차희석, 두 사람간의 관계.”
“....!”

아무 말도 못하고 당혹해 하는 지혁.
그의 입에서 ‘네가 그걸 어떻게..’라고 중얼거리는 듯하였다.
나도 처음부터  관계를 떠올린 건 아니었다.
처음에 종철로부터 박승지의 이름을 들었을 때, 그 승지가 내가 아는 SH그룹의 그 승지임을 매칭하지 못했다.

그러나 승지가 표면적으로 음대를 다니는 해커라는 것, SH그룹이 해킹당한 방식,
그리고 차희석의 해킹 사주로부터 나는 문득 어떤 연관성을 유추할 수 있었다.
승지가 희석을 이용했거나 혹은 희석에게 이용당했거나.

“두 사람 관계가 혹시 연인관계였나요?”
“그.. 그건..”

지혁이는 쩔쩔 매고 있었다.
어떻게 말할지 고민하는 듯 하였다.

“그 건은 뉴월드건과는 상관없는 문제이지 않나?”
“박광혁과 관련이 있으니까요.”
“그 문제는... 나중에 말하자.”
“혹시, 동생 때문에, 그러시나요?”
“...................”
“동생이 차희석에게 괴롭힘을 당한 거죠?”

그가 불편해하고 괴로워한다.
그렇다면.. 할  없지.

“휴우.. 알았어요. 그럼 다음 질문으로 넘어갈 게요.”

그때였다.

“하하, 이게 누군가. 이게 거의  년만인가? 지혁아, 반갑다.”

은색 안경테에 위로  찢어진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사내가 인사말과 함께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샤프하고 깔끔한 인상이 매력적인 제법 잘 생긴 남자.
아마도 그는 차희석?
지혁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지혁의 얼굴에 올라온 차가운 눈빛과 경멸을 담은 냉소.
곧 지혁은 얼굴 표정을 다시 고치고서는, 분노를 가장한 반가움을 내비쳤다.

“오래만입니다. 희석 형님.”
“정말이지, 지혁이,  얼굴 보기 힘들다. 좀 자주 만나서 이야기  하자.”

이 작자, 웃는 미소가 어딘지 가려짐이 있다.
곧, 그의 비릿한 웃음이 그대로 나에게로 왔다.

“네 옆에  계신 숙녀분의 미모가 찬란하여 눈을 뜰 수가 없는데, 한마디 말을 건네  기회를 주지 않겠나?”

나를 보고 하는 말?
 희석이라는 인간은 쓸데없이 기름을 잔뜩 발라 놓은 발언을 하였고, 그것을 듣는 나는 동맥경화가 일어날 지경이었다.
나는 그렇다 치고, 지혁이가 우물쭈물 가만히 서 있었다.
저 자세를 취하면 상대방에게 얕보일 텐데.
안되겠다 싶어, 내가 나섰다.
거북한 인사말을 지혁에게서 듣기보다는 차라리 내가 하는 것이 더 낫기도 하고.

“안녕하세요. 지혁씨와는 한국대학교 같은 경영대학을 다니고 있는 이한얼이라고 합니다.
지혁씨와는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애인 사이 입니다.”

내가 습관적으로 악수 자세와 함께 인사말을 건네자, 희석이라는 사람의 눈빛에 뭔가 이채가 서렸음을 느꼈다.
근데, 지금 내가  한필 악수를 청했지?
살짝 희석이라는 작자가 재밌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기분이 나빠졌다.

“정말 반갑습니다. 저는 차희석이라고 합니다. 지혁이가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했더니 그 이유를 알겠군요.”

뺀질이 같은 놈. 내가 악수하려던 손을 빼려고 하려는 찰나에 그가 그새 내 손을 조용히, 그러나 다소 힘을 주어 잡으며 말했다.
아프다, 이 씨댕아.

“저기.. 이 손을 좀 놔주시면.”
“아..네. 죄송합니다.”

이 모습을 애써 담담하게 지켜 보던 지혁이가 말을 이었다.

“형님은 여기 혼자 오셨습니까?”
“후후, 글쎄다. 네가 승지를 데려올 줄 알고, 혼자 왔는데. 조금 섭섭한 걸.”

그 말을 듣는 순간, 지혁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걸 놓치지 않는 희석의 눈빛이 날카롭게 느껴졌다.

“승지가 나랑 이런 자리 오면 좋아했을 텐데. 직접 승지에게 이야기 할 걸 그랬어.”

희석의 목소리에 지혁이를 노리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지혁은 그를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나는 그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
제발 흥분하지 말라고.
제발 적 앞에서 속을 쉽게 드러내지 말아달라고.
그의 주먹이 흔들리기에, 내 손을 그의 주먹위에 얹었다.
그가 주먹을 피자, 나의 손이 그의  마디마디 사이로 들어가 깍지를 꼈다.
그의 분노가 진정된 듯했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승지의 이름이 희석의 입에 올라갈 때마다 지혁이가 과민반응을 보인다는 것.
그 반응으로 인하여 나는 내가 던진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럼, 내 보스를 지금과 같은 상황에 그대로 놓아둘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반격을 해야지.
내 보스를 힘들게 한 죄를 지금 갚아주고자 한다.

“참 차희석씨, 혹시 맥킨코리아 컨설팅 담당자 맞으시죠?”
“네? 아, 제가 무엇을 하는지 아시다니. 영광입니다.”
“그럼요. 경영학 수업시간에 컨설팅의 사례로서 자세히 소개가 되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본격적으로 들어가 봐야지.

“그래요?”
“마케팅 근시(Marketing Myopia)! 성장전략을 짤  고객의 니즈를 파악하여 사업의 방향성을 설정하고,
절대로 지나간 영광에 목매지 마라. 마케팅의 기본 원리죠.”
“그런데 그게 저희하고 무슨 상관인지?”
“엑센 컴퓨터, 잘 아실 겁니다.”

순간, 차희석의 얼굴이 확 변한다.
엑센컴퓨터에 컨설팅을 제공한 책임자가 차희석임을 본인이 알 것이다.

“한 투자자문 기관이 치명적인 제안을 내놓죠. 메인프레임 중심의 기업용 컴퓨터를 생산하여 성장한 엑센에게,
거대 빅데이타센터를 건립하고 데이터허브를 구축하라.
과거의 기대에 안주하여 엑센이 잘 할 거라 착각해서 내놓은 제안이죠.
그 제안으로, 소프트웨어 중심의 컨설팅 기업으로 가자는 내부의 목소리가 깡그리 묻혀 졌고,
결국은 엣센이 워크아웃 지정 직전까지 내몰리게 되었다죠?”

차희석이 내 어여쁜 용모를 쬐려 봅니다.

“초연결시대라는 세태에, 계속 공룡의 체구를 유지하도록 한 그 유명한 제안을 내신 분을 만나는데 어떻게 안 설렐 수가 있겠어요?”
“이.. 여자가..”
“마케팅 근시가 주는 교훈, 기업뿐만 아니라 사람 사이에도 유효하죠.”

이제 최후의 한방을 깝니다.

“과거의 사실에 목매어, 그 누군가 자기를 계속 좋아해 줄 거라 착각하는 모양인데, SH의 왕관 자리가 그리 만만하지는 않을 거란 말입니다.”
“당신 뭐하는 여자야!”

이런 반응  줄 알았다.

“말씀드렸잖아요. 전, 박지혁의 애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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