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완벽한 비서 이한얼
차희석.
샤프하고 냉철한 사람처럼 보이기를 원하지만, 사실 그는 매우 다혈질적인 사내였다.
지적인 스타일로 자신을 연출하려 하지만, 결국 몇 마디 말을 하다보면 감정을 드러내 보이지.
자존심도 무지 강하기 이를 데 없어서 남이 자기에 대하여 싫은 소리 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나는 차희석의 아킬레스건과 같은 과거의 실패를 지적했고, 지금 그의 입에서 상스러운 욕이 내게로 향하고 있었다.
‘쌍년.. ****를 찢어 버릴까보다’
하피카움(인이어)으로 그의 중얼거림이 여기까지 선명하게 다 들린다.
저 욕을 들어도 과히 기분이 나쁘지 않다.
다만, 저 새끼는 언젠가 꼭 손 보겠다는 의지가 돋는다.
격노에 빠져있는 차희석을 뒤로 하고, 나와 지혁은 연회장으로 향했다.
“얼, 고맙다.”
지혁이 짧고 굻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뭘요? 내가 뭘 했는데?”
“날 대신해 나서 준 거.”
그가 부쩍 거리를 내게로 좁혔다.
지혁의 따스한 눈길이 좀 그렇다.
“아직 시작도 안했어요. 오늘 감사할 일 많을 걸요?”
“그렇군. 근데, 상대를 너무 격분케 한 건 아닐지?”
“어차피, 저 자식은 절대로 아군이 될 수 없어요. 차라리 대놓고 저격하는 게 더 좋은 방법일 겁니다.
더군다나, 상대를 흥분시켜 일을 망치게도 할 수 있고요.”
“하지만 네가 다칠 수도 있을 텐데?”
오호, 지혁이가 날 걱정해 주는 건가?
하지만, 너는 날 걱정해 주지 않아도 된다.
나의 싸움실력은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그 이상이니까.
“걱정은 감사합니다만 그 걱정은 우리 적에게 해주시죠?”
“후후. 항상 자신만만하군. 우리 비서께서.”
“잠깐. 잠시만요. 지혁씨.”
메시카움(특수렌즈)에 미리 체크해 둔 한 인물의 이미지가 올라왔다.
다소 체구가 있어 보이는 듬직한 인물.
나의 또다른 사냥감인 그가 근처에 있다는 것이지.
“왜 그러지? 얼? 무슨 일인데?”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잠시 제가 생각할 게 있어서요.”
“아, 그래? 이제 당신이 생각할 것이 있다고 하면, 기대가 되는데?”
피식.
내가 그 기대를 오늘 확실하게 충족시켜 줄 테니 두고 보라고요.
근사한 저녁식사가 차려져 있는 야외 연회장.
연회장 한 칸에는 클래식 퀸텟(오중주 악단)이 자리 잡고, 클라리넷 5중주 B단조 작품번호 115번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내가 클래식을 잘 알아서 아는 게 아니다.
하피카움(인이어)이 음향정보를 분석하여 메씨카움(특수렌즈)에 전달하고,
전자 콘텍트렌즈에 그 곡명이 프린트되어 있는 것을 읽었을 뿐이다.
어쨌든, 그 은은한 클래식 연주가 연회장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키고 있었다.
“저 음식들을 보니 식욕이 돋는군. 얼, 배고프지 않나?”
“지혁씨, 우리 저녁 먹기 전에 어페타이저로 누굴 한 명 쌈 싸먹어 볼래요?”
무슨 일인 듯 싶어서 눈을 껌벅이기만 하는 지혁.
저런 표정은 참 귀엽다.
표정 푸세요. 식인종 되자는 이야기 아닙니다.
<우리가 만족시켜야 할 사냥감이 바로 앞에 있어요.>
내가 그의 귀에 속삭였다.
지혁이가 간지러운지 눈썹을 좀 찡그렸다.
