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제갈량과의 설전
송준수가 인사말을 건넸을 때, 박지혁은 그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간신히 꺼내는 인사말.
“준수 형님.. 잘.. 지내셨습니까?”
“여긴 나름 공식적인 석상인데, 사적인 호칭은 접어두시지요.”
준수의 부드러운 말투.
하지만 그 말투에는 차가움이 융해되어 있었다.
곤혹스러워 하는 지훈을 두고, 준수는 여전히 미소를 입에 띠우며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 분위기를 보던 내가 준수에게 악수를 청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한얼이라고 합니다.”
“지혁씨 애인 분이시군요? 반갑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나한테로 머무는 그의 동공.
“미인이시군요. 지혁씨가 충분히 좋아할 만한 인상입니다.”
악수를 청하는 내 손은 여전히 그에게 외면받았고, 대신 설서희가 내 손을 잡았다.
“반가와요. 저 설서희입니다. 한얼씨 보니, 눈부셔서 눈이 멀 지경이네요.”
“과찬입니다. 설서희님. 서희씨도 아름다우세요.”
“여기 오기 참 잘했네요. 야외 연회장이라, 공기도 상쾌하고 음악도 좋고.”
설서희가 송준수를 애정이 담뿍 담긴 눈길로 보며 말했다.
“이렇게 꾸민 우리 오빠도 멋지고.”
준수는 무심하게 그녀의 애정 표현을 받았다.
“지혁씨는 한동안 이런 자리 안 온다고 들었었는데?”
준수의 질문에 내가 살짝 끼어들었다.
“제가 오고 싶다고 지혁씨를 졸랐습니다. 이런 곳은 처음이라..”
“공교롭군요. 저도 올해는 여기 처음으로 오는데..”
이번에는 설서희가 끼어든다.
“제가 오자고 했거든요. 우리 곧 결혼할 사이라는 거 사람들에게 알려두면 좋잖아요?”
준수에게서 터지는 아무 감정이 없는 조용한 웃음.
준수가 쟁반에서 물이 담긴 유리잔 하나를 집었다.
그리고 잔을 슬슬 돌렸다. 그의 습관처럼.
그가 지나가듯이 말을 한다.
“지혁씨, 저 때문에 오신 거군요?”
우리가 여기에 온 이유를 바로 알아차린다.
그리고..
“옆에 비서 분 대동하고.”
그 짧은 시간에 준수는 우리의 사이까지도 간파했다.
이 사람은 정말 눈치가 좋네.
이 눈치 백단인 사람 앞에서 우리 사이를 속이는 것은 별 의미가 없지.
“뭐야? 이 사람 비서야?”
나를 가리키는 서희의 낮춤말에 지혁이가 나섰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같은 과 후배이구요.”
재벌집 자제가 아닌 학과 후배라는 말에, 설서희가 나를 내려 깔 보는 듯 했다.
송준수는 술잔을 탁자에 놓았다.
“제가 실례를 했군요. 죄송합니다. 이한얼양.”
그가 고개를 나한테 정중하게 숙였다.
상황에 따라 충분히 자신을 숙일 줄 아는 사람, 자존감이 높으며 강한 사람이다.
정말 만만치 않는 호적수인데.
“아닙니다. 송준수씨.”
“저는 이만 설서희씨와 다른 자리에서 식사하도록 하겠습니다. 식사자리는 편해야 되니까요.”
송준수의 조곤조곤한 말투, 그러나 그 안에 숨겨진 날카로운 칼.
벌써 피곤해 진다.
“형..형님. 이따가 따로 드릴 말씀이 있는데..”
지혁이가 허둥대며, 그의 팔을 살짝 잡았다.
“설마 이 자리가 사업을 논의하는 자리로 착각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저는 설희와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려고 온 것입니다.”
그가 오른 손으로 자신의 소매를 잡은 지혁이의 손을 슬며시 뿌리쳤다.
준수, 그가 우리와 의도적으로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다. 엮이기 싫어하는 눈치도 보이고.
그러나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송준수는 본인이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자리는 절대로 가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오는 것을 알고도 이 자리에 온 것이지.
이 자리에 오고서, 우리와 절대로 엮이려 하지 않는 제스쳐.
여기까지 와서 굳이 저런 제스쳐를?
이건 뭔가 의미가 있다.
그 의미를 알아야 송준수와 어떻게든 일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 텐데.
이 복잡한 고차원 방정식을 어떻게 풀어야 하나?
중요한 건, 이대로 있다가는 어떤 일도 진행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딪혀 봐야지.
