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두개의 카드
파티하우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벤틀리 차안.
나는 골몰히 생각에 빠져 있었다.
NW 송준수, 앞으로의 계획, 박광혁, 그리고 음..
옆에서 운전하던 박지혁이 나를 흘끔 보더니, 콘솔박스에서 껌을 꺼냈다.
“이거 씹을래?”
“나는 껌 싫다고요.”
“나는 침묵이 싫은데..”
지혁이가 나랑 말을 하고 싶다는 신호지.
좋아. 나도 말없이 오는 게 답답하긴 하다.
“좋아요. 이야기 합시다. 단, 가끔 제 입에서 욕과 반말이 나와도 이해하세요.”
“그렇게 하던가.”
이외로 지혁이가 순순히 받아들이는 모양새이다.
솔직히 오늘 내가 당신에게 일일이 존댓말 쓰고 싶지 않았다.
따질 게 좀 많거든.
첫 번째 따지기.
“왜 송준수에게 거절 한마디 안하고서 제게 그 입박치기를 했어요?”
“입박치기라니? 키스?”
“진짜 생각하면 리얼 빡치네. 그 입박치기. 제가 기분이 어떨 거라는 거 생각 안 해봤어요?”
정말 능구렁이같은.. 이 두 인간들.
마치 준수와 지혁이 서로 짠 장난에 걸린 기분이었다.
준수가 걸었던 조건에 대해, 지혁이 조금만 머리를 썼었더라면 키스 안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공적인 자리에 이건 실례라던가,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던가.
그렇게 둘러 대는 게 가능했었지.
적어도 내게 의향을 물어보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것도 없이 한 번에 오케이하고 바로 들어왔다.
게다가 이때다 싶어 혀까지 입에다 집어 쳐 넣고 빨아대?
키스할 때는 송준수가 보는 눈앞이고 그와 걸었던 약조가 있어서, 분노를 애써 참았다만,
지금은 확실히 선을 그어두고 보상을 받아야겠다.
“미안하다. 내가 계약금 배로 줄게.”
지혁이가 또 사과한다.
“뭐,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다음부터 이런 일 없게 해주세요.”
그래, 내가 지혁으로부터 이 말을 듣기 위해서 말을 꺼낸 거다.
계약금 배로 준다고 자기 입으로 말했으니. 더 이상 언급할 필요 없겠지.
두 번째 건. 이건 지혁에게 따질 건 아니고 박광혁에 대해 논의할 사항이지.
“아까, 여기 파티하우스에 들어가기 직전, 선배가 그랬죠? 나와 관련하여 꺼림직스러운 것이 하나 있다고..”
“음..”
“우선, 박광혁이 경영2세 모임에 올 수도 있다고 했잖아요? 그 거 그냥 선배의 순전한 추측?”
파트하우스에 들어가기 전에 지혁이가 꺼림직하다고 말했던 것들, 그것들이 모두 실현이 되었다.
박광혁이 이 자리에 불쑥 참석했고, 그가 나를 탐욕스럽게 보았다.
“나도 그가 여기에 참석할 줄은 몰랐지. 오늘 저녁에 중요한 미팅이 잡혀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그럼, 박광혁이 뭔가 눈치를 챈 거네. 그래서 일정 취소하고 여기 참석한 거고.”
송준수과 박지혁이 자리를 함께 하는 것에 대하여, 분명히 박광혁은 무슨 불안한 예감을 가졌을 것이다.
자기를 노리는 위험요소를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는 동물적인 감각인 것이지.
아니면, 그의 수하 중 유능한 부하가 있던가.
본론에 들어가자.
“선배, 두려워요? 그 인간이 저를 어떻게 할까봐?”박지혁은 박광혁이 나를 보면 무슨 짓을 할까봐 걱정된다고 했었다.
이렇게 꾸민 당신이 너무 예뻐서, 박광혁이 무슨 짓 할까봐 두렵다고..
그가 그런 말을 했었다.
“솔직히 그가 너한테 무슨 짓을 할지 무섭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할까요? 선배랑 앞으로 같이 다니지 말까? 이 일에서 손 뗄까?”
박지혁이 날 보지 못하고 전방만 주시하며 핸들을 잡는다.
“모르겠어. 나도.. 나도 너한테 뭐라고 해야 할지.”
“후후, 그렇다고 제가 선배를 떠나버리면 전 안전할까요?”
박지혁이 내 질문에 쉽게 긍정을 하지 못한다.
“불행하게도요, 난 이미 그의 타겟이 되어 버렸어요. 선배가 꺼림직하다고 했던 거 다 사실이 되어버렸다고요.”
“얼아.”