<이청수 온우리 유통사업 본부장?>
<네. 맞아요.>
<저 사람은 우리와 크게 관련이 없는데..>
바보. 이렇게 몰라서야.
<온우리가 SH캐피탈 지분 8프로를 가지고 있죠.>
<그..그런가?>
<잘하면 우리 우호 세력으로 만들 수 있는 타겟이라고요.>
우호세력을 만든다.. 중얼거리는 지혁이 또 멍청한 표정을 짓는다.
오늘 바보가 많이 되시는군.
<어떻게?>
<이청수 본부장은 온우리그룹 이장열 회장의 둘째라는 건 아실 거여요.
실력은 뛰어난데, 장남이 아니다 보니 후계구도에서 살짝 밀리는 상황이라, 지금 실적을 보여 주는 게 급한 상황이죠.>
<근데, 그에게 줄 수 있는 게 있나?>
<있죠. 그가 지금 갖고 있는 고민의 열쇠.>
아마 저 사람은 그 고민 때문에 오늘 제대로 식사를 못할 것이다. 제대로 근사한 저녁을 잡수실 수 있게 해드려야지.
<고민의 열쇠?>
<이청수 본부장의 큰 업적은 미국 랜토프 코퍼레이션과 협력하여 메가쇼핑몰인 랜토프를 한국에 입점시킨 것이죠.
그걸로 온우리그룹 매출에 상당부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구요.>
지혁이가 믿지 못하는 눈빛으로 날 보고 있었다.
별 것을 다 조사했다는 눈치이다.
<그런데 요즘 지자체에서 계속 랜토프 입점을 막고 있어요.
특히, 동부경남지역에 그룹 전체가 역점을 두어 랜드마크 개념으로 추진 중인 랜토프와 쇼핑파크가 계속 지자체의 완강한 벽에 막혀있는 부분이고.>
<그 책임자인 이청수는 지금 그 문제로 예민할 것이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우리가 그에게 사이다를 준다면 어떨까요?>
<그게 뭔데?>
지혁은 그 사이다를 빨리 알고 싶은 눈치였다.
살짝 뜸들여 볼까? 아님, 그냥 입을 닫아 버릴까?
좀 시간 간격을 두었더니, 지혁이가 몸이 단 듯 하였다.
재밌네, 이 장난. 그래도 말해줘야겠다.
<랜토프의 입점을 가장 격렬하게 반대하는 곳은 한 시민단체이죠. 『지역상권살리기 연합회』.
그쪽에서 가장 영향력이 크고, 심지어 지금 부울 시장도 그쪽 출신이고. 또 한축은 토착지역기업이라고 하는 명설기업.
만약에요, 시민단체와 명설기업, 공공기관, 특히 시장 라인 간 이 트라이앵글 액시스(축)에서 투명하지 못한 자금의 흐름이 발견되었다면 어떻게 될까요?>
<결정적인 증거가 있나?>
<지역상권살리기 연합회에서 다량의 수상한 거래내역서와 돈을 슈킹한 흔적이 나왔어요.
거기들 다 뒷돈 받아먹고 돈을 빼돌린 것에 대한 명확한 흔적. 거래 출처까지 다.>
내가 이 자료를 알게 된 것은, 다 각종 은행이나 공기업의 서버를 해킹할 수 있는 헤프의 컴퓨터 덕분이다.
그리고 종철이도 좀 도운 것이고.
<동부경남지역 및 부울시 사는 소비자들은 랜토프가 오기를 고대하고 있어요. 여론에서 이미 우위를 점하고 있으니까.
이 자료를 가지고 그쪽 시장과 딜을 해보시거나, 아님 검찰에 고발하시거나. 뭐.. 그 이후는 이청수 본부장이 알아서 하겠죠?>
나는 지혁에게 USB를 건네주었다.
지혁은 또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이 세 번째.
