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빼앗긴 키스
송준수, 그가 왜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나랑 지혁과의 키스를 강요할까?
도대체 왜?
무슨 억하심정으로?
나는 필사적으로 저 송준수가 왜 지혁이에게 입맞춤을 지시했는지 이해해 보려고 하였다.
뭔가 있을 텐데?
무슨 흑막이 존재할 텐데?
준수, 저 놈의 수가 뭐지?
나와 지혁이가 애인 사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을 텐데?
데이터가 완전히 헝클어지고, 머릿속의 생각 체계가 고장나버렸다.
송준수의 의도가 나를 공항상태로 빠뜨리는 거라면 그는 완전히 성공한 거다.
추측건대, 박지혁도 분명히 나와 같은 상황이겠지?
살짝 박지혁을 쳐다 보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근데 기분 탓인가?
눈빛이 슬퍼 보인다고 해야 할지, 다소 애처로워 보인다.
아니지. 박지혁, 저 놈 속은 좋아죽겠으면서 애써 자기 기분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송준수는 스위치가 나가 버린 내 얼굴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고, 설서희는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듯 손뼉까지 치고 있었다.
“두 분이 애인이시라면서, 사이가 별로 안 좋으신가 보네요? 아니면 쇼윈도우 커플?”
송준수가 조롱 섞인 농담을 나와 지혁이에게 던졌다.
그런데, 박지혁은 그런 송준수의 농담을 진지함으로 받았다.
“형님.. 원하시는 게 이겁니까?”
“무리한 부탁은 아니지 않습니까? 커플 모임의 취지에도 맞고.
난 두 분이 워낙 잘 어울려서, 두 분을 축복하는 마음에서 제안해 본 겁니다.”
그리고 그가 또렷하게 한자 한자 힘주어 덧붙인다.
“연출 보다는 진심으로 하시면 좋을 것 같은데.”
박지혁은 송준수를 무겁게 응시하였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형님, 저보고 마음을 정리하라는 겁니까?”
송준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차갑고 딱딱한 답변이 뒤따른다.
“무슨 말씀인지 전혀 모르겠군요. 이한얼씨를 너무 기다리게 하는 게 아닙니까?”
무슨 x같은 소리야?
난 전혀 기다리지 않았다고.
나의 이런 내부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지혁이의 짧고 명료한 대답이 들려왔다.
“알겠습니다.”
그리고는 그가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리고 내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지혁씨, 이거 아니잖....!”
나는 말을 멈췄다.
지혁이의 눈가에 눈물이 고인 걸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눈물을 흘리지?
그가 나 혼자만 들을 수 있도록 조용하게 그의 마음을 전했다.
<한얼, 미안해.>
그의 이 한마디 사과에 나는 갑자기 모든 상황이 이해되었다.
준수나 지혁이나 나를 도구로 쓰고 있다는 것을.
혜정이를 포기하게 만들기 위한 단순한 카드로 내가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이제 이해했다.
갑자기 기분이 더러워진다.
차라리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말지.
<나쁜 새끼...>
송준수에 대한 분노까지 담아서 지혁을 노려보았다.
<책임질께. 오늘 일.>
책임? 책임이라는 말에 벙쪄서 입을 벌렸는데.. 갑자기 그가 들어왔다.
한손으로 내 허리를 붙잡고 다른 한손으로는 내 머리를 감싸 안으며 말이다.
나는 한 번도 연애라는 걸 하지 못했었다.
키도 작고 못생긴 외모도 한 몫 했지만,
연애하는 동안 떨어질 내 자존감을 견딜 수가 없었고 누구랑 헤어진다는 사실이 지극히 두려웠다.
겉으로는 싸움 잘하며 패기만만한 열정을 갖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나를 알아주는 누군가를 항상 갈구하고, 그 사람에게 버림받는 것을 무서워하는 연약한 사람이었다.
종철이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순간, 난 정말로 생각지도 못한 눈물을 흘렸었으니까.
그때는 내가 왜 울었는지 몰랐는데, 지금은 좀 알 것 같았다.
내가 의지하는 상대와 뭔가 끈이 하나 톡 떨어져 버린다는 느낌이 들 때,
그래서 헤어짐에 가까이 간다고 생각할 때, 그래서 슬퍼했던 것 같다.
나는 지금 나의 의지에 상관없이 내 입술에 들어온 그의 거친 호흡을 느끼며, 슬펐다.
그에게 믿었던 뭔가 하나의 끈이 떨어져 간 느낌.
그리고 송준수가 내세운 두 번째 조건에 속박당한 자신이 한심한 느낌.
재벌집 자제들의 게임에 말려들은 내가 실컷 놀림을 당하고 있다는 느낌.
그의 혀가 깊이 들어왔을 때, 나는 정말 그 느낌들로 인해서 눈물 흘리며 울고 있었다.
난 그저 지금의 순간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고만 있었다.
자기 자존감이 떨어지는 모습을 견디는 건 정말 고역이었으니까.
거의 정확하게 5분.
그의 혀가 내 입에서 신나게 뛰놀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난 그의 침으로 더렵혀진 나의 집을 깨끗이 정리할 일이 남았다.
송준수가 내 눈가에 물든 눈물자국을 보고, 슬며시 웃으며 박수를 쳤다.
“훌륭합니다. 두 분의 키스가 너무 행복해 보이는군요. 앞으로 저를 불러주시면, 이런 이벤트를 해드려야겠습니다.”