“당신의 형이라는 새끼가 날 쳐다보는 눈빛을 봤어? 정욕과 탐심에다가 살기까지 그 안에 담겨있었다고.”
말하다 보니 그 순간이 생각났고, 저절로 소름이 끼쳤다.
아씨. 정말이지 생각도 하기 싫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지혁의 인상이 잔뜩 흐려졌다. 곧, 비가 올 것처럼.
“저한테 할 수 있는 모든 걸 지원해주세요. 그럼 내 몸은 내가 잘 관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혁에게 자신만만한 내 표정을 보여주었다.
“난 당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한 사람입니다.”
그가 운전하다 말고 내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게 말해주니, 안심이 되는 걸. 그렇게 하지. 네가 원하는 모든 지원을 해주마.”
“그러시다면, 나한테 지원해줄 건 돈입니다. 돈만 많이 주심 됩니다.”
“돈?”
“돈이 많아야 맛있는 거 많이 먹고 힘내서 싸울 거 아닙니까?”
지혁이가 뭔가 이상하다 싶은 모양이다.
솔직히 지혁이에게 돈을 더 뜯어내려고 하는 소리다.
“돈... 최대한 지원해줄게.”
오케이 두 번째 안건도 클리어.
“그런데, 널 보호해 줄 경호원들이 혹시 필요하지 않니?”
“말했잖아요. 저 강한 사람이라고.”
어차피 나한테는 감마족이 준 최신 무기들이 있고, 장비들도 있다.
여차하면 그걸 쓰면 되니, 박광혁 하나즈음은 내 한줌의 주먹거리도 안 된다.
안된다..
안된다..
그때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불길한 예감 하나.
아까 박광혁을 만나기 직전 메씨카움(렌즈)와 하피카움(인이어), 둘 다 작동이 되지 않았었다.
하나도 아니고 동시에 두 개가 다 작동불능이라는 건 뭔가 그 기계들에 보이지 않는 충격이 가해졌다는 거고.
그렇다면, 헤프가 내린 ‘SH그룹의 의사결정과정에 변형 외계인이 관여하고 있는 것’이라는 추측이 맞는 것은 아닌지.
그 SH 임원의 탈을 쓴 그 바퀠라(변형외계인)가 이 두 기기를 무력화시킨 당사자일 수도 있겠다.
그럼 박광혁이 혹시 바퀠라일까?
“선배.. 어쩌면요..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이 당신이 알고 있는 당신 형이 아닐 수도 있어요..”
“무슨 말이지?”
“그냥 다른 존재일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지혁은 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하는 듯 했다.
“그래, 확실히 박광혁이 변하긴 했다. 예전에는 야비하기는 했어도, 이정도로 타인을 괴롭히는 걸 즐기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그는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 되어 있을지 몰라요.”
“그래.. 괴물. 그런지도.”
지혁은 은유적인 의미로 괴물을 생각했는지 몰라도, 나는 실제 존재하는 괴물로 그를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 차이를 지혁에게 직접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당분간은.
나는 곧바로 몰려드는 피곤함에 연신 하품을 했다.
“피곤하면 어서 자라. 얼.”
“선배와 논의할 게 많은 데, 도저히 못 참겠네요. 저 잘 테니 안전운행 하십쇼.”
“그래. 오늘 나를 도와주어서 고맙다.”
나도 고맙습니다. 하루에 그토록 많은 돈을 벌게 해주셨으니.
“고마우면, 절 소중하게 잘 쓰십시오. 선배.”
“그 선배라는 소리 듣기 싫은데.”
별 거에 다 신경 쓰는군.
“그래, 알았어. 오빠. 오빠도 고생 많았어.”
“좋아. 그 호칭 변하지 마.”
“오빠는 자주는 못 해드리고 종종 해드릴 께.”
그래도, 오빠라는 호칭이 이제는 좀 입에 익숙해진다.
그렇게 호칭 뒤에 반말을 하는 것도 좋고.
나는 그 말 뒤에, 서서히 의식의 흐름이 끊어졌다.
그가 코트를 벗어 나를 덮어준 것도 모를 만큼 깊은 잠에 빠졌다.
그 잠결에서도, 간만에 느껴보는 따뜻함이 좋아, 미소를 지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지혁에게서 느껴본 것은 그때 처음이었다.
그냥 형같은 느낌.
오늘 지혁이 형이 나를 짜증나게 만들기도 했지만 그가 살짝 좋아지기도 했다.
아주 살짝.
********
달빛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새벽의 시간.
경기도 근방 한 전원주택 안에 들어서는 인영이 있었다.
그 인영의 정체는 하비천.