<지혁씨, 경남쪽 지역에 행사 마케팅을 담당하는 SH지점이 하나 있어요.
우리 지점도 랜토프가 오면 이득을 취할 수 있으니까. 그쪽을 통해서 투서된 자료라고 하세요.>
지혁이가 멍청한 표정을 지우고 웃었다.
활짝.
그래, 보기 좋습니다.
“그에게로 가셔서 잘 말씀하세요. 파이팅.”
그에게 주먹을 쥐어 보였다.
이야기가 잘 된 모양이다.
이청수라는 사람이 매우 감사한 표정을 짓고서는 지혁이에게 허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우리는 이청수에게 강력한 무기를 건네 주었고, 이청수는 나중에 우리의 지분 확보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든든한 받침대를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지혁이가 활짝 웃으며 나한테로 오고 있었다.
저거, 너무 좋아해도 안 되는데.
지금까지 감정을 잘 숨기고 살았는데, 오늘은 팔불출처럼 자신의 감정을 다 드러내보인다.
자, 밥 먹기 전까지 대충 해야 할 일들은 다 했다.
그럼 열심히 밥을 먹고, 송준수를 기다려 볼까나?
........
괜히 말했나 보다.
NW 송준수가 늦게 온다고 알고 있었는데, 메씨카움(전자렌즈)에 그의 모습이 잡혔다.
저녁 좀 편히 먹고, 이 강력한 상대와 말을 섞어보려 했건만.
저녁을 편히 먹기는 글렀다. 칫.
한눈에 보기에 연약한 서생 스타일의 한 남자와 우아한 외모를 지닌 한 여자가 천천히 연회장안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NW그룹의 차기 후계자로 굳혀진 송준수와 그의 공식적인 애인으로 인정받는 설서희.
송준수는 3세 경영인 중 최고의 브레인으로 꼽히며, NW의 제갈량이라 불리울 만큼 학식과 지혜가 뛰어난 자.
속내를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진중함을 갖추었고 그의 머리는 심오한 책략으로 가득하였다.
반면, 설서희는 재계15위 우현그룹 막내딸로서 좋게 말하면, 재기 발랄하고 나쁘게 말하자면 지나치게 나대는 여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둘이 연회장 안으로 들어 왔을 때 참석자의 1/3은 그들에게 시샘을, 1/3은 무관심을, 그리고 1/3은 다소 환영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나와 지혁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그 둘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지혁이가 좀 전에 나한테 보였던 미소를 지워버렸고, 다소 굳은 표정으로 내 옆에 섰다.
그리고 그의 손가락이 내 손 부위에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한얼아,”
그가 불렀다.
“왜요?”
“내 손을 좀 잡아 줄래?”
그의 급격하게 창백해진 얼굴을 보았다.
“지혁씨, 제가 손 잡아 드리면 괜찮으시겠어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지혁.
가만히 그의 손에 내 손을 가지런히 바쳤다.
그리고 난 반드시 물어야 할 두 번째 질문을 조심스럽게 내뱉는다.
“제가 아까 못한 두 번째 질문...”
내 질문이 끝나기 전에 그가 고백했다.
“송혜정, 내가 사랑했던 여자가..”
“.......”
“그 새끼한테 몹쓸 짓을 당했어.”
“.......”
“바보같이. 난 옆에서 그저 바라보기만 했고.”
그의 목소리에 습기가 찬다.
송혜정씨에게 일어난 일을 예상하기는 했지만, 그의 습기찬 목소리로 직접 들으니 마음이 착 가라앉았다.
“오빠...”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오빠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 전에는 장난삼아 했던 호칭이었는데..
감정이 갑자기 고조되었던 탓일까?
그 호칭에 진심이 투영되었다.
그렇게 고개를 숙인 지혁이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오래간만입니다. 박지혁씨.”
어느새, 송준수와 설서희가 바로 우리 앞에 서 있었다.
차마 마음의 대비를 못했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