결국, 내 머릿속에 미뤄두었던 그 수를 써보기로 하였다.
송준수의 반응이 어떨지.
“송준수씨.”
나는 다른 테이블로 천천히 걸음을 옮겨가는 송준수를 불렀다.
송준수가 걸음을 멈췄고, 난 빠른 걸음으로 그 송준수 커플 앞에 섰다.
설서희의 눈초리가 곱지 않았다.
“무슨 일이죠? 지혁씨 애인분.”
“솔직히 말씀드릴께요. 저, 지혁씨 애인 아닙니다. 비서로 따라왔습니다.”
“그게 지금 무슨 의미가 있나요? 한새봄양?”
한숨을 한번 크게 내쉬었다. 이제 말한다.
“저희에게 따로 시간을 내주세요.”
“오빠가 싫다고 하잖아요? 자꾸 시간을 뺐지 마시라구요.”
설서희가 나서서 신경질적으로 반응하였다.
그때, 송준수가 설서희의 팔을 살짝 잡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서지 말라는 이야기겠지.
설서희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다소 뒤로 물러섰다.
“이곳 이 자리에서의 시간은 당신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아까보다 말이 더 차갑다.
얼어 죽을 것 같은 냉랭함이 쩐다.
그래도 내가 질 리가 없지.
“저희는 이때가 아니면 다른 시간이 없습니다.”
“유감스럽지만, 앞으로 만날 시간도 없겠군요. 오늘 볼 생각이 없으니.”
“송준수씨, 그럼 여기 왜 왔죠?”
짧은 순간에 그에게서 감정의 균열이 보였다.
냉랭함이 이글거림으로 변하는 그 짧은 순간이 내게 보였다.
“2세 경영인 모임에 오는 이유는 다들 뻔하겠지만, 난 결혼할 사람을 위해 온 겁니다.”
설서희가 그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듯 했다.
미안하지만, 설서희. 그 말이 이 사람의 진심이 아니란다.
우리를 시험하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 온 것이지.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보며 한자 한자 또박또박 발언했다.
“아뇨, 당신은... 우리와 『박광혁을 죽이기 위한 협상』을 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송준수, 그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송준수가 설서희 옆에 가서 그녀의 귀에 대고 무엇인가를 소곤거렸다.
서희가 다소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곧 웃었다.
“오빠, 빨리 끝내고 와.”
물론 나를 향한 눈빛은 적개심으로 가득 찼고.
서희가 시야에서 다소 멀어지자, 송준수는 나한테로 가까이 오더니 말투를 바꿨다.
“협상이라... 협상은 서로 아쉬워야 성립되는 것이 아닌가?”
“솔직히, 저희는 현재 매우 아쉽습니다. 그러나, 송준수 당신도 매우 아쉬울 겁니다.”
“아쉬울 거다?”
그는 이죽거렸다. 공개된 석상에서는 보지 못하는 싸늘한 비웃음.
나는 오늘 이 사내의 은밀한 모습을 다 보고 있는 것이다.
“난, 아쉬울 게 없어. 어차피 기울어 가는 그룹, 놔두면 알아서 망할 텐데 내가 왜 그런 수고를 하지?”
“당신은 더 잔인한 방법을 원하잖아! 운명에 맡기는 그런 편한 방법보다는 박광혁,
그 개새끼를 죽이기 위한 처절한 복수. 그걸 원하는 게 아닌가?”
그는 나한테서 다시 한발 물러서더니, 예의 이전의 모습으로 애써 돌아왔다.
“날 이용하고 싶어 하는군요. 후후. 그게 과연 될까요?”
“당신이 원하시면, 저와 지혁씨, 사람들 다보는 공개석상에서 무릎을 꿇겠습니다.”
“그건 오히려 나한테 협박하는 거 같은데. 제안을 받지 않으면, 무릎을 꿇어버리겠다는.”
“네!”
우리가 무릎을 꿇으면 준수가 한사코 입에 꺼내고 싶지 않는 그 사건이 사람들 사이에서 공론화될 수 있다.
준수는 그것이 싫을 것이다. 자신의 동생을 위해서라도.
“당신이 협상을 받아주시면, 당신이 직접 박지혁, 그의 운명을 처분할 수 있습니다. 어쩌시겠습니까?”
준수는 골몰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생각을 끝내더니, 내게로 와서 조용히 말했다.
<너는 우리 동생을 이용해 먹을 못된 심보를 갖고 있어. 난 절대 그 꼬라지를 볼 수 없어.>
“......”
