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4화 〉파국을 향해 가는 시간 (34/68)



〈 34화 〉파국을 향해 가는 시간

후계자모임을 갖다 온지도 벌써 5일이 흘렀다.
이날은, 새벽까지 과제를 한 탓에 아침 늦게까지 꿀잠을 자고 있던 중이었다.
오늘 수업은 오후에만 있어서 오전 중 내내 잠을 보충할까 했는데,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아씨, 꼭두새벽부터 누가 전화질이야 화를 내며, 비몽사몽간에 전화를 받았다.
언뜻 보니 시계가 오전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여보시오.”
“안녕하십니까? 이한얼씨. SH 경영조정실 허비천 비서입니다.”

몰려오던 잠이 확 달아났다.
박광혁의 심복이 어떻게 내 전화를 알아가지고 나한테 직접 전화를 했나?
나는 침착하게 전화를 받았다.

“네. 무슨 일 때문에?”
“저희 박광혁 실장님께서 오늘 밤 시급하게 이한얼씨를 뵙고 싶어 하셔서 전화드렸습니다.”


오늘 아침에 전화해서 오늘 만나자고? 이건 예의에 어긋난 게 아닌가?


“박광혁씨가 날 뵙고자 하는 용건이 무엇인가요?”
“선물을 드리고 싶어 합니다. 이한얼씨께서 궁금해 하실 것을 드리겠다고.”


내가 궁금해 하는 거? 아 물론, 절실히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있다.
박광혁이 바퀠라(변형외계인)인지 아닌지!
오늘의 개인적인 만남이 박광혁의 진짜 정체를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는 하다.
다만, 그 정체만을 알려고 가기에는 너무나 꺼림칙했다.

“선물 주실 것 있으면 택배로 보내라고 하세요. 그리고  한필 오늘입니까?”
“내일부터는 실장님께서 해외출장이 잡혀 있어서 부득불 오늘 시간을 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건 직접 전달해 드려야 한다고 하시는군요.”
“흥, 택배로 부치지 못할 것이 뭐가 있다고!”
“그것은 바로..”

나는 하비천으로부터  선물이 무엇인지를 전해 듣고는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이걸 가지고 나를 보자고 하다니? 자신의 목줄을 날려버릴  있는 선물을 주겠다고 한다.
이 새끼 미쳤나? 하비천 비서가 전화상으로 재촉하였다.

“어쩌시겠습니까?”


이건 독약을 탄 미끼였다.
그런데, 독약임을 알고도, 낚일 수밖에 없는 강력한 마약과 같은 것이었다.


“조건은 혼자만 오셔야 합니다. 같이 오는 일행이 있다면, 그 선물을 보시지 못할 것이라고.”

하비천의 말은 나를 더욱 심각하게 고민케 하였다.
박광혁은 분명히 무엇인가를 준비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순순히 그 중요한 선물을 바치면서 나와 협상하자고 할 만큼 바보는 아닐 텐데..
나한테서 분명 무엇을 요구할 것이고, 그 요구 사항이 무엇일지를 갸름해 보고 있었다.


입술을 깨물었다.
그게 뭔지는 어렴풋이 잡힌다.
박지혁을 배신하고 자기에게로 붙으라는 것이겠지.

“알겠습니다. 오늘 만나겠습니다. 하지만 만나는 장소는 박광혁 실장의 집이라던가 회사가 아니었음 합니다.”
“그건 걱정 마십시오. 오늘 오후 6시30분에 저녁식사를 겸해 식당에서 보자고 하십니다.”
“그 식사하는 자리에 허비서, 당신도 오시나요?”

허비서, 당신이 오면 재수 없다. 뭔가 소름끼치기도 하고.


“저는 다른 일정이 있어서, 아쉽게도 이한얼씨를 모시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를 모신다고? 정말 소름이 짝짝 끼치는 말만 골라서 하는군.

“아, 가급적 정장으로 입고 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저희 실장님이 드레스코드를 강조하셔서 지나친 캐쥬얼 복장은 싫어하십니다.”
“네? 정장바지는 없는데.”
“단정해 보이는 치마를 입고 오시면 됩니다.”


내 옷장에 그나마 정장에 가까운 것은 후계자 모임 때 입었던 투피스밖에 없다.
그걸 입고 가야  거 같군.

“오늘 식사장소는 곧 문자로 통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주위 사람들에게 비밀을 유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비천은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오늘의 만남은 어찌 보면 매우 위험한 자리가 될 수도 있을 터.
나는 오늘 완벽하게 세팅을 하고, 박광혁을 만날 것이다.
장비 착용 때문에 헤프 박사와 연락을 해야 하겠군.
나는 지하 연구실에 있는 헤프 박사를 급히 호출하였다.