그가 집의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이상한 주문을 외웠다.
“나르코르슈마(통로개방)”
거실 바닥으로부터 푸른 빛 광선이 굵은 줄기로 천장을 향해 쭉 뻗었다가 곧 사라졌다.
그리고는 지하로 들어가는 통로가 생성되었다.
하비천은 그 통로를 걸어 내려갔고, 곧 그를 맞이하고 있던 철문 앞에 섰다.
하비천의 몇 마디 외계어에 철문이 열리고, 실내 경기장 크기의 확 트인 공간이 그 앞에 펼쳐졌다.
그가 다양한 연구 장비들과 지구인들의 사체로 추정되는 조직샘플 등을 스쳐 지나갈 때, 음침한 쇳소리가 그를 환영하였다.
“하르슈텐트. 오늘도 수고했네.”
하비천 앞에는 커다란 원통 모양에 기포가 출렁이는 연푸른 빛 액체로 가득 찬 유리관이 있었고,
그 유리관 안에는 감마인의 형상을 한 외계인이 눈을 감고 서 있었다.
그 외계인은 전혀 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고, 그의 입에 부착되어 있는 관을 통해서 그 음침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렌바움 대신 각하. 오늘도 무탈하셨습니까?”
“무탈이라, 이 자리에 아무 미동 없이 있는다는 것이 무탈이라면, 그렇겠지.”
음침한 목소리의 주인공에 불편한 심기가 서려있음을 하비천은 즉시 알았다.
“송구합니다. 현재 나크-20A3 두뇌 안정화 작업이 한 달 정도면 끝날 것입니다.”
“이제 곧 반역자들과 전쟁이 시작할 터. 그 작업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것이다.”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렌바움의 목소리가 한동안 들리지 않았다.
하비천의 ‘최선을 다한다’는 말을 못마땅해 하는 듯 했다.
“오늘 보고할 것은 무엇인가?”
“나크 20A3, 박광혁이 두 개의 카드를 내어놓았습니다.”
“두 개의 카드?”
“하나는 자신의 여동생에 대한 박해, 또 하나는 남동생의 애인에 대한 정욕입니다.”
하비천은 박광혁이 했던 발언을 떠올렸다.
점차 전두엽의 기능이 사라져가는 박광혁의 거친 말들이, 이 두뇌 안정화 작업의 끝을 알려주고 있었다.
“당연히 그가 두 개의 카드를 모두 갖도록 놔두지는 않겠지?”
“물론입니다. 한쪽에는 분노, 한쪽에는 희열.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좌절과 만족을 같이 안겨줄 것입니다.”
안정화 작업을 가속화할 양 극단 감정의 교차. 하비천은 그것을 노리고 있었다.
“어느 카드를 그가 갖게 할 것인가?”
“현재 상황에서는 이 카드를 갖게 할 것입니다...”
하비천은 어떻게 할 것인지 실행 계획을 그렌바움에게 보고하였다.
“재밌겠군. 그 인간의 반응이.”
“기대하십시오.”
잠시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그렌바움의 눈치를 보던 하비천이 중요한 보고 사항 하나를 슬며시 꺼내놓았다.
“그보다, 각하. 긴급히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
“암살자가 드디어 출몰한 것 같습니다.”
“알삼자!!”
“메씨카움이나 하피카움의 강도로 보아서 카테고리 5 근접에 든 자입니다.”
하비천은 파티하우스에서 감지했던, 익숙하지만 낯선 그 메씨카움과 하피카움의 신호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의 카테고리보다 상급의 상대.
“암살자는 오늘 파티하우스에 참석한 사람들 중 하나이며, 박광혁 근처를 배회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조심해야 하겠군. 아직 그를 상대할 실력자를 배양하지 못했으니.”
“당분간은 감마족 장비를 쓰지 않고 그와 맞닿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좋다, 하르슈텐트. 명령을 하달하겠다.”
하비천은 유리관 원통 안에 있는 그렌바움을 향해 더욱 고개를 숙였다.
“화성의 기지로부터의 동력 공급은 열흘 후에 재개된다.
그때까지 나크 20A3의 카드를 처리하라. 동시에 바퀠라의 숙성을 위한 인간을 수확한다.”
“네. 명령 받들겠습니다.”
“앞으로 정확히 15일 후, 카테고리 1급의 바퀠라가 암살자와 첫 대면을 하도록 하고, 그 날 암살자의 정체를 밝히도록 하라.”
“네. 존귀한 그렌바움 각하.”
하비천은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물러섰다.
여전히 원통안에 있는 그 외계인의 형상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다만, 관을 통해 전달되는 미세한 입술의 떨림만이 존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