<난 그리고 SH의 형제 새끼들이 우리 동생과 엮이는 게 싫다.>
“......”
<두 가지 조건이 있다. 하나는 지혁과 너, 너희 둘이 내 동생을 이용해 먹으려 한다면 기꺼이 목숨을 내놓겠다는 각서와.. 다른 하나는...>
그가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이따 지혁이가 보는 데에서 다른 조건 하나를 제시하도록 하지.”
“그럼, 협상이 성립된 겁니까?”
“그 두 가지 조건을 지킨다면.”
나는 문득 그가 말하지 않는 두 번째 조건이 불안해졌다.
“두번째 조건을 지금 말씀해 주시면..”
“후후. 너무 불안해 하지 마십시오. 알고 보면 너무나 쉬운 조건이니까.”
“그럼, 그렇게 믿고 가겠습니다.”
“식사 후에 보도록 하죠.”
그 말과 함께 송준수는 그의 애인이 있는 테이블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가 말한 두 번째 조건이 꺼림직하면서도, 박광혁을 죽이기 위한 거래가 성사되었다는 것에 안도하였다.
박지혁이 있는 연회석 테이블로 오니, 그가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웃음으로써, 거래성립 성공을 알렸다.
박지혁은 테이블에서 나와 나의 어깨를 톡톡 쳤다.
“얼..”
“왜요?”
“어떻게 거래를 성립시킨 거지?”
“간단해요. 지혁씨를 제물로 바쳤으니까.”
실제로 지혁씨가 그의 손에 처분될 수 있다고는 했었지.
우선 급한 대로 말한 거긴 하지만.
“진짜?”
“걱정마요. 당신이 제물이 되면 제가 제단은 쌓아 드릴께.”
나와 그는 임무를 마쳤다는 안도감에서 즐거운 식사를 하였다.
지혁은 주위의 재벌 친구들, 혹은 지인들에게 나를 소개시켜 주었고, 다들 나의 미모에 넋이 나간 표정들이었다.
물론, 그 사람들이 각자의 애인이나 여자 친구로부터 구박당하는 것을 종종 목격하기도 해서 마음이 불편하기는 했지만.
나는 지혁이를 통해서, 그의 지인들이 갖고 있는 문제의 해결책을 살짝 제시해 주었고, 그때마다 그들은 지혁이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역시 데이터의 힘은 대단한 것이었다.
데이터 정보 분석 덕에, 지혁은 잠재적인 우군을 오늘 얻을 수 있었다.
지혁의 오늘 실적에 나도 큰 역할을 했지만, 외계인 헤프와 종철이의 공도 컸다.
나중에 감사인사를 톡톡히 올려야겠다.
참, 종철이와 승지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집에 돌아가면 전화 좀 해봐야지.
식사가 끝나고, 각자가 간단한 술 한 잔씩 나누며 담소를 나누는 시간이 왔다.
나는 잠시 자리에 앉아 감겨오는 눈을 애써 뜨고 있었다.
참으로 피곤했다.
사람들과 논쟁하며 치열한 설전을 펼친다는 것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세삼 깨달았다.
그리고 그 때, 송준수 커플이 나와 지혁이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박지혁의 표정에 다시 피어나는 긴장감.
나는 저 둘이 왜 우리에게로 다가오고 있는 지 알 수 있었다.
그가 두 번 째 조건을 알려주기 위해서 오고 있는 것이지.
나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송준수와 설서희를 맞이하였다.
“박지혁씨, 그리고 이한얼양. 내가 흥미로운 것을 제안하기 위하여 여기에 왔습니다.”
박지혁과 나는 그 흥미로운 제안이 무엇인지 듣기 위해서 귀를 쫑긋했다.
송준수는 나를 의미 있게 쳐다보았다.
그의 입에서 ‘두 번째 조건’이라는 말이 들려왔다.
“아마도, 여기 근처에 계신 분들도 매우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뭐 이리 서두가 길지?
불안하게 시리.
“내가 두 분께 제안하는 건, 연인들이 자주 하는 것, 5분 이상 키스하기입니다.”
“.............................”
송준수의 그 말이 나오자 마자 나는 완전히 얼어버렸다.
정말 예상도 못한 두 번째 조건이 그의 입을 통해 나왔고..
나는 플러그가 뽑혀진 전자기계 모양 완전히 백짓장 상태가 되어 버렸다.
왜.. 왜.. 저 송준수 자식은 저런 개떡같은 조건을 내세운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