“헤프 박사님, 저 오늘 풀셋[라테카움(전자가발, 이동형 레이더장치), 메씨카움(특수렌즈), 하피카움(인이어)]으로 차려 입고 나가겠습니다.
하피카움과 메씨카움 수리는 다 끝나셨죠?”
“수리는 이미 다 완료했네만. 상대가 지난번처럼 미리 너의 장비를 알아차려서 반전자기복사를 사용하게 된다면, 다시 장비를 쓸 수 없게 되지.”
“네? 그럼...”
“라피카움을 얼굴에 바르고 가게나. 그게 네가 착용하는 장비들의 신호를 감춰줄 것일세.”

라피카움.
가장 중요한 기능으로는, 내가 착용하는 감마족 장비의 전자파를 위장하거나 은폐하는 것.
부수적인 기능으로는, 이걸 바르면 화장을 한 것처럼 얼굴을 빛나 보이게 만든다는 것.
이른바 미백의 효과라고 할 수 있다.

“혹시 바퀠라로 의심되는 인물을 만나러 가는가?”
“네. 그렇습니다. 오늘 그의 진짜 정체를 확인해 보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전투가 있을 지도 모르는 일. 신경안정제를 챙겨가게.”

나는 내 책상위의 놓여 있는 알약들을 슬쩍 보았다.

“네. 잘 챙겨 가겠습니다.”
“이한얼. 어쩌면 오늘부터가 진짜 전쟁의 시작일지 모른다. 조심해서 다녀오도록 해라.”


어쩐지 헤프 박사가 나를 걱정해 주는 듯이 말한다.
 만남 때에는 아무 감정이 없어 보이던 사람이, 그나마 나한테 정이라는  생겼는지도 모르지.
나는 그에게 자신 있게 말했다.


“박사님, 잘 싸워서 꼭 이기고 오겠습니다.”

***


SH그룹 박덕성 회장의 넓은 저택.
아침부터 모녀간 싸우는 소리가 그 넓은 집안을 가득히 매웠다.

“승지야,  오늘 자리 꼭 잊지 말고 참석해. 새안그룹 셋째 아들과 어렵게 자리 마련한 거야.”

승지의 어머니, 황여사가 아침부터 박승지를 몰아 세웠다.


“엄마, 나 싫다고. 내가 다시는 사내새끼들 안 만난다고 했지?”
“야, 이 미친 지지배야. 맨날 컴퓨터만 들여다보고 게임하면 밥이 나와 돈이 나와?

사내새끼라도 만나서 연애를 해야 그나마 좋은 곳에 시집을 갈 거 아냐?”

“흥. 엄만 오빠나 챙기세요. 나는 내가 알아서 잘 할 테니까, 저 연애질도 못하는 오라버니나 챙기시라고.”

박승지는 엄마와의 말싸움에서는 항상 자신의 친 오빠인 박지혁을 내세운다.
자기 혼자만 당하기 싫다는 심보가 그녀의 마음에 항상 가득 찼다.
그리고, 지금은 그녀가 약 올라 있는 상태였다.
박지혁이라도 있었으면 그를 끌어들였을 텐데, 아쉽게도 박지혁은 집에 없었다.

“저 지지배가 진짜..”
“엄마, 정말 나한테 남자를 만들어 주고 싶거들랑 돈을 주세요.
 억 정도. 그럼 온달 정도는 만들어가지고 엄마한테 대령할게.”
“이게 못하는 소리가 없어.”

황여사가 승지의 등짝을 내려 칠 원기옥을 한 팔에 만땅으로 채운 후, 승지의 뒤꽁무니를 쿵쾅쿵쾅 쫓아가고 있었다.
이리저리 엄마를 피해 도망가는 승지.
잡히면 뒤지게 얻어터질 거라는 예감에 그녀의 민첩함과 회피 스킬은 풀로 정착된 상태였다.
발이라고는 도통 볼 수가 없는 승지의 잽싼 뜀박질에, 약이 오른 황여사.

애처롭게 서 있던 두루마리 화장지 하나를 집어다가, 승지에게 포심으로 던져본다.
난데없이 봉변당한 두루마리 화장지는 그러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 화풀이를 하였다.

-퍽


애꿎은 화장지를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마빡에 맞아버린  3의 인물.
그는 바로.


“아침부터 활기차게 시작하시는군요.”


예의  트레이드마크인 냉철함을 내세우는 인간, 하비천이었다.

“아, 하비서. 마침 잘 왔다. 우리 승지 좀 설득해 봐요.”
“흥. 아저씨는  언제 불렀대?”

승지는 날렵하게 도망가면서  날렵한 입술로 조잘거린다.