이건 나를 향한 그의 경고였다.
앞으로 나를 가지고 놀면, 더 비참한 상황을 만들어 버리겠다는 그의 강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미친 새끼. 이거였구나.
지혁에게는 혜정을 완전히 포기하라는 강력한 신호를 주고, 나한테는 의도적으로 상처를 준거다.
나는 애써 마음을 진정했다.
이왕 키스 당한 건 키스 당한 거고.
이대로 멍한 꼴을 보이는 건 결국 그에게 졌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지.
그렇게 보일 수는 없었다.
“좋네요. 송준수씨. 감사합니다. 이런 기회를 주셔서.”
“후후.. 그런가요?”
송준수가 흥미롭게 나의 다음 반응을 기대하였다.
“지혁씨가 워낙 소심해서 절 외롭게 했거든요. 스킨십이라는 걸 모르는 이 사람에게 적절한 가르침을 주신 겁니다.”
“가르침이라...”
송준수는 저 가르침의 의미를 알 것이다.
“그런데, 저와 오빠간의 둘만의 스킨쉽을 공개적으로 요청하시는 건, 매너가 아니지 않나요?”
송준수가 내 말에 잠시 흠칫했다. 예상 못했던 반응이라는 것이지.
씨바, 정말 기분이 엿 같았거든. 이 새끼야.
이외로, 재빨리 준수가 고개를 숙이며 사과한다.
“아하.. 그것까지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저의 잘못을 너그럽게 봐주시기를 바랍니다.”
그와 동시에 터지는 설서희의 불만.
“둘 사이를 좋게 하려고 오빠가 신경 써준 건데, 뭐라는 거니?”
그러나 그녀의 불만은 곧 송준수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이건 내가 잘못한 게 맞아. 서희야. 그래도 날 위해서 나서 주는 건 고맙다.”
그의 토닥임에 금방 기분이 좋아진 서희.
“서희야, 잠깐 저기서 기다리고 있어. 이 분들하고 이야기하고 곧 올 것이니.”
송준수가 천천히 나와 지혁에게 오더니 우리 둘만 들을 수 있는 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삼일 후에 따로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을 통해 연락을 드리죠.”
“형..님. 감사합니다.”
감사하고 싶지 않아 난 잠자코 있었다.
“지혁아,”
그가 처음으로 지혁에게 반말을 썼다.
“형..”
“옆의 아가씨, 매우 탐난다. 노리는 사람 많을 거야. 간수 잘해라.”
뭐래? 이 인간이?
“여보세요. 전 물건 아니거든요.”
“알지요, 물건 아니라는거. 이한얼씨, 당신은 참 좋은 비서입니다.”
그가 뜬금없이 칭찬한다.
“제가 오늘 일 꼭 기억할 겁니다. 송준수씨.”
“네. 앞으로 두고 보겠습니다. 오늘 제 호적수를 만나서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 한마디를 덧붙였다.
“난 이만 갑니다. 면상을 마주하고 싶지 않는 그 분이 오신다는 소식을 접해서. 그럼 즐거운 하루 되십시오.”
그는 그렇게 몸을 틀어, 자기의 파트너를 향하여 걸어갔다.
잠깐, 그분이라면... 박광혁!
그가 이 자리에 온다고?
오늘 왜 이리 거물들을 자주 만나는 거지?
박광혁이 온다는 소리에 박지혁 역시 얼굴에 핏기 하나 보기 어려웠다.
"박지혁씨. 어떻게 할래요? 그 사람 피해서 그냥 갈래요? 아님 여기서 만나볼래요?"
나는 오늘만큼은 박광혁을 만나는 걸 피하고 싶었다. 박광혁을 만나지 않고, 내가 지혁과 지금 하고 싶은 게 있었다.
"얼아, 네 생각은?"
"가요. 그냥. 오늘은 더이상 누구를 만나고 싶지 않네요."
"네 생각에 따르지."
그는 순순히 내 의견에 동의해 주었다.
그와 나는 주위의 안면을 튼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와 지혁이는 말없이 주자창까지 걸었다.
그렇게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그 장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었다고 생각했다.
"지혁씨, 잠깐 멈춰봐요."
"왜?"
"할 말과 할 일이 있어서요."
"그게 뭐지?"
"박지혁. 이 나쁜 새끼야."
나는 그대로 박지혁의 귀싸대기를 날려버렸다.
휘청한 그의 몸.
"내 입술을 허락없이 훔쳐간 죄다."
내 주먹이 꽤 강했던지, 그의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그가 피식 웃었다.
"이..정도로 네 화가 풀어지겠니?"
"아니. 너같으면 그러겠니?"
"그럼, 네가 마음이 편할 때까지 날 더 때려."
"됐어. 이건 돈으로 갚아. 더블로 받을 거야."
지혁에게 내 등을 보이며, 뒤로 돌아섰다.
그런데, 바로 나한테로 다가오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
저 두 사람이 나와 지혁이 근처에 가까이 있었음에도, 어떤 낌새도 느끼지 못한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히, 메씨카움(특수전자랜즈)과 하피카움(인이어)이 이 두 사람이 오는 것을 체크해서 내게 알려주었을 텐데.
알고 보니, 두 기기의 전원은 꺼져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모습이 점점 선명해졌다.
한 사람은 박광혁, 또 한 사람은 신원을 알 수 없는, 그러나 섬찟한 기분을 들게 하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