“그 자리 하비서가 주선하느냐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이것아!”
“하비서, 당신 나한테 배신 때린 거야. 가만 안 놔둬.”


승지는 엄마를 피해 도망가면서도 하비천을 향해 이를 박박 간다.

“아가씨. 오늘 소개팅 자리는 가셔야 좋을 겁니다.”
“우아아아~~~~ 싫다고~~~~~~. 안 간다고~~~~~~~~~”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승지를 보고, 황여사가 깜짝 놀란다.


“저게 아침부터 화통을 삶아먹었나.”
“오지 마. 나 절대 안 가. 절대로.”

둘의 말싸움을 지켜보던 하비천이 조용히 말했다.

“아가씨, 돈이 필요하십니까?”
“씨... 돈도 필요 없어. 무조건 남자 안 만나.”
“마크레안....”


승지가 ‘마크레안’이라는 하비천의 말에 갑자기 대경실색하였다.


“무슨 소리 하려는 거야? 저 아저씨가.”


동시에 황여사가 의심어린 눈초리로 하비천에게 말했다.

“마크레안? 황비서? 그게 뭐야?”
“아냐. 엄마. 아이씨. 만나면 될  아냐. 그 사내새끼.”
“마크레안은 아가씨가 미국에 있을 때 아가씨가 쫓아다녔던 백인청년이었습니다.”
“백인청년? 아니 저 년이 미국에 있을 때 쓸데없이 연애질 하고 다닌거야?”

분개하는 황여사 앞에서, 승지는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하비천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하비천은 그냥 씩 웃을 뿐이었다.

“아가씨가 차였죠.”
“그..그래. 엄마. 내 연애의 흑역사라고. 그러니까 더 말하지 말아요. 오늘 소개팅 가면 될 거 아냐.”





하비천이 운전하는 차안.
승지는 계속 쫑알쫑알 거리고 있었다.


“하비서,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네.”
“후후. 함부로 사람을 믿지 마십시오. 그게 세상 살면서 꼭 지켜야할 교훈입니다.”
“흥. 마크레안이 내가 쫓아다니던 남자친구라고? 날 감히 바보로 만들어요?”
“아가씨가 마크레안사 주식 투자 실패로 이십만 달러 날린  사모님께서 아시는 것보다는 낫겠죠?”


승지는 큰돈을 벌어보겠다고 섣불리 투자하다가 날린 돈이 꽤 되었다.
그 돈을 메꾸기 위해서 그녀의 외할아버지에게 손을 벌리고, 오빠한테도 손을 벌렸다.
그리고 오빠 지혁이의 요청에 해커 일도 어쩔  없이 하게 된 것이었고.

“칫! 사람의 약점을 잡고 흔드는 거, 얼마나 불량한 짓인지 알아요? 하비서는 그런 몹쓸 불량배가 되고 싶어요?”
“그럴 리가요? 제가 아가씨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을 드렸습니까?”
“참 나, SH 미주지사 서버에 접속하도록 권한 준 거. 그거 하나가지고 많이 우려먹으시네요.”


하비천은 SH그룹 내부의 자료를 해킹하는  도움을 준 인물이 자기라는 것을 그녀에게 강조하였다.

“후후후. 제가 목숨을 걸고 도와드린 겁니다. 박광혁 실장님께서 아시면  바로 모가지입니다.”
“흥, 수틀리면 큰오빠에게 이를 거야.”
“후후. 글쎄요. 아가씨 전적이 화려해서 과연 괜찮으실까요?”
“제길..”


승지는 하비천이 자신을 도왔노라고 박광혁에게 고해바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비서, 오늘 모임 대충 때려 친 후에 친구 좀 만나면 안돼요?”
“그건 좀..”
“혹시 모르니까, 친구를 가까운 곳에 오라고 하고 대충 소개팅 끝나면 만나러 갈 건데.”
“그 친구, 남자입니까?”

승지는 자신의 노예로서 충실하게 제 역할을 하고 있는 종철이를 떠올렸다.

“음.. 남자 아니고 바보 있어요. 그 친구 좀 근처에 오라고 하면 안 될까요?”


하비천은 살짝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는 곧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하십시오. 바로 근처에  친구를 대기시키십시오.”
“오홋.. 하비서. 역시 사람이 유두리가 있어.”


운전을 하는 하비서의 팔을 툭툭 치는 승지.


“근데, 하비서. 지금 학교가기에는 좀 이른데. 오늘 수업이 오후에 있단 말야.”
“학교가 아니라, 미용실 갑니다. 여자같이 꾸미셔야죠.”
“이씨.. 싫다고. 난!!!”


멱딴 목소리로 반항을 하는 승지를 태운 채, 차는 조용히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또한, 파국의 시간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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